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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모카란] 내일의 밤하늘 초계반 中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5 23:54:40
조회 266 추천 17 댓글 1
														


 X X X 


 언제부턴가 꿈을 꾼다. 


 평소대로의 일상을 구가하는 나쁘지 않은 꿈. 아련한 예전의 기억과 최근의 기억들이 하나의 필름처럼 몽땅 뒤죽박죽 섞인 꿈이다. 그곳에서 난 아이였고, 가끔은 중학생, 그리고 가끔은 현재의 모습이 되곤 했다. 


 꿈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늘 함께했던 사인조. 가족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들. 허나 내 꿈속에서의 우리들은 어째선지 항상 넷이 아니라 다섯이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꿈속의 난 친구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넷보다 다섯이 더욱 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왜 그럴까, 우린 분명 넷인데. 왜 다섯이란 숫자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그 감각에 대해서 난 이렇게 느꼈다. 보통 꿈이 다 그렇지만, 꿈속에선 마치 위화감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억지로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마음 한 구석에 돌덩이가 얹힌 것 마냥 답답한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를 잠에서 깨어날 때면, 언제나 잠옷은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흐릿해지는 꿈과 선명한 기억들이 부딪혀, 무엇이 진실이냐며 마음을 충동질했다. 


 나에게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잊었는지,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날들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거리에서 단지 만끽할 뿐이다. 


 언제부턴가 공허함에 뻥 뚫려버린 울컥한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X X X 



 책상 머리맡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취미마저 수면인 모카였기에, 이른 아침부터 울리는 알람 소리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카는 소리만 끈 채 스마트폰을 다시 침대로 휙 던져버렸다. 퉁, 하고 스프링이 튕기는 소리가 들리며, 스마트폰은 그대로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으, 으.....”


 그러거나 말거나 모카는 이불에 폭 들어가 고치처럼 웅크린 채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겨울의 마법에 얼어버린 것처럼 아려왔다. 요즘 옛날 꿈을 꾸고 나선, 항상 이렇게 아파하기를 반복이다. 최근 슬프다거나, 안타깝다거나, 아쉬운 일이 전혀 없는데도, 요즘의 모카는 이러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였다. 


 잠에서 깨면, 무언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풀리지 않을 향수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강한 애수가 해일이 되어 모카를 덮쳤다. 이 따스한 감정이 지닌 고동의 끝은 과연 어딘지, 모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좀처럼 쉽사리 이 감정의 실이 풀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그녀 또한 알 수 있었다. 최근이라곤 하지만 모카로서는 전혀 특정할 수 없는 시기에, 마음은 바늘이 박힌 것 마냥 따끔, 따끔 아파왔다. 심장병이 있다거나, 특별한 지병이 있는 게 아닌데도. 


 거울을 바라보며, 모카는 제 젖가슴 사이를 검지로 꾹, 꾹 눌러보았다. 제 손가락으로 인해 가슴팍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제외하곤, 다른 감각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난 왜 아픈 걸까.


 이런 심오한 생각을 가져가면서도, 모카는 결국 하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는 강과 같았다. 느낀 아픔도 흘러가는 일상에 퇴색되기를 바라면서, 모카는 터져버린 수도꼭지에 손을 담갔다.


 X X X 



 매일, 매일 달라진 것 없는 똑같은 풍경. 눈부시기는커녕, 색다른 자극 없이 졸음만을 자극하는 나날들. 가로수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들이 마시기에 상쾌한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니 이러한 느낌을 제대로 만끽할 수도 없었다.  물론 요런 느긋한 일상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이러한 무료함을 쫓아내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존재했다. 


 “모카쨩! 


 “오오, 츠구.”


 모카는 제 갈 길을 따라잡은 저의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 목덜미 끝을 살짝 덮은 갈색 단발이 어울리는,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평소대로의 하자와 츠구미였다. 


 “오늘도 잠 제대로 못 잤어?”


