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니아.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싸워 왔어.]
[10년 전 남로마나 공국.]
[우리는 기지를 방어하고 있었어. 유시아의 마족들이 작정하고 대군을 몰고 왔지.]
[숫자도 화력도 부족했어.]
어두컴컴한 바닷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세니아에게는 루이사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루이사? 어디 있어?"
[해야 할 일이 있어]
"루이사?"
[해야 할 일이 있어]
세니아의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새까만 바다에 작은 점 같은 빛이 나타났다.
[해야 할 일이 있어]
빛이 점점 밝아졌다. 퍼져나간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세니아가 서 있는 장소를 밝혔다.
[해야 할 일이 있어]
빛이 태양이 되고, 갈색 황토가 깔린 너저분한 기지의 풍경이 드러났다.
"여긴…. 어디야?"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포탄이 지근거리에 떨어졌다. 이명이 세니아를 덮쳤다. 이번엔 진짜 고막이 찢어진 듯 했다. 폭풍과 열기에 세니아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루이사… 루이사!'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수라장이 된 기지에서 세니아를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넌 그대로 일어서서 지팡이를 집었어.]
루이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렸다. 여긴 대체 뭐지? 꿈인가? 자신의 기억? 세니아는 의문점이 많았지만 날아오는 미사일을 보고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집어 용해 마법을 사용했다.
[헬리패드에서 벗어난 너는 나랑 합류해서 방어 진지로 달려갔지.]
뭐가 뭔지 모르는 전장에서 세니아는 루이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사는 항상 자신을 구해줬으니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번이고 구해주었고 항상 곁에 있어 주었으니까.
'아무도 믿지 마'
모르는 목소리가 노이즈처럼 섞였다. 루이사보다 따뜻한, 어딘가 그리운 목소리.
하지만 세니아는 따뜻하지만 모르는 목소리 대신 루이사의 차갑지만 익숙한 목소리를 택하기로 했다.
10년 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이사. 여전히 은발이 매력적이었고 여전히 눈동자는 차가웠다. 압도적인 마법 실력도 변함이 없었다. 적들이 발사한 형형색색의 광탄들을 남김없이 요격했다. 루이사는 곡사포가 터지는 재투성이 전장에서 홀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한눈을 파는 사이 동쪽 지역 최전방 방어선에 마력 탄들이 날아왔다. 녹색 마법탄. 토(土)속성 탄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진흙 칼날이 열 명 남짓한 방어 병력을 순식간에 난도질했다.
[동쪽 방어선이 뚫리고 마족 병력이 쏟아져 들어오자 너는 적색 마법탄을 쏘아 시간을 벌고 후퇴했지.]
세니아는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기고 천천히 영창을 했다. 루이사 정도의 마녀라면 10초 정도면 충분하지만, 보통의 마법사는 1분은 넘게 걸리는 영창이다. 소모하는 마력도 많고. 침착하게 루이사가 시킨 대로, 배운 대로 영창을 했다.
"ist yel u t, kel ter yul……"
마족 보병들의 격발음과 군홧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세니아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루이사를 생각했다. 루이사. 루이사. 루이사. 루이사. 루이사. 루이사. 레비. 루이사. 루이사. 레비. 레비. 루이사. 루이사. 레비……
'레비? 누구지? 무슨 이름이야?'
루이사 사이에 끼어든 불순물 같은 이름. 하지만 어딘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름. 영창을 하면서 세니아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마족 보병의 수류탄이 세니아의 엄폐물 바로 앞에서 폭발하면서 세니아의 혼란은 진정되었다. 정신 차린 세니아는 남은 영창을 끝냈다.
"fin!"
