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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단편] 찐따는 손가락으로 복수한다. 1/3 [이지메 요소 있음]

후구후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8 19:40:46
조회 1625 추천 45 댓글 9
														

 0.


 학교 폭력이나 이지메를 다소 진지하지 않게 다루고 있습니다.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려요.



 1.


 어느 날, 유튜브에 영상 하나가 업로드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개인 계정, 심지어 그저 검은 화면에 노래만 흐르는 영상 단 하나. 『Missing In Action』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어 보컬 곡으로, 소개문조차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정말 기적적인 우연으로 이 곡을 만난 사람들은, 떠나 버린 연인을 그리워하는 여성 보컬의 아름답고 애절한 목소리에 영혼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아무리 명곡일지라도 유튜브의 바다는 너무 넓다. 업로드 후 3개월이 지날 때까지 이 영상의 조회수는 1만을 간신히 넘길 뿐이었다.

 그러나 주머니 속 송곳은 반드시 삐져나오는 법이고, 이 곡에 영혼을 빼앗긴 몇몇 청취자들은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이 곡이 갑자기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어떤 인터넷 방송의 BJ가 소개하면서부터. 그때부터 영상의 인기는 폭증, Grace라는 이름만 달랑 달아 둔 업로더에 대한 호기심까지 포함되어 엄청난 화제를 불렀다.

 업로드 후 6개월 시점에서 해당 영상의 조회수는 10억. 『강남 스타일』의 조회수가 36억을 넘긴 지금, 10억 뷰라는 게 그렇게까지 보기 어려운 숫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만만한 숫자도 아니다. 순수한 보컬만으로 이 숫자를 기록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만큼 노래의 힘이 강력하다는 의견과 어딘가의 엄청나게 공 들인 홍보가 아니냐는 의견이 충돌했다. 그리고 그 논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영상의 조회수는 올라만 갔다.


 이 시점까지 미아(21세, 백합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는 이렇다 할 생각이 없었다. 정말이지 매료될 만큼 아름답고 안타까운 노래였고, 그걸 들을 수 있었으니 홍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는 정도 생각이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빨리 어디서 픽업해 가서 다른 곡도 발표시키라는 정도였다. 서글픈 거 말고 행복한 걸로.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서 곤란했기 때문에.


 연예 프로들을 통해 해당 영상의 업로더가 음반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 업로드 후 딱 7개월이 지난 날, Grace의 계정에 두 번째 영상이 올라왔다.

 모 유명 기획사에서 음반을 내기로 하였다, 보내 주신 관심에 대해 대단히 감사드린다는 짤막한 소개 다음에 한국어 가사로 된 『Missing In Action』이 흘러나왔다. 설명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그 기획사의 링크가 걸려 있었고, 그곳은 Grace의 데뷔 음반 예약 페이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연히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데뷔 이전에 이미 유튜브 조회수 10억을 넘긴 신인이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예약 페이지가 5분 만에 폭파, 10분 후에 복구했지만 3분 만에 다시 폭파, 결국 그날 여섯 번이나 폭파되었다.

 두 번째 영상의 조회수가 며칠 만에 1억을 넘겼다거나, Grace가 전곡의 작사·작곡·보컬을 했을 뿐더러 부클릿 디자인까지 맡았다거나, 부클릿 페이지 샘플에서 살짝 보인 Grace의 흐릿한 옆얼굴이 암시하는 범상치 않은 미모 등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미아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공개된 Grace의 사진은 누군가를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흐릿했지만 미아는 그게 누구인지 잘 알았다. 지금도 잘 때면 심심찮게 꿈에 나오니까.

 믿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걔’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고? 그것도 이렇게 잘 부른다고?

 엄청나게 짜증이 나기도 했다. 결국 이건 굉장히 공들인 홍보가 맞았던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서, 그 노래에 감동해서 몇십 번이고 울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참기 어려웠다. 이전 영상에 달았던 추천 댓글 같은 거 다 지웠지만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Grace의 두 번째 영상에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댓글을 써 갈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이거 다 조작이에요.

 백붕 그룹이 밀어주는데 조회수 10억쯤이야 껌이지.

 2015~2017년에 연화고 다닌 애들은 미친엘사라고 하면 다 알걸요? 맨날 애 패고 돌아다니던 일진 년이 청순가련한 척은 다하니까 너무 역겹네요.」


 그렇게 댓글을 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대로 인터넷 창을 닫고 자러 갔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TV를 켰더니 「Grace 학폭 의혹?!」이라며 일약 화제가 되어 있었다. 미아 자신이 단 댓글이 TV에 그대로 클로즈업 되고 앵커가 진지한 목소리로 받아 읽었다. 아니 무슨 댓글 하나가 TV에까지 나오냐고 얼어붙었는데, 음반이 나온다는 기획사 관계자와의 전화 통화가 이어졌다.


