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아야, 어이, 야마부키 사아야! "
" 으헤엫... 에? "
때는 나른한 5교시 수업 시간. 창가로 쏟아지는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방금까지도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학생은 바로 포피파의 드러머, 야마부키 사아야. 그리고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사아야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사람은 바로 나, 이치가야 아리사다.
" 에..? 아리사, 왜? "
" 왜는 무슨 왜야, 이게... 앞에 봐, 앞에!! "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사아야가 퍼뜩 놀란다. 깐깐하기로 소문이 난 국어 선생님이 지금 잔뜩 화가 나셨기 때문이다. 자기 수업 맨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졸고 있다니, 그런 꼴을 두고 볼 순 없는 분이시다.
" 야마부키 사아야, 그렇게 졸리다면 뒤로 나가서 서 있어! "
" 네, 네엣....! "
사아야가 허둥지둥 교과서를 가지고 뒤로 나간다. 수학 시간은 낮잠 시간이나 마찬가지인 카스미 녀석이 걸렸다면 반 아이들이 다 소리를 죽여 키득키득 웃었겠지만, 이번엔 다들 의외라는 분위기. 그야, 사아야는 나름 성실한 모범생이었으니까...
사실 사아야가 저렇게 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매사에 나름 똑 부러지게 처신하던 사아야가 최근에는 다크서클도 달고 오는가 하면, 수업 시간에도, 연습 시간에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집안일이 많아졌나 싶어서 사아야네 어머니께 조심스레 여쭤봤었지만, 요새 용돈을 이번 달에만 아주 조금 더 받을 수 있냐고 부탁하거나 최근 늦게까지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고.
맨 뒷자리의 카스미가 울상이 되어서는 사아야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눈에 밟힌다. 아주 울겠다, 울겠어. 그렇게 걱정되면 사아야한테 대놓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주지는. 카스미도 카스미대로 그런 일에는 겁쟁이가 되니까, 마냥 우리 리더님만 믿고 있을 순 없겠지? 역시, 내가 따로 알아봐야...
" 이치가야 아리사!! "
" 네, 넵!! "
" 몇 번이나 불렀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너도 같이 뒤로 나가-!! "
이번에는 등 뒤에서 반 친구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확실히 들린다. 하아 !? 나, 이미 2-A 반에선 카스미랑 비슷한 이미지...?
*
그날따라 집에 와서도 사아야 생각이 자꾸만 났다.
사아야가 달라진 게 언제부터였더라? 자세히는 기억 나지 않지만, 대략 몰래 X튜브 하던 걸 나한테 들킨 이후부터일지도... 어쩌면 그게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가 다른 애들한테 일러 바칠까봐 신경쓰고 있나? 하긴, 나 같아도 그럴지도.
' 만 원 감사합니다, 냥...! '
그 생각을 하니, 억지로 애교를 살짝 섞은 사아야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뭐... 귀엽긴 했지. 15000원이라는 거금을 내 지갑에서 빼 갔으니까. 그나저나, 애교 한 번에 만 오천원이나 썼다니! 어쩌면 나도 인터넷 방송 중독자의 자질이 있는 걸지도...?! 회삿돈까지 빼돌려서 거액의 후원금을 스트리머들에게 선물했다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뉴스가 눈앞에 스쳤다.
' 사아야 녀석, 방송 안 하려나 이제. '
X튜브 아이콘을 클릭해서 [starbeat0519]를 검색하자, 이번에는 아예 계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 엑, 아무리 그래도 계정 삭제까지? 그렇게나 상처 받았나...? '
또 부정적으로 돌아가려는 아싸 회로를 머릿속에서 억지로 털어내버렸다. 에이, 나한테 앙금이 있는 거였음 사아야가 그런 낌새라도 보였겠지. 그날 이후로도 서로 잘만 얘기하고 장난도 쳤는데!
기분전환이라도 할 생각으로, X튜브의 [이달의 초신성 스트리머!] 페이지에 들어갔다. 이미 팬덤이 공고히 형성된 인기 스트리머들의 방송과는 달리, 색다른 매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신인 스트리머들을 매달 발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그래봐야 여기도 다 어디서 봤다 싶은 컨셉에, 식상한 말투, 물리는 컨텐츠가 대부분이기는 하다. 내가 인터넷 방송을 조금 많이 보는 탓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도 버릇처럼 스크롤을 아래쪽으로 쭉 내리자, 시청자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1200, 895, 462, 126... 한 자릿수까지 진입하고 나서, 나는 또 흥미로운 제목, 아니 아이디를 발견하고 말았다......
