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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돈 안 갚는 거로 회로 돌렸던 거 (3)

00(125.138) 2020.11.23 18:07:07
조회 539 추천 25 댓글 5
														

이전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lilyfever&no=650363&_rk=tDL&search_head=20&page=1


절취선에서 시점 바뀜


 얼마 지나지 않아 너에 대한 소문은 거의 사라졌다. 근거 없는 헛소문이 대부분이었고, 돈도 다 갚았겠다, 너의 원래 평판이 소문을 빠르게 없애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여전히 뒤에서 수군거리는 애들이 종종 있긴 했지만 크게 문제 될만한 일은 아니었다. 내 눈에 보일 때마다 시비 걸어서 패줬다는 건 너한텐 비밀로 하자고 다짐한다.

 너는 다시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웃게 됐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 온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조금 아쉬운 건 나와의 관계도 다시 리셋된 것 같다는 거? 역시 장난이라도 그런 짓은 좀 부담스러웠나. 새삼 내 자신이 너무 병신 같다. 그래도 평일에 나도 가게 일을 돕겠다는 핑계로 널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아,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너와의 은밀한 거래, 우리 사이에 변화가 있다면 그거 하나다. 학교에서는 그냥 평범한데, 이 날만 되면 좀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너는 내가 말하는 소원들을 굉장히 착실하게 들어줬다. 처음엔 소원 얘기 꺼내놓고 유치하다고 이불을 찼는데, 그 후로 꼬박꼬박 고마운 일엔 고맙다고 말하는 네가 너무 귀여워서 지금은 나를 칭찬하는 중이다.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마다 네가 조금 쑥스러워하는 걸 관찰하는 게 요즘 내 삶의 낙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소원이란 게 조금 곤란할 때가 있는데, 매주 새로운 소원을 생각해내는 게 꽤 고역이란 점이다. 아무 때나 1번 내가 원할 때 같이 점심 먹어주기, 알바 끝나고 잠깐 내 숙제 도와주기, 내가 집에 대려다 줄 때 친구처럼 손잡고 가기 등등. 대체로 그런 자잘한 것들이지만, 내가 하는 말들을 네가 너무 순진하게 들어주는 탓에 자꾸만 내가 선을 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애써 마음을 다잡게 된다.

 저번 주, 마주잡았던 손의 온기를 떠올려본다. 손잡기, 여기까지는 괜찮은 걸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허용 되는 건 어디까지 였더라. 그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만큼의 망설임이 있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속마음을 꾹 누른 채 오늘도 나는 너에게 아무래도 좋은 소원을 빌겠지.

 그럴 생각이었다. 요즘 낮에 더우니까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달라고 하려 했다.

 그런데 목격해버리고 말았다. 오늘 낮에 나랑 이야기 하던 중 어떤 남자애가 널 불러 나가는 걸. 역시 그건 고백이었을까? 학기 초에 몇 번인가 네가 그런 식으로 불려 나가는 걸 본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때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왜 네가 다른 애와 사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너와 나, 둘 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언제나 특별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한테 빌린 돈을 다 갚고 나면, 이 이상한 소원 들어주기가 끝난다면, 그 때도 우리가 특별한 사이일까? 아니라는 대답밖에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야 학교에서 너와 난 평범한 친구 관계일 뿐이니까, 네가 누군가와 사귀기라도 한다면 난 또 한 번 순위에서 밀려나겠지.

 “오늘은 뭐로 할 거야?”

 어두운 저녁, 너를 데려다 주는 길에, 여느 때와 같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물어오는 너. 언젠가부터 다른 애들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이 웃어주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날 내 품에서 서럽게 울던 게 너의 나만 아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런 너를 더 보고 싶다. 너와 좀 더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 나만 아는 너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키스해줘.”

 화를 내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남들한테 화내는 모습 같은 거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너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데, 네가 얼굴을 가까이 한다. . 가볍게. 저번에 내가 했던 것처럼. 너는 언제나처럼 순순히 내 말을 들어줬다.

 자꾸 그러면 ..기대하게 되잖아. 해냈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너의 얼굴을 잡고 다시 입을 맞춘다. 이번엔 좀 더 길게. 떨어지자 보이는 너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좀 더 본적 없는 너를 원하게 한다.

 “입 벌려봐.”

------------------------------------------------------------------

 “나랑 사귀어 주라.”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봤자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야 나는 누구와도 그런 관계가 될 마음이 없는걸. 가끔 이런 고백을 받을 때마다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하는 모진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들어간다.

