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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사약대회] 하루미 담론

코발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11 19:14:53
조회 624 추천 28 댓글 4
														

하루미 담론




1



 내 이름은 유키노시타 하루노. 유키노의 언니이자, 히키가야 군에게 기대했고 그만큼 실망한, 연약한 소녀이다.


 아, 히키가야 군에게는 얻은 것도 있다. 그 아이가 그토록 원하던 진짜라는 것의 편린을 덕분에 조금은 엿보았다. 그 아이 덕분에 유키노도 성장하게 되었다. 앞을 향해 결정하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난 저런 모습을 주욱 보고 싶었다. 그래서 졸업한 고등학교에도 시시때때 들락날락거렸다. 하지만 그래서 무엇이 변했지? 돌이켜보면 유키노는 변했다. 어머니도 변하셨고, 아버지도 변하셨다. 모두 히키가야 군의 존재 덕분이라고 하면 조금 과언이겠지만.


 그곳에 나만이 없었다.


 나만 남겨둔 채로 모두가 앞으로 나아간다. 난 그런 것을 보고 싶어서 지금까지 이렇게 행동해온 것인데, 막상 보고 싶었던 것을 보고 나니 마음 속에 너무 큰 공허함이 남아있음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유키노의 성장해가는 모습은 그 아이에 대한 마음-애증을 점차 공허함으로 바꾸어나갔다.


 진실한 것이란 무엇일까.


 내가 그토록 염원하고 바라오던 진실한 것은 무엇일까.


 하야토가 내려놓고, 히키가야 군이 찾으려 하던, 그래서 유키노를 변화시키고 결국 우리 부모님마저 돌려놓은 그 진실한 것은 내게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을까.


 대학교에 돌아갈 마음도 들지 않는다.


 학점이 망했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다.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공부를 못 해서가 아니라 안 해서다. 마음 먹고 하면 과탑 정도는 자신있다.


 그런데, 그 마음 먹기가 참 어려웠다.


 대학교에서도 친구 한 명 사귀지 않은 채 양아치를 연기해봤는데 글쎄. 대학이라는 곳은 그런 사람이 양아치가 아니라 평균인 곳이다. 부모님 말 안 듣고 교수님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굴어서 혼나는 것은 미성년자 한정. 성인인 내가 그래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철없이 그렇게 구는 것도 이제 질렸다.


 강의도 출석도 다 싫어져서 몇 번 빼먹다 보니 학점도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다음 학기가 되어도 바뀔 리는 없다. 더군다나 나는 유키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해, 정치인을 지향한다는 그 아이에게 장녀권을 양보하기로 했다. 가업은 그 아이가 잇고, 나를이렇게나 짓누르던 사명으로부터 나는 해방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텅 비어있을까.


 히키가야 군을 만나서 실컷 놀려주면 조금 달라질까?


 유키노를 만나서 뭐라도 이야기하면 조금 달라질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결국 저들의 관계에 불청객밖에 안 되었다. 고등학생들 연애에 시시껄렁하게 간섭하고 훼방놓던 머리만 크고 정신은 애인 아싸 대학생. 그게 나였다.


 나만 뒤쳐졌다.


 나만 놓고 세상이 떠나간다.


 모든 책무와 관계로부터 해방된 곳에 진실한 것은 없었다.


 그저 끝을 알 수 없는 우물만이 있었다.


 나는 며칠 전 부모님께 말씀드린 후 홀로 집을 떠나왔다.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속시원히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속시원하지 않았다.


 나는 내 책무와 사명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그걸 성실히 수행해왔고 기대에 부응해왔다. 그게 내 일부였다. 이제와 그걸 내려놓았다고 한들, 나 자신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금씩이라도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싶었다. 무작정 유학을 간다고 해놨지만 그곳에서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이 의구심을 해소하는 것은, 아마 머나먼 여정이 될 것을 짐작했다.


 나이를 너무 쉽게 먹은 나는 그저 이 약한 마음을 꽁꽁 숨긴 채로 내 최대 무기인 가면 속에 숨어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이 내비치는 진심을 유치하게 놀려주며, 내 진심은 끝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게 나다.


 허탈하다.


 조금은 달라지고 싶었는데.


