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학주의라고 했지만 별로 수위가 쌔진 않음
------------------------------------------------------------------------------------------------------------------------------
싱글거리면서 옆구리를 만져오는 아라의 손길에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교실에서 옷을 벗는다는 배덕감이, 눈앞에서 싱글거리며 자신의 몸을 훑는 아라의 눈빛이, 자신의 옆구리에 닿은 아라의 차가운 손가락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 이제 돌려줘, 아라야.”
영문도 모른 채 빼앗긴 휴대폰은 여전히 아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새로 산 휴대폰을 너무 자랑했던 것일까? 방금까지 같이 셀카를 찍고 그 사진을 꾸미면서 서로 웃고 떠들었는데, 왜 이렇게 돼버렸는지 수아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옷을 벗으면 휴대폰을 돌려준다, 그것이 아라와의 약속이었다. 덜렁 드러나 버린 자신의 맨 가슴을 필사적으로 가리며 수아는 아라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아라에 손에 들린 휴대폰은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지만, 수아의 손은 주춤거리며 아라의 눈앞에 멈추었다.
“나, 이제 학원도 가야…. 하읏”
옆구리에 닿은 차가운 손가락이 위로 향하는 감각에 수아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아연실색한 눈으로 아라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아라는 짓궂게 웃으면서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부모님, 한 테도, 연락….”
수아가 한마디 할 때마다, 똑같이 조금씩 올라오는 아라의 손은 어느덧 수아의 밑가슴까지 올라와 있었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밑가슴을, 그 옆의 갈비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다음은 가슴이고, 그다음은 유두라고 말하는 것처럼 상냥히.
“왜? 계속 말해.”
아라는 그렇게 말하며 깡마른 수아의 옆구리를 계속해서 훑었다. 이따금 손가락이 밑가슴에 닿으며 수아의 몸이 흠칫흠칫 떨렸지만, 그 손가락이 더 위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수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아라를 올려다보는 수아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가득 찼다. 아라는 이런 아이가 아닌데, 눈앞의 아라는 아라가 아닌 것처럼 낯설고 무서웠다. 수치심이, 공포가 너무나도 컸다. 아라의 차가운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은 교실의 문이, 이따금 창문 밖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모든 것이 두려웠다.
“계속 말하라니까.”
그런 수아의 망설임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라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손톱을 세워 수아의 옆구리를 꽉 잡았다. 아까의 소름 돋는 상냥함과는 다른 피부를 찢는 아픔에, 수아의 몸이 크게 떨렸다.
“아파, 아파, 아라야 미안해….”
고통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듯 흘러나온 수아의 목소리에, 아라는 만족한 듯 손톱을 내렸다. 쓰라림을 참지 못하고 짚은 옆구리는 아라의 차가운 손가락과는 대비될 정도로,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손톱에 살이 파여서 쓰라렸다.
“말할 수 있으면서.”
글썽거리는 수아의 눈에, 오늘 처음으로 보는 아라의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도 무심코 가만히 보게 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 아라의 반달이 된 눈이, 싱긋 벌어진 연분홍색 입술이, 작은 코가, 검은색의 긴 머리가 수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물론 현실은 보이는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아라의 미소에 시선을 뺏긴 것도 잠시, 이내 자신의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아라의 손길에 수아의 머리가 휙 젖혀졌다. 뒷머리를 잡아챈 아라의 손길에는 더는 상냥함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아윽, 아라야, 아파….”
“수아야, 네가 허락한 거다? 맞지?”
이번에는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수아의 뒷머리를 잡은 아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 아파..”
“나 지금부터 너 만질 거거든. 가슴도 만질 거고 아래도 만질 거야. 키스도 할 거야, 네 머리에도 목에도 배에도, 허벅지에도 다리에도. 다. 근데, 이건 절대 내가 강요하거나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다 서로 좋아해서 하는 거지, 맞지?”
“아, 윽, 아라야”
“대답해!”
