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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했다. 분명 저번엔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틈도 없이 용사가 찾아왔었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폐쇄적인 숲 속 엘프 마을이라 그런지 용사의 소식조차도 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른 곳과 수정구로나마 교류하는 엘프 장로인지 촌장인지 하는 아줌마가 용사 이름이라도 알려주니까 망정이었지.

이전 삶이었다면 그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했겠지만... 나는 활과 여행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용사를 모른척하기엔 이미 그녀를 너무 좋아하게 돼버렸다.

엘프들은 내가 마을을 떠나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원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는지, 어딜 가도 먹고 살 말괄량이라며 누구 잘못 쏴죽이지 말라는 농담만 듣고 말았다.

그렇게 엘프 마을을 떠나, 일주일 동안 마을 세 개를 거쳐 수소문해 찾은 용사의 일행들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드워프 탱커가 사제를 하고 있었고, 사제였던 언데드가 마법사를 하고 있었고, 대마법사 할아버지는 비실비실한 몸으로 갑옷과 방패를 입고 있었다.

언데드 빼고 참 어울리지 않고, 탱커는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아 웃음을 참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용사님은요?"

"뭐야 시발, 그딴 년을 왜 여기서 찾아."

드워프 사제가 험하게 욕을 했지만 어느 게임 소설에서든 힐러가 입이 험한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던 거니까 그러려니 했다.

"안좋은 일이 있으셨는지 열흘 전에 중간에 파탈하셨어요. 일단 하는데까진 해봐야죠. 못깨도 뭐, 다음에 깨면 되고."

열흘이면 내가 되돌아온 시점이다. 그들에게 용사와 헤어졌던 마을을 물어 찾아가는데에 또 이틀이 걸렸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또 용사를 찾으려다, 세상이 한 번 더 리셋됐다.

이번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 당신은 S급 공략대상입니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알림창을 보지도 않고 집에서 뛰어내려 곧바로 엘프 마을을 벗어났다. 분명히 과거로 돌아오는 조건은 용사의 죽음이겠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한번 더 죽었다는 말이니까, 상당히 착잡해졌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삶에서 곧바로 찾아간 용사는 이미 무언가를 할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동료들은 아마 마왕을 잡겠다는 목표를 향해 떠난 상태인 것 같았고, 혼자 여관도 아니고 분수대 광장 앞의 벤치에 누워있는 꼴은 노숙자나 다름없었다.

"용사님."

안타까움에 가까이 다가가서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용사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용사님."

"저 그런거 아니에요."

귀찮음이 물씬 묻어나는 말투에 가슴이 저려왔다. 달콤한 말만 속삭이고 애정어린 웃음들은 전부 가식이었을까. 그렇지만 그 가짜 친절들도 나는 너무 상냥하게 느껴졌었는데.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제인."

그녀는 곧바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잠깐 눈썹이 움찔거리더니, 슬그머니 눈을 뜬 용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불렀어요?"

"용사님 이름이요. 저번엔 기억 못해서 못 불렀지만, 이번엔 장로님한테 물어보고..."

"진짜로... 진짜로 일라이자 사람이에요? NPC가 아니라구요?"

"진짜에요."

벌떡 몸을 일으킨 용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제가 일라이자를 가지고 놀았네요."

NPC가 아니니까 바로 태도가 바뀌는 걸까. 아니면 이미 다 포기한 상태라서 진심을 내비치는 걸까. 무엇이든 간에 제인의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아보였다. 움푹 패여있는 야윈 뺨에, 퀭한 눈동자. 일어났던 게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쓴건지 그녀는 다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런 그녀를 받아내 내게 기대게 하고 물었다.

"밥이라도 먹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이번 생은 이미 글러서."

"왜요?"

"그 할배가 메인탱에 드워프가 힐러면 못깨요."

"아... 저번 파티도 그랬는데 이번에도요?"

"그래서 포기하고 굶어 죽은건데, 이번에도 그러려구요."

웃으면서 농담처럼 하는 말에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대체 이런 삶을 얼마나 살아온 걸까. 마왕을 잡으면, 혹은 용사에게만 보이는 퀘스트를 깨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기약없는 게임을 진행해왔을 용사의 손을 꼭 잡았다.

"제인, 저도 게임을 잘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서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활 잘 쏘시던데. 재능있는 거에요."

"어쨌거나요. 다음생에도 제가 찾아올테니까 이렇게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요. 알겠어요?"

"좋아요."

용사의 힘겨운 숨소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그리고, 다시 다음 회차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