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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승지영원] 기억상실 - 승지앱에서 작성

공룡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20 23:42:50
조회 370 추천 18 댓글 4
														

눈을 뜨기 전 희미한 의식 너머로 들린 것은 정신없이 시끄러운 소리였다. 일정한 박자의 기계음과 바쁜 발걸음,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바퀴 소리가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딱 하나 슬픔에 울부짖는 소리는 편안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우는 소리는 너무나 예뻐서 달래주고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소리는 분명 웃으면 더욱 예쁠 것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하얀 천장이었다. 여전히 들리는 울음소리를 향해 눈동자를 굴리자 순한 눈의 여성이 그렁그렁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승지야, 흐윽...! 승지... 언니... 흑흑."

울지마. 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도 온몸을 방망이로 때리는 고통에 난 눈을 뜨는 것 조차 힘겨웠다.

눈을 뜬 나를 발견한 여성은 곧 사방을 막고 있는 하얀 커튼을 거두며 누군가를 소리쳐 불렀다. 내가 있는 곳이 응급실의 침대 위라는 사실을 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지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도 난 알 수 없었다. 나는 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다시 한번 눈을 떴을 땐, 조용한 방이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움직여지지 않아, 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눈으로 내 몸을 훑었다. 그러자 오른팔과 오른 다리에 깁스를 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니, 정신이 들어?"

비몽사몽 한 탓에 누군가 있는 지도 몰랐던 나는 목소리를 듣고서 그 존재를 깨달았다. 잠이 들기 전 보았던 순한 눈과 예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의 손을 잡으며 울먹거리는 눈으로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까보단 견딜만한 고통에 난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물었다.

"넌, 누구야?"

나의 물음에 여성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여성의 얼굴을 본 난 그보다도 더 놀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턱에서부터 시작된 말도 안 되게 큰 흉이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얼굴을 이상하게 웃음 짓게 하는 그것은 무척 흉스러웠다.

그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흉한 여자.'였다.

***

각종 검사를 받고서 내게 떨어진 진단 결과는 전치 4주의 골절과 기억상실증이었다. 내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경위는 4중 충돌의 교통사고라고 하는데, 희미했던 의식 속에서 느꼈던 응급실이 유독 시끄러웠던 이유가 그때의 부상자들이 몰린 탓임을 난 추측 할 수 있었다.

그래도 1인실의 병실을 이용하는 덕에 지금은 조용할 수 있었다. 이곳을 쓰게 된 데에는 흉한 여자의 덕이었는데, 그녀는 생긴 것과는 달리 돈이 많은 듯했다.

"언니, 몸은 좀 어때?"
"응, 뭐..."

병실의 문을 열며 들어온 흉한 여자가 말했다. 편의점에서 물을 사 온 그녀는 사고가 난 당시 나와 함께 있었다는데 손이나 팔에 약간의 찰과상 말고는 딱히 문제 없다고 한다.

'운 한 번 오지게 좋았네.'

"금방 줄게, 잠깐만."

그녀가 페트병의 뚜껑을 따려 하였으나, 손을 다쳐 그것이 쉽지 않은 탓에, 결국 지켜보던 내가 답답하여 그녀에게서 그것을 뺏어 대신 열었다.

"자."
"아냐, 언니 마셔."

그녀의 권유에 난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그것을 한모금 마셨다. 입에서 페트병을 떼어내고, 한 번 더 여성의 얼굴을 보았다. 갈색의 긴 머리, 그것과 같은 색의 순한 눈동자 이것만 보면 꽤 귀엽게 생긴 인상인데 얼굴의 흉터가 참 아쉬우면서, 어쩌다 저 꼴이 났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름이 지영원이랬나. 내 이름은 권승지고?"
"응, 언니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그녀의 말, 아니 영원의 말에 기억을 해내 보려고 머리를 써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탓에 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사실에 영원의 눈은 잠시 슬퍼 보였으나, 곧 괜찮을 거라며 웃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본인도 힘든데 애써 참기는... 응? 난 이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난, 그런 내게 당황하며 괜히 다른 말을 하여 화제를 돌려보려 했다.

