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서양인은 원래 이렇게 거리감이 없는지 서양사 교수님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 게 유진의 심정이었다.
아침부터 달라붙어 오는, 엘리의 기세 좋은 등장에 유진은 질색하면서 손을 뻗어 다가오는 엘리의 얼굴을 붙잡았다.
엘리의 부드러운 얼굴이 유진의 손에 파묻혔다. 엘리는 유진의 완고한 거절이 퍽 서운한 눈치였다.
“유진은 제가 싫어진 건가요?”
다시는 허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유진이었지만,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의 얼굴을 보자 또 마음이 느슨해졌다.
지금까지 계속해오던 일인데 뭐 어때, 라고 비아냥거리는 생각과 사람들 눈앞에서 이러는 건 역시 부끄럽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유진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무엇보다 먼저 오늘은 엘리에게 따져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인사 너처럼 하는 거 아니라며? 너 땜에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인사? 비쥬, 말하는 건가요? 그건 유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어레인지에요.”
비쥬, 그래 그거. 귀엽게 웃어 오는 엘리가 얄미웠다. 일단은 다가오는 엘리를 저 멀리 치워놓고, 못 마땅한 표정의 유진은 어제의 곤란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
통계학 수업의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해 유진은 카페에 있었다. 랜덤으로 조를 추첨했다는 교수의 말에 서늘한 불안감이 들었는데 역시나, 만난 지 벌써 10분이나 지났지만, 흰색 바탕에 자그마한 커서만이 깜빡이는 한글 파일에는 아직 한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유진은 애꿎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쭉쭉 빨면서 통계학 교수를 저주했다.
빨대를 입에 물고, 유진은 뭐라도 말해보라는 듯 조원들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후배 한 명, 그나마 MT나 새터에서 몇번 본 같은 과 후배인 김혜은이 보였다.
혜은은 아까 ‘선배가 가장 나이가 많으시니까, 선배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는 몇십 분째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싸가지 없는 아이였다. 소싯적의 유진이었으면 분명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을 태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까만 피부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이클이라고 했던가, 카페 소파를 거의 두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거구의 흑인은 눈이 마주치자,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이클은 거의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유진은 한국어도 못 하는데 어떻게 유학을 온 건지 물어보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훑어보고, 노려보아도 유진의 자리에는 고요한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유진은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그냥 집에 가서 나 혼자 할까, 이 새끼들 이름 빼고.’ 라고 반포기에 가까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 유진 조별 과제 중? 잘 되어 가나요?”
거북한 침묵을 깬건 의외의 인물이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리였다.
진정한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난다고 하던가, 갑작스러운 마리의 등장이 너무나도 반가운 유진이었다.
마리는 그야말로 지금의 유진에게 가장 필요한 인물이였다.
“마리, 다행이다 나 좀 도와줘….”
마리는 엘리의 룸메이트였다. 그리고 엘리와 가장 친한 친구이던 유진의 친구이기도 하였다.
엘리와 같은 프랑스인인 마리는 모국어인 불어 말고도 영어와 한국어 모두가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 덕분에 마리는 외국인 교수님이 인터뷰 같은 걸 할 때면, 이따금씩 옆에서 통역을 도와주곤 했다.
그리고 그 통역이야말로, 지금의 유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마리, 나 통역 좀 해줄 수 있을까? 말이 안 통하니까 답답해 미치겠어….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응? 딱 1시간만, 아니 30분 만이라도 좋으니까….”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요, 도와줄게요. 유진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도와야죠.”
유진의 간절한 부탁에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마리였다.
유진은 마리의 손을 꼭 잡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마리는 멋쩍은 듯, 할 일도 없었으니 상관없다며 웃음을 지었다.
마리를 거쳐서 말이 통하기 시작하자, 유진은 마이클이 의외로 말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토리그레시브니 어심토틱이니 어려운 행정학 용어가 마구 흘러나왔지만, 마리는 능숙하게 어려운 단어들을 한국어로 번역해주었다. 자꾸 어려운 용어를 말하는 마이클도 대단했지만, 그걸 척척 해석해주는 마리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조금씩 계획서가 써지기 시작하자, 어느덧 혜은도 끼어들어 왔다.
세 사람의 의견에, 가끔 마리의 의견이 전해지자 텅텅 비어 있던 문서 파일이 순식간에 까맣게 물들어갔다.
본래라면 주제를 정하고, 역할 분담 정도만 하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이건 유진의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였다.