 나는 예전부터 이런저런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이야기 하는 것도 들어주는 것도 좋아했고, 큰 호불호도 없어서 누구든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혼자 있는 건 쓸쓸하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날 혼자 키우느라 늘 바빠 집에 없었던 엄마에 대한 애정결핍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어딘가에 속하게 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탓인지 특별하게 친한 친구나 사귀는 사람 같은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을 깊게 못 믿어서 넓고 얕은 관계를 선호하는 거였으니까.

 “미안,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앗, 스스로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누굴 사귈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고백한 남자애가 누군데?’하고 물어온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려나. 하긴 내가 생각해도 거짓말 같긴 하다. 적당히 수습하고 교실로 돌아오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떠오른 거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다.

 학기 초에 과학 실험 조 배정을 확인 했을 때, 솔직히 좀 힘이 빠졌다. 나까지 셋이었는데, 그 중 둘은 실험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보였고, 다른 하나는 왠지 이런저런 소문이 많은 너였으니까. ‘그래, 조별 과제는 원래 혼자 하는 거지.’하고 마음을 다 잡았는데, 예상외로 너는 굉장히 열심히 실험에 참여해줬고, 우리 조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이런 거 열심히 하는구나.”

 “...조별 과제는 내가 안 하면 열심히 하는 애한테 피해가니까.”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데, 너에게서 돌아온 건 더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런 거 생각하는 구나. 조금 재밌는 애 같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종종 너를 지켜보게 됐는데, 너는 입은 좀 거칠어도 꽤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애였다. 수업시간에 자는 한이 있어도 땡땡이는 치지 않았고, 당번일이나 조별과제 같이 남들에게 피해가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도, 좀처럼 애들이랑 친해지지 못하는 너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도난 사건 때 양호실에 가는 널 마주쳤었다. 하지만 끝까지 지켜본 건 아니라 증언 하는 게 좀 애매해서 망설였는데, 너는 날 증인으로 지목 하지도, 너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반에서 떨어져 나간 널 보자 조금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의 일은 그렇게 신경 쓰면서 자기 일에는 무심하다니, 이해 할 수 없었다. 결국 괜히 내가 범인을 잡는데 열을 올리게 됐잖아. 잡아서 다행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보다 그 때의 내가 더 이상한 것 같다.

 그 후로 왜인지 나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살가워졌고, 나도 모르게 점점 너랑 친해져버렸다. 나답지 않은 짓을 해서인가 얼마 안 가 엄마가 그렇게 되시고, 이제 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나한테 심한 말을 할 정도로 실망하게 한 내가 나쁜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정말 이상한 애였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했던 걸 반성중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아무래도 이상한 건 내가 맞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감정이 느껴질 리가 없으니까.

 살짝 벌린 입 사이로 너의 혀가 들어왔다. 가볍게 내 입술을 쓸고는 혀를 감쌌다.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서 참는데, ‘숨 쉬어봐.’하는 너의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내 낯선 목소리가, 점점 더 깊숙이 나를 원해오는 너의 혀가 조금 무서웠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이 왜인지 화가 난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자세를 낮춰 내 목을 핥아 내려가더니 쇄골쪽을 살짝 깨문다. 찌릿한 아픔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널 밀쳤다.

 “...미안, 오늘은 여기서 갈게.”

 텅 빈 집.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지금이라도 옆의 병원에 달려가면 엄마가 누운 채로 환하게 반겨줄 것 같은데. 오늘따라 혼자 이 차가운 집에 있는 게 외롭다.

 침대에 누워 헤어질 때의 너를 떠올린다. 조금 상처 받은 표정이었지. 조금 가슴이 쓰려 살짝 손을 올려 본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너의 시선. 뜨거웠던 입 안. 부드럽게 날 끌어안던 너.

 “.....”

 아까도 이런 소리였던가. 아니, 조금 다르다. 아까는 좀 더...

 방안에 내 숨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아까와 달리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게 아쉽다. 지금 내 몸을 쓰다듬는 손길이, 아래쪽에서 머무르는 손가락이 너의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살짝 젖은 속옷 위에서 손으로 조금 눌러보다가 곧 그만 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 오늘 고백을 거절 할 때 왜 어렴풋이 그 애를 생각했어? 그야 방금 전까지 걔랑 대화하다가 불려 나갔으니까. 그럼 오늘 키스는 왜 했는데? 소원이었잖아. 게다가 저번에 걔도 나한테 했는걸. 그 정도는 장난이야. 그 다음에 다가오는 그 애를 거부 하지 않는 건? 그건... 그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이미 알고 있잖아.

다음 날, 너를 만나면 나를 좋아하냐고 물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넌 학교에서 나를 피했고, 더 이상 가게에도 나오지 않았다. 누가 나를 피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갚아야 하는 날, 너를 만날 순 있었지만 싸늘한 공기에 너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매주 한 번씩 목적만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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