"그런데 넌 나랑 같이 있었다는 거 치곤 꽤 멀쩡하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화제였다. 마치 본인만 멀쩡한 것을 질책하는 듯한 내 발언에 아니나 다를까 영원의 얼굴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난 미안함 보다 욱하는 심정이 나타났다.

'내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나, 울긴 왜 울어.'

"미안해, 나 때문에... 언니가 그렇게 된 건 다 내 탓인데... 나만 멀쩡해서. 내가 괜히 나가자고 해서... 거기다... 언니가 나를 지키려다가... 그렇게 돼서..."

그녀의 말에 그제야 내가 왜 이렇게 다쳤는지, 또 그녀는 어쩜 그리 무사한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자신에게 놀랬다.

'쟤를 구하다가 내가 이 꼴이 난 거라고?'

기억을 잃기 전 나는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었거나, 아님 저 여성이 내게 있어서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거나. 지금의 난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지금 확실했다.

"......울지마."

영원이라는 저 여성이 우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진 몰라도 그냥 보기 싫었다.

***

"야, 권승지 괜찮냐?!"
"아, 희신 언니..."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영원의 연락으로 온, 나의 이전 직장동료이자 친구인 희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역시나 그녀에 관해서도 난 아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다른 건 몰라도 지영원 관해선 기억해야지! 너랑 영원이..!"
"희신 언니!"

희신이 뒷말을 덧붙이려 할 때 영원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내가 아프니까 또 혼란스러울 테니까 라는 이유를 대며 영원은 내 기억을 끄집어내려던 희신을 말렸다.

난 희신이 하려던 말을 캐묻고 싶었지만, 그러다 또 영원이 울까 봐 조심스러운 나머지 우선은 참아보기로 했다.

입을 꾹 다문 희신이 이번엔 영원의 상태를 물었다.

"너는 좀 괜찮아?"
"네, 전 괜찮..."
"네, 는 무슨 보아하니 권승지 깰 동안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은 거 같구먼."

희신의 발언은 내 신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친 건 난데 왜 멀쩡한 쟤를 더 걱정해?... 그리고 내버려 두면 알아서 깼을 텐데, 쟨 왜 그동안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었데...'

어느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진 괜히 머리만 아플 거 같아서 더 생각하지는 않았다.

"난 괜찮으니까, 가서 뭐 좀 먹고 와... 그러니까... 영원아."

눈을 뜨고 처음으로 부른 그녀의 이름은 낯설었고 생각보다 그녀랑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되었다. 영원 또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기쁜지 눈을 접어 내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애달파서 급하게 시선을 거둔 난 희신을 보며 그녀의 식사를 부탁했고, 희신 또한 알겠다며 영원을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정말... 흉터만 없으면 제법 봐줄 만한 얼굴 같은데."

홀로 병실에 남은 내가 중얼 거리자 곧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들겼다. 방금 내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순간 놀랬으나 그러고 들어온 사람은 내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간호사였다.

간호사의 몸매는 내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을 만큼 예뻤다. 이 사실에 난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굳이 기억해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간 간호사와 눈이 마주치자 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색하게 내 눈을 피하며 드러난 귀가 붉게 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나가고, 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쉽네.'

***

병원 생활은 너무나 지긋지긋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난 늘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하는 영화를 보거나, 창밖을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잠을 자는 게 겨우였다. 내 곁에는 늘 영원이 있었는데, 그녀는 말수가 적은 편인지 함께 있어도 지루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평소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오후 때나 오는 희신에 의해 밥을 먹곤 했다. 영원을 챙기는 희신의 모습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냐 보였다.

'영원이라는 애가 손이 많이 가나 보네...'

그렇게 생각을 하던 찰라, 영원에게 편의점 심부름을 시킨 희신이 내게 말했다.

"야, 권승지. 너 기억이 없는 건 알겠는데, 애 잠 정돈 재워도 되는 거 아냐?"

희신의 말이 난 거슬렀다.

