1.
Date: 2020/04/28.
제11회 Zeitgeist 공모전 최종심 이틀째.
석 달 전의 연아라면 오전 8시가 말도 안 되게 이른 기상 시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혈압으로 아침이 괴로운 그녀는 정오쯤 되어야만 힘겹게 고개를 들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 일어나야만 했다. 악몽 같은 어지러움을 견디며 간신히 일어나 잠든 경하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같은 모습인 걸 확인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종일 나가 있어야 하니 아침은 튼실하게 먹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장을 봐 왔지만, 막상 싱크대 앞에 서니 도무지 기력이 생기지 않았다. 도마를 앞에 두고 십여 분을 끙끙댄 끝에, 결국 배달 앱을 켜서 아침부터 영업하는 백반집에서 주문을 했다.
근처 가게인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금방 도착했다. 일회용 용기에 들었는데도 밑반찬과 찌개, 생선 구이는 놀라울 만큼 맛있어 보여서 연아를 위축시켰다. 도마 위에 있는 썰다 만 재료들과 비교해 보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식탁 위에 배달 온 음식들을 올려놓고 침실로 돌아갔다. 아까도 확인했지만 경하는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즉, 자물쇠가 달린 개목걸이와 수갑을 차고 침대에 묶여 있었다.
“경하야.”
작게 소리 내어 부르자 경하가 눈을 떴다. 아마도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나 있었으리라. 연아와 달리 아침부터 활발한 아이였으니까.
“밥 먹자.”
“…응.”
경하는 웅얼거림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불편하지? 잠깐만….”
연아가 손을 얼굴로 뻗자 경하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텅 커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아래의 물림쇠를 풀자 오랫동안 눌려 있던 혀가 드러났다. 한중간에 나 있는 상처의 흔적이 심장을 죄여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을 적신 수건으로 입가와 혀를 닦아 주었다.
침대에 비끄러맨 줄도 풀었지만 수갑은 풀지 않는다. 식탁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아 아침을 먹였다. 이젠 익숙해져서 반항하지 않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아침을 먹은 다음에는 몸을 씻겼다. 아물기 시작한 왼팔의 긴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몸을 씻기고, 깨끗하게 닦아 준 다음 다시 옷을 입혔다.
다시 침실로 데려가 침대에 밧줄로 묶었다. 목과 양팔, 다리를 묶는 줄의 길이를 조심스럽게 조절해서, 어느 정도 뒤척일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하도록 했다.
“미안. 오늘도 출판사에 다녀와야 해. 어제보다는 빨리 올게.”
“…응.”
침실 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문득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이런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경하야.”
“…난 포기 안 할 거야, 엄마.”
연아의 말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경하가 앞질러 대답했다.
연아는 입술을 깨물고 침실 문을 닫았다. 문 밖에 달아 둔 자물쇠를 몇 겹으로 걸어 잠그고서, 욕실로 들어가서 소리 죽여 울었다.
* * * * * *
오전 10시.
연아는 출판사에 도착했다. 도서출판 Zeitgeist. 자이트가이스트. 시대정신. 거창한 이름에 비해서 회사 건물은 다소 소박하지만 연아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회사였다. 그녀 자신이 10년 전 「제1회 Zeitgeist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해 전업 작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제11회 공모전의 최종심 이틀째 날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있을 리가 없었던 ‘이틀째’.
자주 방문해 낯이 익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사내 회의실로 향했다. 공모전을 담당하는 편집부 네 명과 편집장,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다른 작가 한 명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아, 한 작가님, 어서 오십시오.”
편집자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했다. 다른 초빙 작가, 화영은 환영인지 꺼지라는 건지 알 수 없게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늦기까지 하네.”
노골적으로 찌르는 화영의 말에 연아는 발끈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본래대로라면 어제 끝났어야 할 최종심이 하루 더 연장된 건 자신의 책임이 맞았으니까. 낯가림이 심한 연아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가깝다 할 작가 지인이기도 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온 거 맞다며 편집장이 달래고, 화영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수긍하자 간신히 최종심 이틀째가 시작되었다.
“자, 모두 어젯밤에 원고들 재검토는 하셨을 거고… 문제는 이거죠. 『상냥한 교살』.”