 호텔을 예약하고 비행기를 잡아놨다. 일본을 떠나 무작정 이탈리아로 가볼까 한다. 예술가의 도시에 가면 나는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정치인을 지망하던 주제에 이제와서 예술가라니 참 웃기는 생각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대학교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키노 얼굴이나 볼까 해서 소부고 방향으로 가보기로 했다. 물론 제대로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그 뒤로 유키노와 1:1로 대화해본 적도 없다. 말하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말하게 될지 스스로도 두려우니까. 그저 요즘 유키노가 학교에서 어떤 얼굴로 지내는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학교 밖에서 본 그 아이는 더 이상 외로워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곧은 마음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지만 이제는 다르다. 저 아이는 기탄 없이 속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다.


 나와는 다르게.


 바람에 저 아이의 머리카락이 날린다.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내 동생, 너무 멀리 가버려서 언니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속으로 그런 시인 같은 짓이나 하고 운동장을 빙 돌아나왔다. 누군가 날 발견해 아는 척하지 않은 것이 장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다. 실컷 웃어놓자. 웃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테니까.


 혼자 큭큭거리며 교문 바깥에 나오려 할 때 웬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더니 학교로 들어갔다. 얼굴은 어린데 그런 것치고는 키가 크다.


 "저기, 얘."


 학교로 곧장 들어가려던 아이가 뒤돌아봤다.


 나는 그냥 마음이 따르는 대로 부른 탓에 뭐라 해야할지 그 다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항상 머리와 이성 속에 살아가는 나로서 이런 적은 너무 오랜만인데. 왠지 가슴이 벅차오는 것은 이 신선한 감각 때문일까. 저 아이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일단은 차분하게 나의 감정을 되짚어보자. 나는 저 아이를 왜 불렀지? 아, 얼굴을 보니까 바로 알았다.


 저 아이는 유키노와 닮은 것이다. 나이는 유키노보다 한참 어려보이지만 저 긴 머리카락과 곧은 눈초리. 유키노의 그것 같이 보인다. 어떻게 저런 아이가 있을까?


 나는 가까스로 말을 떠올려 아이를 불러냈다.


 "소부고에 볼 일 있니?"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네, 지난번에 학교 행사 관련해서 소부고에 도움을 많이 받아서 감사인사 드리기로 말이 나왔는데 그게 좀 지연이 되어서.. 그러다가 학년도 끝났고 해서 늦기 전에 제가 대표로 왔어요."


 행사라면 작년 말의 그건가보다. 손에 쇼핑백이 들려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나. 볼수록 생긴 것도 그렇고 유키노 같았다. 음, 미니 유키노라 부를까.


 미니 유키노가 빤히 날 쳐다봤다. 고등학생 치고 얼굴이 늙었다고 생각하나. 아니, 애초에 왜 자길 붙잡나 싶은 거겠지.


 "그래, 고생이 많구나. 너 초등학생이니? 어려보이는데 예의바르고 착하네."


 머리에 손을 갖다대 쓰다듬으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도 그 아이는 그다지 웃어주진 않고 딱딱하게 답했다. 꽤나 독특한 경우다. 히키가야 군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다. 속내는 상당한 새침떼기인 것일까.


 "네. 감사합니다. 급한 용건이 아니라면 먼저 가봐도 될까요?"


 "아? 응 그래 그래. 그래도 되지. 근데 너, 이름이 뭐니?"


 미니 유키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답했다.


 "루미에요. 츠루미 루미."


 미니 유키노는 루미라는 이름이었구나.


 "예쁜 이름이네."


 루미가 다시 감사하다는 투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름을 말해줬으니 나도 이야기해주는 게 예의겠지. 나는 유키노시타 하루노라고 해."


 "유키노시타요?"


 루미가 놀란 투로 되물었다.


 "응, 유키노시타. 그런데 너, 유키노랑 아니?"


 루미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루미와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전에도 얼굴을 볼 기회는 있었을 텐데 어째선지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나는 유키노의 언니라고 재차 소개한 뒤 학교 교무실까지 따라가 루미가 감사인사하는 걸 도왔다. 루미는 역시 어려서 떨렸던 모양이라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했다.



2



 내가 루미를 다시 떠올린 것은 삼일쯤 후였다.


 나는 휴학신청을 끝내고 진짜 할 일도 없어져 한가한 기분에 카페에 가서 혼자 아메리카노를 쭉쭉 들이키고 있었다.


 쓴 게 맛있어지면 인생이 그만큼 쓴 거라고 하던데, 우울한책이라도 꺼내읽을까-그렇게 혼자 시시콜콜한 생각이나 할때 누가 말을 걸어왔다.


