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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소백) 여름휴가 여자친구

백갤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7.31 23:59:49
조회 613 추천 22 댓글 4
														


‘올해는 계곡 갈 거니까, 수영복 꼭 챙겨와! 아, 그리고 전에 말했던 휴대폰 케이스는 샀지? 미리 고마워~ 아니, 여기가 아무리 시골이라도 그렇지 배송비가 케이스값보다 두 배는 비싸더라고, 진짜 웃기지 않아?’


‘응’


‘진짜 기대된다, 1년 만에 만나는 거네. 전에 기억나? 나 개구리 잡다가 논에 빠져서 진흙투성이 된 거, 어제 길 나가보니까 개구리 진짜 많더라. 어제 찍은 청개구리 사진 보내줄게, 진짜 귀엽지?’


‘귀엽네’


‘아, 벌써 11시네 내일 먼 길 오려면 피곤하겠다. 내일 이야기 많이 하자! 푹 쉬고 건강하게 와~ 내일 오면 내가 맛있는 감자 삶아줄게, 너 감자 좋아하잖아.’


‘ㅇ’


마지막으로 보낸 귀여운 곰돌이 이모티콘의 1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승연은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1주일 전만 해도 실감이 안 났는데, 하루 전이 되니까 드디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수연이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덥디더운 여름의 열대야도 푸근하게만 느껴졌고, 평소라면 구슬프게만 들리던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도 오늘따라 묘한 생동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키스 사건 이후로, 집에 잘 들어갔냐는 문자마저 읽씹한 수연이 다시 말을 걸어온 건 6개월 전의 겨울이었다. ‘이번 겨울에 못 감’, 보통이라면 실망스러울 말이었지만, 6개월 만에 문자로나마 만난 수연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작년 겨울에 있었던 추억들을 하나둘씩 풀다 보니, 수연은 다시 대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연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적어도 문자에서만큼은 예전처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내일이면 수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승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켠 후, 수연과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사진을 받은 적은 없지만, 수연의 프로필 사진으로 한참 성숙해진 수연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어깨까지 왔던 중단발의 머리는 등허리까지 길었고 황갈색으로 염색을 한 모양이었다. 동갑이지만 키가 작은 탓에 어린아이 같게만 느껴졌었는데, 화장의 힘인지 귀엽다기보다는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특히 립스틱을 발랐는지 새빨간 입술은 그날의 그 작고 부드러운 입술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요염하고 성숙해 보였다.


“뭔가 변태 같네.”


한참 동안 프사 속 수연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승연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서 승연은 자신의 조촐한 화장대를 바라보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올리브영까지는 두 시간마다 하나 있는 버스를 타고 50분은 나가서 시내로 가야만 했다. 화장품 가게가 멀었기 때문에 안 한다는 건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자신은 기초화장을 제외하곤 제대로 화장하는 법도 잘 몰랐었다.


“화장이라도 알려주라고 해볼까.”


승연은 수연의 보들보들한 손을 떠올렸다. 햇볕의 그을린 자신의 갈색 피부와는 반대되는 새하얀 수연의 손. 수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쳐 오며, 그 작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것을 상상하자 이상하고도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 혹시 수연이 언니랑 싸웠...”


기세 좋게 열리는 미닫이문의 드르륵 소리와 함께 들려 온 승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승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언니 지금 표정 완전 이상한 거 알아?”


“응? 내가? 왜?”


“으, 이쪽 보지 마, 히죽거리는 거 진짜 기분 나빠.”


승아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번엔 자신이 히죽거리며 승연에게 다가갔다.


“아, 알겠다. 수연이 언니 생각하고 있었지.”


승아는 히죽거리며 승연의 누워있는 침대의 옆자리에 가만히 들어가 누웠다.


“진짜 언니는 알기 쉽네.”


그러고는 이불 속에 손을 넣어서 승연의 옆구리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야, 그만해, 갑자기 뭐 하는 거…. 아 그만…. 그만하라니깐~”


벗어나려고 해도 다리를 몸 위에 감아 찍어 내리는 승아의 힘에 밀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승아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승연의 옆구리를 계속해서 간지럽혔다. 덕분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승연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킥킥거리며 숨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이유 모를 간지럽힘은 숨넘어갈 듯 웃던 승연이 웃을 기운조차도 잃어버리고 축 늘어졌을 때가 돼서야 끝났다. 승아는 만족한 듯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혹시 모를 승연의 반격에 대비해 방 반대편으로 피한 승아가 축 늘어진 승연에게 말했다.


“언니 내일 자리 비켜줄까?”


“그게, 뭔, 소리야..”


승아는 대답 대신 잠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승연은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게슴츠레한 눈으로 승아의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승아의 핸드폰 속 대화방에는 익숙한 프사가 보였다.


“응? 그거 수연이야?”


승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연은 간지럼의 여운조차 잊은 듯, 황급히 일어나 승아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언니가 무섭게 달려오자 조금 당황한 듯 움찔한 승아였지만, 승연의 정신이 자신의 핸드폰에 팔린 것을 확인하곤 말을 이었다.


