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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링크
안녕 작가지망생 백붕이야.
초커 2화가 나오게 되었어.
항상 꾸준한 사랑 보내주고 내 글을 읽어주서 고마워.
오탈자 지적이나 궁금한 점, 피드백 등은 댓글로 달아주면 작중 스포일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성실히 답변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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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몸을 내어 줄 수 있는가? 비유가 아니라, 진짜 몸을. ]
앤은 자신이 어떻게 침대를 벗어나 출근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제대로 정신이 들었다는 걸 인식할 때 그녀는 마트에 출근해 진열대의 물건을 재배치하고 있었다.
그것도 손에 한 가득 물건을 집고 이리 저리 움직인 다음 목록을 작성한 지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갑자기 들고 있는 물건에서 무게감이 확 느껴져 내려다 보니 술이 가득 든 박스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앤은 서둘러서 술 박스를 진열대에 올려놓고 손목을 돌렸다.
필요 이상의 장신구를 착용하면 안 되는 마트 규정 때문에 앤은 머리핀을 제외한 귀걸이와 초커는 모두 집에 빼 둔 상태였다.
특히 루시가 골라주었던 나머지 두 개의 초커는 혹시 모를 일 때문에 함부로 건들지도 못하고 포장도 내버려 둔 뒤 옷장에 넣어두었다.
손목을 풀며 잠시 재고를 파악하는 동안 앤의 마음 한 켠은 자신의 한 말과 대답해준 엘의 의도를 추측하느라 콩밭에 가 있었다.
전날 일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리라도 한 걸까.
엘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아름답게 꾸몄더니 엘의 다정함이 키스로 바뀌었고 앤의 몸을 녹일 만큼 따뜻한 사랑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엘에게 어리광을 부리려 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엘이 자신의 얼굴을 만졌을 뿐인데 앤은 엘의 손에 볼을 맡겼고 따스한 아침 키스를 했다.
어제와 오늘, 하루에 한 번씩 그녀의 입술이 엘의 입술과 맞닫았다.
부드러운 그 감촉은 일하면서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혀지질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제일 크게 흔드는 것은 엘에게 먼저 조르듯이 이야기를 한 자신이었다.
앤은 엘이 당분간 얼굴을 보기 힘들다고 말했을 때 큰 근심과 걱정이 들었다.
엘이 이사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해줬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사는 건 어떠냐고 말해 버렸다.
잠시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어불성설했지만 엘은 앤이 말하는 것 하나하나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엘이 이마를 가져다대었을때 어제 보았던 사랑을 담은 눈동자를 또 보았다.
엘의 사려깊은 마음은 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엘이 떠나고 난 다음 그녀의 집은 사라져가던 적막이 드리워졌다.
이윽고 외로움이 찾아왔다.
엘과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전화통화를 할 수는 있지만 당분간은 그녀의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도 없었다.
그녀와 만난 지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몇 년은 지난 느낌이 들었다.
앤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자기 자신이 만지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도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을라치면 앤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만다.
앤의 생각에 엘은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존중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 엘은 모든 것을 앤의 의사에 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성의 끈은 무척이나 얇았다.
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랐다.
엘이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리고 엘이 정말 자신이랑 같이 살게 되면 앤은 뭐라고 말해야 하고 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갖은 생각이 들었다.
불순한 후회감이 들었다.
자신이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게 되고 연약해지면서 욕심도 드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또 술 두 상자가 위로 층층히 쌓였다.
술 상자가 3단씩 일곱 줄이 나열되자 어디에서 보아도 매장에서 판매하는 주요 재고처리 상품처럼 보였다.
안그래도 빨리빨리 넘겨야 하니 곳곳에는 세일중이라는 패널이 걸려 있었다.
앤은 어깨를 살살 풀었다.
강하게 풀면 안그래도 아픈 어깨가 비명을 지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다시 어깨와 팔에 붕대를 감았다.
이제 더 이상 붕대에서는 피가 묻어나오지 않게 되었다.
" 술 다 넣었어? "
주류를 담당하고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앤에게 다가왔다.
앤의 편견일수도 있으나 상당히 독특한 사람이었다.
긴 머리카락의 반은 분홍색이고 반은 검정색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재로 잰 것처럼 정수리를 기준으로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유행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 거의 다 넣었어요. "
앤은 높이 쌓인 술의 산을 가리켰다.