이 정도면 오늘 내로 계획서 초안을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유진, 미안해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유진의 설레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계획서 초안의 완성을 눈앞에 두었지만, 마리가 갑자기 미안한 듯 멋쩍게 웃으면서 말해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는 마리의 말에 유진은 카페 한가운데에 걸려 있던 작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은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 그럼 우리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오늘 정리한 건, 제가 집에 가서 다듬어서 다시 보내드릴게요. PPT는 제가 작성할태니, 두 분은 자료를 찾아주세요.”
마리 없이는 어차피 죽도 밥도 안되니까요,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담아두기로 했다. 유진은 PPT 같은 어려운 일은 차라리 자기가 해버리는 성격이었다. 조금은 귀찮았지만, 한국어도 모르는 마이클이나 무식한 1학년인 혜은에게 맡겼다가는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보노보노야 귀엽기라도 하지, 마이클의 영문 가득한 PPT나, 혜은의 센스없는 PPT를 보며 발표를 하는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꼭 그런 이유 뿐만 아니라, 행정학 특성상 찾아야 할 자료도 방대했다. 오고 간 이야기 속에서 찾아야 할 자료들을 대충 정리해보니 PPT 작성보다 자료 찾는 게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이클과 혜은은 역할 분담에는 큰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주섬주섬, 계획서 초안을 저장하고, 유진은 노트북을 껐다. 마침 마리도 갈 준비를 끝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마리 오늘은 진짜 고마워…. 내일 바쁘면 나중에라도 꼭 점심 살게.”
마리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유진은 역시 마리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솔직히 마리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중에 엘리를 통해서 자리를 잡아보자고 유진은 생각했다.
“그럼, 저 가볼게요, 유진도 조심히 들어가요.”
그렇게 말하며 마리는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얼굴을 가까이했다. 평소에 엘리가 없는 장소에서 마리와 둘만의 교류는 없었기에 잘 몰랐지만, 마리도 작별에는 볼 키스를 하는 모양이었다.
유진은 엘리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볼 키스를 해오는 통에 볼 키스에는 퍽 익숙했다. 엘리는 이상할정도로 볼 키스에 집착하는 아이였다.
마리를 따라서, 유진도 마리의 어깨의 손을 얹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문득 유진은 언젠가 엘리가 자신의 볼에 입술을 맞추며 진짜 친한 친구나, 고마운 사람에게는 비쥬를 하면서 상대방의 뺨에 실제로 자신의 입술을 맞추는 거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배운 것은 그때그때 써먹자, 그게 유진의 지론이었다. 오늘은 마리에게 아주 고마웠던 날이니 실제로 실험해볼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볼의 입술을 맞추는건 역시 부끄러웠지만,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마리가 고향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의 용기는 낼 수 있었다.
“쪽,”
작게, 뺨에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유진은 순간 마리의 몸이 멈칫하는 것을 느꼈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마리의 손이 유진을 작게 밀쳐냈다. 뭔가 실수를 한 거 같아 유진은 조금 불안해졌다.
“어…. 유진, 유진은 한국 사람이라 잘 모르겠지만, 볼 뽀뽀, 비쥬할 때 입술 대는 건, 조금 실례에요. 아니 절대 하면 안 돼요.”
미묘한 표정의 마리는 진지한 목소리였다. 마리는 언뜻 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유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엘리에게 속았다는 분노와 사람들 앞에서 마리에게 뽀뽀를 해버린 수치심이 유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 미…. 미…. 미안, 엘리 걔가 친한 친구끼리는 이래도 된다고 말해서…. 마리 미안해, 기분 나빴지?”
마리의 볼에 자신의 흔적이 남은 거 같아서, 빨간 얼굴의 유진은 옷소매로 마리의 볼을 마구마구 닦았다.
뒤에서 마이클과 혜은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유진을 향해서 모였다.
유진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었다. 아니, 거짓된 정보를 알려준 엘리를 찾아서 혼쭐을 내주고,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아하하, 괜찮아요. 유진. 분명 저도 엘리가 잘못 알려줬다고 생각했어요.”
뻣뻣하게 굳어 버린 유진이 어색해지지 않게, 마리는 다시 볼 키스를 해왔다. 왼쪽 한번 오른쪽 한번, 평범한 볼 키스였다.
볼 키스를 끝낸 마리는 여전히 굳어 있는 유진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떠나갔다. 그런 마리의 뒤를 따라 마이클과 혜은이 유진에게 손바닥을 흔들며 떠나갔다.