 《아, 네. 저희도 보고 사실 확인 중인 내용이고요…. 루머나 말도 안 되는 음해에 대해서는 민형사를 포함해 강력하게 대처를….》

 《댓글 중에 국내 최고의 대기업 이름이 언급되는데 Grace와 정말 무슨 관련이 있나요?》

 《그거는 저희가 사실 확인을….》


 어이없어하며 컴퓨터를 켰다. 유튜브에 들어갔더니 어제 자신이 쓴 댓글에 대댓글이 못해도 수천 건은 달려 있었다. 그 대부분이 ‘무슨 개소리냐 시발아 증거 대라 지금 몇 시간째인데 증거 못 대는 거 보니까 개구라네 개구라야 꼭 세상에 이렇게 남 잘되는 거 못 참는 것들이 있어요’ 같은 식이었기 때문에 머리로 피가 팍 쏠렸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계속해서 심호흡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미아는 버리고 싶었지만 부모님 반대로 못 버린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끄집어냈다.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넘겨 3학년 6반을 찾았다. 모두 똑같이 못생겨 보이는 것만이 장점인 앨범에서 유일하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소녀를 찾아 폰카로 찍었다.

 유튜브에 다시 댓글을 달았다.


 「여기 증거 있다.

 연화고 3학년 6반 안은혜. 이년 백붕그룹 회장 증손녀야 병신들아.」


 이번에는 브라우저 창을 곧장 닫지 않고 10초마다 한 번씩 대댓글을 확인했다. ‘???’ 일색이던 대댓글들이 점차 ‘어? 진짠가? 비슷해 보이는데?’나 ‘백붕그룹 증손녀가 몇 푼이나 번다고 이딴 걸 하겠냐?’ 등으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아니 그래서 Grace가 저 사람이라고 치고, 일진이라는 증거를 대라니까? 루머나 음해에 강경 대처한다는 소리 못 봤음?’이라는 대댓글이 있었다.

 “내가 증거다 병신들아!”라고 모니터 앞에서 외치긴 했지만 그걸 쓰면 자기가 누군지 특정되어 버리니까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은혜가 한 짓을 폭로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대댓글 하나에 시선이 못 박혔다.

 ‘야, 일단 얘가 연화고 졸업생은 맞나 본데? 아이디로 찾아보니까….’ 하면서 자신이 인터넷에 쓴 글을 추적하는 글이 올라왔다. 오싹해진 미아는 곧장 자신이 쓴 댓글을 지우고, 대댓글에 달린 자기가 이전에 쓴 글, 그리고 그 외에도 생각나는 모든 글들을 다 지웠다.

 식은땀을 흘리며 브라우저 창을 닫았다. 자신이 방금까지 한 일을 엄청나게 후회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 겨우 3년 안 봤다고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봐!


 ───────────────


 꼬박 이틀 동안, 미아는 모든 외부 매체를 차단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폰도 꺼 놓았다. 당장이라도 백붕 기업의 SS(경호원인 척하는 살인 머신. 강함)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백붕 기업의 고문실(지하 7층까지 있음. 엘리베이터는 없고 에스컬레이터만 있음)에 끌고 갈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아는 겨우 외부 반응을 확인할 용기가 생겼다. 떨리는 손으로 폰을 켜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온 기록이 하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잔뜩 긴장해서 전화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는 딱히 용건이 있어서 전화한 게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에 “근데 너 그거 봤니? 그레이스인가 하는 그 가수, 네 친구인 은혜래!”라는 말을 해서, “걔가 왜 내 친구야?!” 하고 미아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는 딱히 아무 연락도 없어서, 뭔가 긴장해서 손해 봤다는 느낌이었다.

 다소 안심하며 인터넷을 확인해 보자 난리가 나 있었다. 미아에 대한 것은 아니고, 미아가 폭로한 내용 중 은혜가 백붕그룹 회장의 증손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본래 밝힐 예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 폭로가 사실임을 기획사에서 확인해 준 것이다.

 그것도 Grace의 앨범을 먼저 확인해 볼 수 있는 미니 라이브라는 형식으로. 연예 관련 기자, 음악 평론가 등을 초대하여 간단한 질의응답 시간을 보낸 후 앨범에 수록될 네 곡을 연달아 불렀다. 이 과정은 모두 생중계가 되었다. 미아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 생중계 영상을 확인했다.