“내일 수연이 언니 오잖아, 그래서 조금 대화를 했거든.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내일은 내 방에서 자고 싶다는 거야”


승연은 떨리는 손으로 대화방을 빠르게 넘겼다. 승아와 대화하는 수연은 자신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짧은 단답형의 문장은 그대로였지만 이모티콘도 사용하고, 글에는 미묘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상하잖아, 수연이 언니는 맨날 언니 방에서 잤는데. 그래서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데. 그래서 내가 뭐 별로 상관없다고 그러라고 말했지.”


상관없다는 말에 승연은 찌릿하고 승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승아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상한 거야, 그야 언니랑 수연이 언니 사귀고 있잖아.”


승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연의 손에서 핸드폰이 스륵 하고 빠져나갔다. 승아가 매일 같이 부모님의 감자 수확을 도와주며 겨우겨우 손에 넣은 최신형 아이폰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으아아아! 야 이승연 뭐 하는 거야!”


“사, 사, 사, 사귄다니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울상이 된 승아는 땅에 떨어진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안심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승연을 올려다보았다.


“장난인데 개오바하네 진짜, 뭐 진짜 둘이 사귀어? 사촌끼리?”


승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떨어진 핸드폰을 잠옷 소매로 슥슥 닦던 승아가 작은 목소리로 욕을 하는 것이 보였지만, 승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여간 둘이 좀 끈적한 사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맨날 붙어 있었고. 근데 갑자기 그러기에 언니랑 싸움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언니 표정을 보면 또 그런 것도 아닌 거 같더라고.”


기스가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승아는 핸드폰을 다시 잠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여전히 표정은 조금 화가 난 듯 보였지만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래서 눈치 빠르게 내가 빠져주겠다는 이야기였어.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둘이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승연은 대답 대신 승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승연의 행동에 승아는 질색하며 손을 내뺐다.


“으으, 진짜 징그럽게 왜 그래”


“승아가 눈치 빠른 아이로 자라주어서 언니는 기뻐.”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연은 다시 승아의 손을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아 진짜 왜 그래, 언니 손 뜨거워서 기분 나빠.”


승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연은 잡고 있던 손을 자신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힘이라곤 승연에게 지지 않는 승아였지만, 갑작스러운 당김에 승아의 몸이 힘없이 승연에게 겹쳐졌다. 승아를 꽉 끌어안는 모양이 된 채로, 승연은 자신의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어, 언니? 봐주는 거 아니었어?”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건지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려는 승아였지만 방금과는 반대로 꽈악 끌어안은 승연의 힘에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는 건 승아의 안 좋은 버릇이야.”


“놔줘~ 수연이 언니랑 같이 자기 싫어? 다 일러버린다.”


“이걸 보고도 아직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좁아진 승아의 시야 속에 익숙한 아이폰이 슬쩍 들어왔다. 주머니에 손이 들어온 감촉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도, 분명히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핸드폰이 거짓말같이 언니의 손에 잡혀 있었다.


“엑, 뭐야 언제 가져갔어?”


대답 대신 등 뒤에서 키득거리는 승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무언의 압박이었다. 핸드폰을 구하고 싶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자신에게 몸을 맡기라는. 승아의 머릿속에 20KG으로 150박스나 되었던 길고 길었던 감자 수확의 기억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핸드폰만은 살려주세요.”


“눈물 나는 애정이구먼, 후후.”


승연은 진짜 인질범이라도 된 것 마냥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만족했다는 듯 승연은 승아의 핸드폰을 다시 그녀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주고는, 꽉 잡은 손을 조금 느슨하게 해 승아의 옆구리로 가져갔다.


“상냥하게 해줘 언니.”


힘없이 그런 말을 하는 승아의 귀가 빨갛게 물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먼저 잘못한 것은 승아였는데, 이렇게까지 하니까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야, 이러니까 진짜 범죄 같잖아”


“절도범. 납치범.”


“됐어, 흥이 깨져버렸어. 안 할래 그냥.”


승연은 그렇게 말하며 승아의 옆구리에 가있던 손을 빼어, 가볍게 승아를 끌어안았다.


“대신 오늘은 같이 자자, 엄마가 그 기다란 베개 빨아버려서 안 그래도 심심했어.”


기다란 베개란 시바견 모양의 롱쿠션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해서, 에어컨 없는 승연의 여름나기에 필수품 중 하나였지만. 수연이네 가족 맞이 대청소를 한다는 어머니의 손에 걸려서 지금은 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건조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진심이야? 더워죽겠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는 승아였다.


“승아는 체온이 낮으니까 시원해서 괜찮아.”


“역으로 내가 더울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보네….”


“벌이니까 참아.”


둘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울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잠이 드는 것이 빠른 승연은 금방 잠들었고, 껴안긴 자세가 조금 불편한 듯 잠시 뒤척거리던 승아도 승연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조금 선선하고, 시끄럽게만 느껴졌던 귀뚜라미 소리와 개구리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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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이도 많이 컸구나. 승아도 그렇고…. 근데 승아는 감기라도 걸렸니?”


걱정 섞인 목소리에 마스크를 쓴 승아가 멋쩍게 웃었다.


“하여간 내일 작은아버지네 오시니까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을 했는데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승아를 노려보던 어머니가 툴툴거렸다. 그런 어머니의 행동에 숙부는 별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애들은 아프면서 크는 거죠. 그나저나 수연이가 아쉽겠네요. 내일 승연이 승아랑 놀 수 있다고 기대 많이 했었는데.”


