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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승지영원] 스물하나, 열일곱 - 3화앱에서 작성

공룡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8.29 21: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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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아, 못 본 새에 정말 많이 자랐구나."

갑자기 나타난 남성은 자신이 영원의 아빠, 지준형이라고 주장하며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그를 경계한 영원은 몸을 떨었고, 승지도 그런 그녀를 제 뒤로 감싸 숨기려 하였다. 그녀들의 확연한 경계심에 남성도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며 멋쩍게 말했다.

"아, 미안하다. 갑자기 나타나서 많이 놀랐지... 들었어, 작년에 장모... 아니 외할머니 돌아가셔서 지금은 영원이 혼자 살고 있다고... 그래도 아빠가 왔으니 인제 괜찮아."

남성의 말을 들은 승지는 속으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영원이 혼자 살고 있음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서 그렇게 된 것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작년이라면 영원과 편의점에서 만나기 시작한 때로 시기는 얼추 맞아 들었다.

그러나 승지는 지금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영원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살아있었음에도 그동안 영원을 외롭게 만들었고, 또 작년 영원에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그녀를 방치하고선 이제 와서 아빠라며 찾아온 그가 너무나 의심되어서 승지는 그가 마음에 안 들고, 아주 싫었다. 그때 영원이 말했다.

"저는... 아빠 같은 건 없어요. 그만 가주세요."

머뭇거리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는 영원에게 승지는 내심 놀라고 통쾌했다. 그녀가 자신과 생각이 같다는 사실이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녔다. 그러나 남성은 포기할 줄 모르는지 자신의 주머니에서 티슈조각과 펜을 꺼내어 무언갈 끄적이고는 바닥에 두며 말했다.

"영원아, 이건 아빠 번호야. 언제라도 좋으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그리고 아빠 또 올게."

또 온다는 그의 말에 승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험한 말을 할 뻔한 걸 참으며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 그리고 남성이 보이지 않게 되자 서둘러 영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영원아, 괜찮아? 많이 놀랐지?"
"응, 난 괜찮아."

괜찮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녀의 얼굴에선 지금의 복잡한 심경이 전부 드러나고 있었다.

"승지야, 미안. 나 지금 너무 피곤해서... 아까 대답은 나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알았어, 그럼 언니 집에 가서 자자."
"아니야, 난 집에..."
"언니가 우유 데워줄게."
"괜찮.."
"다음날 영원이 좋아하는 반숙도 해주고, 교복도 다려줄게."
"언니, 괜찮다니.."
"자기 전에 언니가 안아줄게."
"......"
"등 토닥토닥 해줄게, 응?"
"......좋아."

이대로 영원을 보내면 안된다고 생각한 승지는 영원을 필사적으로 붙잡았고, 끝끝내 그녀가 좋아하는 스킨십으로 영원을 꼬시기를 성공했다.

승지의 집에 도착한 영원은 씻고 나오기 바쁘게 승지의 티셔츠 차림으로 승지 품 안에 안겨들었다. 승지는 품 안에서 데운 우유를 마셔서 더욱 우유 향이 피어오르는 영원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가 잠드는 것을 도왔다.

그날따라 영원은 잠이 드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늘 영원이 하교를 할 때면 승지가 마중을 왔으나, 오늘은 승지에게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영원에게 마중을 가지 못한다는 문자만을 남기게 되었다. 처음 그 문자를 받았을 때 영원은 승지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낙심하였으나, 그다음 바로 온 [12시쯤엔 집에 도착할 거 같은데 언니 집에서 먼저 자고있어♥]라는 문자에 기꺼워하며 괜히 그것을 닳도록 몇번이나 보았다.

[알겠어] [알게] [얼른 와] [얼른] [보고싶] [보ㄱ]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승지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는 영원은 결국 [알겠어]를 보내고는 아쉬운지 자꾸만 휴대폰을 보았다.

그때 영원이 정류장에 도착하자 어제의 남성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녀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 영원아!"
"여기를 어떻게..!"
"어제 영원이 교복 입고 있었으니까..."
"전 더 할 말 없으니 가주세요."