 실시간 댓글로 보는 질의응답 시간의 분위기는 그다지 재미있진 않았다. 자식이 귀한 백붕 그룹 회장의 장증손녀다 보니 기자들 중에서는 얼굴을 파악하고 간 사람도 적지 않아서, 직접 얼굴을 드러낸 시점에서 이미 은혜의 위치는 확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초기 반응은 대부분 은혜의 미모를 찬탄하는 것이었지만, ‘뭐야 진짜네?’, ‘백붕 그룹 귀하신 분이 뭐 하러 스텔스 마케팅씩이나 하고 그러셔?’ 하고 비아냥대는 반응도 제법 있었다. 초기부터 있었던 ‘공들인 마케팅’ 설에 힘을 주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갑작스럽게 준비했다고는 절대 볼 수 없는 깔끔한 음향·중계 시스템도 그 의견에 한몫했고.

 하지만 질의응답이 끝나고 미니 라이브를 시작하자 반응이 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은혜에게 비판적일 사람, 즉 미아조차도 감격할 것만 같아서 필사적으로 영상을 스킵해야만 했으니까. 이런 식의 ‘홍보 아닌 척하는 홍보’에 질색하는 사람들조차 라이브가 끝날 때는 ‘뭐 홍보 안 해도 잘 팔렸겠구만 왜 그랬어?’로 태세를 전환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악질 루머 퍼트리고 사라진 어떤 년’에 대한 코멘트도 있었다. 미아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그 어조는 다소 동정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시발 얼굴 이뻐 노래도 잘해 작사작곡도 잘해 루나티타늄 수저야…. 디스 좀 할 수도 있지 시발. 이딴 년이 인성까지 좋으면 우주의 균형이 안 맞는 거 아니냐거.」


 동의하는 코멘트가 여럿 있었다. 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 그냥 그런 걸로 하자고 생각했다. 은혜는 미아가 미워하기에도 너무 먼 곳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라이브가 끝나고 발표회를 마치기 직전에, 뜻밖의 해프닝이 있었다. 기자 누군가가 인사를 하고 무대를 뜨려는 은혜를 향해 크게 소리쳐 질문한 것이다.


 “그레… 안은혜 씨! 인터넷에 학창 시절에 폭력을 휘둘렀다는 폭로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요, 혹시 진위 여부에 대해 코멘트해 주실 수 없습니까?”


 돌발적인 질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기획사 사람들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해지는데 은혜는 조용히 돌아서서 카메라를 향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짓고 있던 업무적인 웃음이 사라지고, 미아가 잘 아는 옛 표정으로 돌아왔다. 미친엘사라고 불리던 시절의,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평범한 학창 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모범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은 없습니다. 그런 주장을 할 거라면, 익명에 숨지 말고 직접 나와서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네요.”


 가장 먼저 놀란 것은 말투였다. 언제나 냉랭한 어조로 짤막한 말 밖에 못하던 은혜가 저렇게 멀쩡하고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줄이야.

 다음에는 그 내용에 놀랐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다니. 고개를 꾸벅하고서는 몸을 돌려 사라지는 은혜가 너무 당당해서, 순간 미아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뻔했다.


 ───────────────


 그 발표회 이후 학원폭력 이야기는(원래도 그렇게 힘이 있진 않았지만) 쏙 들어가고 말았다. 매스컴은 은혜가 고교 3년 내내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거나, 현재는 해외 유명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 중이라든가, 음악은 완전히 독학한 것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끄집어냈다.

 발표회 마지막에 보인 모습에 대해서도 ‘얼토당토않은 디스에 빡쳤구나’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뒤에 백붕 그룹 있는데 대가리에 총 맞은 게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나서겠냐?’라는 태클을 거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극소수였다.

 그리고 대가리에 총 맞을 각오를 한 미아는 고교 3년 동안 만들어 두었던 자료가 든 USB를 책상 서랍 아래 비밀 공간에서 끄집어냈다. 당시에는 용기가 없어서, 그리고 이후에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묻어 두었던 자료였다.

 PC에 연결하고 드라이브를 열자, 수백 장의 사진 파일과 엑셀 시트가 나타났다. 미아는 그걸 참고하여 고교 3년에 걸쳐 은혜에게 당한 이지메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저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안은혜와 안은혜가 이끄는 친구 그룹에게 폭력과 추행을 포함한 이지메를 당했습니다. 주동자는 안은혜, 실행자는…」.



 2.


 고등학교 1학년, 미아는 은혜와 처음 만났다.

 입학식을 끝마치고 교실에서 은혜를 처음 만났을 때는 누구나 그렇듯이 그 미모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동갑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성숙한 모습, 오싹할 만큼 희고 깨끗한 피부, 조용하고 우아한 태도, 그리고 감정을 일절 느낄 수 없는 시선과 표정.

 은혜는 그때부터 안데르센 동화 『눈의 여왕』이 떠오르는 소녀였다.


 “와, 미친엘사가 우리 반이네?”