정말로 기대했어?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승연은 숙부 뒤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서 있던 수연을 바라보았다. 승연과 눈이 마주치자, 수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수연이야 승연이가 멀쩡하니까 괜찮지 뭐, 그래 말 나온 김에 승연이 너는 나가서 막걸리나 좀 사 와라.”


오전일 동안 막걸리를 얼큰하게 드시고 방에 축 늘어져 있던 아버지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술이 덜 깬 듯 걸걸한 목소리에 어머니는 질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승연이한테 술 심부름시키지 말라니까요.”


어머니의 잔소리에도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승연의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었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데 뭐 어때. 그래, 수연이도 따라가서 과자나 하나 사 먹어라.”


“이젠 수연이도 보낼 생각이에요? 도련님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하하하..”


어쩌다 보니 어른들 사이에 끼어버린 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보았다. 처음 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머리는 길었지만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움츠려 들으니 정말로 작년과 다를 게 없는 작고 귀여운 수연이었다.


“수연이가 이제 몇 살이더라? 하여간 요즘 애들은 빨라서 술 같은 거 다 마신다니까. 우리 승연이는 나랑 겸상을 해.”


“아, 형님 우리 수연이는 그런 거 몰라요.”


그렇게 말하며 숙부는 힐끗 승연의 눈치를 보았다. 갑작스러운 지목에 당황한 승연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 후로는 이젠 멀쩡한 애를 술꾼으로 만드네, 라며 소리치는 엄마를 시작으로 끝도 없는 어른들의 소란이 시작되었다. 여름 감기를 연기하던 승아가 괜히 기침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지만, 어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서로 떠드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자꾸만 수연이와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게 승연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숙부의 뒤에 숨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이가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아 아빠 그만 좀 해, 수연이 당황했잖아.”


결국, 수연과 승연의 학교 성적을 비교하기 시작했을 때쯤 승연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느새 운동화로 갈아 신은 승연은 숙부 쪽으로 서슴없이 다가가 수연의 손을 꽉 잡았다. 옛날과 다를 게 없는 따듯하고도 하얀 손이 움찔 떨렸다.


“술 사 올게, 됐지? 대신 한 병은 수연이랑 내가 먹어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아버지도 할 말을 잃을 정도의 폭탄 발언을 남기고 승연은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등 뒤에서 뭐라 뭐라 소리치는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렸지만, 승연은 더욱 속도를 높여 도망치듯 시골길을 뛰어 내려갔다. 조금 빠르게 달린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수연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연의 발걸음에 자신의 발을 맞추어 주었다.


집과 큰길 사이를 잇는 내리막길을 지나 길이 평탄해질 때쯤, 승연은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깊은숨을 내쉬던 수연은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힘없이 돌담에 기대었다. 승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연을 부축해 주려고 하자, 수연은 괜찮다며 왼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하여간 아빠는 진짜, 오늘은 수연이네 오니까 새참에 술 빼라고 했는데도”


수연의 거절에 멋쩍어진 승연은 괜히 큰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가만히 수연을 내려다 보았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한참 숨을 고르던 수연은 살짝 위를 쳐다보았지만, 승연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자신을 올려다보던 수연의 상기된 얼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가도 다시 고개를 숙이는 수연의 행동에 실망감이 몰려왔다.


갑작스럽게 달린 탓일까? 수연의 숨 고르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등이라도 두들겨 줄까, 내뻗은 승연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하고 갈 곳을 잃었다. 땀에 젖은 수연의 티셔츠가 피부에 붙어서, 뭔가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내었다.


“수, 수연아.”


수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들어 승연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승연이 쉽게 수연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 혼자 가게 다녀올 테니까, 넌 여기서 좀 쉬고 있어. 금방 올게.”


대답 대신 수연은 조금 아련한 표정을 짓더니 승연의 허리춤을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수연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수연은 승연과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자.”


“으응? 아냐, 금방 다녀올게. 조금만 쉬고 있어.”


수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강하게 저었다. 그러고는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채우곤 승연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나 약골이라고 무시하는 거지.”


“아냐 아냐, 그냥 차 타고 오래 왔으니까 힘들까 싶어서. 가게 여기서 멀지도 않아. 진짜 금방 다녀올게.”


“무시하지 마. 이제 움직일 수 있어.”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승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하얀 손이 애처롭게 떨려 보는 사람마저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연의 귀여운 자존심에 승연의 입가에 느슨해졌다.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그래서 승연은 웃으며 수연의 손을 강하게 잡아주었다. 손안에서도 조금 떨리던 수연의 손은 승연의 체온을 느끼자 조금 안정을 찾았다. 승연은 조심스럽게 수연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다시 수연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지만, 천천히 발걸음을 맞추어 왔다.


“어, 개구리다”

도로 한가운데를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길옆으로 펼쳐진 논밭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연도 개구리라는 소리에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네.”


“잡아줄까?”


“됐어, 불쌍하잖아.”


수연이 청개구리를 거절하는 건 의외였다. 메뚜기라면 기겁을 했지만, 개구리는 정말 좋아하는 수연이었다. 심지어는 승연조차 조금은 거북하다고 느끼는 두꺼비마저 귀엽다면서 잡아달라고 해서, 승연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다.


“의외네, 수연이가 개구리를 거부하고.”


“철들었다고 할까.”