세니아가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적색 화(火) 속성 탄을 마족 보병 머리 위로 쏘아 올렸다. 주변의 제국 보병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던 마족들은 반응이 늦었고 그들이 세니아를 향해 자동소총을 겨누었을 때 이미 사방으로 빗발친 불꽃 화살들이 그들을 태워버렸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고, 겨우 몸만 추스린 채 트럭을 타고 기지를 빠져나왔지]
루이사의 지시만 따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니아는 트럭에 올랐다. 10년 전의 루이사가 세니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채 트럭을 향해 포신을 돌리던 마족 군단의 전차를 거대한 얼음 창으로 꿰뚫었다.
'고마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세니아는 사랑하는 자신의 반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쪽을 봐주지는 않지만.
트럭은 전속력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덜컹덜컹거려서 엉덩이가 아팠다. 쏠 줄도 모르는 총을 방금 전까지 어설프게 쏘아댄 탓인지 어깨도 욱신거렸다. 위아래로 진동하는 차체 때문에 멀미까지 났다. 최악의 전장이었다.
'엎드려.'
루이사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니아가 그 목소리에 따를지 망설이던 순간 루이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도망치던 우리의 트럭을 레비아탄이 가로막았어]
갑자기 트럭이 멈추어 섰다. 아니, 멈춰 섰다기보다는 부딪혀서 멈춰졌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지만, 트럭은 벽에 부딪힌 것처럼 찌그러졌다. 운전병은 충격으로 즉사했다.
급정거로 앞으로 쏠린 보병들이 머리나 어깨를 부딪치며 통증에 신음했다. 완전 군장한 보병들보다 가벼웠던 세니아와 루이사는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코가 아파져 왔다. 하지만 이어지는 공격은 코 하나 깨지고 자빠진 게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무수히 많은 바람의 칼날들이 미처 엎드리지 못한 제국 보병들을 꿰뚫었다. 단말마 한번 내지 못하고 한 개 소대가 전멸했다. 루이사는 곧바로 지붕을 뜯어버리고 나와 앞을 가로막은 검은 마녀와 대면했다.
세니아도 그 뒤를 따랐다. 그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세니아를 덮쳤다.
뇌를 직접 손으로 쥐어짜는 감각. 토할 것 같은 욕지기를 참아내며 바닥에 엎드렸다. 전방에서는 검은 마녀와 얼음 마녀의 치열한 마법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루이사를 도와야...해!'
하지만 세니아의 몸은 세니아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팔다리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배가 너무 아파 손을 대보니 붉은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지혈할 틈도 없이 수도꼭지를 틀어둔 것처럼 흘렀다. 소리를 지를 기운도 없이 세니아의 의식은 다시 심해 저편으로 빠져들어갔다.
[젠장! 거의 다 왔는데. 다시 해야겠어. 약 좀 더 줘]
얼음 같은 마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니아는 깊은 물 속으로 다시 한번 잠겨 들어갔다.
*
세니아는 몇 번이고 같은 풍경을 반복했다. 루이사의 지시는 매번 조금씩 바뀌었다. 광탄을 쏘지 않고 피한 적도 있었다. 트럭 대신 장갑차에 올라타기도 했다. 도보로 달리기도 했다. 지팡이 대신 기관총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세니아의 10년 전 지옥도는 끝을 맺었다. 보병들에게 총살당하거나. 마탄에 꿰뚫리거나. 미사일을 맞고 장갑차와 함께 운명하거나.
그럴 때마다 루이사의 목소리는 차가워졌고, 멀어졌다. 또렷이 들리던 그 목소리는 이제 집중해야만 들릴 정도였다.
반대로 정체불명의 따뜻한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루이사와 달리 그 목소리는 다정하고 슬프게 세니아를 보살폈다. 대체로 그 목소리대로 하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루이사의 목소리는 세니아를 살릴 때도 있었지만 위험에 빠뜨리거나 죽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반복할수록 루이사의 목소리는 세니아를 자주 죽여댔다.
세니아는 점점 본능적으로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따르기 시작했다. 생물의 생존본능이란 그런 것이니까.
'왼쪽으로 가.'