 어깨를 꾹 눌러오는 익숙한 감촉에 미아는 간신히 자신을 되찾았다. 말을 걸어온 상대는 수인. 중학교 시절부터의 악연이라고 하면 악연이었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진짜로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였다.

 수인 앞에서 미아는 ‘말해’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게 아픈 꼴을 가장 덜 당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러나 방금 들려온 말에는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친엘사?”

 “보면 알걸.”


 수인의 말대로였다.

 학교에서 은혜는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존재였다. 정오쯤에야 뒤늦게 등교하는 게 일상다반사, 아무렇지도 않게 결석하는 일도 흔했다. 수업 시간에도 거의 늘 잠만 잤는데, 한번은 그걸 진지하게 꾸짖은 교사가 다음 주에 사정이 생겼다며 학교를 떠났다. 체육 수업에 참가하는 건 3년 동안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성적은 언제나 전교 수석.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은혜가 백붕 그룹 회장의 장증손녀, 회장이 특히 장손을 아껴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에게 그룹 실권 대부분을 넘기려 하는 이상,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 후보쯤은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그 마법이 성립되는 것을 이해했다.

 현대 사회에서 돈이란 마법이다. 할 수 없는 일이 없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보자. 재계는 물론이고 정계와 법조계 모두를 휘어잡고 있는 대재벌의 힘은 실로 막강했다.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한다. 영화 『겨울 왕국』이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뒤틀어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친엘사’ 역시 미아의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네이밍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미쳤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웠지만.


 적어도 1학년 1학기에는, 수업 도중 은혜의 옆얼굴을 몰래 바라보는 즐거움에 학교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


 수인은 천성적으로 리더를 하게 되어 있는 아이였다. 훤칠한 키와 활달한 태도,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빨랐다. 단점은 힘의 우열 관계를 너무 잘 파악하고, 동정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수인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그룹을 만들고, 가장 아래에 미아를 놓았다. 미아를 놀리고 괴롭히는 것은 그 그룹의 가장 일반적인 오락이었으며, 미아가 그 관계를 부정하려고 하면 가차 없이 응징했다.

 수인은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지만 그저 재미를 위해 금품을 상납 받고, 약점을 잡기 위해 물건을 훔치게 했다. 싫다고 반항하던 미아도 두세 번 물건을 훔쳤는데, 수인은 그 광경을 착실히 녹화해 약점으로 잡았다.

 고등학교에 오면서 중학 시절 친구들 대부분과 떨어진 수인도 교우 관계를 재편해야 했는데, 새롭게 만든 그룹에서도 미아를 최하위로 놓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수인의 그룹에 새로 들어온 멤버들은 처음엔 미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수인의 행동을 견본 삼아 미아를 대하는 방법을 익혔다. 자질구레한 뭔가가 필요해지면 때는 자기 발보다 미아의 발을 쓰는 게 편하다거나, 미아를 불러야 할 때는 샤프 머리 부분으로 옆구리를 꾹 찔러 주면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내며 기뻐한다거나, 화가 났을 때는 미아의 허벅지 안쪽에 푸는 게 좋다거나 하는 소소한 지식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미아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은혜만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랐다. 미아의 사정을 알고도 무관심한 것, 미아의 사정을 알고 동정해 주는 것, 어느 쪽도 견디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불행은 상상을 초월해서 온다.


 그건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 미아는 죽고 싶은 기분으로 집을 나서야만 했다. 며칠 전 수인의 집에 끌려가서 강제로 염색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재미삼아 골라 온 애쉬 블루로 염색된 머리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러웠다. 딸이 날라리가 되었다고 기겁한 엄마가 당장 원래대로 되돌리라고 강권했지만, 수인에게 방학 끝날 때까진 이렇게 있으라는 말을 들은 미아는 싫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내 집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수인 패거리에게 호출을 받은 오늘은 외출해야만 했다. 머리를 어떻게든 감춰 보고 싶었지만, 특이한 색깔의 머리카락은 모양을 어떻게 해도 눈길을 끌 뿐이다. 타인의 시선이 쏠리는 건 막을 수 없으니, 고개를 푹 숙여 땅만 보면서 남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팔을 붙잡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다.


 “어…? 어? 안은혜?!”

 “…안녕.”


 은혜가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새빨갛게 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미아의 손목을 꼭 붙잡고서.

 미아의 체온도 낮은 편이지만 은혜는 그런 미아조차 놀랄 만큼 체온이 낮아서,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그 손목만이 시원했다. 가능하면 계속 이대로 있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길거리 한복판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미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기, 안녕. 무, 무슨 일이야…?”

 “….”

 “저, 저기, 은혜야…?”

 “…어디 가?”

 “아, 응…. 수인이랑 만나기로 해서….”