" 고생했어, 다친 덴 좀 어때? "
" 괜찮아요. 붓기도 많이 내려갔고 멍도 조금만 있으면 없어질 거래요. "
" 미안해. 사람을 좀 더 많이 붙여줄 걸 그랬어. "
직원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앤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앤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로비에 나타난 그 때, 매장에 있는 거의 모든 직원은 물론이요 비번이나 아예 휴가를 갔던 사람들까지 앤이 다친 사실을 알게 되어 앤이 마트를 쉬는 동안 그녀에 대해서 열심히 소문이 퍼져 있었다.
특히 음료수를 넣었다던 리 씨는 잔뜩 화가 난 프로스트 점장에게 걸려 차라리 퇴사하는 게 나을 만큼의 욕과 압박을 받았노라고 털어 놓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아이비의 마지막 선처인지 리 씨는 부서만 바뀐 채 아직도 근무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모든 이들이 앤을 바라보면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앤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너무 적셔지는 건 원치 않아 출근해서 묵묵히 일을 했다.
보안검색대의 두 요원은 애지간해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앤을 시야에 두거나 여차하면 바로 달려갈 거리에 두고 싶어했지만 앤이 한사코 그것만은 막았다.
앤은 약간의 불행을 경험했다고 해서 자신이 마트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약해지는 것은 엘 앞에서만 해도 충분했다.
" 다들 물건 내리러 가신 거죠? "
앤은 시간을 살펴보더니 물건 발주가 들어올 시간임을 파악했다.
" 좀 쉬다 오라고 하고 싶은데 하필 또 시간제 직원들 전부 불러모으라고 해서 곧바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
" 어디로 가나요? "
" 위층, 상자 만들어 달래. "
" 저는 괜찮아요. 금방 가볼게요. "
물건을 옮기고 진열하는 것만이 앤의 일은 아니었다.
앤은 서둘러서 다음 일을 하기 위해 낡은 상자에 묻어있던 먼지를 몸에서 털어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시간제 직원을 주로 소집하는 일은 전문성은 떨어지지만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일이거나 일반 직원만으로는 하기 힘든 벅찬 일이기에 필연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밞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박스를 조립하고 있었다.
모두 앤과 같은 시간제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만든 박스는 새로운 수납장에 쌓을 물건들을 적재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 같았다.
앤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손을 뻗어들어 그들 사이에 끼어 박스를 집어들었다.
" 저도 도울게요. "
" 몸은 좀 괜찮아? "
말총머리 동료의 따스한 걱정이 들렸다.
" 움직일 만해요. "
앤은 박스를 집어들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접으며 대답했다.
간단하게 척척 몇번 접으면 새로운 상자가 만들어진다
상자가 만들어지면 한 명이나 두 명이 빈 상자를 물건이 쌓인 곳으로 내려놓는 단순한 일이었다.
단지 박스를 너무 빨리 접으려 하다 보면 종이에 베인다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기에 신속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두 가지 모순을 안고 일했다.
" 점장이 더 안 쉬래? "
" 점장님은 더 쉬라고 했는데 제가 더 일하겠다고 했어요. "
" 독하네...그렇게 돈이 벌고 싶어? "
말총머리 동료 뒤에 있던 체크무늬 셔츠의 여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순간 말총머리 동료의 날카로운 시선이 체크무늬 셔츠의 가슴을 후렸다.
이미 사전에 비슷한 일을 당한 경험인지 말총머리 동료는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인상을 썼다.
" 어휴 눈치없는 년, 너같으면 등이 이지랄로 부서졌는데 돈때문에 일하겠냐. "
말총머리 동료가 종이 상자로 체크무늬 셔츠의 머리를 역으로 때렸다.
자신이 당한 걸 그대로 되돌려 주니 묘한 쾌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그러저나 말거나 앤은 앞을 보면서 박스를 접어 체크무늬 셔츠에게 넘겨주었다.
" 돈 때문에 맞아요. 돈마저 없으면 안 그래도 보잘것없는 제가 더 보잘것없을 것 같아서요. 돈이라도 모아 놔야죠. "
앤이 가벼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아니 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그럴 수 있지. 난 충분히 이해해. "
체크무늬 셔츠는 따사로운 시선을 못 이기고 자신의 발언을 급히 철회했다.
앤의 작은 미소에 잠시나마 자신이 농담으로 던진 것이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자 서른 개를 맞추어 조립하자 그네들의 대장 격이나 다름없는 비올라가 찾아와 상자를 한아름 받아들었다.
몇 개인가 남은 것은 앤의 몫이었다. 앤은 비올라의 곁에서 차근차근 짐을 옮겼다.