[불타는 트럭을 뒤로하고 달려간 갈림길에서 너는 오른쪽 길을 택했어]
상반된 요구를 하는 두 목소리 사이에서 세니아는 갈등한다. 기억은 없지만 믿을 수 있는 반려인가? 믿을 수 없지만 따뜻한 목소리인가?
눈을 감고 갈림길 앞에서 세니아는 루이사를 떠올렸다. 안심되는 애인이자 전우의 얼굴을 떠올린다.
믿음을 주는 얼굴. 세니아의 이정표.
은빛 머리칼. 회색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은빛 머리칼. 회색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은빛 머리칼. 회색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은빛 머리칼. 푸른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은빛 머리칼. 회색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은빛 머리칼. 회색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검은 머리칼. 회색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은빛 머리칼. 회색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피부.
은빛 머리칼. 회색 눈동자. 연한 입술. 하얀 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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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칼. 푸른 눈동자. 연한 입술. 하얀 피부.
세니아에게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이윽고 세니아는 세계가 찢어질 듯이 비명을 질렀다.
[세니아? 세니아?]
[심박 수가 너무 높은데요. 더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닥쳐! 조금만 더! 세니아는 버틸 거야!]
의식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세니아는 비명만으로 세계를 채웠다.
밀림이 우거진 갈림길의 풍경이 어둠에 녹아 없어졌다. 순식간에 사라진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되었다. 하지만 세니아는 그 어둠을 편하게 느꼈다. 처음과는 달리. 이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곧 녹아 없어진 어둠 속 공간에서 은색 문이 나타났다. 재를 생각나게 하는 은색.
'열어봐.'
따뜻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머리에서 울리는 루이사의 목소리와 달리 귓가에서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
세니아는 차가운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끼익 거리는 기분 나쁜 금속음이 울렸다.
육중한 철문을 밀어젖히자 방이 나타났다. 고급스러운 양탄자가 깔려있고 그 위에 놓인 고풍스러운 탁자에는 열 댓 명 정도의 마족 마녀들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탁자의 끝에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 레비아탄이 선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레비아탄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세니아에게 향했다.
그 순간 불안해하던 레비아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각이야. 걱정했잖아."
조금 전까지 세니아를 인도한 목소리.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검은 마녀는 세니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앉아 소피. 오늘은 중요한 얘기를 할 거야."
검은 마녀는 세니아를 소피라 불렀다. 처음 듣는 이름. 하지만 마녀의 목소리만큼이나 그 이름은 그립고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오늘은 안나가 아니라 내가 직접 할 거니까. 10분 만에 끝낼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세니아, 아니 소피는 자리에 앉았다. 딱딱한 간이 의자와 다른 푹신하고 편안한 느낌이 소피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소피를 바라보던 레비아탄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마족 마녀에게 공과 사는 구분하라는 핀잔을 듣고서야 눈길을 거두고 작게 헛기침을 한 뒤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리 마족 연합은 인간 놈들에게 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놈들은 군사, 경제, 외교 모든 방면에서 우리를 압박했습니다. 우리 인민들의 미래가 점점 어두워 지고 있는데도 겁쟁이 같은 우리의 지도자들은 주눅 든 채로 인간들에게 엎드리기만 바쁩니다. 그런 겁쟁이들에게 우리의 위대한 연합을 맡길 수 없습니다."
조금 전의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다른, 결의에 찬 목소리가 회의장을 압도했다. 소피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소피는 이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목소리로 말하는 레비는 어딘가 먼 곳에 가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들의 탐욕과 위선을 이용할 겁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 만든 무기들이 그들을 겨눌 겁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지키려 만든 기술들이 그들 자신을 좀먹을 겁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겁니다. 누군가는 생명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우리 마족들의 미래를 위한 값진 거름이 될 겁니다. 모두, 이곳 슬라비안카에서 위업의 완성을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장장 10분에 걸친 연설이 끝나고 레비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소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소피의 얼굴을 본 레비가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눈빛. 소피는 그 눈빛에 항상 약했다. 작게 한숨을 쉬면서 소피는 결국 또 레비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다른 마녀들이 떠나고 소피와 레비아탄, 단둘이 남았다.