 "언니."


 유키노?


 유키노가 혼자 카페 같은 곳에 온다니 드문 일이다. 뭐 유키노는 항상 혼자 있긴 하지만 나처럼 여기저기 쏘다니는 아이는 아닌데.


 나는 유키노만 보면 마음이 공허해져서 괜히 독설을 퍼부어봤다.


 "유키노시타 가문의 대업을 잇느라 바쁜 거 아니었니? 요즘 히키가야 군은 잘 지내? 통 못 봐서 말이지."


 "으, 응."


 "과연, 히키가야 군에서 찔리는구나. 잘 지내면 됐어. 그나저나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그 유키노가."


 "그냥 , 언니가 있을 것 같아서 와봤어."


 "그래?"


 내가 이 카페에 자주 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유 없이 안 움직이기로 정평이 난 이 아이가 그냥 왔을리가 없다.


 "그러면 유키노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지? 뭐야? 가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말인 거니?"


 "응, 꼭 풀고 가야 돼."


 유키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나도 하마터면 진지하게 굴 뻔 했다.


 귀여운 동생이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모습은, 위에서 지켜보는 데에서 그치고 싶다. 그렇지만 그 모습은 이제 인정해야만 할 수준까지 왔다고, 마음 한구석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귀여운 동생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고 있다.


 "유키노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은 걸?"


 유키노는 뜸을 꽤 오래 들였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아이지만 저렇게까지 뜸을 들여 할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언니는 히키가야 군을 좋아해?"


 "좋아하냐고? 응, 좋아하지."


 "이성적으로 좋아하냐고 묻는 거야."


 "이성적으로? 왜 그런 걸 물어? 유키노는 어떤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는 거 치고는 질문이 꽤 직설적인데?"


 "..잘 모르겠어서 그래."


 유키노가 내 말에 이렇게 따박따박 받아치는 모습은 드문 모습이었다. 솔직하다. 오랜 시간 진지하게 고민해왔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관계에 대해 저렇게까지 골똘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저런 것이야말로 진실한 것일까?


 "유키노는 히키가야 군을 좋아하는 거지? 그래서 내 마음을 미리 듣고 싶었던 거고. 하지만 무서워서 듣지도 못하면서 상황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가버린 거야. 그래도 죄악감 따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날 찾아온 거고."


 "아니야, 그런"


 아니라는 말에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총기를 잃은 눈동자에 대고, 나는 분명히 말해두기로 했다.


 "유키노, 확실히 말해둘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히키가야 군을 좋아하지만 그건 이성을 대하는 사랑은 아니야. 사랑은 네가 실컷 했으면 좋겠어. 그거에 대해 네가 죄책감 따위를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해. 그렇지, 유이가하마에 대한 문제는 네가 확실하게 해결해야겠지만."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나한테 찾아와 대놓고 묻는 건 조금 불쾌하게 받아들여도 괜찮지?"


 유키노는 정공법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르는 아이니까.


 "미안 언니.."


 저 표정만큼은 진실되어 보였다. 진심으로 괴로운 사람의 얼굴이었다.


 "미안해할 건 없어. 실컷 고뇌해보도록 해. 유키노는 유키노 나름의 것이 있어. 그렇게 죽어라 아득바득 굴면서 마음을 끝까지 추구해봐."


-그러면 조금은 진실한 것에 가까이 갈 테니까.


 나는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조차 않는 그곳에 말이지.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 나는 내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할 거야. 그런데 언니의 감정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아."


 "그래, 나는 너의 그런 점은 굉장히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어. 히키가야 군을 좋아한다면 좋아하면 돼. 나는 히키가야 군에게 엄밀히는 너와는 다른 걸 기대한 거야."


 "그런.."


 "하고 싶은 말은 그거뿐인 거니?"


 유키노는 또 말이 없어졌다. 미니 유키노의 똑부러진 대응을 기대하긴 어렵겠지. 백을 들었다.


 유키노는 내가 카페를 나서려고 발을 옮길 즈음에야 곧 이성이 되돌아왔다.


 " 언니. 츠루미 루미라고 알아?"


 "루미.. 루미.. 응, 들어본 적 있어."


 사실은 '들어본 적 있다'는 말 따위보다는 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언니랑 만나고 싶대.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게 있다는 것 같아."


 "그래? 유감이네. 난 내일 아침쯤에는 피렌체에 있을 텐데."