 은혜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미아를 잡은 손을 그대로 잡아끌어 차도로 향했다. 어어어 하며 끌려가자 거기에는 뭔가 중후해 보이는 차가 정차되어 있고, 한여름인데도 검은 양복 정장을 입은 여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혜는 미아를 차 안으로 밀어 넣고는 자신도 탔다. 좌석 시트가 놀라울 만큼 깊고 포근해서 미아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동차 시트라는 게 이런 거였던가…?


 “나도 끼워 줘.”

 “어?”

 “걔랑 만난다면서. 나도 끼워 줘.”

 “어, 어… 저기…. 재, 재미없을 건데….”

 “….”


 은혜는 미아의 말을 무시했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미아는 휴대폰을 꺼내 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가다가 어쩌다 은혜를 만났는데, 혹시 같이 가도 되느냐고.


 《안은혜가 말이지….》

 《여, 역시 좀 그렇지…?》


 제발 싫다고 말해 주기를 빌며 물었다. 은혜를 수인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수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미아의 바람을 무시했다.


 《재밌겠네. 같이 와.》


 수인 패거리에 은혜가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


 은혜는 기본적으로 조용한 아이였다. 어쩌면 미아 이상으로.

 수인 그룹에 들어와서도 이렇다 할 의견을 주장하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수인이 하자는 말에 그대로 따랐다. 다만 은혜에게는 늘 몇 걸음 떨어져 보디가드 언니가 따라다녔고, 이로 인해 수인은 좀처럼 나쁜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이 은혜를 그룹에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돈. 실로 노골적인 이유지만 유흥·향락 비용 때문에 온갖 범죄가 발생한다는 걸 생각하면 웃어넘길 이유도 아니다. 은혜는 씀씀이가 좋았고, 그걸로 뭔가 유세를 부리거나 강하게 주장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수인 역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이는 아니라서 은혜가 호구 잡힌 기분이 들도록 하지는 않도록 조절했다. 은혜가 결석하는 날도 많았기에 그런 날에는 이전처럼 놀기도 했고.

 수인과 친구들은 평소에 노골적으로 미아를 괴롭히지 못하는 만큼을 은혜가 없는 날 풀었고, 다시 말해 은혜가 등교하지 않는 날은 미아가 대놓고 괴롭힘을 당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미아는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눈치 빠른 수인은 미아가 괴롭힘당한다는 사실을 은혜에게 들키는 걸 무서워한다는 걸 금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괴롭힘의 양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같이 뭔가 먹다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꼬집는다거나, 화장실로 불러내어 자칫하면 드러날 만한 곳에 상처를 남긴다거나, 노골적으로 이상한 옷을 입힌다거나.

 당연히, 어떻게 생각해도 은혜가 눈치챌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은혜는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못 본 척했다. 처음 몇 번은 알아채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그저 안심하던 미아도 곧 이상한 걸 깨달았다.

 그리고 결국 알아챘다. 이건 무시, 아니 그보다도 ‘묵인’에 가까운 일임을. 그렇게 깨달은 순간 마음 한구석에 금이 갔다. 그건 은혜에 대한 낙담이 아니었다. ‘어쩌면 은혜가 이걸 막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자신에 대한 낙담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금간 마음이 부서져 날리는 일이 벌어졌다. 원인은 셀카였다.


 수인은 미아에게 셀카를 찍어서 보내도록 요구할 때가 있었다. 주로 뭔가의 사정으로 함께 있지 않을 때 뭘 하나 확인한다는 구실이었지만, 때로는 반라 상태의 다소 야한 셀카를 요구할 때도 있었다. 수인의 괴롭힘 중 미아가 가장 거세게 저항했던 내용이지만, 고1 가을쯤에는 이미 몇 번이고 찍어서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얼굴을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정도를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날은 요구 사항이 좀 달랐다. 상의를 벗고 목에 선물용 리본을 묶으라고 요구하더니, 종이판에 뭔가를 써서 들라고 했다. ‘은혜에게 선물’이라고….

 기겁한 미아가 못 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수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장난치는 거냐며 어서 찍으라고 강요하는 수인에게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묻자, 생각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미친엘사 님께서 네 야한 셀카가 보고 싶으시대잖아.》


 믿을 수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떨어뜨렸다. 기세 좋게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은 뭔가 위치가 좋지 않았는지 화려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모서리가 깨지고 폰의 후면 커버가 덜렁거렸다. 전원을 넣어 보았지만 들어오지 않았다.

 수인이 화낼 게 명백했다. 평소대로였다면 공중전화로 뛰어가거나 부모님의 전화를 빌려서라도 해명을 했으리라. 하지만 너무나 열이 올라 어지러워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기분으로 침대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 자명종이 울었지만 꺼 버리고 계속 잤다. 부모님은 새벽에 일을 나가시는지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당장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진짜로 아팠다.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파서 설령 등교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신이 어느 정도 든 것은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나가자, 인터폰에 수인과 은혜의 모습이 비쳤다.