"소피. 무서워?"
레비아탄이 소피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소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응. 무서워. 레비가 멀리 떠나버릴까 봐."
물기 가득한 소피의 목소리가 레비아탄을 적셨다. 레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피를 바라봤다. 연한 분홍색 입술이 부드러워 보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우리 둘이서 살자. 숲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곳에서 단둘이서 늙어 죽을 때까지."
레비의 머리에 있는 갈색 뿔이 순간 살짝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소피는 레비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으면서 레비의 어깨에 기댔다. 언제나 따뜻하고 폭신한 어깨. 소피는 레비의 어깨에 기대는 것을 좋아했다.
"맹세할 거야?"
"응, 맹세할게."
"그럼, 키스해줘."
"뭐?"
레비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얼굴은 이미 새빨개져 있었다. 레비는 애꿎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안 해주는구나 또."
레비가 눈을 피했다. 귀까지 새빨개졌다. 곧 있으면 갈색 뿔도 빨개지지 않을까 싶었다. 레비가 소피의 붉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말만 잘하는 레비."
조금 재밌어진 소피가 레비를 놀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물기는 이미 사라졌고 소피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쑥맥 바보 레비."
잡고 있는 손이 떨렸다. 소피가 아니라 레비가.
"숫처녀 레비."
"아! 진짜 알았으니까!"
결국 폭발해버린 레비가 소피의 어깨를 잡고 마주 보았다. 기다란 흑발이 살랑거리는 모습이 그림이 되었다.
"키스할게. 영원히 곁에 있을 거라고 맹세할게."
레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레비에게는 상당히 부끄러운 행동인가보다. 소피는 그런 레비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조금 전 결의에 찬 레비아탄보다 지금처럼 부끄럽고 때로는 덜렁대는 레비가 사랑스럽다. 소피는 얼굴에 미소를 진하게 우려내면서 대답했다.
"응. 받아들일게."
두 사람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눈을 감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이 닿으려는 그 순간 소피의 의식이 수면으로 끌어올려졌다.
*
"의식이 돌아왔어요!"
"세니아! 세니아! 내 말 들려? 세니아 소령!"
소피가 눈을 떴다. 눈앞의 반려, 아니 반려인 척 자신을 희롱하고 속여온 원흉. 동족의 주적. 루이사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만, 소피는 루이사에게 상대가 안 됐다. 루이사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제국의 최정예 마녀들과 경보병들이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게 발각되면 살아나갈 수 없었다.
살아나가지 못하면 레비도 볼 수 없다. 소피는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세니아라는 역겨운 이름으로 부르지 마.'
조용히 칼날을 숨기며 소피는 세니아를 연기했다.
"루이사 대령님!"
이쯤에서 콜록거리며 소피는 기침했다.
"세니아,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안도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대령을 소피는 경멸했다. 소피에게 세뇌 약물과 마법을 써서 스파이로 써먹은 주제에 끝까지 위선을 떠는 대령이 역겹기만 하다. 인간들의 위선에 소피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보다도 대령님, 저…… 기억이 돌아온 거 같아요."
곧바로 대령과 주변 마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이용할 대로 이용하는 장기 말일 뿐이잖아. 소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남 로마나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난 거야?"
대령이 무심코 소피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소피는 반사적으로 손을 쳐낼 뻔했지만 겨우겨우 이성으로 막아냈다.
소피는 대령의 잿빛 눈동자가 너무 싫었다.
"네, 그때 동굴에서 발견했던 레비아탄과 수하들의 대화가 기억났어요."
이미 인간들은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성격 급하고 위선적인 종족들이라 생각하며 소피는 거짓을 만들어 냈다. 소피는 루이사와 남 로마나에 간 적이 없기에 어떤 말을 지어내도 검증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저들은 지금 절박했다. 의심할 여유도 의심을 할 생각도 없었다. 저득은 믿고 싶은 거짓 희망을 원했다.