잡힌 머리가 아파서, 윽박지르는 아라가 무서워서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눈물을 보고도 아라는 주춤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수아의 뒷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른 손으로는 수아의 몸에 유일하게 걸쳐있던 아래 속옷을 거칠게 쥐었다.
“아, 싫어, 아라야, 제발, 제발….”
드러난 가슴을 가릴 생각도, 눈앞에서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아이가 아라라는 사실도 잊은 채로 수아는 황급히 속옷을 벗기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잡힌 머리카락이 금방이라도 뜯겨 나갈 것같이 아팠지만, 수아는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속옷을 잡은 아라의 손을 밀어냈다.
“놔.”
얼음장보다 차가운 아라의 목소리가 수아의 등허리를 훑었다. 꾹 참았던 수아의 눈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방울은 어느새 헤아릴 수 없이 흘렀지만, 수아는 고개를 젓고, 또 저었다.
“싫어, 아라야 그만…. 해줘….”
“놓으라고.”
“우리 친구잖아, 아라야…. 그만하자….”
그것이 주제넘은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수아는 아라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아라가 자신을 친구로 대해준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버린 일진들의 괴롭힘. 한때는 자살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집요했던 그것을 막아준 것이 아라라는 걸 수아는 알고 있었다.
“아라야, 나 네가 좋아. 근데 이러는 건 싫어…. 미안해, 미안해, 제발 부탁이야….”
아라기 친하게 대해주는 것도. 매일 같이 점심을 먹어주는 것도. 가끔은 주말에 같이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라와의 모든 것은 좋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라가 원한다면 키스도, 더 한 것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 강제로 당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아라는 평소의 상냥함은 전혀 느낄 수가 없어서, 무섭고 또 무서웠다.
어떤 것이 아라를 바꿨는지, 수아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아라의 손을 잡으며 수아는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말했을까. 집요하게 속옷을 노려오던 아라의 손에 힘이 빠짐과 동시에 뒷머리를 잡고 있던 아라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억지로 천장을 향해있던 고개를 원래대로 하자, 수아의 시야에 아라의 얼굴이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라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아의 시선을 느낀 듯 아라의 눈동자가 수아의 시선과 닿았다.
“옷 입어.”
갑자기 내민 아라의 손에 움찔했던 수아였지만, 아라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자신의 브래지어였다.
아라의 강요하는 듯한 눈빛에 수아가 주춤거리며 속옷을 받아 들자, 아라는 갑작스럽게 수아에게로 다가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라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공허해서,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히익,”
“감기 걸리겠다. 집에 조심히 들어가.”
혹시라도 맞을까 싶어서 올린 팔이 무색하게도 아라는 그대로 수아를 지나쳐 갔다. 아라가 지나쳐 가며, 잠시 닿았던 수아의 왼손에는 그녀의 휴대폰이 들려져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아라는 미닫이문을 열고 나서야 수아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앞서가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아라의 모습에 수아는 속옷을 입는 것조차 넘기고 교복 블레이저를 걸쳤지만 공허한 아라의 눈에는 더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잠시 숨을 죽였던 아라는 조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오늘 일은 잊어줘.”
“잠깐, 아라야 같이….”
수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로 나간 아라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미닫이 문을 닫았다. 커튼이 처진 교실은, 고작 아라가 없어졌을 뿐인데. 너무나도 어둡게 수아를 집어삼켰다.
“가자….”
미처 못다 한 말이, 수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홀로 남은 교실속에서 블레이저의 단추를 끼우던 수아의 손이 멈췄다.
아라에게는 언제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이 사라진 만큼, 아라는 조금 짓궂을 정도의 장난을 치곤 했지만 그 손길은 언제나 상냥해서, 그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장난스럽게 웃는 아라의 얼굴은, 자신을 귀엽다고 말해주는 아라의 입술은, 웃으면서 자신을 보는 아라의 시선은, 모두 좋았다. 처음으로 친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준다는 것이 좋았다.
좋았는데. 아라는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
아라의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저간다. 그 발소리를 따라갈 용기는 수아에게는 없었다.