그런 말을 하며 수연은 살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올해 들어서 처음 보는 수연의 미소였다. 옅은 색의 립밤을 바른 수연의 입술이 기분 좋게 실룩거린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시 수연이가 웃을 때는 입이 가장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수연을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을 때도, 분명 그녀는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어딜 보는 거야.”


수연의 차가운 목소리에, 승연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승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만큼 차가운 수연의 시선에서 도망치듯, 승연은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개구리는 옆 논으로 들어간 듯 더는 보이지 않았다. 수연은 조금 아쉬운 듯 개구리가 사라져간 논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덕을 넘자 저 멀리 가게가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 멈추어 서서 승연은 잠시 수연의 상태를 보았다. 수연의 숨은 언제나처럼 조금 가빠지긴 했지만 멈추어서 쉴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수연도 승연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수연아.”


괜찮다면 말로 해주면 좋을 텐데, 개구리를 지나쳤을 때부터 계속해서 이어진 침묵이 영 거북한 승연이었다.


“괜찮아? 쉴 필요 없지?”


“괜찮아.”


“아, 그러고 보니 내 핸드폰 케이스 사 왔어? 숙부한테 있나?”


“응.”


“수영복은 가져왔고? 계곡 어렸을 때 가보고 안 가봤지? 요즘 비가 많이 왔잖아. 그래서 물이 한 내 어깨까지 찼다?”


승연은 장난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자신의 어깨와 수연의 키를 비교했다.


“수연이한텐 조금 깊을지도 모르겠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수영 알려줄게.”


싱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승연의 손을 수연은 매몰차게 쳐내었다.


“만지지 마. 더워.”


“아, 미안.”


쳐내진 손은 아프지 않았지만, 괜히 마음이 아팠다. 옛날에는 살갑진 않아도 어느 정도의 스킨십은 허락해주던 수연이었는데. 문자를 해주는 걸 보고 다 풀렸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저기 수연아, 혹시 아직 화났어?”


맞잡은 손마저 놓은 채로 앞서 걷는 수연을 풀이 죽어서 따라가던 승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수연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 왜, 1년 전 그거…. 아직도 화났어?”


“아니.”


“그렇구나.”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대신 승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의 키스가 그렇게 싫었던 것일까, 차가운 수연의 말에 승연은 괜히 울적해지는 기분이었다.


“수연아 나 너 좋아해.”


“알아.”


"사랑도 해."


앞서 걸어가던 수연이 흘끔 뒤를 쳐다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거절했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가슴이 시리고 또 아팠다. 먹구름 낀 마음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다 보니 멀게만 느껴졌던 가게가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수연은 여전히 조금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수연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승연은 조금 걸음을 빠르게 해, 조심스럽게 수연의 손을 잡고 주머니 속 들어 있던 만 원짜리를 손에 쥐여주었다.


“..막걸리 4병. 남는 돈은 수연이 먹고 싶은 거 먹어. 우리 아빠 이름 대면 할머니가 그냥 술 주실 거야.”


수연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손에 쥔 만 원짜리와 승연의 얼굴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승연은 아무 말도 없이 가게 옆 돌담에 기대어서 쪼그려 앉았다.


“그냥, 나 저 가게 할머니랑 친하거든. 그래서 내가 가면 자꾸 뭘 주신다? 미안해서 그래.”


당연하게도 거짓말이었다. 뭘 주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고추나 상추 같은 것을 승연의 집에서 싸게 사가시기에 별로 미안한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지금은 기분이 울적해서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무엇인가 울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수연은 가만히 승연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알았다고 말했다. 말은 알았다고 하면서도 수연은 잠시 가만히 서서 승연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수연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연이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방금 보았던 차가운 표정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수연의 시선이 멀어져갔다. 가게의 미닫이문이 열리는 드르륵 소리를 듣고 나서야 승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게도 눈앞엔 아무도 없었다. 아직 고개를 뻣뻣하게 든 초록색의 벼들만이 때마침 불어온 시원한 바람을 따라서 물결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바보 같아.”


적어도 시원한 바람만큼은 울적했던 기분을 조금 달래 주었다. 승연은 고개를 세우고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청량한 바람이 폐를 한번 훑고 지나가자,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희석되는 느낌이었다. 다섯 번 정도 깊은숨을 반복하고는 승연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연이 늦네.”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주변에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해는 여전히 쨍쨍하고 핸드폰도 갖고 오지 않은 탓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수연이 가게에 들어간 지는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승연은 유리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가게 안에는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품속에 가득 막걸릿병을 끌어안은 채로 수연은 손님용 의자에 앉아서 망하니 앉아있었다. 손에 들린 자그마한 풍선껌은 남는 돈으로 산 것일까. 분명 4천 원 정도 남았을 텐데, 기껏 고른 게 풍선껌이라니. 귀여웠다.


승연은 다시 한번 가게 안을 둘러보았지만, 주인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보고 계시던 TV도 꺼져있고, 아무래도 외출이라도 하신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이야 대충 돈을 계산대에 올려 두고, 거스름돈 대신 과자라도 몇 개 집어갔을 태지만 수연이 그런 것을 알고 있을 터가 없었다. 그렇다고 막걸릿병을 가득 안고는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승연의 상상 이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가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수연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지만 팔을 뻗지도 못하고 막걸리를 가득 안고 있는 수연이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도 수연의 귀여운 행동 덕에 울적했던 마음은 거의 다 사라졌었다. 승연은 조금 힘차게 미닫이문을 열었다.