<어떤 대사든 읽어드립니다!(ASMR)> teabrats9150 님의 방송
이미 X튜브의 레드오션이라 할 수 있는 ASMR 방송이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스트리머의 아이디.
' teabrats9150... 이거, starbeat0519잖냐...... '
아이디까지 삭제했으면, 아예 들킬 일도 없게 싹 바꾸려는 노력이라도 하든가! 사아야의 안일함에 내가 다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천사 이치가야가 내 왼쪽 귀에서 걱정스레 속삭인다.
" 아리사, 사아야가 상처받을 일은 하지 않는게 낫지 않을까? "
악마 이치가야도 질세라 내 오른쪽 귀를 붙잡고 외친다.
" 사아야가 저번처럼 혼자서 또 귀여운 짓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아? 아리사, 궁금하지 않냐? "
" 솔직히 나도 궁금해... 아리사, 그럼 30초만 들어가 볼까? 이번에는 사아야에게 절대로 안 들키게 조심하자! "
역시나 금세 져버리는 내 마음속의 양심. 한숨을 푹 쉬고는, 시청자 2명의 신참 ASMR 방송의 입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른 아이디로 들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정도면 모리어티 교수도 인정할 완전 범죄지, 암!
[식물귀여워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아, '식물귀여워' 님 안녕하세요! "
예상했던 대로, 들려오는 것은 익숙한 빵집 딸의 목소리다. 2명밖에 없던 방송의 채팅창도 예상했던 대로 조용하다.
[ 무슨 방송인가요? ]
" 아, ASMR 방송이에요! 시청자분께서 대사를 적어 주시면 제가 어떤 내용이라도 읽어 드려요! 이번에 ASMR 장비도 구매해서, 음질도 엄청 좋아요! "
채팅을 읽은 사아야가 재빨리 자기 PR을 시작한다. 나도 나가버릴까봐 그러나? 사아야에겐 야속하게도, 그러는 사이에 시청자 수는 3에서 1로 바뀐다.
" 아, 아아...... "
' 정말 30초만 보고 나가기로 했는데, 이럼 나갈 수가 없잖냐...! 내가 나가면 0명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순위권 맨 밑으로 추락하는 거라고!? '
[ 오, 처음 본다 이런 방송... ]
" 에!? 아니에요, 아니에요~! ASMR 하는 사람도 이미 많고, 전 완전 늦게 시작하는 거라서... 그래서 그런지 다들 나가버리네요, 아하하... "
나도 안다 알어, 이것아. 성격상 거짓말은 못하는 사아야가 자기를 깎아내리는 것이 살짝 안쓰럽다. 방송, 오늘만이라도 계속 봐 줄까...
[ 지금 대사 신청 가능해요? ]
" 헉, 잠깐만요. 저도 오늘 처음 해보는 거라서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 이거 코드 꽂고, 잭 연결하고...! "
사아야가 한참을 부스럭거리는 동안, 나도 에어팟을 찾아 귀에 끼웠다. 암만 사아야가 초보 스트리머여도 나름 ASMR이라니까, 맨귀로 듣는 건 또 실례거든.
" 다 됐어요! 어떤 대사 해 볼까요? "
어라, 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 안 했다. 뭘 부탁하지? 오천 원 감사합니다냥? 아니, 그건 아니지! 머, 머리가 새하얘...
[ ...노래도 되나요? ]
" 네, 괜찮아요! 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도 있고, 노래도 자신 있어서... 한밤중이라 크게는 못 부르지만. 에헤헤, 뭐 불러드릴까요? "
[ 포X몬스터 주제가... ]
" 아, 완전 추억... 살짝 의외지만 그걸로 가 볼게요! "
' 그치만,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다고! '
"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꼬부기~ "
어느새 전주가 흐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사아야. 포X몬스터 주제가를 신나게 부르는 사아야라니... 뭔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지 않게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다음에 시킬 대사를 생각해봐야...
" 내가 원하는 걸 너도 원하고~ "
어느새 중반을 넘어선 노래. 히키 시절에 인터넷방송과 애니메이션을 섭렵하다시피 한 대뇌피질이 오랜만에 삐걱대며 활동을 재개한다. 무슨 귀여운 대사 없었나!?