일반적으로 최종심 단계에서는 이미 수상권과 아닌 작품들이 구분되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이 ‘수상권’에 있는 작품 중 어떤 작품이 어떤 상을 수상하는지는 의외로 마지막까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누가 봐도 대상 급이 분명한 작품이 있는 경우라면 참으로 행복하겠지만, 많은 경우 투고작들의 수준은 고만고만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수상 여부는 작품의 수준과 함께 편집부의 내부 사정이 깊게 관여하게 되어 있다.
문학에서 객관적 평가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총점 80점인 작품이 셋 정도 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품은 무엇일까? 그건 편집장이 미는 작품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혹은 편집부에서 리스크를 부담할 가치가 높은 쪽이다. 미디어믹스를 노리기 좋다거나, 작가의 이력이나 특징이 세일즈 포인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거나.
최종심 단계에서는 이런 사항을 논의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초빙된 심사위원은 이 단계에서는 딱히 코멘트할 거리가 없는 게 일반적이다. 심사위원의 권위가 아주 높은 경우라면 또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초빙 작가는 편집부의 의견에 토를 달기가 쉽지 않다. 상을 주고 책을 내는 리스크는 아무래도 출판사가 부담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그런 것따위 내가 알 바 아니라는 작가도 드물지는 않지만….
그런데 이번 최종심에서는 바로 그 드문 상황이 벌어졌다.
전원이 ‘이건 수상권은 된다’고 생각한 작품을, 연아가 무조건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상감은 아닌데요’ 정도면 모를까, 애초에 수상권에 오를 작품조차 아니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흔들리게 되어 있다.
단점이 없는 작품이란 세상에 없다. 장점이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게 만드느냐 아닌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장점을 너무 평가한 나머지 단점을 경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기 마련이고, 다시 한 번 원고를 전체적으로 검토한 후 논의하자는 것이 어제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작품이 바로, 『상냥한 교살』이었다.
“솔직히 저는 연아 씨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문장이 조악하다니, 미문(美文) 경진대회 아니잖아요? 서사가 단조로워서 힘이 없다?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이 작품 유일한 장점이 차곡차곡 상승하는 그건데? 자기가 못 쓰게 된 작풍이라 질투하세요?”
화영의 말은 신랄했다.
돌이켜 보면 연아의 데뷔작이 받은 평가도 그러했다. 문장은 조악하고 서사는 단조로워, 정상이 아닌 심리에 몰입시키는 힘만이 장점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화영 씨, 저는….”
“아. 연아 씨, 지금 경하랑 뭔가 문제 있죠? 사춘기 딸이랑 잘 못 지내는 입장에서 저런 이야기 보니까 기분이 나쁘셨어요?”
“……!”
“화영 씨!”
기겁한 편집장이 큰 소리를 내어 화영을 말렸다.
연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잠깐 손 좀 씻고 올게요….”
손이 덜덜 떨려서 회의실 문을 제대로 열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실패하자 편집자 중 한 명이 대신 열어주었다. 괜찮느냐는 질문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간신히 연아를 진정시켜 주었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화영의 이야기는 정반대로 적중했다.
『상냥한 교살』은 모녀상간을 그린 작품이었다. 화자인 17세의 ‘나’는 모친을 사랑하고, 당연히 거부당한다. 거리를 두고 도망치려는 어머니에게 ‘나’는 계속 다가서려 하고, 그리고 역시 거부당한다.
이야기 속 모친은 ‘나’를 극히 사랑한다. 그렇기에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을 끝끝내 거부하고, ‘나’의 강제적인 시도에 큰 상처를 입으면서도 ‘나’를 포용한다.
결국 ‘나’는 사랑을 포기하고, 어색하게나마 과거의 관계를 되찾고자 한다. 그러나 힘겹게 되찾은 평온에 ‘나’는 숨이 막혀 버둥거리며 이야기는 끝을 맞이한다.
마치, 연아와 경하를 보고 쓴 것 같은 이야기였다.
2.
Date: 2020/01/07.
경하의 생일.
연아는 정오 무렵 일어났다. 비척거리며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경하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아, 엄마 일어났어? 오늘은 좀 괜찮아?”
“응…. 괜찮은 것 같아…. 미안….”
마감과 겹친 연말연시에 조금 무리한 대가가 심각하게 오는 바람에 연아는 며칠을 끙끙 앓았었다. 덕분에 경하가 내내 병수발을 들어주다시피 했다. 사실 평소에도 경하의 가사 부담률이 80% 정도 되는지라 미안해하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해야겠지만.
세면을 하고 나오자 경하가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앗, 오늘 점심은 엄마가 차린댔잖아.”