 "응, 그렇지.. 그래도 언니 의견이 듣고 싶었어."


 정말, 어디까지고 귀찮게 구는 귀여운 동생이었다.


 "그 아이한테는 잘 이야기해둬. 나는 멀리 간다고. 그러면 이제는 진짜 볼 일 없는 거지? 나중에 보자, 유키노."


 미소를 띄우며 손을 들었다.


 "연락할게. 연락할 테니까"


 유키노의 불안한 눈초리를 뒤로 하고, 나는 카페를 나왔다.



3



 새로운 세상에 오면 기분도 새로워질까.


 그런 것은 정말 기대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대하고 싶어진다.


 내가 쫓는 것은 이제 없다. 나를 쫓는 것도 이제 없다. 후련해야 할 나는 공허함 속에 빠져든다.


 원래부터 공허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감춰왔을 뿐임을 진짜 혼자가 되어보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앞으로 일주일. 이탈리아에서 일주일을 보내게 된다.


 여행을 통해 변화하는 사람은 많다. 나도 기본적으로 여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나는 별로 바뀌지 않겠지. 이 냉소적인 태도와 남을 깔아뭉개는 언행은,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겠지. 나는 너무 어린 시절에 너무 커버려서 이제 더 커버릴 것도 없이 되어버렸으니까.


 순수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순수함을 추구한다.


 나는 스스로를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유키노에게, 히키가야 군에게 한 집착 역시 그런 류의 것이다. 둘 다 내 겉모습에 감춰진 속을 읽고선 무척 싫어했다. 그 싫어했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건 역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눈을 지긋이 감았다.


 비행기 창문 바깥으로 보이던 구름, 그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해도 시원한 바람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은 서글픈 법이구나.


 아무리 영약하게 굴어도 할 수 없는 일은 항상 있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루미라는 아이가 생각났다. 왜 루미는 갑자기 날 찾았을까. 유키노를 통해 연락했다는 말은, 유키노와는 연락할 방도가 있었다는 말일 텐데.


 유키노랑 비슷한 아이가 유키노랑 안다는 것도 신기하고, 유키노가 그런 쪽으로 연락할 방도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유키노 지인 중에 이런 쪽으로 발이 넓은 건 히키가야 군 정도다. 연락책 노릇은 그 아이 짓일까. 뭐, 어느 쪽이든 좋다.


 루미는 무언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것일까. 이제와서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이미 나는 이탈리아에 있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이탈리아어 따위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다.본 주르노 정도만 대충 안다.


 '하루노니까' 이탈리아어도 통달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본에는 많았다. 뭐, 실제로도 영어와 같은 페니키아계 언어니까 작정하고 배우면 몇 개월이면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해지겠지만 굳이 배울 생각은 없었다.


 언어를 모르는 나였기에, 이곳에서는 대중교통 이용부터 간단한 식사, 호텔까지 뭐 하나 간단한 곳이 없었다. 일본이랑 다르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거리를 실컷 돌아다녀봤다. 동양인 젊은 여자라 껄떡거리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의외로 그렇지만도 않았다. 유럽여행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초라했다. 그 흔하다는 소매치기도 나름 기대했는데 시내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시 낮이라 그런가. 주변에 나 말고도 동양인들이 드물게 걸어다녀서 그럴까.


 그 이유는 공원에 도착할 즈음 알 수 있었다.


 아, 어리다.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아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동양인인데 여기까지 어쩌다가 애들끼리 왔담 하고 혀를 찼다. 부모는 어딜 가있는 거지, 하다가 저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아이들이 있으니 시 차원에서 신경써서 치안이 강화될 법도 한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꽤 많았다. 설마 단체로 온 건가?


 상당히 시끌벅적하다.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일본어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일본 아이들이구나. 학교에서 단체로 온 모양이다.


 다른 세상에 오고자 해서 왔는데 이런 곳에서조차 고향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누군가가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방해받는 기분이다. 나는 나에게 잠겨버리고 싶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미술관에 들어갔다. 미술관까지 들어올 아이는 없으니까 조용히 사색하기에는 미술관이 좋을 것이다. 보통의 초등학생은 미술관의 경건한 분위기를 싫어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예상이 빗나갔음을 미술관 안으로 발을 내딛자말자 알았다.


 "츠루미?"