“수연아, 다 샀어?”


깜짝 놀란 듯 수연의 작은 어깨가 흠칫 떨리는가 싶더니 수연이 조심스럽게 승연을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수연의 얼굴에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수연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품 안 가득 찬 막걸릿병을 승연에게 보여주었다.


“응 잘 샀네. 수연이도 드디어 음주 클럽에 가입했구나.”


얼빠진 수연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승연은 익숙한 몸짓으로 진열장에 놓여있는 과자 몇 개를 대충 집어 들었다.


“아, 수연아 너 담배펴?”


“안피거든 미쳤어?”


“도시 애들은 다 피는 거 아니었어?”


승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거든. 그럼 넌 어떤데.”


수연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야 당연히 안피지.”


그런데 왜 물어보는 거야, 수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승연이 건넨 검은 비닐봉지 안에 양손 가득 품고 있었던 막걸릿병을 털어 넣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거야? 주인이 뭐라 하지 않을까?”


콧노래까지 부르며 승연이 비닐봉지에 하나하나 집어넣는 과자의 양은 언뜻 보기에도 거스름돈은 가볍게 넘어 보였다. 아무리 시골이 물가가 싸다고 하더라도, 과자만으로도 만원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괜찮아, 아까 내가 말했잖아, 나만 보면 뭘 더 주신다고.”


승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쌍쌍바의 껍질을 까서,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었다. 쌍쌍바 정확히 반으로 나누기, 어렸을 때부터 수연과 함께 여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배운 승연의 특기아닌 특기였다.


“입에 넣어줄까?”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수연은 의외로 순순히 입을 벌렸다. 승연은 잠시 당황한 듯 수연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에 아이스크림을 넣어주었다.


사이좋게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은 채로, 수연과 승연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보면 둘의 관계는 언제나 이랬다. 역시 방금처럼 사소한 스킨십까지 거절해버리면 조금은 슬펐지만, 서로 장난을 치고 이야기를 하고, 눈을 마주치며 웃을 수 있는 지금 같은 시간만 있다면 사랑 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승연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키스나 사랑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은 덕분에 아무 말도 할 수는 없었지만, 승연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수연은 다시 한번 그 손을 잡아주었다. 승연은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그 부드럽고 하얀 손을 다시 한번 꽉 잡았다. 가게의 문을 열자,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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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진심이야?”


“진심인데?”


수연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과자 봉지를 열어, 커다란 바위 위에 하나둘씩 펼쳤다.


“아빠가 기다리지 않을까,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인데.”


승연은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길다는 여름 해가 산등성이에 걸린 걸 보면, 적어도 6시는 넘었을 터였다.


“이미 허락받고 나왔잖아?”

허락이라니, 승연은 안절부절못하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거리였지만, 왠지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적막감이 괜히 더 불안했다.


“그럼 뭐야, 나랑 있기 싫어?”


“그런건 아닌데.”


승연은 끝말을 흘리며 멍하니 수연의 손을 바라보았다. 수연의 작은 손이 막걸릿병을 휙휙 흔들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뚜껑을 열어버렸다.


“그건 화나서 한 말이었고, 실제로는 마신다는 이야기가.”


승연의 목소리가 막걸리의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흘러나갔다. 수연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과자 하나를 집고는 뚜껑 열린 막걸릿병을 승연에게 건넸다.


“마셔.”


“아니, 나 진짜 술 마셔본 적 없어.”


“그냥 마셔, 나 그때 일 아직 안 잊었으니까. 벌이야.”


이제는 잊고 넘기려고 했는데, 그때 일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괜히 속이 쓰려왔다. 수연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짜인데,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위가 아파졌다.


“으으, 수연이 너도 먹는 거지?”


얼떨결에 잡아 버린 막걸릿병을 이리저리 보다가 승연은 다시 한번 텅 빈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들켜도 파출소 경찰관 아저씨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마을 어르신들은 그 아들의 그 딸이라며 호쾌하게 웃어주겠지만 역시 밖에서 술판을 벌이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수연은 대답 대신 두 번째 막걸릿병의 뚜껑을 열었다. 한 병만 먹겠다고 했잖아, 인제 와서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두 번째 막걸릿병과 함께 넘지 않으려는 최후의 선마저 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냥 먹는 것도 재미없으니까 게임이라도 할까.”


수연은 작게 웃으며 과자를 공중으로 던지더니 입으로 받아먹었다. 몸치인 주제에 꽤 깔끔한 몸놀림이었다. 몸 쓰는 일은 적어도 수연에게는 지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승연이었지만, 저것이 게임이라면 꽤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실패하면 버려야 하잖아, 자연을 지켜야지. 그리고 아까워.”


절대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니깐, 승연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수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술 게임 몰라?”


“술 많이 먹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수연은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이내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수연의 입에서 세상에, 촌스러워, 순진하네 같은 말이 들린 듯했지만,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실게임 알지? 진실게임.”


“응 그건 알지. 마피아 게임도 알아.”


승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 그래. 하여간 진실게임 하자.”


“난 수연이한테 숨기는 거 없는데.”


“난 있으니까! 어쨌든 하자.”