" 그나저나 앤 너도 큰일이구나. 편한 카운터에 있다가 이런 데까지 나오고. "
두 팔 가득 상자를 들고 있던 비올라가 말했다.
확실히 카운터는 편하기는 하다.
매장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카운터는 다리가 조금 아픈 걸 제외하면 움직이는 양도 적고 계산만 해주면 된다.
육체적인 부담은 적은 것이다.
대신 카운터에 서는 계산원들은 수 많은 진상 고객들과 직접 얼굴을 대하는 감정노동을 필요로 했다.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었다.
앤은 일부분이나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어디에 있든지 일하는 건 똑같고 급여를 받는 것도 똑같은걸요. 비올라 씨도 원래는 우리 마트보다 더 큰 곳에서 일하시지 않으셨나요? "
"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나. 거기서 있을 때보다 여기서 있을 때가 돈은 적어도 훨씬 편하거든. 거기는 시시때때로 행동에 시간 엄수에 어휴... "
비올라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올라는 원래 다른 시의 커다란 마트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신상의 사유로 이 마트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앤은 비올라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어딜 가도 잘할 거 같았다.
" 앤~! "
비올라를 따라 상자를 내려놓으니 동료직원 중 누군가가 앤의 이름을 불렀다. 앤이 고개를 돌리니 한 여성이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비올라와 비슷한 수준의 위치에 있는 첸이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가슴 정도 되는 높이의 바구니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앤의 발 앞에서 멈추었다.
" 이것 좀 점장실에 가져다 둘래? "
" 이게 뭔데요? "
앤은 가슴 정도 오는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상당히 가벼웠고 안을 보려고 했으나 테이프가 붙어서 내부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바구니에 자주 뚫려있는 흔한 구멍조차 없고 온통 검은색이라 무슨 물건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 나도 몰라? 점장님이 중요한 물건이라고 가지러 오랬는데 난 지금 우리 막내 봐줘야 되거든? 미안한데 대신해줄 수 있어? "
" 그렇게 할게요. 어차피 한번 가긴 했어야 했어요. "
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 점장실을? 왜? "
" 점장님이 출근하면 한번 오라고는 하셨어요. 근데 오늘은 계속 아침부터 술상자 정리를 하느라 못 뵈었거든요. "
" 그 마귀가 왜 널 보자고 했을까? "
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문제는 그녀의 눈이 원체 작아서 눈을 뜨는지 안 뜨는지 잘 티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눈을 보고 앤은 바구니를 든 채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또한 최소한 어느 정도 직책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이비 프로스트를 보고 개인적이나마 별명 하나씩을 붙여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상처때문에 그러신 거 아닐까요, 점장님이 엄청 걱정해 주셨거든요. "
" 마귀가 널 안고 오는 걸 봤을 때는 정신이 나갈 정도였지...비올라나 나나 다른 사람도 다...아니다 이럴 게 아니라 얼렁 가, 또 혼나겠다 "
" 안 혼나요...... "
앤은 비올라와 첸의 전송을 받으면서 바구니를 안고 마트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왔다.
이곳은 피치 못할 일로 귀가가 불가능해지는 직원이나 당직서는 이들, 중요 직책을 가진 이들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앤은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점장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기 위해 잠시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녀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벌컥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안에서 아이비 프로스트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왔어 자기? "
아이비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늘어트리면서 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보다는 밝지만 다소 어두운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에 숨은 바다와 같은 푸른색 눈동자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녀는 앤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양 손짓했다.
앤은 바구니를 들고 점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비는 방금 전까지 컴퓨터로 씨름을 하고 있었다. 방대하게 밀려오는 거래명세서와 결제확인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아이비는 손님용 의자를 하나 꺼내어 그곳에 앤에게 앉으라고 권유했다.
앤은 의자 모서리에 비스듬하게 엉덩이를 대어 앉았다.
아이비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지적인 모습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기 위해 그녀의 손가락이 눈가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 전 줄 어떻게 아셨어요? "
" 우리 마트에서 걷는 소리가 그렇게 가벼운 건 자기밖에 없어. "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지만 막상 또 아니라고 잡아뗄 수는 없는 것이 이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 중 앤보다 체중이 적게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은 터벅터벅 걷지만 근무할 때 신는 단화를 신으면 앤은 자신도 모르게 종종걸음으로 걷게 되었다.