" 우리 모두 꿈을 위해~ 피카츄! "
[ 와, 목소리 진짜 예쁘다;; 너무 좋았어요 ㅜㅜ ]
" 와, 심장 떨려... 서클에서도 이런 적 별로 없었는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약간 호들갑을 떨면서 소감을 남겨주니까, 아이처럼 들뜬 사아야다. 아마 이런 경험이 처음이겠지? 그나저나 갑자기 서클이라니, 이 근처에 사는 나쁜 놈이 듣고 어디 사는 누군지 알아내면 어쩌려고!! 기본적으로 사아야의 사생활이기는 하지만, 조심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 다음 대사, 혹시 있나요..? "
' 아차, 대사...! '
[ 사랑해, 자기야 가능해요..? 저 여자고 이상한사람 아니니까 오해하지마세요 ]
" 엣... "
' 아니 나, 뭐래!? 완전히 이상한 변태 아저씨같잖아!! 무슨,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나가야 해, 당장 여기서 나갈래... 아니, 지금 나가면 안 되잖아! 장난이었다고 할까...? '
[ ㅋㅋㅋㅋ막이래ㅎㅎ; 미안해요 언니]
정말 이상한 아저씨로 오해할까봐, 괜히 언니라는 호칭을 덧붙여 본다. 암만 그래도 사아야한테 언니라니... 으으, 부끄럽다고!
" 에이,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자, 해 볼게요..? 으흠, 흠! "
의외의 대답에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에어팟에서는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자기야, 사랑해...! "
찌릿-
가슴께부터 따끔한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기분 좋은 자극이 온 몸으로 퍼지고, 심장이 금방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처음 겪어보는 당황스러움.
' 뭐야앗, 이거, 위험해..... !? '
유명한 스트리머의 Asmr 동영상을 가끔 들어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방금은 실제로 사아야가 내 귓가에서 속삭이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게 얼굴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 나 상상력 쩔어! 뭐냐고, 이거...!
" 어, 어때요..? "
[ 와 진짜 너무 좋아요... 목소리 진짜 예쁘시네요 앞으로 방송 성공하실듯! 구독 눌렀어요 ㅎㅎ 저는 이만.. ]
" 아, 식물귀여워님 가시는 거에요...? "
' ...... '
" 야, 이치가야 아리사 이 바보 천치 멍청아! 지금 한창 좋을 때인데 이걸 놓치냐? "
" 아리사 너 정말 바보니!? 여기서 나가면 사아야가 슬퍼할 거 아니니! 친구로서 그럼 안 돼! "
악마 이치가야와 천사 이치가야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외치는데, 어쩔 수 없지. 30분, 아니 한 시간만 더...
[ 아니요, 오늘 계속 들을게요! ]
*
" 아리사, 요새 다크서클이 눈에 띄게 많네. "
" 하, 하아!? "
" 응, 정말로. 사아야 쨩이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둘 다 무슨 일 있는 거야..? "
" 사-야는 반대로 요즘 기분이 좋아보였는데?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
" 그럴, 리가 없잖냐~!! 최근에 늦게까지 새로 나온 게임 좀 했어! 사아야도 별 일 없는 것 같고,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건 사아야한테 실례라고! "
" 그런가... "
그래, 사실 무슨 일이 있기는 하다. 최근 일주일 동안, 사아야의 asmr 방송에 완전 푹 빠져버렸으니까...! 썸네일이니, 방송 홍보니 하는 건 문외한인 사아야 덕분에 시청자 수는 여전히 한자리 수에, 구독자는 아직도 나 뿐이었다.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할 사아야한텐 안된 일이지만, 솔직히 그래서인지 더 몰입이 돼....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상상 속의 사아야와 오로지 단 둘 뿐인거나 마찬가지니까. 얼굴이 빨개진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사아야가 내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 아리사, 사랑해. 네가 너무 좋아. 귀여워, 아리사. 너무 예뻐.... "
" 아우, 읏...... "
이래선, 안 되는데....! 이럼 내가 마치 사아야를, 조, 좋아하는 것 같잖냐! 난 그런 게 아니라, 사아야의 목소리가 좋은 거야. 그래, 다른 마음 없는 거야! 그냥 나는 사아야의 취미 생활을 응원하는 것 뿐... 그러니까, 오늘 밤도 사아야랑 단 둘이서..."
" 아리사, 부정맥? "
" 시꺼, 오타에!! "
...정말 오늘은 끊어야 할까, 사아야 방송...?