“이히히히히.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는 것보다 내가 한 밥을 엄마가 먹는 게 더 좋은걸.”
“…어, 엄마가 한 밥은 그렇게 맛이 없어…?”
“….”
“아니라고 해 줘야지?!”
“자자, 식기 전에 드세요.”
경하는 뾰로통해진 연아를 샥샥 밀어 식탁 앞에 앉혔다. 간이 약하고 담백한 음식 위주의 식탁은 철저하게 연아를 위한 것이다.
“엄마 때문에 너까지 노인네 입맛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다이어트식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아.”
“네가 다이어트를 왜 하니?”
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좀 과하게 말랐다는 느낌 탓인지 경하는 좀 더 튼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엄마가 바라는 대로 튼튼해지면 돼지 새끼야….”
“조금 비만인 쪽이 건강하다고 그랬어.”
“엄마부터 좀 실천해 보시죠.”
경하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연아의 밥공기에 밥을 한 주걱 더 퍼 담았다. 연아가 비명을 지르며 저항한 결과, 새로 뜬 밥은 경하와 반반씩 나누어 먹기로 했다.
* * * * * *
오늘은 경하의 생일이라서 같이 쇼핑하러 나가기로 이전부터 정해 놓고 있었다. 대학교 입학 선물을 겸해 줄 노트북은 이미 주문해서 받았다. 경하가 택배를 받아 버리는 바람에 아마 이미 들켰을 것 같긴 하지만….
올해 겨울은 꽤 포근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혹시 추워질지 모르니 따스한 코트 한 벌, 초봄에 입을 만한 걸 또 하나, 이젠 교복을 안 입게 되니 또….
머릿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며 나왔는데, 첫 단계부터 삐걱거렸다. 경하가 “오늘 살 건 내 옷이 아니라 엄마 옷!”이라며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엄마 옷 사는 게 내 생일 선물이야!”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논리였다. 아직 서프라이즈를 포기하지 못한 연아는 “네 생일 선물은 집에 있는데….”라는 대답을 할 수 없었고, 결국 경하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엄마 옷 많은데. 외출할 일도 별로 없고.”
“마지막으로 옷 산 지 몇 년은 됐으면서. 외출할 일은 나랑 같이 많이 만들자. 대학생 되면 시간 많으니까 엄마랑 데이트 많이 할 거란 말야.”
“대학생 되면 놀 수 있다는 거 다 거짓말이야…. 데이트는 애인이랑 하지 엄마랑 할 일이 있겠어?”
갑자기 경하의 웃음에 금이 갔다. 이유를 알 수 없던 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경하가 애써 다시 미소를 복구하고 연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에이잇! 죄인은 닥치고 수청을 들라!”
“그 말 듣고 정말 닥치고 수청을 든 사람이 있었을까….”
갑작스럽게 클리셰에 대한 작가로서의 의문이 생겼지만, 못 이긴 척 경하에게 끌려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바로 이게 닥치고 수청을 드는 모양새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경하가 무슨 패션쇼라도 시키려는 듯 무지막지한 양의 옷을 갖고 오기 전의 이야기였지만.
“이걸 다 입어 보라고? 해 져!”
“생일 정도에는 엄마를 독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왜 아까부터 사극인데….”
할 수 없이 경하의 고집에 맞춰 주긴 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사람의 인내심이란 작업 내용마다 다르게 설정되어 있어서, 연아의 경우 36시간 연속 집필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지만 옷 시착 같은 건 서너 벌만 해도 바닥을 보이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닌 경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듯 녹초가 된 연아의 얼굴을 보자 군소리 없이 패션쇼를 끝마쳤다. ‘아, 이건 너무 화려해서 못 입겠다’라고 생각한 옷만 골라서 사자고 하는 바람에 좀 곤혹스러웠지만, 옷장이 화려해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 앞에 섰다. 2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었는데, 손에는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저, 저기…! 한연아 작가님 맞으시죠?!”
연아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떨리는 고개를 들어 여성의 얼굴을 확인했다. 낯선 얼굴. 적어도 일로 교분이 있는 작가나 출판사 관계자는 아니었다. 손에 든 책은 바로 얼마 전에 낸 『그대에게 용기가 있는 이유』.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반색하며 호응한 건 경하 쪽이었다. 연아의 팬인 듯한 여성도 반색하며 대답했다.