"걔가 안자는 걸 왜 나한테 뭐라고 해."
"뭐? 넌 매일 네 간호하는 애한테 그게 할 말이야?"
"내가 해달라고 한 적도 없어."
"야..."

희신의 주먹 쥔 손이 화를 못 이겨 떨리고 있는 게 선명했다. 그 모습에 반발심이 일어난 난 방금 전 내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나 이 꼴 난 게 걔 때문이라며, 그럼 그 정돈 당연한 거 아냐?"
"야."
"뭐, 내가 못 할 말 했어? 애초에 나도 얼굴에 흉한 흉터 있는 그런 애한테 간호 받고 싶지도 않다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그 순간은 나도 알 수 없었다.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그 말은 분명 후회 할 것임을 알았어도, 그때의 나는 바보처럼 뱉어냈다.

결국 나의 말에 제대로 빡친 희신이 간이 의자를 넘어트리며 일어나며 내 멱살을 잡아 당겼다.

"새끼야...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해?"
"언니!!"

그때 병실에 들어온 영원이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희신에게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풀어냈다.

"언니! 희신 언니 승지 아프게 하지 마요. 승지... 때리지 마. 승지야 괜찮아?"
"......"

나를 보며 울먹이는 그녀의 눈을 난 차마 보지 못해, 눈을 피했다. 곧 희신이 짧게 혀를 차더니 영원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너 집에 가. 이딴 년 더 봐줄 필요 없어, 가!!"
"이거 놔요, 제발. 안돼 승지... 승지야..."

같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원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힘없이 그녀에게 끌려갔다. 문이 거칠게 닫히며 잠깐의 폭풍이 지나간 듯 병실은 급격히 조용해졌다. 그곳에 홀로 남은 난 구겨진 옷을 피며, 방금 멱살을 잡아 당겨진 가슴팍을 매만졌다.

"아씨, 졸라 세게도 잡아 당겼네. 그러니까 이렇게 아프지..."

가슴의 고통은 멱살을 잡아 당겨져서 아픈 고통이 분명했을 것이다.

***

영원이 떠나간 지 삼일이 지났다. 그녀가 있든 없든 나의 병원 생활은 똑같았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똑같은 시간에 검사를 받고 전부 똑같았다. 다만, 창밖을 보는 시간이 유독 늘어났다.

창밖을 보면 내 시야 끝엔 버스정류장이 하나 보였다. 그것을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늘은 어제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오늘은 흐렸다. 흐린 하늘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래를 보니 강아지 산책로가 있는지 산책 중인 작은 갈색 강아지가 있었다. 그 강아지를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답답해서 음료나 뽑아 마실 겸 자판기에 갔다. 구석진 위치에 식혜가 있는데 그것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주친 사람 중 문병을 왔는지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파란 수국 꽃다발, 그것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 모를 아픔들이 그저 고통스럽기만 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 병실의 문을 두들겼다.

"영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전 내가 미소를 지어주던 간호사였다. 그녀는 평소의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어, 난 그녀가 개인적인 일로 날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늘 있는 보호자 분 안 계시네요."
"아, 네..."
"쓸쓸하겠어요, 혼자라서."

'쓸쓸한 건가...'

"...제가 달래 드릴까요?"

그녀에게선 코를 찌르는 듯한 향수 냄새가 났다.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유혹적이었다. 나의 앞까지 걸어온 그녀가 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 그랬을 텐데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영원의 얼굴이 떠오르며 난 그 손을 빼내었다.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거부감에 속이 메스꺼웠다. 난 적의를 드러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 그리고 다신 찾아오지 마."

간호사는 화를 내며 내 병실을 나갔다. 갑자기 내가 왜 그런 말을 한지, 난 알기 어려웠다.

"도대체 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날 밤 난 잠을 설쳤다. 사실 그녀, 영원이 떠난 후로 제대로 잠을 잔 적이 내겐 없었다.

***

그 날 이후 내 링거를 갈아주는 간호사가 바뀌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오기 싫은 것은 당연하겠지 생각했고 그것은 영원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내가 한 말을 희신이 걔한테 했겠지..."

난 창밖에 보이는 버스정류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다리지 않는 갈색 머리를 난 찾고 있었다.