*
[ 식물귀여워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 아, 식물귀여워님 어서 오세요! "
오늘도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 0명인 사아야네 자그마한 방송. 정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고도 없이 발길을 끊으면 사아야가 분명 상처받을 테니까. 그래! 오늘만 듣고, 시험 공부 비슷한 것 때문에 한동안 못 온다고 말하자. 더 듣다간, 정말 이상해지겠어...
[ 안녕하세요. ]
차분하게 인삿말을 보내고는 있지만, 방에 입장한 순간부터 가슴이 미묘하게 지끈거린다. 마치 자극에 반응해서 벨을 울리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강아지처럼, 또 그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 저, 이번 달 용돈으로 이거 샀어요. 쨔안-! "
사아야가 보여준 쇼핑몰 사이트에는 [asmr 전문가용 마이크] 라고 적혀있다.
" 이걸로 녹음하면 음질도 훨씬 좋아지구, 잡음 제거도 가능하구요, 또...! "
신나서 마이크의 기능을 열심히 설명하는 사아야. 저 마이크로 들려주는 asmr은 얼마나 현실감 있는 걸까... 침이 꼴깍, 하고 넘어간다.
" 므흐흐, 그래서 오늘도 저에게 애인 컨셉을 주문하시는 건가요?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잘 되고 있어요? "
[ 아, 네에... 말은 걸고 있는데, 그 이상은 좀처럼 가까워지진 못하고 있어요. ]
자꾸만 사아야에게 사랑고백을 시키기 뭐해서, 최근에는 내 나름대로 이유를 덧붙였다. 나는 어디어디 사는 고등학생인데 애인에게 마음을 전할 용기가 안나서 고민이다. 그런데 스트리머님의 목소리가 그 아이랑 너무 비슷하다. 혼자 연습 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 이런 느낌.
" 그럼, 오늘도 시작할게요? "
에어팟은 미리 껴놓고, 수술대 위에 올라간 환자처럼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침대에 눕는다. 사아야의 속삭임이 언제 들릴지 몰라서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다.
" 리사 쨩, 오늘도 학교 갔다오느라 힘들었지? "
" 으읏, 하... "
집안일하랴, 공부하랴 자기가 제일 고생하면서. 물론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 리사 쨩은 정말 예쁘네, 귀엽기도 하고... 같이 있으면 두근두근 거려. "
" 읏. 하... 나도, 나도 두근거려... 사아야... 좋아해... 후아.... "
혼자서 나지막히 사랑고백을 읊자, 전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차오른다. 정말 사아야랑 연애를 하게 된다면, 매일 이렇게 해주는 거구나...
" 이렇게 안아주는 거, 리사 쨩은 정말 좋아하지? 자, 더 달라붙어도 좋으니까... "
두근두근두근두근.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행복하다. 사아야의 목소리가 마치 뇌에 설탕을 부어 넣는것만 같다. 나를 꼭 안아주는 사아야가 머릿속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진다.
" 나, 요즘엔 이 시간이 기다려져. 리사 쨩이랑 단둘이서 있을 수 있으니까... 후후... "
네, 저도 기다려져서 죽겠네요, 야마부키 씨... 얼굴에는 이미 열이 올라 새빨개졌다. 아, 사아야랑 진짜 사귀는 것 같다... 사아야는 현실에서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말 아무렇지도 않게 막 하고 그러나.
그 순간 웃기게도, 얼굴도 모를 제3자에게 새삼스레 질투심이 일었다. 사아야와 진짜 사귀는 것도 뭣도 아니고, 그냥 난 친구일 뿐인데. 사아야가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면 누굴까. 역시 카스미? 스타일 좋은 타에? 귀여운 리미? 혹시 멋진 토모에나 카오루 선배?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우울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아야의 방송은 어느새 꺼져 있었고,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요 일주일동안 익명 뒤에 숨어서 사아야를 가지고 놀다시피 한 주제에,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질투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서 괜히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
" ...리사, 아리사. 아리사~!! "
" 으, 으음... 하, 할머니이... 아직 6시쟈나아... "
" 6시는 무슨 6시! 일어나앗~!! "
그렇게 말하며 내 이불을 뺏다시피 한 아이는, 역시 야마부키 사아야다. 사아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잠기운이 싹 달아나고, 죄책감이 그 빈 자리를 메꾼다.
' 사아야한테 또 장난을 친 데다가, 어젠 아무 말도 안하고 방송 나가버렸고... 상처 받았겠지...? 아니, 근데 사아야가 아침부터 왜 여기...? '
" 너, 여기서 뭐 하냐..? "
" 벌써 오전 10시야, 아리사! 아리사가 학교에 갑자기 안 와서, 선생님이 웬만하면 데려오라고 하셨어. 아리사는 등교거부 위험군이라고 하시면서. "
등교거부 위험군이라니... 그건 또 뭐래? 그나저나, 오전 10시라고?
