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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어느 날 저녁 그의 집에 익명으로 BD가 배송되었다

BB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1.17 18:23:10
조회 564 추천 20 댓글 5
														

그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 남편이 제법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뒤에 아이를 데리고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고, 간신히 지금의 위치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혼을 일부 내어줘야 했다. 그 영혼의 상실을 보충하기 위해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존했다. 그에게 교회는 쓸 만한 인맥과 커뮤니티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내줘야 했던 영혼을 새로운 무언가로 채올 수 있는 신앙의 원천으로써 특히 유용했다.


그는 신앙에 심취했다. 신앙의 대상은 물론 신이어야 했지만, 자연히 신의 말씀을 전하는 대리자, 즉 목사가 그의 안에서 신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신앙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제법 열성적으로 행동했다. TV 뉴스 한켠에 얼굴을 비춘 일도 있었다. 그는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이의 목소리를 충실히 내었다. 그는 매 년 열리는 소위 "퀴어문화축제"의 옆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동성간 성교의 "말초적 쾌락"과 그 "위험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완전한 타인에게 그것은 쓸데없는 곳에 힘을 쏟는 헛짓이었겠지만, 그에게는 영혼의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한 혼신의 몸부림이었다. 영혼의 빈틈을 메꾸기 위해 빌리던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어느덧 그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 것만큼 딸에게 의존할 수는 없었다.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는 딸에게만큼은 엄격한 양육자가 되려고 했다. 다행히도, 자기 영혼의 일부를 갈아가면서까지 현재의 삶을 유지하려던 노력 덕분에, 아이는 구김살 없이 자라 지역의 명문 여고에 입학하였다. 학업도, 교우 관계도 양호하였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는 아쉬움을 느꼈으면서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심적인 지지자보다는 엄격한 양육자가 되길 선택했으니, 아이가 사귀는 친구들이 지지자의 역할을 대신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아이의 친구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아이가 모난 부분이 있더라도 너무 탓하지는 말아주기를 부탁했다. 아이도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부담이 생기기 시작한 건지, 집에 들어올 때는 힘든 듯한 모습으로 그와 마주하는 일이 늘었다. 그런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서로를 지탱해주기를 염원했다.


오늘 아이는 그 친구들 중 한 사람의 집에서 놀고 온다고 한다. 그 때까지 그는 온전히 그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를 노리기라도 한 듯 자신에게 배송되어온 이 BD는 그런 잠깐의 평화를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짐작할 수 없었다. 교회의 일이라든가, 직장의 일이라든가, 블루레이가 올 만한 상황 자체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허나 그런 경우에는 어떤 일인지를 명확하게 알리기 위해 발송자의 이름이 적혀있기 마련이었다. 잘못 온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다. "서울특별시" "◇◇구"로 시작하여 단 한 글자의 생략도 없이 적혀있는 수신자의 주소는 정확히 이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신인에 적혀있는 이름은 분명 그의 것이었다. 자신이 이 BD의 내용을 봐주기를 바라고 보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 BD의 내용을 볼 수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뭔가 바이러스 같은 것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은 금방 가셨다. BD의 안에 든 것은 썸네일이 가려진 단 한 개의 동영상 파일 뿐이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그는 그 영상을 열었다.


"아, 아... 잘 들려?"


검은 화면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금방 그 목소리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첫 번째는 그의 딸이었다. 두 번째는 딸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사귀어 온 단짝 친구로, 그에게는 딸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세 번째 목소리의 주인은 잠깐 집중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약 한 달쯤 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새로 사귀었다고 얘기한 친구의 것이었다.


"아, 화면 안 켰다."


"정말! 이런 데에서까지 산만하다니까."


"그래도 녹화 들어가기 전에 알아채서 다행이네. 한번 하고 나면 다들 녹초가 돼있을테니까."


"아~ 진짜! 그거 벌써 얘기하면 어떡해."


그는 실소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단짝친구는 언제나 산만했으니까. 분명 딸이 엄마를 위해 뭔가를 녹화하기로 계획했을 때 동참하기로 했으면서 이런 실수를 일으켜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도 이번에는 일을 그르치기 전에 알아챘다. 아이도 친구들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윽고 화면이 켜진 곳에는―


"아, 잘 보여 엄마?"


더블 사이즈 침대의 한 켠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딸이 있었다.


"나, 오늘은 엄마가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 근데, 역시 얼굴을 마주해서 말할 용기는 안 나더라. 그래서... ■■랑 ♠♠한테 부탁해서 이렇게 녹화해서 얘기하기로 했어."


잠시 뜸을 들이던 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엄마 앞에서 이런 말 꺼내면 엄청 싫어할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어.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오랫동안 찾아봤어."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의심했다. 자신이 딸에게 무엇을 저질렀기에 딸이 이렇게 두려워하고 주저했는가. 엄격한 양육자로서 딸을 훈육한다고는 했지만 딸이 싫어할 만한 일은 한 기억이 없는데.


"나 말이야... ■■랑 ♠♠랑... 사귀고 있어."


아.