------------------
“아, 미안 손이 미끄러졌네.”
머리에 쏟아진 차가운 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책상 위의 교과서를 젖혔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키득거리며 웃는 반 아이들, 자신을 내려다보는 명백한 악의 섞인 눈빛, 목을 타고 흘러서 교복을, 브래지어를, 팬티를 젖히는 물줄기.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수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에 젖는 교과서를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수아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토끼가 그려진 앙증맞은 컵, 이하은의 이죽거리는 얼굴. 그리고 어느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녀의 패거리들이었다. 그것 조차도, 그대로였다.
“수아야 미안해 미안.”
수아의 눈앞으로 자리를 옮긴 하은은 허리를 숙여 앉아 있는 수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 하은의 갈색 눈은, 지겨울 정도로 많이 보아서 바라만 보아도 하은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수아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냐, 실수할 수도 있지.”
지금 하은의 눈은 명백한 악의였다. 자신이 조금만 실수하면 자신을 반쯤 죽여버릴 악의. 아라가 오고 난 후에는 본 적 없는 눈. 수아는 하은의 눈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닦을게.”
옛날의 하은이라면 걸레라도 던져주면서 얼굴을 닦으라고 했겠지만, 아라가 오고 난 후에는 하은도 그런 노골적인 일은 하은도 하지 않았다. 아라와 하은의 관계를 수아는 잘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은이 아라를 껄끄러워한다는 사실 정도는 수아도 알고 있었다.
익숙했기에, 수아는 머리에 물이 뿌려지거나 교과서가 젖는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아라가 없는 지금은 자신의 사물함에 있는 수건을 꺼내서 닦으면 될 일이었다.
“당연히 네가 닦아야지.”
하지만 눈앞의 하은은 그것조차 허락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둘러싼 패거리들 사이를 조금 비집던 수아는 어깨를 잡아 오는 하은의 손에 잡혀서 억지로 다시 앉혀졌다.
“그나저나, 수아 감 많이 떨어졌다, 그치?”
찰박찰박, 물에 젖은 수아의 책상을 만진 하은의 손이 그대로 수아의 뺨을 향했다.
찰싹, 그리고 삐익. 사정없이 돌아간 뺨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얻어맞은 귀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갑작스러운 하은의 행동이 수아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야, 너 때문에 나도 젖었잖아. 물 똑바로 안 맞아?”
자신을 바라보는 아연실색한 표정의 수아를 보며 하은은 다시 한번 수아의 뺨을 쳤다. 뺨을 친다기보단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 같은 둔탁한 소리에 수아는 책상째로 덜컹거렸다. 상황 파악이 안된다는 듯, 멍해진 수아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전에, 하은은 다시 한번 수아의 뺨을 쳤다.
“머리가, 나쁘면, 정신이라도, 차려야지.”
한 대, 또 한 대, 또 한 대, 또 한 대.
새하얀 수아의 양 뺨이 붉게 물들고, 연분홍색의 작은 입술에서 피가 터지고 나서야 하은은 손을 멈추고 수아의 턱을 잡았다. 언제나처럼 기분 좋은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초점을 잃고 멍해진 수아의 눈에는 언제나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뭐야, 울 정도로 좋았어? 그치 오랜만이지, 응?”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아라와 지내며 마음 한쪽 구석에 숨겨두었던 생각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방금 얻어맞은 뺨에서 느껴지는 아픔이라기보단 하은에게 얻어맞았던, 청소함에 갇혀있었던, 억지로 사진을 찍혔던. 그 옛날의 생각이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눈물이 차, 뿌예진 눈으로 수아는 교실 안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불쌍하듯 보는 사람은 있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아라 말고는.
“야, 차수아, 어딜 봐. 날 봐.”
턱을 잡은 하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정된 시야의 자유조차 뺏겠다는 듯 하은의 얼굴이 가까워져서 수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은의, 담배 냄새 섞인 난폭한 숨이 수아의 얼굴에 닿았다.