“3년 전에 첫 사인회가 있었잖아요? 그때 뵙고 내내 안 잊혀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어쩜 그때랑 똑같으셔라!”
“아, 그 마지막 사인회 말이죠. 사인회 한다고 두 주 동안 사인 연습만 했는데 다 망해서, 사인회 끝난 뒤엔 다신 안 한다고 엉엉 울었….”
“겨, 경하야!”
식겁한 연아가 경하를 뜯어 말렸다. 엉엉 울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딘가 먼 곳에 있는 존재 같던 팬들을 직접 목격한 것에 대한 감동과 그 앞에서조차 쭈뼛거리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지 사인이 실패해서가 아니다. …마구 실패하긴 했지만.
아무튼 전혀 알 필요가 없는 정보인 것이다. 하물며 3년 전에 잠깐 봤을 뿐인 얼굴을 기억해 주고,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어 주는 열렬한 팬에게는 더더욱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저기 엄마, 셀카라도 같이 찍어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안 돼…!”
“…엄마? 세상에?! 작가님 따님이세요?!”
기겁하는 팬, 엄마의 팬을 직접 목격하고 들뜬 딸, 그리고 어쩔 줄 몰라 끙끙대는 작가의 소란은 점원이 와서 주의를 줄 때까지 이어졌다. 셋 다 넙죽넙죽 허리 숙여 사과하고, 연아가 3년 전 만들었던 사인을 필사적으로 되새겨 책에 남김으로써 상황이 정리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3년 전에 만든 것과는 전혀 다른 사인이었지만.
부끄러운 나머지 가게를 나와 다른 카페로 이동했지만, 그때도 경하는 계속 들뜬 채였다.
“엄마 진짜 유명인이었구나….”
“하나도 안 기뻐….”
“엄마는 왜 책에 사진 안 싣고 TV 같은 데도 안 나가? 책은 엄청 더 팔릴 건데….”
연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겸양해도 제법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그녀였지만, 자신의 신상에 대한 정보는 가능하면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3년 전 사인회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처음이자 마지막 이벤트였다.
“그야, 엄마가 아니라 책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서 그런 거지. 엄마한테 책은, 갖고 있는 모든 걸 다 꺼내서 가장 아름답게 장식한 꽃다발 같은 거니까. 거기에 엄마가 묻으면 지지야, 지지.”
연아는 자신이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대단한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최선을 다하려고는 노력했다.
만약 자기 안에 조금이라도 빛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걸 끄집어내어 이야기에 넣고 싶었다. 숯에 열과 압력을 가해 다이아몬드가 된다면, 자신의 모든 걸 태우고 으깨어 먼지만큼의 광채라도 찾아내어 책에 담고 싶었다.
연아 자신에 대한 정보 따위는, 찌끄래기일 뿐이다. 힘겹게 짜 낸 이야기가 단 한 소절이라도 좋으니 마녀조차 매혹시킬 만큼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면, 나머지는 거품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흔히들 작품은 작가의 자식 같은 거라고 하는데, 엄마는 다르게 생각해. 작품은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이상을 체현하려 한 결과물이어야 하고, 아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글쟁이들의 나쁜 버릇이다. 틈만 나면 자신의 망상을 떠들려고 한다. 연아는 가능하면 듣는 쪽이고, 보통은 부끄러우니까 입 밖에 담는 경우도 없었지만, 딸이랑 있다 보니 그만 마음을 놓고 말았다.
“아이는? 아이는 어떤데?”
“밉지.”
연아는 조심하지 않으면 곧장 얼굴이 닿을 정도로 몸을 쭉 뻗은 경하의 볼을 붙잡았다. 어린애 대하듯이 양 볼을 꼬집고 살짝 흔든다.
“엄마가 부끄러워하는 줄도 모르고 신나서 떠들기나 하구. 작품은 무조건 사랑스럽지만 딸은 미울 때가 더 많답니다.”
“히잉….”
경하는 생활력 없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홀어미를 둔 탓에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어른스럽다. 그런 경하가 노골적으로 낙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연아는 양 볼을 꼬집은 손을 좀처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적어도 연아에게 작품은 무조건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모자라고 부족해서 지우는 것밖에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경우라고 해도 그랬다.
그러나 딸은 달랐다. 경하는….
* * * * * *
저녁에는 몇 년 만에 술을 마셨다.