"언니, 잘 있었어?"

창밖에 정신이 팔린 탓에 병실의 문이 열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 한 난 인사 소리에 그제야 누군가 들어 온 것을 알아차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원이었다.

어색하게 인사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디가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희신 언니 설득하느라 오래 걸려서... 몸은 좀 어때? 아, 이거 오는 길에 언니 생각나서 사 왔어. 예쁘지? 그리고 언니 배고플까 봐 이것저것 사 왔는데 먹을 수 있어?"

내가 아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혼자 조잘조잘 말했다. 한 손에는 시장에서 사 온 것 같은 과일이 담긴 검은 봉지와 다른 한 손에는 하얀 백합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 꽃다발을 보는 순간 무언가 울컥하였는데 그것의 정체를 난 알 수 없었다. 

그 울컥함의 정체를 알 지 못했기에 난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왔어?"
"응?"
"희신이한테 아무 말 못 들었어?"
"아..."

그녀의 표정에서 희신이 말했음을 난 알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너 때문에 다친 게 미안해서 그래? 그런 거면 안 와도 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언니 보고 싶어서 왔어..."
"나 좋아해?"
"...응."

그녀가 천천히 걸어 내게 다가왔다. 녹녹한 우유 향이 문뜩 느껴졌다. 그녀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빠져들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정말 좋아해."

영원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처음 느껴 본 온기지만, 처음 느낀 온기가 아녔다. 그것이 부드럽고 애달파서 난 눈물이 흘렀다.

"언니 어디 아파? 왜 울어!?"
"몰라, 나도 모르는데. 그냥 눈물이나."

'어쩌면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해서.' 귓가에 처음 듣는 말이 들려왔다. 난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일부였다.

소매를 손바닥까지 끌어당겨 손가락으로 쥔 영원이 나의 눈물을 조심조심 닦아주며 말했다.

"언니 울지마..."

'울지마 내 강아지.' 또 한 번 들려오는 기억의 조각에 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승지야."

그녀의 부름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멈추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전에도 느껴본 감각이었다. 그 감각을 다시 한번 되뇌자 샛노란 은행잎과 흰 백합이 한가득 핀 꽃다발로 코 아래를 가리고 있는 영원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기다렸어?' '매일 언니 생각만 했어.'

또 한 번 기억의 조각이 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심장이 터지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사랑해.'

"넌, 내게 어떤 누구야. 누군데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거야."

그녀에게 하는 나의 태도는 단순한 화풀이였다. 잔뜩 심통 난 나의 투정 어린 화풀이.

"승지야."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의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부름은 단순한 부름이 아녔다.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성의 울림이었다.

그 부름에 영원을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었다. 조잡하지 않고 예쁘게 빛나는 그것은 반지였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왼손 약지에 끼우자,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꼭 맞아 들었다.

"언니 수술 받을 때 빼야 한다 해서 내가 갖고 있었어... 사실 더 일찍 주고 싶었는데."

라고 말하며 영원은 자신의 손에도 끼고 있던 나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내게 보여주었다.

'죽을 때까지 네 편만 들어줄게. 나랑 있어. 네 옆에 있고 싶어.'

반지의 존재를 보자,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우린 부산에서 만나 사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만나 결혼을 한 사이였다.

'어째서 잊고 지냈을까 이렇게나 영원을 사랑하는데...!'

"사랑해, 영원아."

나의 왼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끌어 잡아 당겼다. 힘없이 내 품에 들어온 그녀를 난 강하게 끌어안았다. 기억이 없었단 이유로 그녀를 무시했던 시간을 다시 채워 넣듯 난 그녀의 귀에 사랑한다는 말을 무한히 뱉어냈다.

울리고 싶지 않던 그녀를, 난 지금 또 울려버렸다.

