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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링크
안녕 작가지망생 백붕이 버터롤빵이야.
초커 14화가 나왔어.
항상 꾸준한 사랑 보내주고 내 글을 읽어주서 고마워.
오탈자 지적이나 궁금한 점, 피드백 등은 댓글로 달아주면 작중 스포일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성실히 답변해줄게.
각설하고 이번화 시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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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만 충성해 주세요 ]
엘은 자기 자신에게 몹시 실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조금 한가할 거라 했던 상사의 말을 철떡같이 믿은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커다란 일을 끝내어 이제야 조금이나마 한가해질까 했더니 금세 다시 회사는 바빠졌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곳은 품질관리이기에 실질적으로는 별 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물건의 품질을 확인 및 검사를 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중책이고 복잡했다.
그리고 언제나 예고하지 않은 검사와 실험이 있거나 혹은 서류 작성이 있기도 했다.
상사가 나쁜 게 아니다. 회사가 바쁜 거다 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마음뿐이었다.
엘은 뻑뻑한 눈을 만지면서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하루종일 모니터만 보고 있다 보니 흰 건 바탕이고 검은 것은 자신이 적은 타이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마저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 가 벌써 대여섯 잔은 너끈히 넘었다.
이미 시간은 저녁 08시를 넘었는데 아직도 사무실에 남아있는 사원들은 적지 않았다.
" 퀸 씨, 혹시 이것도 좀 해줄 수 있겠나? "
" 네 잠시만요. "
아직까지도 일이 끝나지 않아 10시 전에 퇴근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상사가 그녀를 불렀다.
엘은 다급히 머리를 매만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사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 저기 그...녹취록 좀 작성해줄 수 있어? "
" 녹취록이요? "
엘의 상사는 퍽 인자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실상은 그도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그 역시도 가정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퇴근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남아 있는 거 보면 중역은 아래위로 이만저만이 아닐 게 뻔했다.
엘은 이해하기보다는 동병상련의 측은함이 들었다.
" 오후 회의때 끝난 회의록이 작성이 안 됐거든...녹음은 되어있는데 서면으로 작성이 안 됐어, 정리해서 올려야 되는데... "
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그가 말하는 회의란 원래 일정에 없던 회의였다.
갑작스럽게 높으신 분들이 소집되어서 그분들끼리의 이야기를 나누고 땡, 자세한 내막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뒷처리가 도리어 엘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 알겠습니다.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
엘은 표정만이라도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대답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등을 돌리는 그 순간만큼은 있는 이 없는 이를 최대한 갈고 온갖 욕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몸 안으로 꾹꾹 눌러 삼켰다.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엘은 커피를 한잔 더 뽑아오겠다는 이유를 대고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는 휴게실로 나가 커피를 뽑고 흡연실로 나갔다.
담배도 잘 피우지 않는 그녀가 이곳에 나온 이유는 흡연실이라는 이유 때문에 베란다처럼 반쯤 바깥이 개방되어 있어서 담배냄새가 조금 날 지언정 약간의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엘은 플라스틱 의자 세 개를 겹쳐놓아 임시 침대를 만들고 그곳에 앉아 다리를 길게 빼었다.
그리고 깊은 심호흡과 함께 커피를 들이켰다.
머리에 묘한 생각이 들었다.
푸른 밤하늘 달빛과 커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처절해보여 우스움이 다 났다.
" 에휴, 언제쯤 나아지려나. "
자기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한탄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들어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는 그녀의 소중한 앤이 있었다.
앤은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고급스러운 오피스 룩을 입고 목에 긴 초커를 걸고 한껏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앤의 손에는 놀라운 것이 매어져 있었다.
푸른 보석이 박힌 작은 반지, 그것이 그녀의 왼손 약지에 있었다.
엘은 어제 받은 이 사진을 짬날 때마다 틈틈히 보았다.
앤이 아름다워서도 있지만 그녀의 손가락에 매어진 저 반지가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앤에게 반지를 줄 사람은 단 한명뿐이었고 그녀에게서 반지를 받았다는 것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더 이상 나갈 선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엘 퀸은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에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계속해서 들이켰다.
정신이 흔들리면 몸도 힘들다고 했는데 지금이 딱 그 모양이었다.
앤과 아이비, 그리고 자신의 관계는 삼자간에 어느정도 정립이 된 관계였다.
앤은 아이비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엘 역시 그러라고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 누구의 이견도 없었다.
여전히 앤은 엘을 신경 쓰고 있었고 아이비에 진배없이 그녀도 사랑해 주었다.
사랑을 하면 여자가 이뻐진다더니 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예뻐졌다.