남성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으나 영원은 그것을 단호하게 칼같이 끊어냈다. 그러자 그 순간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남성이 영원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영원아, 아빠 말 좀 들어봐. 널 혼자 둔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아빠는 너의 엄마한테 일방적으로 이혼 당한 거야." 
"그게 무슨..."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그 사람이랑 살겠다고 갑자기 너를 데리고 가는 바람에, 그렇게 우린 헤어진 거야."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요?"
"진짜야. 너를 데리고 가면서 나한테 양육비를 청구했는데. 여기, 이것 봐!"

남성은 가지고 온 작은 서류 가방을 뒤지더니 여러 개의 통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영원이 펼쳐보자, 바로 한 달 전까지 받는 이 이름 '박민혜'로 본인의 양육비가 입금된 것을 알 수 있었고, 심지어 7월 14일에는 '영원이 생일'이라는 이름으로 양육비 버금가는 금액이 입금 된 것 또한 확인 할 수 있었다.

"영원이 네가 아빠랑만 있는 것보다 엄마와 새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해서 아빤 영원이와 헤어진 거야. 그런데 설마 네가 혼자 살고 있을 줄은... 아빠는 꿈에도 몰랐어."
"말도 안 돼..."
"아빠가 미안해,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면 아빠 용서해줄 수 있겠니, 영원아?"

계속 무시해오던 목소리가 드디어 영원의 귀에 맴돌며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처음으로 듣는 아빠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영원은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친부 지준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깊게 팬 주름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그의 미소가 여태껏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부모의 자상한 미소였다.

"아빠..!"
"영원아,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혼자 외롭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오랜 이별 끝에 재회한 부녀는 하늘에 비가 쏟아지는 지도 모르고 서로를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영원은 드디어 조건 없는 사랑을 가지게 되었다.

***

12시에는 집에 도착할 거라는 문자와 달리 승지는 예상보다 늦게 일이 끝난 바람에 1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영원에게 [알겠어] 이후의 아무 연락이 오지 않은 거로 보아 이미 그녀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현관문을 조심히 닫고 조용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 달리 거실의 소파 한 쪽에 영원이 안 자고 몸을 웅크리며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승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영원아, 안 자고 있었어?"
"응... 언니 얼굴 보고 싶어서."

집에 돌아오니 자신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애인이 있다는 사실에 승지는 가슴이 뭉클해졌으나, 곧 그녀가 젖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영원아, 왜 이렇게 쫄딱 젖어 있어?! 아까 내린 비 다 맞은 거야? 역시 어떻게 해서든 언니가 마중을 갔어야 했는데..."

다급하게 수건을 가지고 온 승지는 영원의 젖은 머리 결을 닦으며 집안의 보일러를 세게 틀었다. 그리고 젖은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자 이번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원아, 울었어!? 무슨 일이야?"
"아빠가..."

영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호칭에 승지의 얼굴이 일순 무서워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 한 영원은 또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있었어... 나한테도 아빠가 있었어, 승지야."

영원의 울 것 같은 얼굴은 슬픔의 의미가 아닌 감격의 의미가 한껏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승지에겐 너무나도 절망적일 수가 아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좀 더 알아듣게 얘기해줘."

영원을 타이르는 듯이 말하는 승지의 목소리는 애가 탔고, 불안했고, 초조했고, 겁에 질려 있었다.

"아까 아빠를 만났어. 그리고 아빠한테 전부 들었어, 아빠는 나를 버린 적이 없었어."

영원은 지준형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승지에게도 전했다. 자신을 버린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지준형의 말은 모든 순간이 사무치게 외로웠던 영원을 구원해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승지는 그가 의심스럽기가 한이 없었다. 아무리 양육권을 잃었더라도 정말로 사랑했다면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싶어 한 번은 몰래 찾아왔을 법했고, 그랬다면 영원이 겪은 일을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승지에게서 지준형은 '이제 와서?'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얼굴이 승지가 이제껏 봐온 더러운 흙탕물의 면상을 하고 있다는 게 제일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언니가 우리 아빠 싫어 하는 거 나도 알아."
"......"
"그래도 말이야... 난 승지 네가 우리 아빠 너무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어떻게 그래."
"언니.."
"영원아,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넌 아니야? 내가 자기 애인이잖아."
"승지야, 그 사람은... 내 아빠야."