“응, 역시 넌 질질 짤 때가 젤 귀여워.”
시야 한구석에 하은의 손이 올라오는 것이 보여서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지만, 이번에는 하은의 손이 부드럽게 수아의 뺨에 닿았다. 하은의 손은 수아의 뺨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닦아주고, 귀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근데, 수아야 그거 알아?”
공포에 질린 먹잇감을 핥는 뱀의 혓바닥처럼 귓가를 훑는 하은의 목소리에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모습도 귀엽다는 것처럼 하은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라가 너 버렸어.”
“어?”
얼빠진 수아의 목소리. 언제나의 기분 좋은 소리에 하은의 몸이 작게 떨렸다. 이 순간, 수아의 이성이 공포에 압도되는 이 순간이. 옛날부터 하은은 제일 좋았다.
“다시 말해줄까?”
하은은 꽉 잡은 수아의 턱을 놓아주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어느샌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하은의 패거리들도 사라져서 수아의 시야가 확 트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하은의 친구들이.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반 친구들이.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아이들이.
그리고 뒷문에 기대어 서서,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는 아라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제 다시 지옥 시작이라고, 썅년아.”
그 말과 동시에, 다시 한번 휘둘러진 하은의 손이 수아의 뺨에 닿았다. 억지로 돌려진 수아의 시야에 더는 아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아파, 하은아…. 제발,”
“응응, 계속해 계속.”
찰싹 소리엔 머리가 흔들렸고, 퍽 소리에는 다리가 흔들렸다. 교실에서의 일은 장난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화장실 안에서의 하은의 폭력에는 하나의 거침도 없었다.
“살 빠졌네? 아닌 척하면서 유아라 그년이랑 존나게 붙어먹었나 보네.”
하은의 눈에 서린 명백한 악의는, 좀처럼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일어나. 일어나, 수아야. 그러다가 발로 차인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수아를 보고도, 하은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은 역시도, 자신이 조준을 잘못해서 수아의 명치를 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즐거웠다.
“미안해, 하은아. 제발 아파….”
발로 차인다는 소리에 움찔했던 수아였지만, 이제는 한계라는 듯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대신 웅크린 몸을 간신히 움직여 하은의 발목을 잡았다.
“신발 핥을게, 양말도, 다 할 테니까, 제발, 때리, 지만 말아줘.”
신발을 벗기려는 수아의 손길에 하은은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3개월간 아라와 함께 있는 수아는 그렇게 행복해 보였는데, 세 시간도 안 돼서 눈앞의 수아는 1년 전 그 옛날의 수아로 돌아와 있었다.
“수아야, 시발 내가 했지만 너 너무 싼 거 아니야?”
자신의 발을 잡는 수아의 손길을 뿌리치고, 하은은 쪼그려 앉아서 움찔거리는 수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야, 정신 차려. 이제 시작이야. 또 물 뿌려줄까?”
물이라는 소리에 수아는 경기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 코피가 났을 때 얼굴에 호스로 몇 분이나 쏴서일까. 덜덜 떨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아의 눈빛이 새삼 귀여웠다.
“하은아, 미안해. 미안해….”
“뭘 미안해, 이제 시작인데.”
그렇다고 계속 때리기에는, 눈앞의 수아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하은이라고 해서 수아를 망가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하는거니까, 조금 현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응이 약해진 수아는 때리는 재미가 없었다.
“울지 마, 누가 너 죽인 데?”
하은은 치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수아의 눈 주변을 닦아 주었다. 물 섞인 코피에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자 하얀 손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었지만, 하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아의 얼굴 전체를 쓱쓱 닦아주었다.
“흥 해, 흥.”
코에다 손수건을 대고 말해보아도, 수아는 벌벌 떨면서 자신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왜 이리 나를 경계하는 거지? 하은은 갸웃거리며 수아의 코에 손수건을 조금 더 세게 대었다. 물에 젖은 손수건이 코와 입을 막아서, 수아는 작게 캑캑거렸지만 하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하라고. 괜찮아, 어차피 버릴 거야.”