소피가 심호흡하면서 장소를 생각했다. 멍청한 인간들을 몰아넣고 레비와 재회를 할 약속의 장소를.
"레비아탄이 마력 파장을 발신할 곳은……"
*
시끄러운 화물기의 엔진소리가 제국 특작 부대의 고막을 때렸다. 제국의 명운을 건 작전이기에 특수부대 3개 소대에 최정예 마녀들도 1개 소대나 붙었다. 각자 작전내용을 점검하거나 장비를 손질하거나 마력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루이사는 지팡이와 마력 점검을 끝낸 뒤 화물기의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서 눈을 깜빡이며 긴장하고 있는 세니아를 바라봤다.
"세니아. 미안해."
"네?"
갑작스러운 사과에 세니아가 의아해했다. 루이사는 세니아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기억 때문에 너한테 몹쓸 짓을 좀 한 거 같아서."
"아…… 뭐 괜찮아요. 임무 때문인데."
세니아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루이사의 눈동자가 슬퍼졌다.
"이번 임무 끝나면 나 은퇴하려고."
"은퇴요?"
세니아가 되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세니아가 루이사를 바라보았다. 루이사가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가 비행기 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집어넣었다. 사실 화물기라 피워도 상관없긴 하지만 이왕이면 임무가 끝나고 축배를 들며 피우는 게 나을성싶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담배를 쑤셔 넣고 아직도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세니아에게 루이사가 말했다.
"은퇴해서, 퇴직금이랑 연금으로 작은 집을 사서 텃밭이나 가꾸면서 살려고."
"의외로 전원적이시네요. 대령님."
"너도 같이 갈래? 세니아?"
갑작스러운 제안에 세니아는 멍청하게 네? 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농담으로 흘려보내려 했지만, 루이사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세니아는 그럴 수 없었다.
"같이 토마토 같은 거 키우면서 사는 거야. 고양이나 강아지도 한 마리 기르고."
세니아가 지팡이를 가방 속에 넣었다.
"아이는 못 가지지만, 나름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루이사가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가끔 여행도 다니면서요?"
세니아가 미소지으면서 맞장구쳤다. 루이사의 슬픈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응. 여행도 좋겠네. 픽업트럭에 이것저것 실어서. 돈 모아서 캠핑카라도 살까?"
세니아가 말없이 루이사의 손을 잡았다. 루이사는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얽혀오는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지금 떨리는 건 세니아인지 루이사인지 둘은 모른다.
"승낙하는 거야? 세니아 소령?"
대령이 물었다. 이때까지 들었던 목소리 중 가장 따뜻하지만 가장 물기 서린 목소리.
소피는 대령의 눈동자를 보았다가 대령의 슬픔을 읽고 눈을 피했다.
"이번 임무가 끝나고 답을 들려드릴게요."
소피가 대령과 잡은 손을 뗐다.
대신 대령의 어깨에 살포시 몸을 기대었다.
"중요한 작전이니까 조금 더 쉴게요."
소피가 눈을 감았다.
"응."
어깨에 기댄 세니아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루이사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만두고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시끄러운 엔진소리만이 화물기 안을 채우고 있었다.
*
휘르트겐 숲. 유시아 연합의 초수평선 레이더 기지.
동서로 길게 뻗은 연합에 있어서 이 레이더 기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방공 관제와 영공 감시, 영해 감시 같은 굵직한 임무부터 전파 중계와 송수신까지 유시아 연합의 국방과 통신에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시설이다.
그 핵심시설에 침투한 제국군 특수부대는 진입한 뒤 이상 징후를 포착했다.
아무도 없었다.
정말 몇 년간 버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레비아탄이 마력 파장을 발신하기로 한 장소인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레비아탄의 수하들이나 마녀들, 특수부대들은커녕 일반 육군 보병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 한 마리 없습니다."