그 순간 승지는 영원에게서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가족 만큼, 아니 가족 보다도 더 자신이 영원을 사랑해 줄 수 있으나, 영원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승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일단은 씻자.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어서."

영원을 타이르며 말하는 승지의 목소리는 그저 절망에 가까웠다.

***

이후로도 영원은 종종 지준형을 만났다. 그는 타지에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시간이 맞을 때면 종종 서울로 오는 버스를 타고 영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바로 출근해야 하는 그의 이유로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둘은 꽤 가까워 졌다.

둘의 만남을 달가워할 승지는 아니었으나, 최근 들어 그녀의 일이 바빠진 탓에 은연중에라도 승지가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승지의 일이 바빠져 그녀가 영원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할 때면, 꼭 그 곁엔 지준형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었고, 영원이 방학을 시작하자 그녀는 알바의 수를 더 늘려 낮에는 레스토랑의 홀 서빙, 저녁에는 고깃집 서빙으로 꾸준히 대학 등록금을 벌고 있었다. 새벽에는 pc방 알바도 하려 했으나, 그것은 승지나 아빠를 만나는 시간을 위해 포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을 자주 보는 것은 아녔다. 승지는 요 며칠 일이 바빠진 탓으로 영원에게 전화나 문자를 겨우 하는 날이 늘었고, 지준형 또한 최근 들어 못 간다는 연락을 하기 일쑤였다.

그 날도 영원이 승지의 전화를 일과 삼아 집으로 돌아왔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자니 영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에 영원이 의아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영원아, 아빠야.]
"아빠?!"

휴대폰이 고장 나서 공중전화로 전화를 했다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기운이 없어 영원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지 물어보았고, 그는 뜸을 들이더니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영원아.. 아빠가 몸이 안좋아서 이번에 큰 수술을 하게 됐어..]
"네?"

지준형의 말에 영원은 금세 그가 만날 때면 종종 기침을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준형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녔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돈 좀 있을까? 아빠가 수술비가 조금 부족해서...]
"도... 돈이요..?"
[아, 아니다! 갑자기 미안하구나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이런 몹쓸 부탁을 해서...]

영원의 당황한 목소리에 지준형은 금세 의기소침해지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영원은 곧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준형의 말대로 그에겐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딸이고, 자신에겐 그가 하나밖에 없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앗, 아니에요. 그동안 모은 알바비 있어요. 아빠 수술 받는 건데 드려야죠!"
[그러니? 정말 고맙구나. 그리고 말이야. 영원이 인제 아빠랑 같이 사는 거 어떻니?]
"같이요..?"
[그래, 지금 영원이 사는 집은 팔고, 우리 딸은 아빠랑 아빠 집에서 같이 살자, 좋지?]

처음으로 듣는 우리 딸이라는 호칭에 영원은 기뻐하기보단 혼란스러움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이 부담스럽고 긍정을 강요하는 말에 영원은 곤란했다. 영원의 머릿속에는 어느 날인가 자신의 집 앞 가로등 앞에서 함께 살자고 고백을 하던 승지의 얼굴이 순간 뇌리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집은 아빠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우리 딸은 짐만 싸놔. 아빠가 금방 데리러 갈게.]
"앗, 아빠..!"

뚝.

지준형의 전화는 영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 새도 없이 끊겨버렸다.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 영원은 고민에 빠져 버렸다. 가족과 사는 것은 언젠가 영원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 분명하였음에도 이것이 그것이 맞는지 그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영원은 어느 순간보다도 가장 승지가 보고 싶어졌다.

***

다음 날 영원은 지준형의 말 때문에 일단 급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금방이라는 게 언제일지도 모르기에 일단은 준비할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해두자고 생각한 그녀의 짐은 고작 더플백 하나가 전부였다. 아무리 혼자 사는 사람의 짐이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살아왔던 곳의 짐이 고작 이 가방 하나에 들어간다는 것에 영원은 조금 씁쓸해졌다. 한편으로 영원은 승지에게 이 사실을 언제 어떻게 전하면 좋을 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영원에게 이런 고민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알바를 가야 할 시간이 된 영원이 급하게 옷을 챙겨 입으며 밖으로 나섰다. 문밖을 나서자 차가운 겨울바람에 그녀의 귀가 떨어질 듯 아려왔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늘 승지와 헤어지던 가로등이 나왔다. 종종 이곳에서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며 키스를 해주던 승지가 떠올랐다.