하은의 강압에 마지못해 흥 소리를 내는 수아였지만, 그건 코를 푼다기보다는 숨을 내쉬는 것에 가까웠다.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수아에겐 아직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손대중을 못 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눈앞의 수아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아야, 차수아 시발 너 진….”
‘아기 상어 뚜뚜루뚜루~ 귀여운~’
수아의 머리채를 강하게 잡고 윽박지르는 하은의 목소리는, 이내 그녀의 주머니 속 벨 소리에 묻혀버렸다. 살벌한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귀여운 벨 소리에도 수아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눈앞의 수아도, 걸려오는 전화도 귀찮아서 하은은 혀를 찼다. 느릿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에는, 역시나 그년의 이름이 찍혀있었다. 차수아도 마찬가지였지만, 귀찮은 것은 이 년도 마찬가지였다. 하은은 정말 질색하는 표정으로 휴대폰과 눈앞의 수아를 번갈아 보았다.
----------------------------------------------------------------------
아프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전화를 받은 하은이 더는 때리지 않는다는 걸까? 집에 가고 싶었다.
“수아야, 일어나. 네 여자친구 온대잖아.”
“으응,”
여자친구 아니라고 하은의 말을 정정할 기력조차, 수아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터진 입술이, 얻어맞은 배가, 밟힌 허벅지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눈물이 났다. 아라와의 3개월은 마음의 굳은살마저 없앴던 건지 옛날과 같은 하은의 폭력에도, 바보 같은 눈물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만 울어 좀.”
하은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손수건이 수아의 얼굴에 닿았다. 아까 피투성이가 된 손수건이 아닌,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하얀 손수건이었다.
“그건 안 버릴 거니까, 흥하면 뒤진다 진짜.”
하은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천 조각을 눈에 대니 눈물이 조금 멎는 기분이었다. 손수건에 눈을 가리고 있자니, 화장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몇 시간 만에 처음 듣는 사람의 기척. 수아는 그것이 아라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 왔어?”
손수건을 미처 내리기도 전에, 하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은과 아라는 껄끄러운 사이인 줄 알았는데, 하은의 목소리에는 묘한 친근함마저 느껴졌다.
“수아는?”
하은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거렸다. 수아가 손수건을 내리자, 하은을 따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아라의 얼굴이 보였다. 바보 같았지만, 아라의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됐다.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기껏 멈춰뒀던 눈물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들어온 아라는 가만히 수아를 바라보더니, 놀라는 기색 없이 하은을 돌아보았다. 아라의 시선에 하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깐 수아랑 둘이서만 있고 싶은데.”
“뭐? 싫어.”
하은의 대답에 아라의 차가운 눈이 하은의 시선에 닿았다. 하은은 언제나 아라를 기분 나쁜 년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한 게 없었다. 그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눈이, 솔직하게 기분 나빴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에 누워있는 게, 수아가 아닌 아라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막힘 없는 눈빛에, 하은도 질 수 없다는 듯 아라를 노려보았다. 서로 양보할 생각은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이었지만, 먼저 손을 턴 것은 하은이었다. 하은은 졌다는 듯 양손을 들면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아써, 나가면 되잖아. 둘이서 물고 빨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라고.”
대답도 없이 나가라며 고개를 까닥거리는 아라의 행동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하은도 아라와 별로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잠시 수아와 아라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은은 순순히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수아야 아팠어?”
하은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라는 처음으로 수아와 눈을 마주쳐주었다. 그 목소리에는 하은에게 향했던 독기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이런 상황에서도 수아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냐, 괜찮아. 괜찮아.”
수아는 비틀거리면서도, 벽을 잡으며 혼자의 힘으로 일어섰다.
“응, 나 멀쩡해.”
눈앞에서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아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수아는 있는 힘껏 강한 척을 했다. 부은 뺨이, 터진 입술이, 멍든 배가 모든 곳이 아팠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은은 아라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지만, 자신을 보며 저런 표정을 짓는 아라가 그럴 리가 없다고, 수아는 생각했다. 그야 지금도 나를 찾아와 줬잖아?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응, 괜찮다니까. 완전 멀쩡해. 옷은 좀 젖었지만.”