"중앙 관제소도 텅 비어 있습니다."
"감시 초소, 내무반 전부 다 텅텅 비어있습니다."
루이사 대령은 한숨을 쉬며 숲을 바라보고 있는 한 마녀를 쳐다봤다.
"세니아, 여기가 확실하다고 했잖아."
"네, 확실해요."
"근데 아무것도 없는데?"
루이사가 적의를 품고 세니아에게 다가갔다. 언제든 지팡이를 겨눌 준비를 하고.
"아무것도 없진 않아요. 대령님."
세니아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순간 루이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저희를 너무 얕본 거 같네요. 대령님. 아니, 루이사."
소피가 지팡이를 하늘에 대고 붉은 탄환을 쏘아 올렸다. 탄환은 푸른 하늘을 가르고 올라가다가 약 3천 미터 상공에서 터졌다. 터진 불꽃들이 레이더 기지 주변을 돔처럼 둘러쌌다. 일종의 차단 결계가 형성되었다.
"이건 설마!"
"도망칠 수 없어요. 루이사."
소피가 씩 웃었다. 루이사는 곧바로 지팡이를 소피에게 겨눴다.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요. 전 원래부터 이쪽 편이었는걸요. 뿔을 잘라버렸다고 해서 제가 인간이 되는 건 아니라고요!"
"너… 이 자식이!"
루이사가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푸른 광선이 소피를 꿰뚫기 위해 나아갔다.
하지만 광선은 소피에게 닿기 전 휘어져 애꿎은 침엽수만 고꾸라뜨렸다.
"늦어서 미안해. 소피!"
"레비!"
소피의 사악한 미소가 따뜻하게 변했다. 검은 마녀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마족 보병들의 총격과 헬기의 엔진소리가 고요한 숲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젠장! 중앙관제실로 후퇴! 응사해!"
총격과 포격이 이어지면서 숲에 죽음이 하나둘 생겨났다. 루이사는 얼음 방벽을 레비아탄와 소피에게 처박은 뒤 제국의 보병과 마녀들을 지원하러 갔다.
달려가면서 루이사는 딱 한 번 뒤를 돌아 소피를 바라봤다. 몹시 슬픈 잿빛 눈동자로.
형형색색의 광선과 광탄, 불꽃과 얼음, 진흙과 공기가 허공을 갈랐다. 제국 최정예 전력이었지만 절대적인 숫자의 차이를 극복할 순 없었다.
마녀들은 포기하지 않고 속성 광탄을 쏘아 올리며 보병들을 참살했지만, 곧 도착한 마족 마녀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명색이 최정예 제국군이었기에 마족 마녀 몇몇이 희생되었지만 루이사를 쫓아 달려온 검은 마녀가 합류하자 제국의 마녀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내 애인한테 이상한 짓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빨리 나와!"
동원된 제국의 보병과 마녀들은 모두 죽었다. 단 한 명, 루이사만 빼고.
그 루이사를 찾기 위해 소피와 레비는 천천히 레이더 시설을 수색해 들어갔다.
기지 내부는 회색빛을 띄는 강화 외벽 때문에 삭막했다. 그런 삭막함 속에 붉은 생명의 흔적이 한 두 방울 이정표를 만들고 있었다. 비릿한 쇠 냄새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마녀의 것일 테지?"
레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소피가 핏자국을 따라 걸으려 하자 레비가 제지한다.
"위험한 년이야. 내가 앞장설게."
"응……"
소피가 힘없이 말했다. 분명 지금은 기뻐야 할 순간이다. 자신을 이용하고 세뇌하던 원수를 죽일 시간이니까.
그런데 소피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도 그 여자를 속인 거니까. 똑같은 인간, 아니 똑같이 비열한 마족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아까는 분노한 감정을 전부 토해내면서 조롱했지만, 머리가 식고 나니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방금 죽은 군인들과 마녀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었을 테니까.