이번엔 승지와 처음 만난 편의점이 나왔다. 그러자 이번엔 저를 위해 먹을 것을 사주었던 첫날의 풋풋함과 승지가 취했을 때 풍긴 독한 술 냄새가 떠올랐다.

버스를 타고 길을 이동하니 승지와 갔었던 중국집이 보였다. 졸업식 날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한 자신을 유일하게 축하해주었던 승지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 해보면 그것은 영원의 중학교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다.

그 밖에도 곳곳에 맛집이라며 승지가 저를 데리고 가 밥을 먹은 식당이나 그녀와 함께 걸어온 길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평생 살아온 영원의 짐은 더플백 하나가 겨우였지만, 일 년간 승지와 만나며 쌓은 추억은 셀 수도 없었다. 고요한 호수에 작은 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지더니 작은 파동이 일었다.

***

"아얏..!"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는 영원이 테이블을 치우다가 불판에 손을 데여 작은 비명을 질렀다. 마침 그녀와 함께 테이블을 치우던 직원이 있었던 덕에 영원은 간단한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녀의 고집으로 병원은 가지 않았다. 병원을 가려면 알바를 째고 가야 하는데 그러기엔 돈이 필요한 영원에겐 사치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같이 일하던 직원이 영원이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면 그녀는 이곳에서 응급처치마저도 받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퇴근하고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은 낮보다 더 차가운 바람에 의해 귀가 찢어질 듯했다. 새빨개진 손끝을 모아 입김으로 데우는 것은 꽤 한계가 있었다.

낮의 일 때문일까 더욱 승지가 보고 싶어진 영원은 휴대폰을 켜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에 빠졌다. 혹시나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가 바쁜 상황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그녀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 영원의 휴대폰에 [승지..]이 나타났고 깜짝 놀란 영원은 그것을 급히 받았다.

"여보세요."
[자기야, 마쳤어? 어디야?]
"아, 응. 나 아직 가게 근처..."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줘, 마중갈게!]
"..응, 알았어."

때 마침 너무 보고 싶던 그녀가 마중 온다는 사실에 영원은 기뻐하며 그녀와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승지는 5분도 안되어서 영원에게 나타나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언제나처럼 강하게 안겨드는 승지에게 영원은 편안함을 느끼며 그녀 또한 승지를 안았다.

"내 강아지~ 어떤 못난이가 이렇게 이쁜 강아지를 길거리에 혼자 있게 뒀대? 누가 확 데려가 버리면 어쩌려구."

영원의 귀가 추워서 빨개진 것을 본 승지는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그녀의 목에 꼼꼼하게 감아주었다. 영원의 코 아래까지 덮인 목도리에서는 그녀의 향이 나서 영원은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아 목도리에 더 얼굴을 묻었다. 그 덕에 빨갰던 그녀의 귀가 서서히 온기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때 영원의 눈앞에 승지가 짠하며 파란 수국꽃다발을 펼쳐 들었다. 그것의 등장에 영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승지가 샐긋하게 웃으며 영원에게 건네었다.

"오면서 자기 생각나서 샀어."
"우와 나 꽃 선물 처음 받아봐."
"정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애한테 아무도 꽃 줄 생각을 안 했을까. 다 머저리들이야."

그녀의 갑작스러운 선물에 영원이 몸 둘 바를 모르며 꽃을 받아들여 승지가 감싸준 목도리를 살짝 내려 꽃향기를 맡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승지는 더 빨리 못 해준 것을 아쉬워하며 그녀의 기뻐하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다가 그녀 손의 밴드를 발견했다.

"어, 이거 뭐야. 영원아, 다쳤어?!"
"아, 별건 아니야. 그냥 일하다가 살짝 데인 거 뿐이야.."
"데였다고? 봐서는 병원도 안 간 거 같은데, 안되지. 덧나면 얼마나 아픈데... 얼른 차 타, 병원부터 가자."