역시 조금 힘들었기에, 수아는 벽에 등을 대고 섰다. 그래도 시선은 아라에게 고정하고,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었다. 아라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수아야 힘들면 말해도 돼, 내가 도와줄게."
“나 진짜 괜찮다니까, 멀쩡해.”
싱긋 웃으면서 아라는 손가락으로 V를 만들었다. 셀카를 찍을 때면 아라는 언제나 손가락으로 V를 만들었다. 자신만이 아는 아라의 비밀. 수아와 자신만의 연결고리에, 아라가 조금이라도 안심을 느끼기를 바라며 한 행동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라는 주춤거리며 수아에게로 다가왔다.
“아냐, 아니야 수아야….”
“으응, 뭐가?”
그 말과 동시에, 아라의 몸이.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수아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멀쩡하게 자신에게로 다가오던 아라가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다니?
“아윽….”
쓰러진 건 아라였을 텐데, 90도로 돌아선 벽에 부딪힌 옆구리가, 벽에 닿은 팔이 부서진 듯 아파졌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신음에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90도로 돌아선 세상처럼, 폐조차 뒤집혀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아야 네가 괜찮으면 안 되잖아….”
옆으로 서 있는 아라가 조금 가까워진다 싶더니, 내던져진 손가락이 잘릴 듯 아파져 왔다. 아니, 잘린다기보다는 손가락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술 시간 실수로 손톱에 망치질을했을 때, 그것의 두 배는 되는 고통이 손가락의 한 점에 집중되었다.
“아파, 아파, 아라야, 아파….”
그 고통을 주는 것이 아라라는 것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지만, 고통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아라의 익숙한 하얀 운동화가 자신의 손가락을 밟고 있었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아라의 운동화를 잡고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간 아라의 다리는 뿌리 박힌 나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운동화를 밀어내려는 수아의 손은, 다급하면서도 가련했다. 그런 수아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라는 수아의 손가락을 짓이길 기세로 발을 바닥에 비벼댔다.
“살려주라고 말해야지, 하은이가 나를 너무 아프게 해서, 죽을 것 같다고. 아라, 네가 없으니까,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다시 알았다고. 나에겐 너밖에 없다고. 살려주라고.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수아야.”
“아, 윽, 아라,야…?”
처음 보는 아라의 모습에 넋이 나가는 것도 잠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수아의 검지 손톱이 바닥에 짓이겨지며 찢겨나갔다. 그제야 눈앞의 아라도, 아까의 하은이도, 어제 있었던 일도 모든 것이 깨끗하게 쓸려나갔다.
뺨을 맞거나, 주먹에 배를 맞거나 하는 아픔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이 온몸에 엄습했다.
“아아아아아앗! 아파, 아파 아라야 아파!”
“응, 수아야. 살려주라고 말해 빨리.”
“아파, 아파 진짜 엄마 살려줘, 엄마….”
“엄마가 아니라, 아라야. 유아라.”
아라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발에 체중을 더 실었다. 손톱이 벗겨져 드러나 버린 속살에, 부러진 손톱과 까끌까끌한 화장실 바닥이 쓸려서 화장실 바닥을, 수아의 빨개진 손을 더더욱 붉게 물들였다.
“아으으윽, 진짜, 죽을 것 같아, 아라야. 미안, 해 살려, 줘 제발. 그만….”
“응, 말할 수 있잖아.”
거의 오열하듯 내뱉는 수아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아라는 깔끔하게 웃으면서 수아의 손에서 발을 뗐다. 자유로워진 손을 수아는 황급히 품속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찢어진 손가락이, 교복과 닿아서 미칠 듯이 아팠지만, 손가락을 숨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수아야 안돼, 그러면 상처 덧나.”