너만 숨기는 게 있으면 네가 불리한 거 아니야? 말하고 싶었지만, 진실게임을 하자고 말하는 수연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승연은 차마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일단 한잔 먹고 시작하자.”


게임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수연은 막무가내로 병끼리 건배를 시키고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 자그마한 수연이, 지금도 작았지만, 술을 병나발로 마시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도시 애들 무서워….”


“뭐야 짠했는데 안 먹는 거야?”


수연의 지적에 승연도 어쩔 수 없이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고소한 향기 속에 왠지 모를 알코올의 냄새가 났다. 막걸릿병 너머로 수연의 기대의 찬 눈빛이 느껴졌다. 승연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딱 감고 막걸리를 입안 가득 털어 넣었다. 막걸리는 단맛과 쓴맛 사이에 이상한 고소함이 있는 맛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맛있었다.


“맛있지, 막걸리.”


병을 내리자, 싱긋 웃고 있는 수연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술의 힘일까, 수연이 저렇게 환하게 웃은 것은 오랜만에 보았다.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이 술의 탓일지 수연의 탓일지는 알 수 없었다. 승연이 확신할 수 있는 건, 역시 자신은 웃는 수연을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다.


“자자, 그럼 게임을 시작합니다.”


수연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양 볼을 빨갛게 물들이곤 그 동그란 눈으로 승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룰은 간단.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술을 먹어. 그리고 질문해. 만약 대답하지 못하면 대답하지 못한 사람은 술 두 모금을 마시면 되는 거야. 만약 상대방이 대답한다면 공격권은 넘어가.”


“간단하네.”


대답과 동시에 승연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 같이 많았다.


“거, 거침없네.”


아무리 수연이라도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저런 당황한 수연의 얼굴은 메뚜기를 개구리라고 속여 수연의 손에 쥐여주었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승연은 벌써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좋아?”


“응?”


작은 언덕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답 못 하지? 히히, 5초 센다. 5초안에 말해야 해.”


당황한 수연의 표정을 보니 정확한 곳을 찌른 기분이었다. 수연은 척 보기에도 술이 그렇게 강하지 않아 보였다. 이대로 기세를 몰아 계속 이겨서, 취한 수연을 업고 집에 들어가는 게 승연의 계획이었다.


“진심이야?”


“5, 4, 3”


세상에나, 수연은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도 승연이답다면 승연이다웠지만, 이정도까지 오면 솔직히 반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엄마가 좋아. 너 진짜 대박이다.”


“.. 숙부한테 이를 거야.”


“이르던가, 그럼 내가 질문한다.”


어떻게 저렇게 간단히 대답을 할 수 있는 걸까, 승연은 수연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묻는다면, 승연은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때 나한테 왜 키스했어?”


과자로 향하던 승연의 손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텐데, 수연의 목소리로 직접 듣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5초 센다, 하나둘 셋”


좋아하여서라고 마음 편히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때의 그 키스를 그저 사랑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승연은 생각했다. 수연이가 화를 낸 이유는 분명히 그 키스에 있을 것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의 간극. 그 간극을 그저 좋아한다는 말로 메꾸려고 한다면, 수연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주는 것만 같았다.


“넷 다섯, 못 말했지. 마셔.”


결국, 승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가게를 나오며 포기했던 마음이 다시 한번 밀려들어 왔다. 결국,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대답 없는 질문 속에서 승연은 힘없이 막걸릿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모금. 마셨지? 나 방금 한 모금 마셨어. 다시 질문할게.”


수연이 술을 마셨는지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승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사랑한다는 말 진짜야?”


“진짜야.”


“질문 안 끝났어. 우리 가족이잖아. 사촌, 그리고 동성이야. 그런데 사랑해서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어?”


“그건.”


다시 한번 승연의 말문이 막혔다. 진심으로 수연을 사랑했지만, 그 이상의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당장 아버지에게 수연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한 기분이었다.


“5초 센다, 하나 둘 셋.”


승연은 자신이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연의 카운트가 다섯이 되기도 전에 이미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모금 마셨지, 또 질문할 거야, 지금 마신다.”


“수, 수연아 잠깐만.”


술기운이 올랐는지, 정신이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막걸리 한 병도 채 먹지 않았는데 취하려고 하다니, 자신의 주량이 저주스러웠지만, 한가지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가고 싶었다. 승연은 심호흡을 한번하고 얼마 남지 않은 막걸리 한 병을 한 번에 비웠다.


“나, 질문 한 번만 할게.”


술 한 병을 다 마실 줄은 몰랐다는 듯, 수연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오른 머리는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뒤죽박죽 섞여갔다. 승연은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뭐라고 말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승연은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그 질문을 솔직하게 묻기로 하였다.


“수연이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해?”


“노 코멘트할게. 두 모금 마신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마. 제발 부탁이야.”


승연은 술을 마시려는 수연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수연의 손에서 막걸릿병을 가로채서,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야, 뭐 하는 거야! 너 미쳤어?”


주량을 넘어선 탓일까, 막걸리가 식도를 타고 위까지 넘어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속에서 울컥하고 따듯한 기운이 가득 퍼졌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쁜 기분도 아니었다. 그래도 술이 들어가자 방금까지만 해도 탁했던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유없는 자신감도 자꾸만 솟아 올랐다.


“그럼 대답해줘 수연아. 너한테 나는 도대체 뭐야?”