" 이거 첸 씨가 점장님 방에 가져다 놓으래서 왔어요. "
앤은 자신의 용무를 먼저 기억하고 바구니를 내밀었다.
아이비는 바구니를 받아들고 테이프를 뜯어 안을 보았다.
" 음, 역시 첸이야 지시를 정확하게 이해했어. "
" 네? "
아이비는 설명 대신 바구니를 기울여서 안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바구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포장용 종이 한 장만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앤이 들었을 때 가벼운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들어가있는 것이 없었으니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 첸 씨 설마 지금 빈바구니 가져다 달라고 하신 거예요? 아님 잘못된 걸 가져온 거예요? "
앤은 자신이 뭘 잘못 전달했나 싶어 눈을 찡그렸다.
" 제대로 가져다 준 거 맞아.
서류 담아서 버릴려고 가지고 오라고 했어, 근데 시키려고 하는 건 일부러 자기를 시킨 거야. 안 그러면 마트에서 자기가 자꾸만 날 피해 다닐 거잖아? "
" 저...저는 점 - "
아이비의 푸른색 눈이 사납게 빛났다.
앤은 아이비가 왜 이러는지 이제 슬슬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능숙하게 표현을 바꾸었다.
" 아이비 언니 피한 적 없어요. "
표현이 달라지자 아이비는 점장실 의자에 앉아 의자를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앤의 얼굴을 보았다.
" 다친 뒤로 첫출근인데 몸이 어떻다 이야기하러 와 주지도 않았잖아. 난 가뜩이나 애들 관리하느라 지하 내려가랴 사무실에 있으랴 바쁜데. "
아이비는 퉁명스러웠다.
정확히 앤이 예상한 문제였다.
아이비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러 오는 것이 순서가 맞는데 아침에는 정신이 나가 있던 터라 아이비와 만나지 않았거나 만났어도 정신을 못 차렸을 확률이 높았다.
아이비는 다른 직원들 못지않게 앤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
" 죄송합니다 하기 전에? "
아이비의 말 끝이 올라갔다.
마트의 수칙 중 하나가 생각났다.
앤은 천천히 아이비의 말 끝을 따라 이어 말했다.
" 죄송할 짓을 하지 마라... "
아이비는 종달새처럼 아름답게 따라부르는 앤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이비의 인상은 차갑거나 사나운 편이고 지금도 거의 대부분 그대로이지만 눈매만은 퍽 푸근해져 있었다.
" 자기 혼내러 부른 거 아니니까 힘 빼. 그냥 내일 스케줄 때문에 연락한 거야. 자기 내일 시간 빈다고 했지? "
" 맞아요 언니. "
" 몇 시에 만날래? "
앤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어차피 내일은 금요일이라 일 끝나고 나면 더 이상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엘도 집에 없을 터이니 앤은 혼자였다.
" 저는 어느 때라도 괜찮아요. "
" 그럼 열 시쯤 만날래? 밥부터 먹자. "
" 좋아요. "
아이비는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아이비가 이따금씩 중요 사항을 메모하거나 일정을 확인할 때 쓰는 수첩이었다.
몇 번의 빠른 필기가 지나가니 아이비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수첩을 톡톡 두드렸다.
" 그 다음엔 뭐 하고 싶어? "
" 네?..... "
" 설마 밥만 먹고 끝낼 건 아니지? 명색이 날 구해준 감사 인사 겸 관계 개선인데 밥만먹고 끝내면 그냥 회식이잖아. "
" 관계 개선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해요. "
앤은 손사래를 쳤다.
4층에는 사람도 별로 없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문 뒤를 확인했다.
반면에 아이비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 들으면 좀 어때? 그리고 오해가 생길 만큼 이상한 행동을 하진 않았는데? 그런 것만 생각하니 자기는? "
"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요... "
아이비의 치밀한 눈동자가 빛났다.
앤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의견이 자꾸만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앤은 한숨을 쉬었지만 아이비는 묵묵히 앤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로지 생각을 앤이 스스로 하라는 느낌이었다. 앤은 조금 진지하게 고민해보다
얼마 전에 루시와 대화한 내용이 생각났다.
루시가 생각나니 그 다음 스케줄 역시 그녀와 함께 다니던 것과 비슷하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방법이 도출되었다.
" 그럼 영화 어떠신가요? 이번에 재밌는거 하나 나왔다고 루시가 그래서... "
" 루시는 누구야? "
" 아, 제 친구에요. 어릴때부터 지냈던... "
" 자기 친구 있었구나. "
아이비는 진심으로 놀라며 손을 맞잡았다.