영원의 일은 늘 밤늦게 끝이 나다 보니, 응급실을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새벽의 응급실은 생각 외로 조용하였고 그 덕에 그녀는 곧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가 그녀 손의 밴드를 떼어내자 진물이나 무른 피부가 함께 떨어지며 그 안의 붉은 빛 속살이 나타났다. 상처는 깊으나 부위가 크지 않은 덕에 관리만 잘하면 흉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다.

***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승지는 영원의 다친 손이 아플까 조심조심 쓰다듬으며 말했다.

"영원아, 다치지 마. 난 너밖에 없는데..."
"응, 미안."

승지의 목소리는 애절했다. 영원의 사과를 들은 승지의 얼굴은 더욱 고통스러워 일그러졌다. 

"네가 왜 미안해."
"그냥, 전부... 있지, 승지야."
"응?"
"아빠가 나보고 같이 살제... 지금 집 팔고, 아빠 집에서 같이."
"뭐? 언제부터?!"
"어제 전화가 왔는데, 언제부터 갈지는 모르겠어."
"영원이 넌 괜찮아? 나와 떨어져 사는 거... 그게... 자기 마음이야?"

작은 물방울로 작게 일렁이던 호수의 파동이 거센 비가 내리자 크게 요동쳤다. 잔잔함을 잊은 호수는 사방으로 물이 튀었고, 또 넘쳐흘렀다. 영원도 그랬다. 그녀의 밝고 맑은 눈동자에서 쉼 없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난... 언니랑 헤어지기 싫어...! 나는 언니한테 다 해주고 싶어. 그게 내 마음이야. 하지만 나에겐 아무것도...!"
"나는 너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나한테 해줄 필요 없어 노력하지 마. 그런 거 안 해도 사랑한단 말이야."

영원의 다친 손은 진물이 나 떨어지려던 더러운 밴드를 떼어내고, 상처 입은 피부를 잘라내어 약과 깨끗한 밴드를 붙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졌다. 그녀의 손은 아프고 짓무르고 새빨개져 이내 흉터가 될 뻔했다. 그 손을 감싸 쥔 영원은 고개를 숙여 작게 흐느끼었다. 흉터가 진 것이 낫지 않고 계속 아플까 봐 덜컥 겁이 나서였다. 하마터면 영원은 아주아주 소중한 것을 잃을 뻔했다.

"흑... 흐윽..."
"...내 강아지. 그만 울어."

흐느끼는 영원을 승지는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귓가에 미성의 목소리가 작게 속삭여 주었다.

"앞으로 우리는 다치는 일이 없을 거야. 기쁘고 좋은 일들만 생길 거야... 그치, 승지야?"
"응, 영원아."

***

승지의 침실에서 그녀는 영원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크고 기다란 손으로 어긋나는 박자로 토닥여지는 게 승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어서 영원은 좋았다. 그래서 영원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잠이 안 와?"
"아니, 그냥 좋아서."

영원의 좋다는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승지가 곧 미간을 좁히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영원아, 언니가 일이 전보다 더 바빠져서... 한동안은 지금보다 더 만나기 힘들 것 같아."
"아 그렇구나."

힘 없이 대답한 영원은 승지를 지금보다 자주 못 본다는 사실에 한 없이 슬퍼졌다. 그리고는 그동안 내심 생각했던 부분을 이번에 전하기로 다짐을 한 듯 승지에게 말했다.

"있지 언니, 그 일 그만하면 안돼? 언니 하는 일... 나쁜 일이잖아"

승지에게 있어서 일이란 좋고 나쁨은 없다. 다만 많이 벌고 못 벌고 만이 존재할 뿐, 그것에 승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응, 그래. 그게 영원이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러나 그것을 영원이 싫어한다면 승지의 생각은 바뀌고, 무조건 영원의 의견에 따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좋질 못해서...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번 일만 끝나면 자기 말대로 그만둘게."

자신의 부탁이 옳으면서도 어찌 보면 철 없고 고집스러운 부탁임을 영원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것을 금세 수용하는 승지가 고맙기도 한편 미안했다.

다시 한번 엇박자로 토닥이는 그녀의 손에 영원은 다시 집중했다. 승지가 말하는 이번 일만 끝나면 둘은 어떤 장애물도 없이 함께 할 것이다. 분명 그래야만 한다. 

***



3화에서 마무리 지을랬는데, 분량 조절 실패..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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