 학교로 향하는 등굣길 사이로 츠구미는 모카를 향해 조심히 물어보았다. 요즘 유독 불면을 표하는 모카였기에, 착한 심성을 가진 츠구미로선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응, 학교가면 조금 더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에서 모자란 잠을 요새는 학교에 가서 채우는 게 모카의 일이었다. 요상하게도 학교에만 가면 집에선 오지 않던 잠이 솔솔 찾아왔다. 침대도 없고, 베게도 없는 공간인데, 교실 책상에만 엎드려 있으면 묘하게 불면 증세가 없었다. 마치 학교에 있는 누군가 담요를 덮어주는 것처럼, 실제론 아무도 없는데도 이상한 느낌.   


 “또 그 꿈 꿨어?”


 츠구미에겐 꿈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히 해주었다. 물론 넷이 아닌 다섯이라는 내용까진 이야기를 해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등장하는 꿈을 악몽으로 표현하다니. 설령, 내용을 안다 해도 그렇게 표현할 것 같아 조금 웃기다. 아오바 모카가 생각한 하자와 츠구미는 그런 올곧은 캐릭터니까. 


 “...그럴지도~”


 힘겹게 눈이 풀린 그녀의 입가엔 차마 숨길 수 없었던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츠구미는 그것을 걱정스레 보았지만, 그녀의 입에선 힘내란 말만 어쩔 수 없이 나올 뿐이다. 모카가 가진 스트레스의 원인이, 저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걸 통렬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그저 그녀가 힘겨워하지 않길, 안타깝게 마음속으로 빌 뿐이었다.

 

 X X X 

 

 아오바 모카는 저녁놀을 싫어한다. 그녀가 저녁 무렵의 서쪽 하늘을 싫어하게 된 건,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게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보면 그다지 싫어할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감성적인 면에서, 아오바 모카란 사람이 석양빛이 부스러진 잔광을 싫어할 이유가 있었다. 


 저물어갈수록 타오르는 저녁놀을 바라보면, 무언가 깨어진 느낌이 들었다. 진한 상실감과 더불어, 가슴 한 켠에 얹힌 돌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간 그 감정의 해일에 깔려 죽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늘과 같이 친구들 모두가 각자의 동아리로 사라질 때, 나 홀로 이렇게 귀갓길을 걸어 갈 때 더욱 그랬다. 츠구미는 학생회, 토모에는 댄스부, 히마리는 테니스부로 가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귀로를 걷는다. 분명 누군가 함께했었던 감각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혼자였다. 


 태양이 서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애달픔을 더하는 걸까. 순간 느낀 아릿함에 모카는 눈을 비볐다. 뚝뚝, 마음엔 멍자국을 남긴 채 눈물은 구슬피 떨어졌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모카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 겨울엔, 둘이서 에노시마를 갈까.”


 스쳐 지나간 연인의 목소리가 모카의 귓속으로도 파고들었다. 에노시마엔 그녀도 일전에 가본 적이 있었다. 토모에가 그녀답지 않게, 먼저 가보자고 얘기를 꺼내 다함께 간 곳. 히마리는 팬케이크를 먹고, 츠구미의 제안으로 돌고래쇼를 보고, 내가 문어 타월을 썼던가. 돌고래가 다이빙하는 바람에, 다 젖어서. 그리고 다 같이 석양을 봤었지, 즐거웠는데. 아니, 난 석양이 싫은데. 


 “나쁘지 않은 거 아냐?”


 번쩍 들린 목소리에, 모카는 발걸음을 틀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 저의 앞에 있던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어깨를 잡았다. 여학생의 시선은 모카의 치맛자락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말했다. 


 “뭡니까?”


 1학년. 하네오카 여학생이 입은 치마의 색깔은 저와는 확연히 달랐다. 바라본 얼굴마저, 저가 생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얼굴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사람이 아니었다.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여학생은 이상하다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짓곤 다시 제 갈 길을 향했다. 덩그러니 남은 모카만이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발걸음과 그에 동조한 머릿속을 묘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걸었다. 