그렇구나.


그는 대체 무엇이 딸을 이렇게 두렵게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는 중학생 때 처음 고백해왔어. 엄마는... 동성 연애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래서 나도 ■■한테 처음 고백받았을 때는 더럽다고,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우리 둘이 서로 죽일 것처럼 싸웠거든. 근데 싸울 때도 ■■가 눈물 흘리는 걸 보니까 가슴이 메어서..."


"같이 다니면서 정말 ◆◆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천천히 알아보자고 화해했어요. 안녕하세요? 아줌마."


■■. 초등학교 시절부터 딸과 항상 함께 다니던 단짝친구가, 딸의 말을 도중에 끊어먹고 화면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한쪽 팔로 딸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이는 언제나 인상이 밝고 포근해서, 같이 다니고만 있어도 구원받는 것 같았어요. 엄청 섬세한 애라서 조금이라도 언동이 이상한 애가 있으면 상담 같은 것도 해주고, 아마 저 말고도 같은 반 애들 거의 다... 언니처럼 따랐을 걸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셨죠? 그 때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얼굴 하면서도 꾹 참아가면서 눈물 흘리고 있었는데, 그거 보고 제가 무슨 생각했는지 아세요? ◆◆이가 저한테 의지해줬으면 했던 거에요."


"나, 그 때, ■■가 안아줬을 때, 혼자 의연한 척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였는데, 이제와서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처음에는 더럽다고 밀어냈지만, 화해하고 나서 같이 다니면서는... 그런 것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니 하고 엄청 후회했어. ■■라면 서로 의존하면서, 서로 닭살 돋는 말 한다든가, 키스... 같은 거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렸어."


"...그래서 아줌마한테는 비밀로 하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했어요."


속이 끓어오른다. 내가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고. 아무 구김살 없었다고 생각했던 그의 딸은 사실 진작에 자신이 만들어놓은 선을 벗어났다. 그를 되새기고 있자니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남는다. 연애를 한다고 해도 보통은 1:1이 아닌가. 그런데 딸은 방금 두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안녕하세요~ ◆◆이 어머니?"


하고, 또 한 사람이 화면에 들어왔다. 한쪽 팔로 당연하다는 듯이 딸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자신을 ♠♠라고 소개한 그 아이는 말을 계속했다.


"저는 고등학교 입학할 때 ◆◆이를 처음 봤어요~ 저번에 말씀드렸었죠?"


그래. 그 아이는 처음에 만났을 때 그렇게 얘기했다. 단정한 스트레이트 헤어 덕분에 그 아이를 겉핥기로만 본 사람들은 청초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결코 ♠♠가 그리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청초한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본 아이와 몇 달만에 그리 깊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엄청 포근하고 행복해보이는 기운을 가득 내뿜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이한테 접근한 거 있죠? ■■가 단짝친구라고 해서 얘랑도 친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둘이 사귀고 있더라구요!"


어쩌면 ♠♠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흉계라도 꾸민 게 아닐까, 그러니까 딸도 ■■도 그 아이에게 이용당한 게 아닐까 하는 새로운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그는 이내 안도했다. 그 말을 할 때 ♠♠의 눈동자는 순수하게 경이와 행복으로 가득차 있었을 뿐, 짐승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딸이 두 사람과 동성간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안심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둘이 서로 애정표현하는 걸 보고 있으니까... 어느새 그게 저를 향해줬으면 하고 생각하게 돼버렸어요. 엄청 못됐죠? 근데 ◆◆이랑 ■■는 이런 저도... 받아줬어요. 애정 때문에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고."


"그 때 ♠♠는 엄청 사랑스러웠으니까!"


"우리가 서로 의존하면서 사귀게 됐으니까, 혼자 모조리 짊어지는 모습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도 우리한테 의존하고 또 의존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그래서 저희 세 사람은 두 달 전부터 사귀게 되었답니다!"


자축. 엄마 속이 타들어간다는 건 알지 몰라, 하고 그는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그 세 사람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그들 셋만 있는 것처럼 보인 그들은 분명 행복했다. 그리고, 신경쓰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엄마한테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두 사람이랑 한참 의논했거든, 그랬더니 ♠♠가..."


"'기정사실'을 만들고 알려주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그것까지 녹화하려고 한 거에요."


기정사실? 돌려 말하는 단어였지만, 그는 은근슬쩍 그 단어가 가리고 있던 실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 짐짓 침착하게 그 말을 하는 동안, ♠♠는 어느새 딸의 교복 블라우스를 열어젖히고 배에 입맞춤을 하고 있었으니까. 딸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런 ♠♠의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엄마... '동성간 성교의 말초적 쾌락'이라든가, 그런 시험에 지면 안 된다고 했었지? 회개하라고 다른 사람한테 말 했었지?"


딸은 그의 마음을 강력한 일격으로 부숴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미안... 엄마, 나...♡"


두 사람의 스킨십이 점차 강해지자 그것을 온전히 받고 있던 딸의 모습과 언어가 흐트러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속쓰림과,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과,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랑에는 이길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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