전쟁은 그런 거라고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소피는 항상 말로는 못 할 슬픈 감정을 안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핏자국이 끊긴 문 앞에 두 마족은 도착했다. 회색 철문은 슬쩍 열려있었다. 레비가 문을 날려버리려고 마력을 모으자 소피가 제지한다.
"레비, 여긴 내가 끝낼게."
"직접 복수하겠다는 거야? 뭐 좋아. 그년 지팡이만 날려버리고 자리 비워줄게."
레비가 모은 마력을 하얀 광선으로 변환 시켜 문을 날려버렸다. 붉은 등이 깜빡거리는 중앙 통제실에 루이사는 배에서 피를 흘리며 콘솔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흑색 로브는 이미 절반이상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니아 소령…… 그리고 레비아탄."
말을 마치자마자 루이사는 쿨럭거리며 피를 한주먹 토했다. 회색 바닥이 붉게 물든다.
"대충 봐도 마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그렇게 말하면서 레비는 루이사에게 다가가 지팡이를 뺏어서 부숴버렸다. 혹시라도 연인을 상처입힐까 철저히 박살 내 버렸다.
"레비, 잠깐만 자리를 비워줘."
"쳇, 알았어. 피해자는 너니까."
레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통제실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 살기 어린 눈빛을 루이사에게 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세니아. 내게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세니아는 말없이 루이사의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지팡이로 작은 화염을 만들어 담배에 불을 붙인 세니아는 루이사의 입에 그것을 물려 주었다.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세니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루이사는 곧 미친 듯이 웃었다. 금속으로 된 통제실을 얼음 마녀의 냉소가 가득 채웠다. 통제실 문밖에서 팔짱을 낀 채로 레비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처리해 그냥."
"레비, 내가 알아서 해."
세니아가 레비를 다그치고 다시 루이사에게 눈을 돌렸다. 루이사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면서 세니아는 루이사에게 다가갔다.
"속였던 거 미안해요. 같이 텃밭 못 가꾸게 된 것도. 보시다시피 유부녀라 말이죠."
루이사가 담배 연기를 빨아 마셨다. 빌어먹을 복통이 조금은 가시는지 개운한 표정이 되었다.
"하하. 유부녀에게 작업을 걸고 키스까지 해버렸네. 내가 죽일 년이지."
세니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루이사의 볼에 입을 맞췄다.
"루이사,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니. 난 그냥 조국을 위해 더러운 짓을 해댄 쓰레기 년이야."
"네. 그래서 과거형을 썼어요."
세니아가 루이사에게 속삭인다. 루이사가 어이없는 듯 미소짓는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행복하네."
루이사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이니까. 조금은 봐 드릴게요. 루이사."
루이사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세니아는 마족 언어로 명복을 빌어주었다.
"다음 생에는 행복하길."
더는 담배 연기를 내뿜지 않게 된 루이사의 눈을 소피는 조심스럽게 감겨주었다.
깜박거리던 붉은 경고등이 꺼지고 곧 시설의 정상화를 알리듯 백색 형광등이 레이더 시설을 밝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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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씬도 연습할겸 써본 건데 끝에 좀 힘빠진 느낌이다 ㅋㅋㅋ 전투씬 어렵다 ㅠㅠ
스토리 모티프는 콜오브듀티 콜드워 스토리에서 거의 그대로 따왔어. 진짜 스토리 푸는 방식이 소름돋아서 백합으로 써보고 싶어서 해본거야......
ㄹㅇ 배드엔딩이 주인공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인게 참 ㅋㅋ
일부러 소돔 프로토콜에 대한 결말은 적지 않았어. 레비가 소피를 되찾은 뒤 전쟁이나 혁명에 회의를 느끼고 계획을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고
복수심과 대의 때문에 세상을 지옥에 빠뜨릴 수도 있어. 독자의 마음대로 계획에 대한 결말을 상상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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