아라는 싱글거리며 수아의 손목을 잡았다. 버텨보려고 했지만, 차원이 다른 힘에 수아의 얇은 팔은 힘없이 끌려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군데군데 손톱 조각이 박힌 자신의 검지를, 수아는 차마 볼 수도 없었지만 아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수아의 손가락을 바라 보았다.
“아프겠다. 피 나는 거 봐.”
아라는 웃으면서 피 나는 속살에 손가락을 잠시 튕겼다. 비명조차 잊어버리고, 고통에 덜덜 떨면서 수아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은 소독.”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가만히 수아를 바라보던 아라는 이내 거리낌 없이, 손톱이 벗겨진 수아의 검지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수아의 머리가 채 생각하기도 전에 뇌를 녹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손톱이 짓이겨질 때의 고통이 외부에서 온 거라면, 지금은 내부에서부터 고통이 밀려왔다.
“아윽, 아. 으.”
너무나도 강한 고통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타고 오는 고통이 전류가 돼서, 몸 구석구석을 망가뜨리고 마비시켰다. 더는 몸조차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히끅거리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수아는 그저 아라의 혓바닥에 맞춰 손가락을 움찔움찔 떨었다. 이 고통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응, 됐다. 깨끗해졌어. 봐봐 수아야. 니 손톱.”
귀엽게 내민 아라의 혀에는 부서진 손톱 조각이. 작은 입안에는 새빨간 피가 가득 차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수아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지만, 아라는 싱글거리며 손톱을 내뱉고는, 입 안 가득 찬 수아의 피를 꿀꺽 삼켰다. 수아의 하얀 손가락이, 아쉽다는 듯 자신의 입주변을 훑었다.
"이제 병원가자, 수아야"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전류에 아직도 정신이 아득한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아라의 손은 거칠기만 했다. 자신의 몸이, 다리가 다른 사람의 것같이 느껴졌지만 어깨를 잡은 아라의 손은 쓰러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다는 듯, 아플 정도로 꽉 조였다.
“하은이가 많이 아프게 했지? 미안해, 빨리 안 와서.”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는 아라의 손길에 수아는 작게 몸을 떨었다.
엉망이 된 수아의 앞머리를 다 넘겨준 아라는 수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힘없이 늘어진 수아를 자신의 가슴에 품자, 수아를 이렇게 만든 하은에게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품속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움찔거리는 수아는 아기 같아서, 마치 자신의 것이 되어준 것만 같아서, 그 분노조차 금방 잊게 하였다. 품속의 수아가 놀라지 않게, 아라는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도 괜찮아, 이제 다시 내가 지켜줄게. 수아에겐 나밖에 없으니까.”
귀에 닿는 아라의 숨결, 상냥한 목소리. 아라가 주었던 고통은 아직도 생생한데, 그 목소리에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이 마음이 미웠다. 힘없이 고개를 든 곳에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아라의 얼굴이 보였다.
“대답해야지 수아야.”
“으응, 고마, 워.”
“잘했어 수아야.”
아라는 만족했다는 듯,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 근데 어제 수아. 네가 거절한 거 솔직히 조금 슬펐어.”
뺨에 닿은 부드러운 입술과, 뜨거운 뺨을 핥는 아라의 작은 혓바닥. 하지만 순간 바뀌어버린 아라의 분위기에 수아는 짐짓 몸을 떨었다.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있는 아라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을 껴안고 있는 팔에, 자신의 다리를 지탱하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공짜로는 안 해주려고.”
꽉 잡은 아라의 손이, 내디딘 다리가 수아를 때리는 일은 없었다. 대신 수아는 조금 상쾌한 표정을 하며 뺨에서 입을 때, 수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입 주변을 핥는 아라의 얼굴은, 어딘지 뇌쇄적이었다.
“나, 도, 돈 같은 거 없어 아라야. 알잖아.”
아라의 선언에 당황하면서도, 수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었지만, 이것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알아, 우리 수아 힘든 건 내가 가장 잘 알지.”