“말 안 해. 술 두 모금 마신다,”


“술 없잖아.”


“새로운 거 깔 거야,”


그건 진짜 위험했다. 대낮에 언덕 위에서 술판을 벌인 것만으로도 아찔한데 사간 술을 다 마셔버린다니,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던 승연의 마지막 양심이 그것만은 안된다며 소리쳤다.


“그냥 말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싫어?”


승연은 저 멀리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남은 막걸릿병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수연의 손을 다시 한번 꽉 붙잡아 끌었다. 수연이 발버둥을 칠 것 같아서 조금 걱정했지만, 수연은 의외로 큰 저항 없이 승연의 품으로 돌아왔다.


품속으로 돌아온 수연은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다가, 이내 뾰로통한 표정으로 승연을 올려다보았다.


“너 지금, 나 취했다고 생각했지.”


“으응? 뭐라고?”


아무런 맥락 없는 수연의 말에 승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봐봐, 역시 취했다고 생각하네. 사람 무시하는 거, 이승연 네 나쁜 버릇.”


그렇게 말하며 수연은 손을 뻗어 승연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아 아프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조금 울컥했다. 승연은 이리저리 휘두르는 수연의 양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아, 또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힘밖에 모르는 무식한 촌년.”


“뭐, 뭐라고? 말 다 했어?”


이쯤 되니 수연이 술 취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본모습을 알려면 술을 마시라고 하던가, 만약 지금까지 수연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던 거라면, 이건 이거대로 가슴 아팠다.


“키는 멀대같이 커서는, 어렸을 때는 똑같이 커서 이쁜 옷 사서 같이 입자고 했으면서.”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수연과는 키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했다. 사촌이라곤 해도 결국은 같은 피니까 지금처럼 키 차이가 벌어진 건 분명 활동량의 차이일 것이었다.


“그리고 이 포니테일, 내가 촌스러우니까 하지 말라고 했지.”


수연은 머리를 푸려는 듯 손을 바둥바둥했다. 이럴 때만 묘하게 힘이 주는 탓에 승연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풀 수밖에 없었다.


“..가슴도 혼자서 커버리고.”


양손을 꽉 잡혀 움직일 수 없으니, 수연은 승연의 가슴팍에 머리를 쿵 하고 들이박았다. 뺨을 칠 때처럼 힘은 실리지 않았지만, 역시 중량만으로도 묵직하게 아팠다. 승연은 수연의 헤딩을 막기 위해서 몸을 밀착시켜서 그대로 꽈악 안아버렸다.


“아아, 숨 막혀. 떨어져, 더워, 짜증 나.”


“수연아…. 너 술 취하니까 대박이다. 진짜.”


“안 취 했 거 든.”


안 취했다고 소리치며 바둥거리던 수연은 1분 정도 지나자 힘이 빠진 듯 승연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힘을 뺀 이후에도 수연은 한참 동안을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혀를 잔뜩 꼬며 말하는 통에,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수연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승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거리낌 없이 술병을 열었던 거나, 술 게임 같은 걸 말했던 것은 분명 수연 특유의 허세였을 것이다. 막걸리 반병이 주량이라니, 주당인 숙부와 숙모를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또 수연이답다면 수연이다웠다.


“아 몰라, 졸려 잘래..”


한참을 중얼거리던 수연은 그 말을 남기고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버렸다. 축 늘어진 수연을 등에 업고는 승연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막걸리 봉투를 손에 들었다. 여름의 태양은 길어서 아직 지지는 않았지만, 조금 옅어진 태양빛을 보면 7시는 넘어 보였다. 슬슬 어른들도 걱정할만한 시간이었다. 승연은 풀었던 머리를 다시 묶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시는 술 먹지 말자. 응?”


수연은 여전히 가벼워서, 조금 술기운이 오른 승연이였지만 어렵지 않게 언덕을 내려설 수 있었다. 사실 술기운이란 것도 방금의 난리 통을 거치며 이미 사라진 느낌이었다. 자신의 목덜미에 깊게 파묻고 있는 수연의 얼굴이 뜨겁게만 느껴지는 걸 생각하면 아마 술을 마시고 잠시 올랐던 열도, 이미 사라지고 없는 듯했다. 그래도 자신의 주량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안 것은 다행이라고 승연은 생각했다.


“하아, 언제 집에 가냐.”


등에 업힌 수연이는 뜨거웠고, 손에 들린 막걸릿병과 과자들은 무거웠다. 최악의 여름이었다.




“어, 뭐야 움직인다.”


전에 개구리를 보았던 길을 지날 때쯤, 수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발 얌전히 잤으면 좋겠지만, 수연은 당연하게도 등에 업힌 채로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연아, 제발 가만히 있어 줘….”


“어 승여니, 목소리다? 어딨어?”


“네 밑 에”

수연은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눈앞에서 살랑거리던 승연의 묶은 포니테일을 쭉 끌어당겼다.


“야, 야, 아파, 아파 뭐 하는 거야”


“승연이 아파? 왜 아파?”


“와 진짜 말이 안 나오네, 일단 손 놔.”


“내가 머리 풀라고 말했지.”


“뭐야, 너 술 깼어?”


“아니, 술 취했는데.”


목소리가 잠긴 듯 웅얼거리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정신은 들은 모양이었다.