엘로써는 바라마지 않은 일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엘은 몸을 조금 일으켰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면 엘은 아이비에 비해 사회적 직위도 낮고 돈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러한 부분에서는 아이비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앤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건 맞는 말이었다.
물론 이렇다 저렇다 생각해도 엘은 여자였고 또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묘한 상실감이 들었다.
질투심같은 복잡하고 한심한 감정이 아니라 자조적인 한숨과도 같은 단순한 아쉬움이었다.
엘도 앤에게 반지를 쥐여주고 싶었다.
돈 문제는 아니었다.
아무리 벌이가 적어도 소중한 여자에게 반지를 선물해 줄 정도의 돈은 있었다.
대신 자학심 반, 두려움 반이 엘의 마음을 붙잡았다.
반지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인지 엘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행여나 앤이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싶었다.
이 생각은 아이비도 똑같이 했을 것이지만 아이비는 한 발을 먼저 내딛었고 엘은 뒤쳐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앤은 반지를 끼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엘은 아이비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었었다.
역시 언니는 언니였다.
엘이 가진 것은 오로지 앤을 위한 사랑뿐, 앞으로도 그녀는 앤을 사랑하고 한결같이 대하겠지만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것과 어른스러운 건 엄연히 달랐다.
자신처럼 어른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어른인 아이비가 너무나 부러웠다.
엘은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고 의자에서 몸을 튕겨 일어섰다.
밤하늘의 차가운 공기가 머리카락을 간질여 주었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저 하늘을 보았다가 서서히 내려왔다.
무수히 많은 차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엘은 실망하지 않았다.
엘은 주눅들거나 화를 내는 것 대신에 더더욱 힘을 내기로 했다.
그녀의 여자친구는 두 명을 좋아할 수 있는 용기를 낸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엘도 그녀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엘의 역할은 여자친구로써 언제나 정성껏 상대방을 보필해주고 행여나 아내 - 이 경우에는 아마 아이비가 될 것 같았지만 - 에게 상처를 입었거나 길을 잃었을 때 곁에 있어주고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 엘은 언제 어디서 앤에게 불림당해도 당장 도와줄 준비가 되어야 했다.
앤 생각을 하니 없던 힘도 다시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엘은 이제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했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흡연실의 문을 열었으며 엘은 대충 제자리 뛰기를 몇 번 하고 몸을 턴 다음 사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의 자리에 동료 한 명과 후배 한 명이 번갈아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각해 보였지만 엘이 오는 모습을 보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 뭐야, 뭔 일 있어? "
엘은 불안감에 차 물었다.
동료와 후배는 머뭇거리면서 제대로 이야기하려 하지 않고 엘의 눈치만 보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후배가 먼저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저기 선배, 오늘 어서 집에 들어가세요. "
" 뭐? "
엘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지금 자기가 야근하는 걸 알면서도 집에 들어가라는 말을 하나 싶었다.
한 순간 자신을 비꼬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동료가 서둘러 후배의 말을 거들었다.
" 그래. 나도 그게 좋은 거 같아. 녹취록 적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
" 너까지 왜 그러는데? "
역시 이들은 오늘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엘과 나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데면데면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딱 직장 동료 수준이었다.
그런데 다 같이 야근하는 처지에서 자기 일만을 맡아준다니 너무 이상했다.
이질감이 들어서 후배를 내려다 보니 후배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 왜 이렇게 날 집에 보내고 싶어해? "
" 오늘같은 날은 야근하지 말고 들어가야지 어서...사람이 신경써야 할 일이란 게 있는 거야. "
동료가 말했다.
" 맞아요. 오늘은 꼭 집에 들어가요. "
옆에서 후배가 거들어주었다.
엘은 이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들이 아니니 몰래카메라라도 하는 게 아니면 누군가 상사의 압박이 들어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 뭐 부장님이나 과장님이 뭐라고 하셨어? "
" 1층에 내려가 보시면 이해하실 걸요 선배. "
후배가 말했다.
엘은 이들의 말을 어떻게 신용해야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은 찰나에 탕비실 쪽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척 보기에도 묵직한 A4용지 두 상자를 가지고 낑낑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이 A4 용지좀 접수대에 내려줘요! "
" 아 제가 갈게요! "
이야기하다 말고 엘의 후배가 득달같이 튀어나갔다.
그녀는 매우 바빠 보이는 사람에게 용지를 받아들고 다시 되돌아와 엘에게 냉큼 한 상자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같이 가자면서 팔을 끌어당겼다.
엘은 거부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이끌려 사무실을 빠져나왔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둘 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있었다.
접수대는 1층에 있기 때문이었다.