앤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 한 구석에서 친구의 익숙한 장난질이 떠올랐다.
" 미워할 거예요 점장님... "
앤은 이번에 일부러 점장님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어가 이것임을 알게 되자 앤은 자신의 기분 나쁨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비는 미묘한 표정이 되어 머리를 뒤로 넘겼다.
하지만 아이비는 또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것 대신 앤의 마음을 파고드는 걸 택했다.
" 지금 보니 자기 기분 나쁘거나 사무적으로 대답하고 싶을 때는 점장님이라고 부르고 아니면 언니라고 부르는구나. "
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비는 아주 크게 웃었다.
그녀가 소리지를 때 만큼으로 큰 소리였다.
아이비는 한창을 웃다가 수첩에다가 앤이 말한 내용을 적으면서 다시 밑줄을 그었다.
" 그래 그럼 밥먹고 영화보고, 그다음에 카페 갔다가 생각하자. 솔직히 난 자기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그래서 좀 오랜 시간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 "
" 네 알겠어요. "
앤은 공손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뭔가 정말 예상한대로 코스가 만들어졌지만 아이비에게는 다소 연령대적으로 문제가 있어보이는 스케줄이었다.
앤은 그 부분까지는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 그리고 내가 자기에게 전달사항 두 개가 있어. 하나는 마트의 점장 프로스트로써, 하나는 언니 아이비로써야. "
앤은 빠릿하게 자세를 고치고 정자세로 아이비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진지하게 엄숙한 얼굴 표정이 된 아이비는 팔짱을 낀 상태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렸다.
" 하우스 양은 이제 카운터 업무를 재개해도 됩니다. 컴플레인 건이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안전사고에 유의하면서 근무해주세요. "
" 알겠습니다! "
여리지만 앙칼진 앤의 대답이 즉각 들려왔다.
되돌아올까 말까 싶었던 카운터 업무가 다시 돌아오게 되자 앤은 머리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더 못할 줄 알았는데 아이비는 생각보다 긍정적이게 평가해 준 모양이었다.
" 리 씨의 치료비는 내달 내로 정상 지급될 예정입니다. 리 씨에게 사과는 미리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재차 이 건에 대해서 묻지는 말아 주세요. 이미 내가 엄청 갈궜거든요. 아마 세 번은 울었을 걸요. "
앤은 첸이 떠올랐다. 분명 담당자들끼리의 이야기에 이 이야기가 나오질 않았을 리가 없으니 굳이 그 순간을 떠올리지 않아도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뻔할 뻔했다.
앤은 리 씨가 아직도 근무하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이 다음은 프로스트 점장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이비 언니가 하는 말일 뿐이죠. "
아이비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앤을 안아주었다.
" 고생했어...얼마나 아팠을까,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좋았을 걸...내가 자기같은 상황이었다면 분명히 몸을 던졌겠지, 이 약한 몸을 위해서. "
두 사람의 키 차이가 많이 나는지라 앤은 고개를 뒤로 최대한 젖혀서 아이비의 얼굴을 보았다.
지난 번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누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이비는 앤의 상처를 확인했다.
아직도 목 뒤의 상처나 얇은 상의를 입고 있을 때 팔 부분의 상처는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비로써는 상처를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상처가 보였다.
원래라면 그 상처는 모두 그녀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잠깐 상처 좀 볼 수 있을까 자기? "
" 네...괜찮아요. "
앤은 천천히 유니폼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 자신의 팔과 어깨, 그리고 팔을 보여주었다.
두터운 하얀 붕대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아이비는 그 붕대의 끝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손길은 목에 다가와서 멈추었다.
앤은 왠지 모르게 엘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엘 생각만 해서 그런지 이상한 상황이 그려지는 듯 했다.
앤은 아이비에게 실례일 거라 생각해 서둘러 다른 생각을 했다.
아이비는 상처를 만지는 것을 멈추고 한 팔을 앤의 어깨 위로 둘렀다.
그리고 그녀는 앤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고정해 두고 있는 머리핀으로 시선을 옮겼다.
" 상여금이야. "
아이비는 앤의 머리칼을 밀어내고 그녀의 이마를 드러낸 뒤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쪽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앤은 붉어진 얼굴로 아이비의 가슴을 보았다.
큰 키 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은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눈길이 갔다.
앤은 몸에서 계속해서 열이 나는 느낌이었다.