“내려줄까?”


“나 술 취했다니까. 집까지 업어줘.”


그거야 당연하겠지, 승연은 혀를 끌 차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산등성이에 걸린 해가 지고, 조금씩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술을 먹은 언덕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지만, 수연을 업고 있는 탓에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승연아, 있잖아.”

얌전하게 등에 업혀 있던 수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왜.”


“나도 너 좋아해."


“알아.”



수연이에게 저런 말을 들었지만, 승연은 의외로 담담하게 넘길 수 있었다. 술 기운 탓일까, 승연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온함이었다.


“그때 키스하고도, 싫은 건 아니었어.”


한참이 지나도 승연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수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냥, 너무 무서웠어. 나도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을 표현해버리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지, 사촌이 애인이 된다면, 나는 예전과 같은 눈으로 너를 볼 수 있을지. 아무런 확신이 없었어.”

“..술 취했으니까 하는 말이지?”


수연은 대답 대신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어. 너를 어떻게 봐야 할지. 너의 기분은 어떨지. 오전에는 미안해. 그때는 정말로 머릿속이 새하얘서 뭐라고 반응하면 좋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거든.”


“그럼 지금은 조금 정리됐어?”

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의 침묵이 영원한 것처럼 이어졌다. 술이 올라 나른한 기분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와 맞닿은 체온만이 서로를 이어주는 것 같았다.


“그럼 그냥 사귀자 우리.”

그 거북한 침묵을 깬 건, 놀라울 정도로 상쾌한 승연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승연의 급발진을 따라갈 수 없다는 듯,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더 동그랗게 떴다.


“응, 일단 사귀고 생각하자. 너도 날 좋아하고, 나도 널 좋아해. 그럼 사귀면 되는 거잖아.”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니라니까!”


뚜껑을 딴 막걸리처럼 맥이 탁 빠지는 기분이었다. 수연은 업힌 자세 그대로 주먹을 움직여 승연의 어깨를 통통 때렸다.


“너 내 말 안 들었지. 우리 사촌이야, 가족이라고 거기에 동성, 사귀어서 어쩔 건데, 아빠한테 말할 수는 있어? 승아한텐 뭐라고 말하려고. 사귄다고 해도 원거리 연애는 어떻게 할 거야!”

“그런 건 내가 찾을게!”


승연의 외침에 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승연은 업혀 있던 수연을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서서 수연과 눈을 마주쳐왔다. 잠시 가만히 수연의 눈을 바라보던 승연은 이내 작게 웃으며 수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는 수연이한테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수연이는 대답해줬잖아. 그렇지?”


당연하게도, 술 게임의 이야기였다. 눈치 빠른 수연이라면 알아들을 것이라고 믿으며, 승연은 말을 이었다.


“수연이는 솔직하고 똑똑하니까 잘 알겠지만, 나는 솔직히 바보에다 촌스러워서 아직도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

승연은 가만히 수연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적어도 왜 키스했는지는 이제는 알 수 있어. 그냥 좋아하니까 키스했어. 그것 이상의 이유는 없어.”

승연은 수연의 뒷머리를 잡고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제부터 내가 찾을게. 좋아해서 어쩔 건지, 사귀어서 어쩔 건지 가족한테 어떻게 말할 건지, 미래는 어떻게 그려갈 건지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찾아볼게.”

그리고는 가볍게 수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혀를 사용하지도 않고, 그저 입술만을 맞추었을 뿐인데, 따듯하고 부드럽고. 가슴에 따듯한 것이 가득 퍼지는 기분이었다.


“그니까, 수연이는 그냥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 줘. 그런 게임이잖아. 나 더는 술 먹기 싫으니까, 어떻게든 답을 찾을 거야. 그러니까 5초는 너무 짧고, 조금만 더 길게 기다려줘.”


“그거 반칙이야, 멍청아.”


“그, 반칙이라도 게임이 조금 불공평하다고 할까.”


“아, 시끄러워, 분위기 좋았는데 진짜 너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이번에는 수연이 승연에게 입을 맞춰왔다. 이번에는 조금 길고 진하게, 풋풋하게 혀를 마주치는, 그런 조금은 어른의 키스였다.




“놀고 있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수연과 승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옆을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그것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스, 스 스스 스스승아야? 너 아픈거 아니였어?”

당황한 수연이 말을 있는대로 다 더듬어가며 물었다. 승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차며 승연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건 언니한테 들어요. 뭐야 이 술 냄새는, 둘이 진짜 술 먹었어?”


한참을 찌릿하고 승연을 노려다 보다가, 승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빨리 들어가서 씻고 자, 엄마랑 아빠랑 숙부 다 시내로 나갔어. 다큰 어른들끼리 노래방은 무슨.”

승아는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뭐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은 승연이 언니 방에서 자요. 수연이 언니. 내가 이불 다 깔아놨어요.”

“고, 고마워.”


승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희미한 주황색 대문이 보였다. 만약 들킨 게 승아가 아니라 어른들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 맞다 수연이 언니.”

앞서 걷던 승아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응? 왜?”


“사촌이면서 휴가때만 만날 수 있는 여자친구인 사람을 언니는 뭐라고 부를꺼야?”


“그,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수연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그건 내가 말해줄게."


승연이 뭔가 자신감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여름휴가 여자친구.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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