 빠앙, 하고 비명을 지르는 자동차 경적. 움츠러드는 어깨와 이젠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꼿꼿해지는 어깨. 뭐가 이제 아니라는 거야, 도움만 받았으면서, 누구한테. 


 몰라, 


 그런 거. 


 묻지 마.  


 상점가로 가는 길을 걷다, 문득 어딘가의 진열 유리창 앞에서 발걸음은 멈췄다. ‘에도가와’ 라고 적힌 악기점. 주인이 없는 전기 기타. 다가가려 발걸음을 옮겨봤지만, 유리창에 막혀 그러지도 못했다. 푸른색의 몸 위 여러 개의 현을 지닌 저 기타를, 언젠가 만져 본 기억이 있었다. 흐릿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러고 보면 밴드 이름은 어떻게 할래~? 


 “뭐가?”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들린 목소리의 주인을 이미 모카는 알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익숙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목소리니까, 그게 당연하다.  


 히마리는 이제 밴드 이름 생각하지 마. 


 이번에도 알고 있는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를 인지한 순간, 모카의 가슴은 벅참으로 터질 것 같았다. 모카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녀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석양, 석양은 어때?


 X의 목소리를, 그녀는 그리워했었다.  


 결정! 우리 밴드 이름은 「Afterglow」다!


 우리가 있을 곳의 이름을 지어준 토모에의 목소리도.


 석양을 보면서 떠올린다, 왠지 멋있는데!


 항상 남몰래 의지가 되어준 히마리의 목소리도.


 응! 이제부터 우리는 예전보다도 더욱더 함께인 거야!


 모든 일의 시작이자, 마침표를 찍어주는 츠구미의 목소리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에, 모카의 걸음은 다시 경쾌한 소리를 더했다. 이 해묵은 시간의 파도를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헤어지더라도 이어져 있으니까,  설령 그 인연이 풀리더라도 다시 함께 맺을 수 있다는 그 맹세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만큼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우리의 기억은 되살아나는데도, 그녀의 이름만큼은. 


 모카의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눈물도 볼을 타고 흘렀다. 땅에는 무척이나 작은 멍 자국이 생겼다. 그녀의 마음에 새겨진 것처럼, 아주 작은 그림자가. 


 늘 느긋한 모카였기에 달리는 것은 영 익숙지 않았다. 하네오카의 규정 단화가 탁, 탁 소리를 낼 정도로 힘차게 달린 그녀.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후들거리는 무릎에 손을 댄 채, 참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서오세요, 가게예요~”


 이윽고 들린 소리에, 그녀는 고개만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그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공원이 그곳에 있었다. 모카와 토모에, 히마리 그리고 츠구미도 자주 놀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아직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와도.  


 “있지, 언니도 껴줄래?”


 모카는 무릎을 굽히고, 저보다 몇 뼘이나 작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의 어린 시절과 옛날의 X를 보는 것처럼 아이들의 시선은 올망졸망하다. 아이들의 눈엔 호기심과 어른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경계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긴 꽃집이니, 빵집이니?”


 그 경각심을 풀기 위해, 모카가 먼저 옛날의 마음으로 되돌아갔다. 어렸을 적엔 밥 먹듯이 했던 놀이여서 모카도 금세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줄 수 있었다. 


 “빵집이면서, 꽃집이에요.”


 모카의 그리움에 잔뜩 담긴 시선에, 일자머리를 한 꼬마 아이가 대신 말을 덧대었다. 역시나 추억에 얽매인 기억 속의 모습이다. 심장 한 구석에 바늘이 찔린 것처럼, 피가 새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어라, 오늘은 바게트 빵이 싸네?”


 “네~ 오늘은 바게트 빵이 한 개의 만 엔이에요~”


 모카가 능청스레 답하자, 꼬마 아이는 더욱 당돌한 모습으로 답을 주었다. 그 모습이 퍽 웃겨서, 모카는 자기도 모른 채 은은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지갑을 꺼내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만 엔은 없었다. 지갑에 있는 건, 오직 천 엔 짜리 세 장. 어딜 가든 비상금으로 들고 다니는, 천 엔 세 장. 