경하가 만 19세 생일을 맞이했기에 합법적으로 음주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맥주 두 병을 처리하는 모습에 살짝 도끼눈을 떴지만, 연아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 첫 음주를 했던 몸인지라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사실 따지고 싶었어도 맥주 반 잔에 발음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처지에서는 무리였겠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생일 선물로 준비한 노트북을 선물했다. 애석하게도 경하는 ‘아, 이거 역시 내 거였구나.’ 하는 표정이 역력해서 서프라이즈는 완전히 대실패였지만.
그 다음에는 모처럼 함께 잠들기로 했다.
이전에는 방은 따로 써도 잠은 같이 잤는데, 연아가 본격적으로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게 되면서 한 침대에서 자지 않게 된 게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그 뒤로는 종종 경하가 뭔가 불안하거나 쓸쓸할 때 같이 자도 되는지 묻곤 했다. 마지막으로 같이 잠든 건 수시 발표 전날이었다.
고등학교도 곧 졸업할 다 큰 딸이 그러는 건 좀 어떨까 하는 마음도 있지만, 딸의 응석을 받아주는 건 연아 자신도 바라는 바였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마도 이렇게 응석을 부릴 때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면서.
한밤중.
어딘지 갑갑한 느낌에 잠에서 깨었다.
둔한 머리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심장에서 피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듯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게 완료되기까지 머리는 극히 멍해서 사물의 판단력이 극히 떨어진다.
그래서 처음엔 자신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경하를 보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뭐 먹을 것도 없는데 아직 애구나’하고 스스로도 잘 모를 흐뭇함을 느꼈을 뿐.
그러나 캐미솔이 가슴 위까지 끌어올려져 있고, 경하의 손과 입이 집요하게 가슴과 유두를 괴롭히는 걸 깨달았을 때 그 흐뭇함은 완벽히 사라졌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건 ‘애무’라고 불러야 할 움직임이었다.
평생을 따져도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느껴본 적 없는 감각, 몸 깊은 곳을 잘근거리는 듯 다그치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지금 성적으로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싹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경하에게 들키게 될까 무서웠다.
입술을 깨물며 흥분을 참았다. 이 상황이 꿈이기를 기도했다. 그 어느 순간보다도 민감해진 감각과, 가장 깊게 잠들었을 때보다도 더 멍청해진 머리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경하의 손이 가슴을 떠나 다리 사이를 향했을 때는, 더 이상 얼버무릴 수 없게 되었다.
철썩! 하는 큰 소리에 연아와 경하 모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엄마….”
조명이라곤 커튼을 넘어 흐릿하게 들어오는 달빛뿐이었는데도, 경하의 뺨이 새빨갛게 물든 걸 알 수 있었다. 연아 스스로도 놀랐다. 육아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십여 년 전, 발작적으로 저질렀던 두 번의 손찌검 이후로는 결코 경하에게 손을 든 적이 없었는데….
“겨, 경하야…. 미안…. 어, 엄마가 잠깐 놀라서…. 괜찮아?”
다급히 몸을 일으켜 경하의 뺨에 손을 댔다. 얼마나 세게 때린 걸까. 새빨갛게 된 뺨은 화상을 입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 얼음이라도 대서 식혀야 하는 게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며 침대를 나가려는 연아의 손을 경하가 꼭 붙들었다.
“괜찮아. 엄마,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연아는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섰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잠결에 한 실수라면 괜찮을 것이다. 레즈비언이라든가 해도 괜찮다. 요즘 세상에는 그렇게 드문 것도, 백안시할 일도 아니다. 연아 자신도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었다. 죽은 남편과 관련해서 단 하나도 좋은 기억이 없는 그녀는, 차라리 경하가 레즈비언이라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경하는 말했다. 그건 차라리 선전포고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나, 엄마가 좋아. 사랑하고 있어.”
캐미솔 안쪽에 경하가 남긴 흔적이 존재를 주장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도저히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경하가 비틀거리는 연아를 부축했다. 중학교 시절 이미 엄마의 키를 훌쩍 뛰어 넘은 딸이 연아의 손목을 단단하게 죄고 있었다. 처음으로 딸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기분이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인상의 미인. 따져 보면 연아 자신을 닮은 부분은 약간 처진 눈꼬리뿐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맹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약간 불안해 보이는.
그러나 그 눈조차, 지금은 격렬한 빛을 띠고 연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담긴 것은 명백한 ‘욕망’이었다. 키만 커졌을 뿐인 ‘딸’이 아니라, 욕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는 ‘여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사랑하며 키워 온 딸이 순식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바뀌었다.