" 성추행이야? "
" 아뇨... "
" 그럼 됐어. "
아이비 역시 살짝은 부끄러웠는지 푸른 눈 아래로 연약하게 달라오른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여전히 앤은 아이비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떠올리고 말았다.
아이비는 앤의 눈을 따라가다가 아무리 신장차를 고려해도 시선이 부자연스럽자 아이비는 손을 가슴 위로 올려놓았다.
하얗고 긴 앤의 손가락과는 달리 굳은 일 때문에 다소 투박해졌지만 그 큰 손은 앤의 얼굴을 대부분 잡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 자기...생각보다 응큼하구나? "
" 네?.....아뇨 그게..... "
" 그럴 수 있지. 우리 자기도 여자구나. "
아이비는 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양 옆으로 치렁치렁하게 흔들렸다.
앤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이비는 앤을 뒤로 끌어당겼다.
앤의 머리는 아이비의 가슴 앞으로 떨어졌고 앤은 빠져 나오려고 허우적대었지만 아이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있었다.
" 지쳐 보이는데 30분 정도 더 쉴래? 자기 퇴원서류 아직 안 끝났거든. "
아이비는 앤을 반쯤 품은 상태로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그럼 저도 도와야... "
" 아냐, 이러고 있으면 돼. 그걸로 충분해. "
앤은 즉각 일어나려고 했으나 아이비의 포근한 가슴과 그녀에게서 나오는 향 때문에 머리로는 일어나야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몸으로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엘에게서 아로마향이 난다면 아이비에게서는 좀 더 시원하고 농염한 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체화될 수 없는 별개의 향이었다.
앤은 꼼짝없이 아이비의 품 안에서 서류를 체크하고 서명했고 점장실에서는 두 사람의 목소리만 도란도란 들렸다.
앤은 결국 30분 넘도록 점장실에 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내려가 일을 서둘리 마무리하고 퇴근했다.
직원들은 아이비 프로스트와 30분 이상 있다 왔다는 것 때문에 걱정 아닌 걱정을 했지만 앤은 부서 상담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린 거라고 해명했다.
비올라가 대강 이해를 해 주니 다른 이들이 추가로 질문을 해오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앤의 발걸음은 묘하게 빨랐다.
집으로 가는 20분이 평소보다 더 긴 느낌이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앤은 열쇠를 열 생각도 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잠겨 있었다.
아차 싶은 앤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비틀어 열었다.
" 다녀 왔 - "
앤은 힘차게 문을 열었다.
큰 바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철문이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나 온기도 없었다.
오직 불 꺼진 가구만이었다.
" 아... "
앤은 엘이 집에 없음을 지금에야 떠올렸다.
엘의 흔적이 남은 것은 그녀가 잔뜩 만들어주고 간 치킨 수프 뿐이었다.
나머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그녀의 작은 보금자리 뿐이었다.
입을 열어도 말하는 것도 그녀, 듣는 것도 그녀뿐이었다. 집에는 앤 혼자뿐이었다.
" 엘은 지금 없지. "
씁쓸한 웃음이 절로 지어져 나왔다.
앤은 방의 불을 켜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맨바닥을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5분 동안, 계속 그녀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휴대폰을 열어 엘에게 문자를 보내 봤지만 엘은 바쁜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메시지가 안 되니 연락을 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럼 엘에게는 상당한 실례가 될 게 뻔했다.
"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
앤은 중얼거렸다.
넓지도 않은 집에 그녀의 목소리가 반사되어 돌아왔다.
소름끼치는 적막감이 알 수 없는 이명을 불러왔다.
앤은 옷을 하나씩 벗었다.
상의를 벗고 그 다음은 하의, 마지막으로 머리에 달라붙어 있는 아름다운 머리핀을 떼어 냈다.
속옷 차림의 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항상 좁은 것 같다고 불평하던 침대가 오늘따라 또 넓게 느껴졌다.
" 내일 연락하면 돼, 언니도 만날 거잖아. "
앤은 왼팔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머리를 잔뜩 집어삼키는 고민거리를 지워내려고 노력했다.
씻고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런 다음에는 내일 아이비와의 만남을 준비해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다.
앤은 벌써 그녀가 누군가의 온기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며 애써 꿋꿋한 척을 할 뿐이었다.
아이비의 향기가 아직도 그녀의 몸에 베여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아직도 후끈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농염하던 향이 앤의 정신을 흔들게 만들었다.
앤은 거울 속에서 연약하고 보잘것없기만 한 자신을 보았다.
그녀는 어리광을 부릴 수도,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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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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