" 아... 늦잠 자버렸나봐. 미안, 사아야. 얼른 옷 챙겨입고 학교 가자. "
옷걸이에 대충 걸린 교복을 주워 들고 갈아입게 나가라는 눈짓을 하자, 사아야가 잠시 침묵하더니 하더니 겨우 입을 연다.
" ...아리사, 인터넷 방송 보느라 늦게 잤지? "
" 하아!? 하!? 어째서 그런 바보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이, 인터넷 방송? 그거 완전 백수에다, 음침하고 이상한 애들만 보는 거 아니냐!? 하, 하하, 하하하... "
" 저번에 아리사도 내 방송에서 장난 쳤으면서... "
" 그건 그거고! 암튼, 나 X튜브 핸드폰에서 삭제한지 꽤 됐거든! 생사람 잡지 말고, 갈아입을 거니까 밖에서 기다... "
" mamacho777... [식물귀여워], 아리사 아니야? "
순간, 온몸의 피가 그대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대체!?
" 그, 그럴, 리가 어없잖아~~~!? 하, 아하하....!! 웃기네, 그 이름! 시, 식물이 뭐가 귀엽대. 아니 귀엽긴 한데. 그건 분재만 귀여운 거고. 하하, 하.... "
" chomama1027에서 그렇게 조금 바꿔 놓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물론 처음엔 몰랐지만, 한 3~4일 지나니까 뭔가 말투가 은근~히 아리사 같은 거야! [리사냥z] 랑도 비슷하고... "
이래서 아이디/비밀번호는 주기적으로 바꾸라는 거구나. 수많은 공익광고들이 내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하느님 부처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최근 일주일만 없었던 일로 해주시면 앞으로는 사이트에서 비번 바꾸라는 창이 떠도 일주일 뒤에 다시보기 안 누를게요. X이플 2차 비밀번호도 꾸준히 바꿀게요...
" 그래서 처음엔 그냥 아리사한테 말해버리려고 하다가, 아, 아리사...!? "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순식간에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눈앞의 사아야가 두 명, 세 명으로 보인다.
" 미, 미안해. 나 완전 기분 나쁘지. 다신 그런 장난 안할게. 사아야, 내가 그래놓고 이런 말 하는거 염치 없는 거 아는데, 다 잊어 줘, 제발... 없던 일로 해주면 안 될까, 응...? 나한테 실망해도 좋으니까, 다른 애들한테만 마, 말하지 말아줘... "
" 에!? 아리사아!? 그게 아니라, 말 끝까지 들어! 누, 눈물 그치고...! 어휴, 깜짝이야....! "
당황한 사아야가 나를 안고,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달랜다. 나보다 살짝 큰 체격의 사아야에게 기대니까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 것 같다.
" 아리사,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처음엔 그냥 말해버리려고 했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나도 장난을 쳐보고 싶더라... 그때 복수도 할 겸! 그래서 아리사인 걸 모르는 척 하면서 얘기하는 거, 처음엔 재밌었는데... "
조금 뜸을 들이다, 사아야가 내 등을 쓸어주며 다시 말을 잇는다.
" 아리사는 계속 꾸준히 내 방송 보러 와 주고 있는데, 나만 아리사를 속이는 게 뭔가 죄책감이 들어서... 거기다가 어제는 갑자기 방송도 나가버리고, 오늘은 학교도 안 오고. 사실 걱정돼서 내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조퇴했어. 아리사, 혹시 무슨 일 있나 싶었어... "
오히려 자기가 날 걱정해주니까 도리어 열이 받는다.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 사아야의 품을 확 밀치고 소리를 질렀다.
" ...네가 뭐가 미안해, 이 바보야!! 너한테 부끄러운 말 시키고 또 그거 좋다고 듣고 있던 건 난데! 나, 솔직히 네 목소리로 그런 말 듣는거 좋아서 그랬어, 응?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서......