 골똘히 바로크 시기 그림을 보던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길고 곧은 아이는 아무리 봐도 루미였던 것이다. 저 아이도 명실상부한 초등학생이니, 모든 초등학생이 경건함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이다.


 루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았다.


 "언니."


 나는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설마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여기까지 온 거니?"


 "네, 유키노 언니한테 하루노 언니가 여기 와있다고 들었어요. 설마 만날까 했는데.."


 저 초연한 태도는 그래서인가. 나는 유키노가 보여주는 귀여운 모습을, 이 아이에게서는 거의 찾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유키노처럼 조금만 더 어설프게 굴었으면 재밌었을 텐데, 그러면 나도 더 실컷 놀려줬을 것이다.


 루미는 머리 좋고 곧은 점은 유키노랑 똑같았지만 예의를 차리면서 냉소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 루미는 무슨 그림을 보고 있던 걸까.


 벽 한켠에 걸린 것은 여자가 칼로 남자의 목을 베어내는 강렬한 그림이었다.


 교양 시간에 미술을 배워본 적이 있어 단숨에 무슨 그림인지 알았다.


 "카라바조라니, 취향 참 재밌네. 난 밀레 쪽이 좋던데."


 "네."


 루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짧게 답했다. 부끄럽구나, 자기 취향이. 이 아이의 진짜 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키노였으면 실컷 놀려줬을 텐데 루미에게는 다른 할 말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치바에선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 유키노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치바를 강조해 말했다. 루미는 센스 있게 받았다.


 "네. 피렌체까지 와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루미는 내 얼굴을 지긋이 보더니 말을 던졌다. 그래, 말을 했다기보다는 던진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얻어맞았으니까.


 "하루노 언니 너무 쓸쓸해보였어요. 그때 소부고 앞에서 봤을 때."


 그런 루미의 표정도 꽤나 쓸쓸해보였다. 나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쓸쓸해보였다고? 내가?"


 "네, 유키노 언니도 그런 느낌인데 그때 하루노 언니도 무척 쓸쓸해보여서.."


 쓸쓸하다는 단어가 있었다니. 나는 진정으로 쓸쓸한 인간이었다.


 진실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게 진실된 것이 없다는 뜻.


 후후, 속이 비어있는 인간은 쓸쓸하다.


 루미는 말을 아꼈다. 그 말투를 보니 평소에는 말을 거의 안 하고 사는 것 같았다. 확실히 눈초리가 예리하지만, 루미가 그 눈초리로 분석해낸 결과를 이렇게 입밖으로 내뱉는 일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유키노의 언니라서?


 "너 히키가야 군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하니?"


 루미는 어쩐지 답이 없었다. 긍정의 의미일 것이다.


 "사람을 꿰뚫는 눈이 있구나, 너한테도."


 입술이 가늘어졌다.


 이해할 수 있다.


 이 아이가 갑자기 좋아졌다. 나는 루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말 할 것도 없이, 나는 루미와 함께 미술관을 주욱 돌며 그림들을 같이 감상했다. 그동안 루미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서 속으로 웃었다.


 헤어질 때가 되서야 루미는 꾸벅 인사하고 종종걸음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그 아이들은 루미를 찾고 있었다. 친해서가 아니라 같은 조여서 찾고 있었다.


 그날 호텔로 들어온 나는 하룻밤을 보낸 뒤 바깥으로 새벽공기를 쐬러 나왔다. 태양은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데 로비에는 사람 한 명 없다.


 프런트 바깥으로 나가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싸늘한 데가 있다. 난 그런 느낌을 좋아했다. 나는 루미네 학교가 온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면 루미를 만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루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미네 학교 학생들이 머무는 호텔 프런트로 들어가 다리꼬고 앉아 구름 낀 하늘을 보고 있으니 기분도 멋대로 가라앉아서 자판기 쪽으로 가 커피를 뽑아먹었다. 이탈리아 커피는 맛이 오묘하다.


 루미는 주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아이는 아닌데, 그렇다고 나를 보러 나올 아이도 아니다.


 나는 호텔 앞 뜰로 나와 걸었다.


 스스로에게는 실망할 만큼 실망했고, 이제 기대하는 것도 없다. 그런데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두근거림 같은 류의 진부한 표현으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은데.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아직도 나는 모르는 것, 발견 못 한 것 천지라는 것.


 그래서 진실한 것을 아직도 찾고 있는 거겠지.


 츠루미 루미란 아이로부터.








*내청코 나오는 하루노x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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