아라는 가만히 수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은 상냥했지만, 그 이면에는 움직이지 말라는 아라의 뜻이 느껴졌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고, 싱긋 웃으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아라의 어여쁜 얼굴에,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키스로 받을게. 보답.”
“어?”
“하루에 한 번씩, 키스해줘. 그러면 옛날로 돌아갈 수 있어. 너도, 나도.”
아라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수아의 입술에 닿았다. 피맺힌 입술에 손가락이 닿자, 쓰라렸다.
“아, 아라야?”
“괜찮아, 친구끼리 키스는 평범한 거잖아.”
그냥 입에 하는 뽀뽀야, 아라의 손가락이 입술에도, 턱에도, 뺨에도 닿았다. 그 손가락은 차가우면서도 따듯하고, 상냥하면서도 강압적이어서 수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도 억지로는 안 해. 수아가 직접 해줘.”
속삭이듯 말하는 아라의 목소리가, 얼굴을 타고 내려와 귀를 가볍게 간지럽혔다. 어차피 선택권같은건 처음부터 없었다. 수아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아라의 본성이라고, 지금껏 자신이 보아왔던 친절한 아라는, 적어도 이곳에는 더는 없다고.
수아는 힘없이 발돋움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두 끝내고 싶었다.
아라의 얼굴은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지만. 자신이 발돋움해야 겨우 닿을 정도로 높고, 멀었다.
눈앞의 아라는 조금 놀라는 듯하면서도 싱글싱글 웃고 있어서, 수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키스라는 건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이 단순히 입에다가 하는 뽀뽀가 아닌 것은 수아도 알고 있었다. 입을 열고 혀를 섞고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는 외설적인 행위. 그것이 수아가 아는 키스였다. 그러기에 입술에, 아라의 부드러운 것이 닿자마자 수아는 입을 벌려, 아라의 벌린 입안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플정도로 딱딱한 자신의 행위에도 아라는 능숙하게 받아 주었다. 아라의 혀는 조금 까끌까끌하면서도 부드러워서, 혀를 섞자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해온 것은 수아였지만, 어느새 주도권은 아라에게 넘어가 있었다. 아라는 자신의 입안에 닿은 혓바닥을 넘겨, 수아의 입안을 이빨을 이리저리 훑었다. 입안에 들어온 아라의 혀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타액은 따듯했다. 자신의 뒷머리를 잡은 아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것 이상으로 아라의 키스는 상냥해서 오싹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첫 키스는 레몬 맛이라더니, 아라와의 키스는 조금 떫고 비린 맛이 났다. 그 미지의 맛이, 아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향기가. 자신의 손가락에서 나온, 지금도 흘러내려 아라의 교복 치마를 붉게 물드는 그 액체라는 것을 수아는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키스는 자신의 피 맛이었다.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그것 또한 자신답다고 아득한 정신 속에서 수아는 생각했다.
자신의 입을 탐하는 아라의 부드러운 그것은 도저히 멈출 생각이 없어서, 입안을 지나 다시 혀에 얽혀 왔다. 아까와는 다른 거친 움직임. 혓바닥이 아플 정도로 거칠어진 아라의 행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수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 주변을 흐르는 침방울처럼, 정신이 녹아버려서, 다리를 지탱하는 것조차 아라의 목 주변에 손을 감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수아의 다리가 풀리고 나서야, 아라는 조심스럽게 수아의 입에서 고개를 들었다. 휘청거리는 수아를 다시 한번 잡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병원 가자, 수아야.”
상냥한 아라의 목소리. 찢어진 손가락이 아프지 않게,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아라의 손길에 수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손가락의 고통조차 잊게 했다. 눈앞의 아라는 언제나의 상냥한 아라였다. 이제 모두 끝났다.
아라와 함께 먹는 점심을, 괴롭힘 없는 학교생활을, 주말마다 아라와 함께하는 데이트를 다시 떠올리며, 수아는 아득한 정신 속에서도 작게 미소 지었다.
--------------------------------------------------------------------------------------------------------------------------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