 “돈이 없으시면 괜찮아요~ 오늘은 외상이 되는 날이니까요~”


 꼬마 아이의 목소리는 모카의 마음을 자꾸만 때렸다. 그게 아프지는 않지만, 저의 심장 소리를 더욱 크게 만들 목소리였다. 친숙한 광경과, 그 풍경 속엔 어우러질 수 없는 자신.


 “포인트 카드, 있으신가요?”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변한 계절과 서로 장난치며 놀았던 시절이 저를 괴롭혔다. 


 “어, 없어요. 만들어주세요.”


 아까까지의 벅참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이들은 몇 뼘이나 큰 저를 그리 쉽게도 무너트렸다.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시선은 자꾸만 뿌옇게 변했다. 아까와는 달리, 얼굴은 비구름을 만난 것 마냥 빗방울이 떨어졌다.   


 “언니, 왜 울어?”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히 있던 다른 꼬마 아이가, 조심스런 손길로 모카의 교복자락을 잡아 당겼다. 모카는 일자머리를 한, 그리고 단정한 개량 기모노를 입은 어린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의 얼굴은 걱정으로 물든 채였다.  


 역시나, 기억속에 존재하는 얼굴들이었다. 


 “너희들은, 왜 이렇게 정겨운 거야.” 


 그렇게, 모카는 무너졌다. 꼬마 아이가 내민 포인트 카드를, 꼭 다시 와요! 라고 하나마루 표시가 되어 있는 포인트 카드도 받지 못한 채였다. 그토록 마음이 아팠다. 지난 십 수 년의 세월들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가슴은 뻥 뚫려버렸다. 


 신님, 듣고 계세요? 만약, 듣고 계신다면 저에게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저는 그저 당신께 하나만을 바랍니다. 그거 하나를 위해서라면, 전 이 순간의 세월들을 모두 버릴 수 있어요. 


 그러니 바라건대, 저의 시간 속에서 뺏어간 것을 돌려주세요. 저는 그거 하나면 돼요.

 


 모카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쓰러져 갔을 때, 그녀의 귓가로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구름은 먹구름. 하늘에는 번개 꽝. 그런데도 주변의 시간들은 모두 멈춰버렸다. 아이들의 시간도, 무언가를 느끼고 떠나가려던 비둘기들도, 산책 나온 강아지와 아가씨도 모두 굳어버렸다. 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오직 아오바 모카, 단 한 사람뿐이었다. 


 으스스한 한기에, 모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저가 그리워한 얼굴이 떡하니 존재했다. 고양이와 같은 눈매와 타오를 것처럼 붉은 브릿지. 그녀는 하얗고 고른 치열을 드러낸 채 하늘에 떠 있었다. 


 둥둥, 마치 저가 이 세계에 존재한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신님?”


 쓰러지기 직전 찾은 존재가 신이었기에, 모카는 그 호칭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신이 아니란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은 옷은 신이 입을 복장은 아니었고, 엄밀히 말하면 죄인을 다루는 간수의 모습과 가까웠다. 채찍을 든 것마저도 그런 생각을 부추겼다.


 “아냐.”


 모카에겐 불행하게도, 그녀는 모카의 말을 부정했다. 모카의 표정이 절망감에 물들자, 그녀의 입매에 담긴 웃음은 더욱 진하게 변했다. 


 “나는 악마다.”


 그녀는 자신을 악마라고 말했다. 




 악마는 망사 스타킹을 신었다. 모카는 공허한 눈동자로, 흡사 귀신이 씌인 얼굴로 악마를 바라보았다. 신을 찾았는데, 악마가 나타났다. 정녕 신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살아가는 동안, 나는 헛도는 쳇바퀴를 계속 돌아야 하는 걸까.

 

 그건 싫어. 이대로, 이대로 그런 공허함과 함께 살아가고 싶지 않아. 설령, 지금 내 앞에 존재한 게 신이 아니라도 관계없어. 


