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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말뚝

Ly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1.14 09:17:36
조회 131 추천 12 댓글 2
														

“안 돼.”


 그게 간신히 말문을 열었을 때 들은 얘기였다.


“누구랑 사귀고 결혼을 한다고?”


 어렵게 뗀 입술은 난폭하게 꿰매였다. 사랑을 증명받고 싶다는 건 아직 이른 얘기였을까.


“안 돼. 엄마는 절대로 그런 꼴 못 본다.”


 겨우 불씨를 피우던 용기는 젖은 재만 남아버렸다.


“그래, 아빠 생각에도 넌 아직 젊으니까 좀 더 사람을 만나다 보면…….”


 눈시울에 온기가, 혀끝에 비릿함이 느껴졌다. 내가 바라던 게 그렇게나 문제였을까. 집 안을 채운 차가운 공기에 어는 손끝, 짐을 챙겨 넣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다.


“너 대체 어딜…….”


 단단한 철문은 목소리를 잘도 막아주었다. 이렇게 급하게 찾아가도 괜찮을까. 뽀득뽀득 밟히는 길에서도,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찾아가면 놀랄 텐데. 왜 그랬는지 물어볼 텐데.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깨끗한 보도블록을 밟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 날씨는 왜 이리 다른지. 맺히는 입김이 따듯해 보일 지경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걸어가면 적당한 냉기에 눈가가 식었다. 입안에도 금방 딱지가 앉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다. 하나, , . 벨을 눌렀다. 간격이 긴 걸음 소리가 곧 요란해진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있는 힘껏 지른 소리. 너무 그런 모습을 보여주긴 싫을 테니까. 집 안이 뒤집어지는 소리가 난다. 손을 녹이고 있으면 문이 벌컥 열린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무래도 꽤 편하게 있었나 보다. 옷도 얼마나 서둘러 입었는지, 깔끔해 보여야 할 옷이 주름이 잔뜩 져 있다.


“괜찮아요.”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오히려 신경 쓰는 게 느껴져서 기쁘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달라붙으며 얼굴을 묻어버렸다. 방금 까지도 잔뜩 우울했으니 좋은 표정이 아니었을 거다.


“집에서, 일이 조금 있었어요.”


 실수다. 품 안에서 입술 상처를 짓씹었다. 태연한 목소리를 내어야 했는데, 왜 떨어버린 걸까.


“얘기… 했구나…”


 언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이끄는 손이 떨렸다.


“미안해요.”


 겨우 상의만 하던 걸 얘기해버렸으니까.


“아냐, 나도 허락받고 싶었는걸. 결국 안 됐지만.”


 언니의 목소리가 썼다. 거부당한 건 나 혼자가 아니니까. 우리가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그냥, 이대로 둘이 어디라도 갈까요?”


 그게 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은 무책임하게 움직였다. 언니 가족들은? 직장은? 그리고 같이 지낼 집은?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주제에, 아무 생각도 없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럴까.”


 한숨 소리, 답답한 표정. 나 때문이다.


“갈 수 있어요?”


 나는, 아마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연락만 제대로 하고, 마감만 지키면 되었으니까. 이기적이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남에게도 그걸 강요한다.


“어떻게든?’


 저 말이 단순한 위로이길 바랐다. 어설프게 토해낸 것에 진심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그건 사람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뿐이다.


“됐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도망을 치더라도 그건 나 혼자여야 한다.


“괜찮은데.”


 사랑의 도피란 건 어디 싸구려 로맨스에나 나올 얘기다. 아무 생각 없이 도망치는 건 망망대해 속 조각배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빈말로라도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듣는다는 건, 얼마나 큰일인지.


“그런 말 아무렇게나 하는 거 아니에요.”


 느릿한 손놀림이 등을 토닥였다. 나른할 정도로 풀린 태엽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도, 안 되더라. 예전에, 딱 한 번 그랬는데. 그럴 거면, 연을 끊자시더라.”


 여린 한숨이 끝나니 집 안이 고요했다. 시간을 차갑게 가두어 놓은 것처럼 냉장고만 한참을 웅웅거렸다.


“그래도, 안 돼요.”


 웃음이 쓸쓸했다. 그렇다고, 덥석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이기심으로 모든 걸 잘라버려선 안 되었다. 우린 영원하다는 찰나의 거짓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아무도 없이, 모든 걸 숨기면서 영원을 살 수는 없었다.


“우리 은월이랑만 있어도 괜찮은데.”


 그래서,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혼자만 살 수 있어서는 안 되었다. 시간이 다시 얼어붙었다. 검은 TV 화면 속엔 손잡은 우리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 도망치지 말아요. 혼자 살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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