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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불건전]낙화(落火)와 두 사람의 종말 - 1 -앱에서 작성

AGBMD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2.24 03: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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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그냥 쓰던건데 마침 대회 기간이길래 마저 완성해서 낼려고 해!

불건전이지만 아주 건전하게 키스정도만 나와!

장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아포칼립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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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하늘 아래 광야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날카롭게 솟아있는 검푸른 산의 뒤편에서 하늘을 향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는 검은 연기. 새의 지저귐조차 없는 고요한 숲. 붉은 하늘을 비추듯 적갈색으로 타오르는 흙.

그것은 종말이라기에는 너무나 장엄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빽빽한 숲을 헤치고 나아가 마침내 드러난 뻥 뚫린 공터에 여자는 힘없이 드러누웠다. 차가운 땅의 온도와 억센 풀의 따가운 감촉이 등으로 전해졌다.

검붉은 배경에 하얀 입김을 섞으며 여자는 불타오르는 하늘을 쳐다봤다. 늦은 오후의 석양처럼 붉게 타올랐지만, 그 색깔은 가짜였다. 항성의 불타오르는 빛이 아닌, 행성조차 되지 못한 별의 조각이 행성을 증오하며 대기를 찢어놓은 울분의 색상. 그래서인지 깔끔하고 정갈한 주홍빛의 석양과 달리 탁하고 어두운 짙은 회색 불순물들이 잔뜩 섞여 있었다.

여자는 그 불순물들이 좋았다. 자신은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에게 붙어있는 검은 재 같은 불순물이라 생각했기에. 어쩌면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또 한 번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혜성의 파편들이 하늘을 일자로 찢어발기고 행성의 살갗을 무참히 두들겼다. 여자의 등도 행성이 울부짖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수 초 뒤 흙먼지를 머금은 충격파가 돌풍처럼 휘날렸다. 호흡기로 들어온 흙먼지 때문에 은혜는 콜록거리며 얼굴을 닦았다. 풀들이 살짝 드러난 발목 살갗을 억세게 간질였다.

풀밭에 맨발 맨다리로 다니면 병에 걸린다고 항상 스타킹이나 양말을 신고 공원이나 언덕을 거닐었던 그녀였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마당에 그런 것들은 의미가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본 풀의 감촉은 기분 좋은 살랑임보다는 따갑고 가려운 가시 같았다. 역시 만물은 멀리서 볼 때는 그 추악함과 위험함을 알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수천만 킬로미터 밖에서 보이던 아름다운 빛의 꼬리는 수만 킬로미터 앞으로 다가왔고 그제야 인간들은 빛의 꼬리가 얼음과 먼지, 그리고 모든 것을 불태울 불꽃으로 이루어진 파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찢어진 하늘에 아로새겨진 검붉은 상흔을 향해 은혜는 자신의 손을 쭉 뻗었다.

이 대지가 무너지더라도 그녀만은 무사하기를.

*
베르무트 혜성.

혜성은 예로부터 불길한 징조였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하는 별의 섭리를 거스르고 대지로 떨어지는 조각들은 고대인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과학의 등불이 우리 혹성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고 혜성들은 우주 공간에서 돌아다니는 수많은 얼음과 바위 덩어리 중 하나임을 알아내면서 자연히 혜성이 주는 공포와 경외감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이제 혜성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에 한 번씩 하늘을 아름답게 빛내는 이색적인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베르무트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도 그랬다. 수천 년 주기로 태양을 공전하는 혜성들은 인간이 고성능 망원경으로 하늘은 관측한 이래 처음으로 마주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혜성치고는 꽤 가까운 거리로 통과하며 20세기의 헤일-밥보다 훨씬 거대하고 화려한 꼬리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과학자들의 추측이 텔레비전 방송과 일간지의 지면을 채웠다.

혜성이 지나가기로 발표된 날짜가 점차 다가오자 사람들은 비일상적인 사건에 들뜨기 시작했다. 망원경을 비롯한 천문학 관련 장비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때다 싶어 마케팅 부서들도 열심히 일했다. 각종 이벤트가 소셜미디어와 웹사이트를 뒤덮었다. 수천 년에 한 번 있는 이런 사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 우리 세대는 축복받은 것이라는 과장 섞인 표현까지 오갔다. 일부 종말론을 신봉하는 종교집단들은 종말의 강림이라며 떠들어댔지만, 항상 그랬듯이 그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았다.

혜성이 지구를 지나가기 1개월 전. 우려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혜성의 파편 중 일부가 약 3주 뒤에 지구 대기권을 통과한다고 했다. 크기가 매우 작아서 피해를 줄 가능성은 적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이 덧붙었다. 한창 발전해가는 과학의 힘에 취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인류 최대의 지성들의 말을 믿고 본 이벤트 전에 등장한 작은 이벤트를 보기 위해서 산으로 옥상으로 망원경과 카메라를 들고 올라갔다.