유진은 부끄러움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이었다, 일단은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 때까지, 카페 안에서 조금만 버티자고 생각하며, 유진은 카페 테이블에 고개를 엎드려버렸다.
...
“아하하, 왠지 저를 보는 마리의 눈빛이 이상하더니, 어제 그런 판타스틱한 일이 있었군요.”
“판타스틱은 얼어 죽을.”
애초에 네 년 때문이잖아, 유진은 히죽거리는 엘리의 왼뺨을 쭈욱 당겼다.
하얀 피부의 부드러운 뺨이 신기할 정도로 늘어났다.
“아파요, 아파요. 유진. 미안해요, 아 임 소리”
마음 같아선 이대로 강의실까지 늘려버리고 싶었지만, 유진이 일단 엘리의 뺨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엘리는 으으거리며 뺨을 비볐다. 하얀 엘리의 뺨은 그세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유진을 향한 애정이 담긴 어레인지는 사실이라고요?”
“어레인지는 무슨. 하여간 다시는 나한테 비쥬할 생각하지 마.”
“에, 그래도 유진만을 위한 애정표현인데. 유진은 아깝지도 않아요?”
“응, 필요 없어 그런 애정. 그냥 앞으로는 뽀뽀 하지마.”
엘리가 볼에 직접 키스를 해올 때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는지, 엘리가 자신의 앞에서는 왜 마리와 비쥬를 하지 않았는지, 모든 의문이 해결된 유진이었다.
지금껏 자신을 속여온 엘리가 건방져서라도, 유진은 비쥬를 허락해줄 마음이 없었다.
“하여간 이제 그 비, 비…. 비수?”
“Bise에요.”
미묘하게 발음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엘리는 유진의 거절이 영 못마땅한것 처럼 보였다.
“그래, 그 비쥬는 금지야. 오늘부터 인사는 평범하게 해, 손을 흔든다던가”
“한국 사람들은 뭔가 쩨쩨하네요.”
“너희가 이상한 거거든!”
네네, 하면서 엘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유진이 그런 엘리에게 뭐라고 하자, 엘리는 괜히 더 큰 소리로 흥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깟 인사 좀 못하게 했다고 삐진거야?”
엘리의 뾰로통한 표정이 신경 쓰이는 유진이었다. 날씬한 서양 미녀의 스테레오 타입인 엘리가 어울리지 않게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있는 모습은 나름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삐진 티를 팍팍 내는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뇨, 다 제 잘못이죠. 유진은 언제나 옳아요.”
“얘가 진짜 삐졌네."
“이젠 진짜로 Bise 하지 않을게요, 강의에 늦겠네요, 빨리 가죠.”
그렇게 말한 엘리는, 유진이 손을 잡자는 의미로 내민 손이 무색하게도 유진을 혼자 두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인을 잃은 손이 무안해졌다. 유진이 같이 가자고 소리쳐보았지만, 엘리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쟤가 진짜 삐졌나 보네.”
멀어져 가는 엘리의 뒷모습을 보며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렇게 대놓고 삐진틱을 팍팍 내는 엘리의 모습은 처음봤지만, 분명 내일쯤이면 평소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
그 시간 이후로 3일이 지났지만, 엘리는 단 한 번도 볼 키스를 해오지 않았다.
딱히 유진을 피하거나 멀리하는 건 아니었다. 같이 강의실에 가고, 점심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만나고 헤어질 때 볼 키스를 해오지 않았고, 근 3일간은 말수도 줄어들었고 표정도 영 웃지를 않았다.
꼭 필요한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물어오지도, 대답을 해오지도 않았다.
지금도 엘리는 유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몸을 창문 쪽으로 돌려서는 유진이 아닌 창문 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화 좀 풀지.”
“화 안 났거든요”
지금 화내고 있잖아! 유진은 소리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유진의 경험상 이쯤 되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해 오는 게 엘리였다.
유진은 그깟 볼 키스가 이렇게 중요한 건지 의아했다. 별일 아니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엘리의 삐짐은 조금 오래가는 거 같았다.
“알았어, 입술만 안 맞추면, 비쥬인가 그거 해도 되니까. 인제 그만 좀 하자, 답답해 미치겠어.”
입술을 대지 않는 평범한 볼 키스면 유진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엘리에게는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흥,”
심드렁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워대는 엘리의 모습이 얄미웠다.