 당신이 나를 구해줄 수 있다면, 그리고 기억 속의 그 아이도 만나게 해준다면.  


 “당신이 신이든, 악마든, 뭐든 상관없어요.”


 모카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리고 땅위에 바싹 엎드렸다. 저의 이마가 땅에 닿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불편하게 팔을 폈다. 머리가 흐트러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자세엔 변함이 없었다. 모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저가 할 수 있는 최고로 굴종적인 자세였다.   


 “부디, 제 안에 존재했던 평소대로를 돌려주세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악마는 저의 입 꼬리에 그 누구보다 진한 미소를 매달았다. 



  X X X 


 악마의 채찍 소리가 땅에서 들려올 때, 그제야 아오바 모카는 눈을 뜰 수 있었다. 극히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와 그에 반해 미동도 없는 악마의 눈동자. 


 “고개를 들라, 그대여.”


 익숙하면서도, 기억에 희미한 모습을 한 악마는 모카를 바라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카는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모습을 그제야 눈에 담는다. 


 분명 처음 보는 모습일진대, 마치 데자뷰라도 느끼는 것 마냥 친숙한 모습을 띈 악마.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모카는 황급히 재킷 소매로 닦아 내렸다. 뿌옇게 변하려 했던 시야가, 와이퍼를 만난 차창처럼 훤히 변했다. 


 “그대는 나에게 빚진 것이 없을 터인데, 왜 그대는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가?”


 모카는 공허한 눈으로 악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이형의 존재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제가 당신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혹여나 존칭을 원할까 싶어 모카는 먼저 악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허공에 기댄 악마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모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편히 부르라.”


 내린 채찍을 거두며, 악마는 말했다. 여유로움마저 느껴지는 몸짓에, 모카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 대신이랄까, 꿇어버린 무릎은 여전하지만.


 “악마인 당신은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행여나 혀를 깨물어버릴까, 그것도 아니라면 말을 더듬을까. 그 모든 가능성을 제하고 싶어, 모카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힘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


 그에 흥미가 돋았는지, 심드렁한 시선이지만 악마는 귀를 쫑긋 세워 모카를 보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긴 하지만, 꽤나 당돌하고 똑똑한 아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은커녕 도망치기에 바빴을 텐데. 그만큼 절박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악마께서는, 왜 저의 부름에 응답하셨는지요?”


 과연, 듣던 대로다. 


 “무언가를 알고 있기에, 당신이 나의 부름에 응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모카의 주먹이 말려 들어갔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의 흰 손만이 쥐어진 힘으로 빨갛게 변했다. 몇 년간 친 기타로 굳은살이 생기지 않았다면, 피가 쭉 흘려 내렸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이내 악마의 시선에도 들어왔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구나.”


 악마는 팔짱을 끼었다. 저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꿇어앉은 여자 아이, 그 아이의 입에서 퍽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나왔다. 정확히는 저를 향해 흥정하려는 말 속내가 보여 재밌다.  


 “당신이 어떠한 악마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인간이 기록한 수많은 기록물들과 전승들과 설화들. 그 사이에서, 지금 저의 앞에 있는 악마가 어떤 악마인지, 모카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악마를, 기억 속에서 엮일 수 있는 공통점을.


 “내기를 좋아하시지요.”


 그대로 말해버렸다.


 “만약 당신이 진짜 악마라면, 이야기 속 악마들처럼 그렇겠지요.”


 악마의 권태로운 표정이, 그때 살짝 깨졌다. 모카는 조심스레 입 꼬리를 올렸다. 


 사탄이 하나님에게 욥의 일로 내기를 걸었듯, 메피스토 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내기를 걸었듯, 모든 악마들은 유희와 오락, 그리고 내기를 사랑해 마지않는다. 


 “우리, 내기를 해요.”