 당연하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그렇게 되새기며 문을 열자, 수인이 즉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뭔가 잔뜩 든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괜찮아? 또 열 났지?”

 “으, 응….”


 자못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수인에게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폰은 왜 꺼 놓은 거야? 은혜가 엄청 걱정한 거 알아?”

 “아, 저기… 어제 통화하다 실수로 떨어뜨려서… 고장 났어….”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서 부서진 폰을 가져왔다. 수인이 피식하고 웃더니 알았다며 미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화나서 던지기라도 했나 했더니 아닌가 봐? 거짓말 아니겠지?”


 은혜에게 들리지 않게끔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오싹했다. 그러나 정말로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보니까 뭐 제대로 먹은 것도 없지? 죽 만들어 줄 테니까 누워 있어.”


 은혜가 있기 때문인지, 수인은 평소 이상으로 ‘착한 친구’ 모드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주저하는 미아의 손을 잡아끌어 침대에 눕히더니, 은혜를 불러서는 미아가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해 달라는 얘기까지 했다.

 은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리드미컬한 소리는 죽에 넣을 야채를 다지는 소리이리라.

 이 정도 거리라면 들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미아에게 용기를 주었다. 손톱 하나 만큼. 그래도 그걸 필사적으로 두드려 펴서 면적을 늘린 다음, 힘겹게 질문했다.


 “저기… 정말로 내 야한 셀카가 보고 싶다고 했어…?”


 대답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수인에게 들릴까 봐 너무 작게 말했던 걸까. 다시 한 번 말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대답이 들려왔다.


 “…왜. 내겐 안 돼?”


 미아가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냉랭한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은혜는 수인이 미아에게 시키는 일들을 알고 있으며, 그걸 막을 생각도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동조…하고 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티 나지 않게 가짜 웃음을 짓는 법만은 수인을 통해 지나치게 잘 배운 후였다. 어떤 명령을 받아도, 어떤 대우를 당해도 기분 나쁜 티를 내선 안 된다. 용납되는 최대한의 반항은, 수줍어하는 미소와 함께 자신의 무능을 알리고 양해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실상의 읍소까지.


 “…그, 그런 건 아닌데…. 보기 흉할 거…라서….”


 은혜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창백한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그래?”


 그러나 목소리에 내린 한기만은 명백했다. 상대가 수인이었다면 다음 순간엔 몸 어딘가가 격통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미아는 조건반사적으로 대응했다.


 “시… 싫은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잠옷의 단추를 급히 풀었다. 그리고 맨가슴이 덜렁 튀어나온 것에 화들짝 놀랐다. 열을 내며 자느라 갑갑해서 브래지어를 벗어 버렸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그렇게 벗어던진 브래지어가 침대 한쪽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땀 냄새도 확 피어오르는 게 느껴져서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찰칵. 휴대폰 카메라의 촬영음이 났다. 언제 주방에서 왔는지 모를 수인이 휴대폰으로 미아의 사진을 찍은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지르며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는데, 수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서는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화보 급으로 나왔다, 이거.”


 정돈하지 않아 잔뜩 흐트러진 머리에 멍한 표정, 단추가 풀려 있지 않은 파자마 자락이 가슴 절반씩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다. 오후의 햇살이라는 천연 조명에 힘입어 필터 없이도 굉장히 그럴싸하게 나온 사진이었다. 자신이 찍힌 게 아니었다면 화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세미 누드 화보이긴 하겠지만.


 “여자끼리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이거 보내줄까, 은혜야?”


 수인이 휴대폰을 내밀자 은혜는 드물게도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갈래.”


 갑자기 일어서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어?” 하고 수인이 따라나서고, 잠옷 단추를 다시 채운 미아도 뒤를 따랐지만 현관에 나섰을 때는 이미 은혜가 떠나 버린 후였다.

 수인이 피식 하고 웃었다.


 “재밌기도 하지.”

 “응?”

 “넌 몰라도 되는 얘기… 아니지. 너 말야, 물주님을 화나게 하면 어떡해? 옛날처럼 귀여워해 주는 게 좋아?”


 안색이 창백해진 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인은 너무 오랫동안 미아를 귀여워하지 않았다며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는 밀린 만큼을 그날 중으로 채우겠다고 선언했다.

 갓 끓인 죽을 담은 수저는 엄청나게 뜨겁다는 걸, 몸으로 실감한 날이었다.