유진은 지금 당장이라도 금발 사이로 보이는 엘리의 부드럽고 하얀 볼을 당겨버리고만 싶었다. 당기면서 정신 좀 차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유진이었다. 대신 유진은 애꿎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만을 쪽쪽 빨았다.
시계를 보니까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 강의는 불어였다. 분명 오늘은 불어의 쪽지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다음 강의까지 몇 분이나 남았어?”
“유진의 강의를 뭐, 제가 알 수가 있나요.”
아까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은 대답해주었는데, 엘리의 삐짐이 더 강해졌다.
자꾸만 비아냥거리는 엘리의 말에 괜히 유진의 머리가 아파져 왔다. 도대체 엘리가 언제까지 삐짐 모드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분명 잘못한 건 멋대로 볼에 키스해대는 거리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엘리인데, 그걸 거부한 자신이 뭔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아, 진짜 답답해서 미치겠네.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자고”
영원히 삐짐 모드의 엘리를 볼 바에는, 차라리 옛날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사실 엘리만의 비쥬의 진짜 정체를 알기 전까진 엘리가 볼에 뽀뽀를 해와도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뽀뽀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것이 엘리의 나라의 인사법이라고 생각했기에 부끄러움을 충분히 상쇄시켜 주었다.
그런데 막상 엘리의 비쥬가 평범한 인사가 아니라, 그냥 볼에 하는 키스라고 생각하자 부끄러워졌을 뿐이었다.
슬쩍하고 엘리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엘리의 유진의 얼굴을 보며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유진은, 비쥬가 뭐라고 생각해요?"
"너네 나라 인사잖아, 너가 하는건 그냥 변태짓이지만."
유진의 말에 엘리는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엘리는 조금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유진은 엘리의 표정에 뭔지 모르겠을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유진은 엘리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엘리의 기다란 속눈썹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참 동안 하던 엘리에 대한 생각은 이내 자신이 왜 이렇게 엘리에게 신경을 쓰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엘리가 친한 친구라고 생각은 한다. 그렇다고 유진에게 엘리가 유일한 친구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친구는 엘리쪽이 없었다.
엘리와는 요즘 항상 붙어 다녔던 유진이었지만, 엘리의 룸메이트인 마리 말고는 엘리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길을 걷다 보면, 안녕이라고 인사해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진짜 친구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게 유진이 아는 엘리였다.
자꾸 엘리가 삐진 척을 하면, 자신도 엘리를 무시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친구가 없어졌을 때 곤란한건 엘리지 자신이 아니었다.
지금도, 삐진 척을 하면서도 엘리는 자신에게 떨어지려고 하지는 않고 있었다. 분명,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자꾸 엘리가 볼 키스가 마음에 걸리는 걸까. 가슴 한 구석이 울렁거렸다.
“유진.”
엘리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유진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엘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유진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제가 달라붙는 거, 싫은가요?”
“그런 건 아닌데….”
유진은 눈을 흘겼다. 자신이 왜 엘리를 신경 쓰는지에 대한 대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유진은 비쥬가 외국의 인사라서 싫은 건가요?”
“그런 것도... 아니야,”
“근데 왜 거절하는 거에요?”
“그거야,”
그거야 뭐? 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어쩌면 영원히 그 답은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부끄러워서? 겨우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엘리가 질렸어? 엘리와의 지난 날들이 단 한번도 즐겁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면 왜 그러는 거야? 마음속에 계속해서 의문이 떠올랐지만, 유진은 좀처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거야...”
엘리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엘리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은 그 시선이 무거웠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뭐라 설명 해야 할지 몰랐다.
"그거야, 뭐요?"
그래서, 엘리의 다그침에 유진은
“이상하잖아! 여자끼리 뽀뽀하고…. 애초에 여긴 한국이니까, 친구끼리는 아무리 친해도 뽀뽀 같은 거 안 한다니까?”
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버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엘리의 눈빛에 유진은 방금의 발언을 후회했다.
엘리와의 볼 키스는 사실은 싫은것은 아니였는데도, 너무 성급하게 말한 것만 같았다.
한번 던진 말은 주워담을수 없지만, 유진은 간절히 방금의 말을 취소하고만 싶었다.
“유진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침묵을 깬 엘리의 목소리는 약간의 씁쓸함이 담겨있었다.
그 목소리가 서글프게 들려서 유진은 차마 엘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프랑스에서도, 그냥 친구끼리는 볼 뽀뽀 같은 거, 안 해요....”