연신 싱글벙글해 보이는 후배와 달리 엘의 속은 타들어만 갔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엘은 결국 평소 자기의 얼굴을 있는 힘껏 일그러트리고 후배를 진심으로 째려 보았다.
후배도 엘의 눈길을 느꼈는지 싱글벙글한 얼굴에 당혹감이 들었다.
엘은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이 표정을 풀지 않을 셈이었다.
후배는 시선을 회피했지만 엘은 다시 그녀를 주시했다.
결국 시선을 회피하기 포기한 후배는 엘과 눈을 맞추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선배를 어떻게든 집으로 보내려고 구상했는데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어요. "
" 아까 오늘 같은 날은 집에 가야 한다고 그랬지, 대체 왜 그러는데? "
추궁하는 엘의 목소리에 후배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 ......사실 선배 위에서 일하고 계실 때 여자 한 분이 찾아오셔서 선배를 뵙고 싶다고 하셨어요. 죄송하지만 야근중이라고 말씀드리니 오늘 꼭 뵙고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냐면서 퇴근 언제하냐고 물으시고...... "
" 여자? 누군데? "
엘은 따가운 눈초리로 물었다.
여자 후배는 잠시 히죽이며 대답했다.
" 되게 귀여운 사람이었어요. 선배 애인이라던데요? 지난번에 SNS에 뜬 그사람이요. "
엘의 몸이 철렁였다.
단순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몸과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자기의 애인이라고 자청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시간에 이런 곳까지 온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 애인이라고 그사람이 직접 그랬어? "
엘은 믿기지 않아 다시 되물었다.
" 네. 맞아요 "
" 그래서 그냥 네~했어? 겨우 그런 거 때문에 너희가 내 일 해주려고? "
후배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생글생글하던 표정이 또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엘이 회사에서 배운 사회적인 스킬로 미루어본 바 이것은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증거였다.
후배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어두운 복도를 걸을 때만 해도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접수대에 거의 다 도착해서야 후배는 오랜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 사실 그분이 빈 손으로 오신 건 아니었어요. 언제나 선배님을 챙겨줘서 고맙고 정말 고생하신다고 우리 부서에 캔커피 한 박스랑 초코바 한 박스, 그리고 샌드위치를 직접 포장해서 들고 오셨거든요. 그래서 지금 탕비실에서 1인분씩 소분하는 중이고 무척이나 차장님이 행복해 하셨어요. "
" 그냥 그걸 그대로 받았어?! "
앨은 A4용지를 꼭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엘이 소리를 지르자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후배도 바득바득 대들었다.
" 어떻게 해요!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내면서 자기 몸만한 상자를 넘기는데 어떻게 안 받아요, 그럼 그걸 들고 도로 가져가라고 해요? "
" 정중히 사양했어야지! "
" 차장님이 좋아하셨다니까요! "
차장님이 좋아하셨다는 말은 너무나 강력한 대답이었다.
그들의 차장은 소위 말하는 매우 심각한 '꼰대' 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이상하우리만치 가정이나 가족 관해서는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었고 행여나 가족이 회사를 찾아오는 일이라도 생기면 최고의 대접을 해서 그들을 돌려보내는 사람이었다.
또한 차장은 그 나이 먹고 연애소설이나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서 로맨틱한 상황이 생기면 손도 발도 못 쓰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봐도 애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온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 외부인이 주는 걸 함부로 받으면 안된다는 규정 따위는 깡그리 신경도 쓰지 않고 넙죽 받아버렸다는 결론이 나왔다.
게다가 지금 시간이 늦어서 다들 단 것과 음식이 한창 땡길 때였다.
그 한 마디에 엘은 온 몸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 그런데다가 저한테 자기 번호도 줬다구요. 일 끝날때까지 1층에서 기다릴 테니까 연락 달라고요, 이런 와중인데 우리가 어떻게 선배를 집으로 안 보내요. 이건 죄를 짓는 거예요. 죄를! "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녀의 동료와 후배는 지금 절대적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올바른 방법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맹렬한 부담감을 떨어뜨리기 위한 방법으로 엘을 빨리 집으로 보내버리겠단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방법에 나오는 건 엘의 한숨뿐이었다.
" 그래서 보고드렸어? "
" 아뇨, 어차피 근태기록 관리는 제가 하니까 따로 보고 안했어요, 그거하면 귀찮잖아요. "
" 너 미쳤니? 이제 아주 막 나가니? "
엘은 아무렇게나 회사 내규를 어기려는 후배의 행동에 기가 찼다.
그러나 후배는 너무나 손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저 원래 이런 여자에요. 이제 아셨어요? 입사할 때부터 아셨어야죠. "
그녀는 한번 입이 열리기 시작하면 그 어떤 말싸움에도 지지 않았다.