“놔!”
연아는 거부했다.
울며 소리쳐서 경하를 방 밖으로 내쫓았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3.
Date: 2020/01/08~2020/04/27.
핏빛 실패의 나날.
다음 날,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방을 나오려던 연아는 경하가 문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쫓아낸 후에도 계속 연아의 방 앞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리라.
굳게 다짐하고 나왔지만 그 모습을 보자 다시금 마음이 아렸다. 격동을 숨기고자 입술을 깨물고 경하를 깨웠다. 이야기를 하자는 말에, 경하는 얼굴을 먹빛으로 물들이면서도 수긍했다.
세 시간에 걸친 설교와 설득, 애원은 실패로 끝났다.
경하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러나 연아를 사랑한다는 것은 착각도, 실수도 아니라고 단언했다. 포기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 자신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격려하고 싶어질 정도로 굳건하게.
기다리겠다고도 말했다. 연아가 받아들여줄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고. ‘우선 달래며 자연적으로 생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는 방법을 쓸 수 없었던 건, 그렇게 말하는 경하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고집을 부리면 절대로 꺾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연아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아는 울음에 호소할 뻔했다. 어떻게 매를 들지 않고도 아이를 키울 수 있었는가. 철이 채 들기도 전부터 경하는 연아의 울음에 약했기 때문이었다. 연아가 울면 경하는 반성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필사적으로 주의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아주 어릴 적부터 아이에게 응석을 부려 왔던 것이다. 어쩌면 경하가 연아를 정애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그 영향일지 모른다. 연아가 제대로 된 어머니가 아니었으니까. 도리어 돌보고 지켜 줘야 하는 대상처럼 느끼도록 방조했으니까.
아이를 지나치게 어른으로 만드는 것도 학대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아는 충동적으로 칼을 집어 들었다.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안색이 창백해진 경하를 보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어, 엄마는… 엄마는 네가 행복해지는 것만 바랐어….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만약에 자신의 존재가 경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다.
힘껏 그으려 한 팔은 덧없이 붙들렸다. 경하는 연아의 손목을 비틀어 칼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그 두 눈에 피어오른 격노에 연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폭력은 따라오지 않았다.
경하는 그저 그대로 연아를 끌어안고, 그대로 울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연아의 얼굴에, 어깨에 뚝뚝 떨어졌다.
“왜 몰라주는 거야…. 기다리는 거라면…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어…. 하지만 이 마음이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그땐 살아갈 수가 없단 말야….”
연아는 말한다. 이 사랑은 허락될 수 없다. 반드시 불행해진다.
경하는 말한다. 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행해진다.
경하에 대한 입장은 평행선. 그렇다면.
“말해 줘, 엄마…. 내가 엄마를 사랑하면, 엄마는 불행해지는 거야…?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게, 죽을 만큼 싫어…?”
연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간절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경하를 떨쳐내고 도망쳤다. 더 이상 경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버틸 수가 없었기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생애 첫 가출을 저질렀다.
* * * * * *
닷새 동안, 연아는 집 근처 모텔에 머물렀다.
짧은 수면과 영원한 악몽. 그걸 되풀이하는 사이에 잠에 취한 두뇌가 과거를 반추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사랑한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연아의 기억 속 어머니는 히스테릭하고 교활하고 어리석고 징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면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을 알았기에 연아는 진심으로 어머니를 혐오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뺨과 허벅지의 아픔이다. 누군가 보고 있지 않을 때면 뺨을 맞고, 타인의 눈을 신경 써야만 하는 곳에서는 허벅지를 꼬집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역시 비슷한 사람이었다. 보다 더 몸집이 크고, 보다 막무가내이며, 보다 잔인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만나서 결혼하게 될 때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연아는 단 한 번도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지 못했다.
임신은 고통이었고 출산의 순간은 기억에서 지워져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이 낳았다는 아이를 품에 안고서 흘린 눈물은 결코 감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세 살짜리 경하와 홀로 남게 된 후에야 비로소 연아는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어머니였던 적은 한순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어머니였던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어머니의 지배 아래 되돌아가는 게 무서워 홀로 살겠노라 선언하고 2년. 힘겨운 생활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연아는 다섯 살짜리 경하가 저지른 실수에 자신도 모르게 뺨을 때렸다.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공포에 질려 있던 경하.