***

"애기야, 아~"

기억이 돌아온 난 영원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먼저 희신에게 연락해 앞서 있었던 일을 사과하며 그녀에게 딸기를 사 오라고 시켰다. 희신이 그것 때문에 사과한 거냐고 소리친 것에,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무튼 희신 덕에 딸기를 얻은 난 영원의 입에 그것들을 넣어 주었다. 영원은 하루 만에 돌아온 나의 모습에 조금 진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영원아, 언니가 너무 무심했던 거 정말 미안해."
"아냐, 나 때문에 기억을 잃어서 그렇게 된 거잖아. 언니 기억도 다 돌아왔고, 난 이제 괜찮아."
"아... 사실 그거 말인데 다는 아니야."
"응?"
"우리 6년? 쯤의 연애한 기억은 전혀 안나..."
"무슨 말이야? 6년이라니..."
"그게 부산에서 만난 건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이 우리 결혼하고 함께 살기 시작한 기억이라... 그렇지, 애기가 얘기 해주라. 우리의 6년 간의 이야기!"
"아..."
"분명 처음에 내 나이 속였는데, 언제 알게 됐어? 내가 자기한테 솔직하게 털어놨지?!"

영원에게 말한 것처럼 나의 기억은 불안정했다. 어딘가 중요한 부분이 짙은 안개가 깔린 것처럼 볼 수 없게 자리 잡혔고, 그것을 파내려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옥죄여서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영원에게 묻기로 하며 난 그녀와 지냈을 6년간이 너무 궁금했다.

지금 이토록 영원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6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영원의 흉터마저 사랑할 정도니까, 분명 그럴 터이다.

그러나 어쩐지 대답하기 곤란한 그녀의 눈치에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걸려던 차, 누군가 병실을 들어왔다. 그것은 남자 간호사였다. 병원 내에서 나의 소문이 나쁘게 돌았는지 나의 병실에는 더이상 여자 간호사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난 그러거나 말거나지만.

다른 사람의 등장에 영원은 마스크를 껴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내겐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의 체온과 혈압, 링거 체크를 하는 남 간호사의 시선이 자꾸만 영원에게 가는 것이 나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영원아, 이거 먹어."
"응?"

난 침대 옆 탁자에 영원이를 위해 준비했던 딸기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 대었다. 그러나 고개를 저으며 나중에 먹겠다고 하는 그녀에게 난 억지로 마스크를 벗겨 그녀의 입안에 딸기를 넣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영원은 당황하며 입에 들어온 딸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다시 마스크를 올려 썼다. 영원에게 싱긋 눈웃음을 그리며 살며 시 남성의 눈치를 보니, 그는 영원의 얼굴에 난 흉터에 심히 놀란 눈치를 하고 있었다.

곧, 남 간호사가 병실은 나가고 영원이 내게 물었다.

"방금 뭐야?"
"뭐가?"
"마스크 일부로 벗긴 거잖아. 저 사람 보라고."
"저 자식이 자꾸만 자기 보잖아. 짜증 나게."
"그래서 내 얼굴의 흉터를 그런 식으로 이용한 거야?!"
"영원아?"
"이게 어떤 건지는 알고나...!"

순간 높아진 그녀의 언성에 난 아차 하는 심정이 들었다. 어쩌다 생긴 흉터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녀에게 아킬레스건이었나 보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그녀에게 실수를 한 난 입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

병원의 소등 시간은 무척이나 빨랐다. 소등하면 쥐 죽은 듯 조용해지기 때문에 나 또한 늘 일찍 잠을 청했지만, 오늘따라 달이 너무 밝아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영원아, 우리 잠깐 산책 갈까?"
"언니 다리도 안 좋은데 무슨 산책이야."

칼 같이 거절하는 탓에 난 금세 꼬리를 말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나는 아녔다.

"그럼 하늘 정원은? 거기는 안 머니까 별로 안 걸어도 되잖아. 나 너무 여기에만 있어서 답답해, 응?"

투정 부리 듯 말하자, 영원은 결국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작게 뱉고는 나를 태울 휠체어를 가지고 오겠다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빨리, 난 목발을 잡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거 타면, 자기랑 손 못 잡잖아. 그러니 난 이게 좋아."

영원의 손을 잡으며 난 최대한 멀쩡한 척 걸었다. 영원은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할 수 없다 느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우린 걸었다.