 ───────────────


 훗날 돌이켜 보면 그날부터 꽤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선 은혜가 수인 그룹에서 주도권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대단한 것을 한 건 아니다. 그저 ‘뭐 하고 놀까?’ 같은 얘기에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뿐.

 그러나 지갑을 쥔 사람의 의견이란 막강할 수밖에 없다.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수인 대신 은혜를 바라보는 경우가 늘어났고, 수인이 뭔가 말을 해도 은혜를 통해 확인을 받는 형태가 되어 갔다.

 수인은 거기에 대해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인을 꽤 길게 알고 지낸 미아 입장에서는 좀 뜻밖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인은 인간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걸 극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럴 수 없는 관계라면 적당히 빠져나오는 솜씨가 능숙했기 때문이다.

 대신 수인은 미아를 괴롭히는 일에 열중했는데, 그 괴롭힘의 방향성 또한 조금씩 변해 갔다. 폭행의 빈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그만큼을 성적 추행이라고 해야 할 것들이 채워 갔다. 이전과 달리 은혜의 앞에서도 대놓고 그랬는데, 은혜는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때로는 수인의 괴롭힘을 노골적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2학년 여름, 해외로 몇 박짜리 여행을 가자는 은혜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을 때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하게 무표정을 깨트린 은혜는 수인을 향해 “설득해.”라고 명령하듯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대놓고 아랫사람 취급하는 태도에 수인의 입가가 경련했다. 미아의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멋대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야,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해.”


 미아는 지옥이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도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기분으로 복종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의 결과를 맞이했다.


 그런 관계가 고교 3년 내내 이어졌다. 3학년이 되었을 즈음 은혜는 학교를 거의 빠지지 않게 되었고, 늘 냉랭하던 표정도 조금씩 풀려 갔다. 학창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미아의 처지 역시, 객관적으로 따지면 이전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었으리라. 언젠가 고발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는 생각으로 정리해 둔 폭행의 기록도 점점 간격이 길어졌다. 미아 자신의 마음만 제외하면, 모두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관계가 확실히 끝난 것은 수능 시험 당일이었다.


 ───────────────


 시험 당일. 늦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서자 은혜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 장소가 같으니 함께 타고 가자는 말에 부모님이 고맙다고 허리를 넙죽 숙였고, 미아는 싫다는 내색을 하지 못하고 차에 탔다.

 새벽길을 유유자적 나아가는 차 안에서, 은혜가 불쑥 질문했다.


 “지망 학교, 못 들었어.”

 “아, 저기… 나는 지망 학교는 없고, 그냥 점수 맞춰서 가야 할 것 같아…. 수시는 안 될 것 같고….”

 “학과는?”

 “문창과…를 가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


 은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인이는 해외에 갈 거라던데.”

 “그런가 봐.”

 “…괜찮아?”

 “응? 뭐, 뭐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수인을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게 미아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괜찮냐니. 물론 괜찮고말고….


 “…학교, 같은 데 가자.”

 “…어?!”


 생각도 못했던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전교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은혜였다. 자세히 물어 본 적은 없지만 수시도 붙어서 수능은 그저 최저 등급을 확보하기 위해 볼 것이다. 미아가 아무리 수능에서 대박을 내도 절대로 같은 학교에 갈 수 없을 텐데?


 “…내가 맞춰서 갈 거야. 문창과, 재밌을 것 같네.”


 미아의 머릿속이 창백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해방될 거라는 게 유일한 믿음이었다. 또 다른 가능성, 언젠가 모아 둔 증거들을 폭로해서 괴롭힌 녀석들이 벌을 받게 만든다…는 계획은 은혜가 합류하면서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 진심이야…?”

 “…………………….”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후에 은혜가 물었다. 이전에도 몇 번쯤 이런 냉랭한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왜. 나랑 같이 있는 건 싫어?”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목소리. 미아는 습관이 된 억지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싫다는 말 한 마디조차 꺼내지 못하다니. 너 같은 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 달라고 토해 버리면 될 텐데.

 수인에게 괴롭힘을 당한 후에, 혹은 괴롭힘을 당하는 도중에, 냉담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은혜의 눈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그런 경험을 다시 해야 한다니 너무나도….

 너무나도…?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은혜와는 시험 보는 교실마저 같았다.

 한 줄 옆, 세 자리 앞. 당당하게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훔쳐보는 사람은 미아만이 아니었다. 이 반에서 시험 치는 아이들은 나중에 정부든 은혜에게든 피해 소송을 걸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수험 전에 이보다 더 마음을 어지럽힐 수는 없을 테니까.

 감독관이 들어오고, 문제지가 배부되었다. 시험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내내 앞을 향하던 은혜가 고개를 돌려 미아를 바라보았다. 작게 움직이는 입 모양. ‘힘내’라고 말한 것 같았다.