" ...... "
" 하, 하... 왜 말이 없어? 이제 환멸했어? 친구가 너랑 사귀고 싶다고 해서? 그럼, 그럼 어디든 가 버리든가!! "
" ...나도 아리사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좋았어... "
" 하, 하아...!? "
" 아리사, 좋아한다구...! 그래서 더 죄책감 들었어, 좋아하는 애한테 이런 장난 치는 거... 솔직히 방송 하는 거 재밌기도 했지만, 보통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말까진 안 하잖아. 아리사인거 알았으니까, 조, 좋아했으니까... 예전부터. "
헛웃음이 나왔다. 서로 좋아했으면서, 바보같이 둘이 그러고 있었다니. 뺨이 핫팩처럼 따끈해졌다. 이유 없이 눈앞의 바보에게 틱틱거리지 않으면, 부끄러움 때문에 이불을 둘러쓰고 숨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 모, 못 믿어!! 사아야는 거짓말쟁이니까, 방송 켜서 아무한테나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니까 못 믿어! 말이 가볍다고!! 이제 와서 그러면 내가 뭐가 ㄷ, "
먼저 잘못한 주제에 아무 말이나 쏟아내던 내 입이 그대로 사아야의 입술에 가로막힌다. 사아야와 나는 침대에 눕듯이 쓰러지고, 달콤한 설탕 향기가 나는 숨소리가 온몸을 감싼다.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기도 모자른 순간, 사아야의 혀가 내 혀에 얽히고...
" " 아얏!! " "
그렇게, 첫 키스는 서로 이빨을 부딪히며 종료.
" 이익... 먼저 넘어뜨린 주제에 키스도 못해!! 바보! 멍청이! 변태! 난봉꾼!! 허당!! 야마부키 사아야는 asmr으로 야한 말이나 하는 비행청소년!! "
" ...아리사, 조, 좋아해. 좋아해... "
" 하, 하아...... 무슨, 지금 너 뭐하는, 읏..... "
이미 사아야한테 길들여진 내 귀는, 금세 그 달콤한 유혹에 반응해버린다. 숨이 금세 가빠지고, 솔직히 야릇한 기분도 들었다. 그야, 상상이 아니라 이건 진짜니까... 사아야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이렇게나 서로 밀착해서,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 아, 아리사가 믿어 줄 때까지 계속 말 할게...! "
" 돼, 됐으니까 그만해엣... 기분, 이상하다구...!! 수, 숨결 간지러워... 앗, 흐읏?! "
" 엣...!? 미안해! "
내 입에서 슬슬 엄한 소리가 나오자, 사아야는 금세 나를 놓아줘버린다. 그게 또 괜히 열이 받는다. 그만하란다고 정말 그만해버리니? 처음부터 아예 도끼질을 하지 말던가, 넘어뜨릴거면 끝까지 하던가....!
" ...아리사, 학교 갈래? "
" ...학교는 무슨 학교. 너, 오늘 아무데도 못 가... "
" 응!? 아, 아리ㅅ... 으읍, 하, 츕, 츄웁.... "
더 열이 받는 건, 그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일 정도로 내가 사아야에게 푹 빠져버렸다는 것. 그러니까 이젠 목소리로만 만족할 수는 없다. 사아야와 더 닿고 싶다. 사아야의, 전부를 원해...
*
" 사-야, 아리사, 그 얘기 들었어? ! "
" " 응!? " "
놀란 나와 사아야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카스미가 눈을 반짝이며 일을 벌인다.
" X튜브에서 이번에 신인 스트리머를 뽑는대! 상금은 무려 1천만원...! 나, 랜덤 스타 들고 나가 볼까?? 어쩌면 이것도, 우리 포피파가 무도관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일지도 몰라! "
" 카, 카스미...! 방송은 절대로 안 돼! "
" 엥? 사-야, 인터넷 방송 같은 거 잘 알아? "
카스미가 고개를 갸웃 하자, 잠시 고민하던 사아야가 나를 흘깃 보면서 사족을 붙인다.
" ...그런 거 보는 사람 중엔, 마음이 새카만 나쁜 사람들이 많거든. "
" 하아 !? 야마부키 사아야, 너 진짜 오늘 밤에 죽... 이 아니라, 카스미! X튜브고 나발이고, 시험 기간에 무슨 딴 생각이야! "
" 아리사는 인터넷 방송 중독인거 여기 있는 모두가 알거든요, 베에-! "
혀를 삐죽 내밀면서 얄밉게 약을 올리는 카스미. 오냐, 네 랜덤스타 값 오늘 좀 매값으로 받아내자...
" 사-야, 아리사가 나 때리려고 해!! 어, 얼른 막아줘~!! "
" 난, 인터넷 방송 같은 거 관심 없다고~~!!! "
*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