병원의 복도는 옅은 조명만이 켜져 있어서 조용하고 또 음산했다. 그러나 그 끝의 하늘 정원과 연결된 유리문은 정원의 조명 빛이 새어 들어와 그곳만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유리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에 기분이 좋아 눈이 감겼다. 가끔 들리는 바람 소리만이 귀를 간질였고,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커다란 보름달이 밝아, 주변의 조명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근처의 벤치에 앉은 우리는 기대어 서로의 온기로 몸을 데우고 있었다.

하늘 정원은 예뻤다, 예쁜 꽃과 아름다운 달.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빛이 나는 영원. 모든 게 좋았다.

"아, 너무 좋다."
"..."
"영원아?"

지금의 시간이 좋아 행복한 나의 얼굴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사뭇 어두웠다. 잠시 한참 고민하는 듯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이대로 언니가 나머지 기억을 못 찾아도 난 괜찮을 거 같아."
"뭐, 난 싫어. 우리의 6년 추억을 잊으라니 그건 너무 아깝잖아."
"...사실 우리 6년 동안 좀 안 좋았어, 힘들고 괴롭고 많이 아팠어... 그래서 그것이 또 언니를 아프게 할 바엔 지금처럼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것도 난 괜찮을 거 같아."

영원의 발언에 난 조금 충격을 받았다.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던 나의 이상론이 뒤집히자 가슴이 쓰라렸다.

"그래, 그게 영원이 네가 원하는 거면 알겠어."

아프기만 한 기억이면 영원의 말대로 모르는 채로 있어도 괜찮을 거라 난 생각했다. 살며시 그녀를 안아 그녀의 녹녹한 우유 체향을 난 깊이 마셨다. 그녀의 말대로 지나간 일들 따윈 잊어버리고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고 생각했다.

어느새 하늘 정원의 소등 시간 마저 찾아왔다.

"그만 들어가자."
"응."

다시 한번 목발을 집고 천천히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유리문을 밀어 열자, 아까는 밝아서 눈치채지 못했던 그곳의 센서 등이 밝게 빛을 내었다.

"아."

그 순간 나의 몸은 얼어 붙은 듯 정원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밀었던 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놓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며 문이 닫혔다.

"언니 왜 그래?"
"울지마..."
"언니?"
"영원아, 울지마. 안돼, 우리 애 아프게 하지 마. 미안해, 영원아."

난 목발을 집던 손을 놓으며, 내 옆의 영원을 껴안았다. 나의 무게를 지탱하기엔 여린 영원은 곧 바닥에 주저앉으며 나 또한 그녀의 위에 주저 앉아 버렸다.

"승지야, 괜찮아?! 어디 아파?!"
"영원아... 영원아. 괜찮아 영원아, 울지마. 떨지 마. 언니가 있어, 괜찮아."
"승지야 왜 그래 갑자기."
"미안해, 영원아. 이젠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언니... 언니!"

난 영원을 숨쉬기도 힘들 만큼 강하게 안았다. 센서 등 아래 영원은 그 불빛에 떨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떨고 있는 기억의 환상을 난 바라보았다.

기억이 돌아왔다. 모든 기억이. 영원의 흉한 흉터는 나의 비겁한 사랑에서 시작된, 나의 추악한 업이었다. 절대 잊어선 안됐을 나의 죄악. 그것을 잊어도 된다고 한 나의 생각은 무척이나 이기적이었다.

"영원아, 정말 미안해... 미안해. 너를 잊어서, 너를 또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해."

나의 기억은 단순한 영원과의 추억이 깃든 기억이 아니다. 그녀에게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의 벌이었다.

"...정말로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구나."
"응, 흐윽... 미안해, 미안해 영원아. 내가 너무 미안해."
"아니야, 난 괜찮아 언니."

하늘 정원은 예뻤다, 예쁜 꽃과 아름다운 달.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빛이 나는 영원. 모든 게 좋았다. 그 속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더럽고 추잡했다.

나는 정말로 흉한 여자다.

***


드디어 내일 낙차 발매!! 외쳐 갓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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