 눈은 불안하지만, 입은 웃고 있어 묘하게 불안한 웃음이 완성되었다. 악마는 모카를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 뼘, 또 한 뼘. 악마는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할 뻔했지만, 마치 주박에 걸린 것 마냥 피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모카는 악마의 얼굴을 조금 더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이렇게 바라보니, 조금 더 아는 누군가와 닮은 느낌이 든다. 아련하면서도, 안타까운, 누군가와 참 많이도 닮았다. 그 사람의 얼굴을 더 쉬이 떠올릴 수 없다는 점이, 참으로 아쉬웠다. 


 “요즘엔 보기 드문 아이구나.” 


 악마는 모카에게 색다른 감흥을 느꼈다. 저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있었으나, 그것이 피하려는 발걸음으론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는 지금도 떨려왔으나, 꽂혀버린 눈길은 저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여지껏 살아가며, 이러한 눈을가진 사람을 악마는 수십 번 보았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간 보통 내기가 아니었다. 진짜 비범한 사람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진짜 바보거나. 


 악마가 바라본 소녀는 두 부류 중 전자의 느낌과 가까워보였다. 그리고 전자의 사람들은 언제나 악마에게 지고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수년, 수십년, 수백년을 회상해도 질리지 않을, 지고의 쾌락을.  


 “좋다.”


 계약자 아오바 모카가 저에게 다시 즐거움을 되돌려주길 간절히 원하며, 악마는 그렇게 검은 장갑을 뺀 저의 흰 검지로 모카의 이마를 살며시 두드렸다. 


 “너의 세계를, 돌려주마.”


 악마의 목소리와 함께, 모카의 시야에서 붉은 하늘이 멀어졌다. 쿵, 하고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땅으로 맞닿아버린다는 감각과 동시에, 땅이 꺼졌다는 감각이 모카를 덮쳤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러자 이번에 그곳은 물로 변했다. 더 정확히는 물로 채워진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시간의 파도에 갇혀 힘이 거웠으나, 숨은 멀쩡히 쉴 수 있었다. 


 하늘도, 물도 아닌 공간 속에서 아오바 모카는 그저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론가, 어딘가로 떨어지고 있었다. 모카는 두 손을 위로 벌린 채, 하늘이었던 공간을 눈에 새겼다. 점점 작아지는 하늘의 붉은 조각, 그리고 이윽고 그 구멍은 땅의 움직임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걸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내 들린 풍덩 소리에 그녀도 정신을 차렸다.


 ‘...란, 미타케 란.’ 


 지금 목소리, 누구? 미타케 란이 누구야?


 ‘우리 집이 화도 집안... 이니까.’


 화도? 집안?


 ‘꽃을 예쁘게 장식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화도에서 유명한 사람이야.’


 란, 화도, 아저씨. 미타케 家. 어딘가 익숙한 키워드들. 왜? 왜 넷 사이에 네가 끼어 있는 거야? 나는, 잘 모르겠어, 란을,


 ‘응....! 앞으로도 쭉 친구야.’


 친구. 어딜 가든 바늘과 실, 하늘과 구름처럼 항상 함께했던 넷. 아니, 넷 더하기 일? 모르겠어, 더 있었어? 왜 기억이 안 나지? 더 선명해질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기억해보면...


 ‘다들 란이 기운 없다고 걱정하고 있어, 물론 나도.’ 


 내 목소리? 란을, 란을 아는 거야? 지금의 난 전혀 란을 알 수 없는데. 옛날의 나는 어떻게 아는 거야? 어째서?


 ‘...반이 바뀐 거랑은, 상관없어.’ 


 옛날과는 달리 조금 귀염성이 사라진 목소리. 쓸쓸하게 들려, 아니, 이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존재해. 지금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을 거야, 그렇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한 거라구?’


 ‘그렇긴 한데, 그렇게 말하니까... 완전 쪽팔린데...“


 ‘아니, 아니, 좋은 시야. 이거. 나는 국어를 잘 하니까.’


 시? 이런 게 왜? 란은 시를 쓰는 사람이야? 중학생인데? 아니야, 란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뭔가. 비슷하지만 다른 거. 뭔가 다른 거야. 그래, 이 시를 듣고 난 란을 도와주고 싶었어. 