 다시금 오한이 찾아왔다.


 안 돼. 어째서 그러는 거야. 왜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거야.

 그러지 마. 냉담한 너에게, 미친엘사라는 웃긴 별명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잘 어울리는 차가운 너에게 따스한 심장이 있는 게 아닐까 망상하게 돼. 같은 학교에 가자는 말이, 너무나도 정감 어린 유혹처럼 느껴져서 견딜 수 없게 돼. 수인이 없어지면, 그 애만 없다면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

 아니, 그것조차 아냐.

 이전 그대로라도 좋으니까, 아니, 더 심해지더라도 좋으니까, 너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어. 네가 있어서 부끄럽고 괴로워서 죽고 싶은데, 그 순간만 지나면 네 옆얼굴에 어쩐지 행복감을 느끼는 멍청한 내가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은혜와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이고 드라이한 판단. 수인조차도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미아에게 관심이 없으리라는 걸 알 수 있겠다. 자신처럼 찍어 누르며 괴롭히면서 즐거워할 누군가를 찾아내겠지만, 억지로 그 관계를 유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은혜가 이상한 말을 했다. 이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자신이 맞춰서 내려오겠다고 말했다. 하기야 대학교의 이름 따위 아무래도 좋을 신분이시죠, 하고 마음속으로 비아냥대 보지만 소용없었다. 그냥 장난 삼아 한 말이겠지 진담일 리 없다는 회의도 무의미했다. 은혜가 그런 장난을 친 적이 없어서? 물론 그랬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은혜가 동정이나 장난 삼아 한 무의미한 말이라고 해도, 거기에 기대고 싶어지는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계속해서 끌려다니기만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든, 누군가의 동정을 사든, 결국 자신은 달라지지 못할 것이다. 수인이나 은혜를 향해, 단 한마디 진심을 내뱉는 것조차 할 수 없으리라.


 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 보는 도중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태에 교실 안 전원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방을 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뭔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휴대폰이 울기 시작해서 그것마저 꺼 버리고 계속 달렸다.


 ───────────────


 이후의 일은 어째서인지 삽화의 연속 같았다. 3년 전은 그리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없을 텐데도 중간중간이 희미하다.

 귀가해서 문을 잠그고 방에 틀어박혔다. 누군가가 힘껏 문을 두드렸지만 무시했다. 30분 정도 후에 어머니가 급히 직장에서 돌아왔다. 은혜를 통해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갑자기 뛰쳐 나온 이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엉엉 울고 있었더니 수험 스트레스인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하고는 안아 주었다. 괜찮다, 내년에 잘하면 된다,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그 위로가 어쩐지 마음 아팠다.

 일주일 동안, 창밖을 내다보면 은혜가 서 있었다. 미아는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졸업장은 부모님이 대신 받아다 주었다. 수능 이후의 결석은 어영부영 없는 것으로 처리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은혜가 몇 번이고 괜찮으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도 같이.

 석 달 만에 휴대폰을 켜려고 했지만 배터리가 부족했다.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고 몇 분 지나 다시 휴대폰을 켰다. 화면에 불이 들어오고 얼마 후, 석 달 치의 알림이 다다다다 떠오르는 걸 보고는 다시 케이블을 뽑았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무서워서 볼 수가 없었다.


 다음 수능에서, 미아는 1지망이던 학교에 당당히 합격하며 그 어렵다는 재수 대박을 터트렸다. 콤플렉스이던 키까지 뒤늦게 크기 시작해,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는데 어째서인지 외모까지 마음에 들게 변했다. 어머니는 애가 뼈만 남았다며 속을 끓이는 것 같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한 초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방법을 잊어서 다소 애를 먹었다. 하지만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걸 그만두고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쓴 결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친구들에게서 미친 년 취급을 받게 되었다.

 나름대로, 적어도 미아 자신의 기준으로는 성공적인 대학교 데뷔라고 할 수 있었다.


 수인에 대해서는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걔를 무서워했던 걸까, 왜 그렇게 저항을 못 했던 걸까 의아해하는 기분을 종종 느낄 뿐이었다. 어려서 저지른 온갖 합리적인 짓들이 돌이켜 보면 이불을 발로 차게 만드는 것처럼.

 그러나 은혜에 대해서는 달랐다. 이따금 꿈에 나왔고, 그때마다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 목이 꽉 메인 채로 꿈에서 깨어야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일상에 묻혀서 아주 가끔만 떠오르는 존재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 시선조차 완전히 흐려져서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존재가 되리라고.

 당장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러나 3년 만에 은혜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에게도 폭력을 휘두른 적 없다는 말로 미아의 속을 날카롭게 후볐다. 웃기지 말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고도 생각했다.


 은혜는, 그 존재만으로도 폭력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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