선배인 자신에게도 이 모양이고 그 위에도 자기가 부당하다면 부당하다고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강한 기백을 지금 이런 곳에 사용하고 있었다.
엘은 머지 않아 자신의 후배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농담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더구나 그녀의 동료도 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듣고 그녀의 의견에 따라주겠다는 말을 했다니, 그동안 믿어왔던 신뢰가 완전히 깨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A4상자를 대충 접수대에 내려놓고 몸을 풀었다.
후배는 상자를 접수대 정면에서 아주 잘 보이게 세워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 선배는 이대로 퇴근하시면 돼요. "
" 아니 가방은 어떻게 하고? 내 일은? 그걸 왜 너희들이 하냐니까. "
엘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투로 물었다.
그녀는 철면피가 아니었다.
대뜸 후배와 동료들에게 일을 넘기고 나서 맘편히 룰루랄라 집에 갈 수 있을 만큼 강심장도 아니었다.
어쩌면 다소 일 중독일수도 있는 자신이기에, 엘은 더더욱 그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의 후배는 너스레를 떨면서 A4상자의 뚜껑을 멋대로 열었다.
" 아이 평소에 선배가 저랑 동기들 커버쳐준 일 생각하면 가끔은 행정담당자 후배 덕도 좀 봐야죠. 그리고 그럴 줄 알고 제가 가방을 다 챙겨왔습니다. "
단단히 봉해져 있던 거 같은 A4 상자 사이와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그 사이에는 익숙해 보이는 작은 가방이 있었다.
그건 바로 엘 자신의 가방이었다.
후배는 가방을 정성스럽게 넘기고 다시 가방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어쩐지 아까 자리에 갈 때 그녀의 가방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싶었더니 이 영악한 후배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엘은 여전히 찜찜했다.
아직까지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자 후배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선배에게는 다소 무례한 행동이기에 지금 뭐하냐고 한소리 하려 했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말에 엘의 입은 굳게 닫혔다.
" 차장님이 매번 말씀하셨잖아요, 가정이 있는 사람은 가정을 소중히 하고 가정이 없는 사람도 앞으로 만들 가정을 위해 힘내라고요. "
" 그...그렇게 말하긴 했지. "
" 그러니까 선배도 가셔야죠, 애인이라는 분이 이시간에 간식까지 준비해가면서 얼굴 보고 싶다고 하는데 내치실 꺼에요? "
" ...... "
" 애인이잖아요 선배님, 가정을 이룰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
" 가정이라니...아직 너무 일러. "
가정을 이룰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은 겉보기에는 참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렇지만 엘이 앤과 가정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다소 꿈같은 이야기지만 그 사정을 모를 리 없는 후배는 정말 진지하게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
엘의 동료도, 그리고 지금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후배도 진심으로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엘은 그녀들의 친절에 감사하기로 했다.
" 알았어. "
" 이제 퇴근하실 마음이 드셨어요? "
후배는 드디어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 갈게. 갈테니까는 혹시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꼭 전화해. "
엘은 씩 웃었다.
" 연락 안할 꺼니까 걱정마시고 들어가세요, 들어가시고 꼭 연락 주세요! "
후배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다시 상층으로 올라왔다.
예정에 없던 퇴근, 그리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귀가였다.
엘은 동료와 후배의 배려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나간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로비에서 몇 걸음을 걷지 않아 1층 로비 맨 끝에 보이는 어둠에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엘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그림자 사이에 무언가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자 엘은 휴대폰 불빛을 밑으로 하고 살짝 올려보았다.
흐릿한 인영이 지워지고 사람의 하얀 다리가 나타났다.
엘은 천천히 불빛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 확인했다.
" 앤? "
꾸벅이던 것은 다름아닌 앤의 고개였다.
앤은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쥐고 계속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의 몸 옆에는 튼튼한 직물봉투가 있었고 그 안에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찌나 깊이 의식을 잃었는지 꽤 큰 구두소리가 들려도 앤은 전혀 깨지 않았다.
그녀는 나름 갖춰 입는다고 입은 건지 지난 번과 상의는 다르지만 라인이 딱 잡힌 스커트를 입고 최대한 오피스룩인 것처럼 꾸미고 나왔다.
그녀가 평소 일하는 곳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묘하게 과한 힘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오늘같은 날에 경비는 대체 어디간 건지 손전등 하나 들고 순찰도 오지 않았다.
여전히 앤의 왼손 약지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엘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미소를 띄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귓가에 가까이 붙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일어나요 앤, 내 사랑. "
엘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고 앤은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고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이 곁에 있는 엘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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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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