 항상 옆에 있는 건 나였는데 정작 나한텐 말도 안 해주고. 그게 섭섭했었어, 나는. 


 ‘상관없잖아~ 망상 정도는 마음껏 하게 해달라고~ 히마리 밴드!’


 히짱? 히짱도 란을 알고 있는 거야? 어떻게?


 ‘히~짱 밴드라~ 그럼 내가 기타 칠까?’  


 조용히 해, 너. 머리가 꽝꽝 울리잖아. 지금은 다른 사람 목소리부터 좀.


 ‘그럼 난 전통식 큰 북을 칠 줄 아니까 드럼인가?’ 


 토모찡도 란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근데 왜 나만 기억에 없었지? 도대체 왜?


 ‘밴드.... 밴드, 하자!’


 밴드. 기다렸다는 듯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츠구?


 ‘밴드 하자! 응, 무조건 밴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밴드, 우리 그런 걸 했었어? 란이랑 같이? 왜 기억에 없는데, 그게. 나는 왜. 


 ‘찬성~ 작사란 사람이 노래를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넌 좀 까먹었으면 닥치고 있으라고, 제발 잠깐만 조용히 좀 해봐. 순식간에 너무 많은 게 들어와서, 깨질 것 같아.


 ‘저...... 얘들아, 그러니까.... 걱정해줘서 고마워.’


 웃었다. 란이 웃으니 조금 기뻐. 왜지? 왜 그런 거야? 조금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어. 나는 란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어렸을 때 모두와 놀이터 미끄럼틀에 올라가서 불곤 했던 비눗방울. 하나, 하나, 추억을 담은 둥그런 기억방울들. 


 ‘따, 딱히 무서워한 게 아니거든!’


 그렇게 놀릴 생각은 없었는데, 란은 어두운 공간을 참 싫어했어. 그게 재밌어서, 그때 은근 많이 건드렸었지. 


 ‘밤하늘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그... 가끔은 평소와 다른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우리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애프터글로우가 남의 곡을 만들어주면서 한 수 배운 적도 있었어. 그때, 참 즐거웠는데. 밤하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별이 밝아서, 즐거웠었어.  


 ‘알았지, 모두 아직 보면 안 된다!’


 모두와 함께 봤던 바다도.


 ‘난 만화는 남한테 빌려 읽는 정도니까, 어떤 이야기가 좋은지 잘 몰라.’


 만화책 한 권으로 밤이 다 될 때까지 떠든 기억들도.


 ‘해돋이와 석양은 닮았네. 뭐,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모두와 부딪히고, 깨지고, 그걸 다시 극복해낸 기억들도 모두 소중한데.


 ‘이제부터 아침이 되고 점심이 오고 석양이 지고, 밤이 된다.’


 ‘밤이 오면 또 해가 뜨고 아침이 돼~’


 ‘이어져 있구나, 전부’


 ‘우리의 평소대로도 하늘과 같은 걸지도 몰라.’


 모두와 아침 해를 바라보며 했던 이야기. 미안, 란. 그 평소대로를 까맣게 잊고 있었어. 


 산책할까, 오랜만에. 저, 모카. 만약 내일 죽는다면, 모카는 어떡할 거야? 자, 이거. 거짓말이 아냐. 죽는 게 아니잖아. 있지, 나. 널 살렸으니 여한은 없어. 네가 죽었을 때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두려웠어. 네가 없을 내일이 싫고, 네가 없는 과거만 그리워하며 살았는데. 그래서 내일이 오지 말라고 빌었을 때, 나는 기회를 얻게 된 거야. 널 구할 기회를. 그래서 난 여한이 없어. 설령 모두에게 잊힌다 해도. 


 ‘잊지 않을 거야, 란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항상 잘 담아둘 거야.’


 개씨발, 좆 까지마. 다 까먹었으면서, 란이 나를 위해 했던 일을, 혼자 삼켜야 했을 아픔을. 넌 그걸 다 잊은 채 십 몇 년간 살아왔잖아. 심지어, 란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주제에.  