무력한 자신에 대한 자책, 어머니처럼 되어간다는 두려움에 연아는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경하는 나오려는 울음을 멈추고 연아의 손을 잡았다. 달래려는 듯이, 몸집만 큰 어린애인 자신을 위로하려는 듯이.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하의 외견과 고집에서 자신의 어머니, 혹은 남편을 떠올리고 공포에 질린 적도 많았다. 적어도 그때 그 순간까지 연아는 경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순간 뒤바뀌었다. 사랑한다는 말로는 경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경하는 연아를 처음으로 위로하고, 세례를 내려 주었으며,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준 존재였다.
그러니까 경하가 행복하길 바랐다. 행복이란 각자 다른 것이니까 거기에 왈가왈부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바라는 길을 갈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생각해 보면 자신이 해 온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거리감이 지나치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경하가 좋아하는 것에 너무 무심했는지도 모른다. 못난 어머니를 꼼꼼하게 챙겨 주는 어른스러운 딸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나아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차라리 모른 척하고 있는 게 나았을까. 여자끼리의 성 행위는 잘 모른다. 어떤 식으로 욕정을 해소하게 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나면 고깃덩어리를 보듯 냉담한 시선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정말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간신히 깨닫고 사고를 정지시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일탈은 고통을 부른다. 젊은 나이에 딸을 혼자 키운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소문을 감수해야 했다.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때 무엇이 돌아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연아는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계속 피하고 있을 수 없다는 건 안다. 한 번도 꺾어 본 적 없었던 고집이지만, 관계를 보류하며 시간이 마음을 바꾸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 연아는 왼손 팔뚝을 세로로 긋고 욕조에 잠겨 있는 경하를 발견했다.
* * * * * *
흔히 말하는 리스트컷처럼 가벼운 게 아니었다. 평생 긴소매만 입어야 할 깊은 상처가 남았지만, 그것조차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몇 분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고, 이렇다 할 후유증은 없어 보인다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연아는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물었지만 경하는 묵묵부답이었다. 정신 상담도 받았지만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퇴원해서 돌아왔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경하가 자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방에 가두고, 손발을 묶고, 혀를 깨물지 못하게 텅 커버를 씌우고 항상 옆에 함께 있게 된 후에야 간신히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미워서 그래…? 널 두고 도망가서, 그게 미웠던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벌주는 거야?”
경하는 침묵했다. 종종 입을 열긴 했어도 그 내용은 극히 짧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아의 마음속에 싹튼 것은 분노였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진짜 분노였을지도 몰랐다. 받아 주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는 심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경하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받아들일 거라는 자각이 마음속에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육체적인 학대를 받는다 해도 결국에는 받아들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하를 향한 감정은 그렇게나 맹목적이었고, 그런 자신이 무서웠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었다.
단 하나,
자해만을 제외하고.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몰랐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경하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는데, 지금은 자신이야말로 경하가 행복할 수 없게 만드는 원흉이었다.
경하의 뜻을 따르면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된다. 뜻을 거부하면 경하는 자해한다. 어떻게 하더라도 경하는 불행해진다.
합리적인 피난책은 경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자해를 그만두게 된다는 효과는 명백하고, 누군가에게 관계가 들켰을 때 생길 일은 어디까지나 미지의 가능성이다. 들키지 않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기 전에 경하가 마음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
그런 ‘합리적인 판단’을 경하가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 * * * *
이 기묘한 속박과 협박의 관계는 석 달 가까이 이어졌다.
연아는 대부분의 일에서 손을 놓았지만, 한 가지 거절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제11회 Zeitgeist 공모전」의 심사 일이었다. 공모전 당시부터 심사위원으로 공표가 되어 있었고, 원고를 읽고 평을 작성하는 것뿐이라면 경하를 돌보면서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상냥한 교살』이라는 원고를 읽었다.
몇 페이지를 넘긴 순간,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들을 관찰당한 듯한 감각에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원고 마감은 벌써 반 년 전. 예심을 거쳐 본심을 담당한 연아에게 도착한 것이다.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읽은 연아는, 다른 의미로 공포를 느꼈다.
온갖 부분에서 모자란 원고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정념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잘못된 감정인데, 거기에 동조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오직 그것 하나만으로 예심을 넘어 연아의 앞까지 도착했다.
연아는 그 원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심 의견에서도, 최종심에서도 그 의견을 고수했다. 그 작품을 인정한다면, 경하의 마음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그 압도적인 열량에, 그만 꺾여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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