떨리는 목소리의 엘리는 뒷말을 흐렸다.
엘리가 자신에게 화를 낼줄만 알았는데, 갑작스러운 엘리의 고백이 혼란스러운 유진이었다. 엘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봐 오는 유진의 시선에, 엘리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저라도 친구끼리는 키스 같은 거 안 한다고요!”
유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아까와 같지만, 조금 더 큰 목소리의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엘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유진이라도 엘리의 말이 의미하는 뜻은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기쁘다, 놀랍다 같은 감정이 아닌 엘리가 나를? 이라는 의미 없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의 꼬리를 이어서, 언제나 자신의 시선 안에 있었던 엘리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대답이 없는 건 거절의 의미인가요…?”
하지만, 눈 앞에 엘리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도 엘리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대답을 강요해왔다.
“그럼, 정확히 말로 해주세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는 듯, 엘리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눈앞의 엘리는,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그제야 유진은 깨달았다. 나는 이 아이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을 뿐이라고, 나의 시선의 끝에 항상 네가 있던 이유는, 네가 좋기 때문이라고.
자꾸만 다가오는 너를 거부한 건, 내 이런 마음이 거부당할까 두려웠을 뿐이라고.
“나는…”
유진은 눈을 꽉 감았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제야 찾아낸 대답에 가슴이 따듯해졌다.
엘리의 용기처럼, 자신도 용기를 내서 다가가 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유진이였다.
...
“어, 그래서, 둘이 사귀게 되었다는 그런?”
마리의 황당한 듯한 목소리에 엘리는 신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헤벌쭉 웃어 오는 엘리가 괜히 부끄러워서, 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프랑스는 동성 결혼이 합법이니까 졸업하면 유진과 My Country에서 살기로 했어.”
“유진과 엘리는 행동력이 좋네요..”
금발의 외국인 두명이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한국어로 대화하는 건 조금 오묘한 기분이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국밥을 휘휘 저었다. 떠다니는 돼지 국밥의 기름을 보며 아직 사귄지 한달도 되지 않았는데 결혼 이야기를 해도 되는걸까, 하는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었다.
“유진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숟가락을 쥔 유진의 손을 엘리의 손이 잡아 왔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라고 해도, 솔직히 엘리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곤란해하는 유진의 모습에, 마리가 눈치 빠르게 물어왔다.
“아, 유진은 정말로 엘리와 프랑스에 갈 생각이에요? 쉽지 않을걸요,”
러브만 있으면 상관없다고 말해오는 엘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에 비해 유진은, 솔직히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었다.
자신의 옆에 누워서,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오며 졸업하면 프랑스에 가자고 속삭이던 엘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프랑스어도 잘하지 못했고, 부모님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만약 프랑스에 간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서의 계획도, 직업도,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 옛날의 엘리가 용기를 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조그만 나라를 선택해준 덕분에 만날 수 있었듯, 유진도 용기를 내서 엘리의 나라에 가서 많은 것을 도전해보고 싶었다.
이미 결정한 일이었다. 유진은 엘리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제나의 따듯함이 느껴졌다.
“응, 일단은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 결혼 같은 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엘리와 같이 살고 싶으니까.
엘리랑 같이 있고 싶다는, 이 마음을 갖고 노력한다면 분명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자기가 말했지만, 너무 오글거리는 대사에 유진은 말끝을 흐렸다.
그런 제멋대로의 말에도, 유진을 바라보는 엘리의 파란 눈이 감동한 듯 조금 커졌다.
“유진, 나 방금 유진에게 또 반해버린 거 같아요.”
쪽쪽거리며 다가오는 엘리의 얼굴을, 유진은 다시 손을 뻗어 붙잡았다.
“미쳤어? 공공장소에선 금지라고 했잖아.”
“에~ 그래도 지금은 그런 타이밍이잖아요.”
“금지는 금지야,”
유진이 자신의 볼에 입술을 맞췄던 사건이 이렇게 된 것이, 마리는 마냥 신기했다. 동양의 누군가가 말하길,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정말이었다.
마리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계속 꽁냥거리는 두 사람이 귀여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둘이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건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엘리의 저런 미소와 유진의 확신 찬사랑만 있다면 분명 결말은 해피엔딩일 거라고, 마리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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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외국인들이 볼 키스하는거 난 진짜 뺨에 뽀뽀하는 건줄 알았는데 하는척만 하는거더라
다음엔 좀 길게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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