 ‘네가 만약 날 기억하게 된다면, 그 아픔에 널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뭐가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넌 왜 미안해해야 하는데, 응? 말해줘. 란. 다시 나에게 찾아와서 말해줘, 란.  


 ‘또 봐.’


 그렇게 말했잖아. 


 X X X 



 혼자만의 밤은 더욱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술에 취했을 때의 밤이라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은 밤이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원치 않는 악몽을 꿨을 때. 


 “란!”


 팔을 허우적거리며 그녀는 잠에서 깼다. 아오바 모카는 갑갑하게 느껴지는 숨을 그대로 몰아쉬었다. 입었던 잠옷의 등판이 땀으로 푹 젖어버렸다. 쥐어지지 않는 주먹에 힘을 주고, 모카는 솟아오르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역시, 모르는 척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입술을 깨물고 바라본 허공엔 란이 둥둥 떠 있다. 정확히는 란의 모습을 한 ‘악마’가. 


 “기억은 되찾았는가?”


 망사 스타킹을 신은 악마는 모카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레 물었다. 악마의 그 질문에, 모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와 나는 이미 이어진 채, 그대의 세계를 돌려주었으니 그대도 마땅히 할 일을 해야할 터.”


 악마는 채찍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모카의 시선에 저의 시선을 덧대었다. 세계를 잠깐 비틀었을 뿐인데, 이리 재밌는 감정을 저에게 보여주다니.


 역시나, 인간은 재밌다. 


 “그대의 친우인 미타케 란은, 네가 운명을 바꿔 돌아와 쓸모없어진 공양 기도를 오늘 막 시작하려는 중에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이 된 란괴 악마의 계약. 그 시작의 날이 악마는 오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걸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이 이제 살아 돌아왔기에, 그러한 계약은 파기하고 저와의 계약만 남겨두기를 바랐다. 


 “그러면 재미가 없지.”


 그러나 악마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미타케 란이 맺은 계약은 죽음의 결과로 유지된다. 그리고 그대, 아오바 모카의 계약은 나와 함께 새로 맺어지는 것이지.”


 악마는 조곤조곤 자신의 뜻을 말하기 시작한다. 짜둔 판이 더욱 커지게끔, 그리고 이어진 붉은 실이 수어 번 꼬이게끔. 


 “미타케 란에게 겨눠진 사신의 낫이, 너에게로 다시 돌아가게끔 말이다.” 


 악마는 그렇게 말했다.


 “쉽게 설명해주자면, 그대는 그대를 구하려는 그대의 친구를 구해주면 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미타케 란이 그랬듯이.”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그 사실이 아프고, 안타깝고, 서글프게 느껴지지만. 


 “자, 쉽지 않은가?”


 만약 결국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위대한 어둠의 존재를 뵙습니다.”


 역시, 그건 내가 되는 게 옳다. 


 “나, 아오바 모카는 당신에게 계약을 청해, 당신이 내린 칠흑의 청탁을 받들겠습니다.”


 이번엔 내가 널 구해줄 차례니까, 란을.


 “호방해서 좋구나.” 


 란의 모습을 한 악마가 마치 란처럼 웃어보였다. 새하얀 이가 보이게끔, 그리고 눈 꼬리가 살짝 접혀 들어가게끔. 그 모습이 진짜 란 같아서, 모카도 소름이 오독 돋았다.  


 “너의 뜻대로 계약은 성립되었다.”


 악마의 입 꼬리가 가증스레 더욱 올라갔다. 그 모습이 보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한 것 같은... 그런 애매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모카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이런 모습인데도, 그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구나.”


 악마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의 나래에 빠져 그 이유를 미처 알지 못했지만.


 “당연하죠.”


 아오바 모카는 이미 그 이유를 마음속에서 새기고 있었다. 수 번,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다시는 미타케 란의 이름을 잊지 않고, 지난 십 수 년간의 세월이 억울하지 않도록.  


 “란은 그런 말 안 하니까요.”


 게임은 이미, 시작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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