첫 번째 파편은 축구장 크기였다.

유명한 나라의 이름 모를 소도시에 직격했다. 이름 모를 도시는 그날로 이름을 잃었다. 거기에 살던 수십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첫 번째 충돌 수 시간 전, 일부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발신인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QR코드와 함께 전송된 단문.

'891012-2****** 박민희. 귀하는 선정되었습니다. 10월 12일까지 오산 공군기지로 오시기 바랍니다. 짐은 1인당 가방 1개. 직계가족만 동행할 수 있습니다.'

*

민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공학 연구자 중 한 명이었다. 빼어난 미모로 입학 당시에는 공대 여신으로 추앙받았으나 1학기가 지나자 곧 그녀의 털털한 성격에 동기와 선배들은 모두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어떤 이는 군대의 또라이 선임이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온 것 같다면서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학점 4.3을 놓치지 않았다. 해외 대학원에 진학하여 주옥같은 성과를 낸 뒤 돌연 그녀는 국내로 돌아왔다. 그 이유에 대해 무수한 추측이 있었지만, 동기는 단순했다.

민희는 은혜를 사랑하고 있었다. 공대생다운 털털한 성격의 민희와 달리 은혜는 감수성이 깊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다만 문학이나 인문계에는 의외로 관심이 적어서 그녀는 간호대학을 택했다. 힘든 공부와 실습을 끝마치고 은혜는 어엿한 신입 간호사가 되었다. 선배들의 갈굼과 환자들의 갑질에 그녀는 마음이 꺾일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민희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동시에 민희에게도 은혜는 한 줄기 빛이었다. 사고로 양친을 잃은 민희를 은혜와 은혜네 할머니가 거두어준 이후 은혜는 민희의 태양이 되었다. 처음에는 말못한 은혜를 입은 상대였지만 점차 그 은혜는 사랑으로 변해갔다. 정식으로 사귄 뒤로 민희는 은혜가 민희에게 의지하는 것 이상으로 은혜에게 심적으로 강하게 의지했다. 프로젝트에서 막힐 때마다 머리가 굳은 교수가 열 받게 할 때마다 민희는 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구소와 병원에서 고된 삶을 살던 탓에 자주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혜성의 파편이 처음 떨어지던 날 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쉬는 날이 겹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방송에서 떠드는 천문학적인 이벤트보다 지금 눈앞에 휘황찬란하게 푸른 빛으로 떠오른 보름달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온기가 남아있는 피자 상자가 놓인 테이블을 뒤로하고 달빛이 커튼 대신 쳐져 있는 자그마한 창문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었다. 달콤한 라즈베리 향이 민희와 은혜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말보다도 이 향기와 고요함이 좋았으니까. 시끄러운 기계음과 컴퓨터의 소리, 환자들의 아우성과 삐삐거리는 바이탈 사인에서 벗어나 적막한 검푸른 공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만끽하고 싶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두 사람은 함께 담요를 덮은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창문이 아닌 서로의 옆모습을 보다가 눈이 맞으면 그대로 피식 웃어버리면서 옅은 입맞춤을 했다. 맞잡아 깍지 낀 두 사람의 손은 기름과 소독약에 거칠어져 있었지만, 그 온기와 부드러움은 풍화시키지 못했다.

혜성이 푸른 보름달을 꿰뚫듯이 겹쳐버린 그때 고요했던 두 사람만의 세계를 깨뜨린 것은 민희의 휴대폰이었다. 진동과 함께 화면에 떠오른 것은 QR코드와 무미건조한 단문.

문자의 내용이 현실감이 없어 민희가 멍하니 있는 사이 두 사람의 대지에 무서운 진동이 스쳐 지나갔다.

*
회색 SUV가 밤의 도로를 질주했다. 민희는 진정하지 못하고 연신 운전대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은혜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민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길한 진동을 느끼자마자 인터넷을 켜서 상황을 파악한 민희는 곧바로 은혜의 손을 잡고 짐을 대충 꾸린 뒤 주차장으로 갔다. 가족을 데리고 오라고 했지만, 민희에겐 친가족이 없었다. 비극적인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민희는 장례식 이후로 친척들에게 버림받았고 따라서 은혜와 은혜의 할머니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민희야, 괜찮아?"

안도감을 주던 가녀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영문도 모를 문자를 받고 생각과 상황을 정리할 새도 없이 급하게 출발해서인지 은혜는 민희 못지않게, 아니 심약한 그녀의 성격을 미루어 보아 민희 이상으로 떨고 있었다. 다만 불안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는 민희를 생각해서 꾹꾹 참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희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혜성의 파편이 지구에 떨어진 건 확실했다. 그리고 파편이 떨어지기 전 자신에게 정체불명의 문자가 왔다. 이미 털릴 대로 털린 개인정보를 기반으로 보낸 장난문자일 수도 있었지만 타이밍과 내용이 너무 절묘했다. 무엇보다도 동봉된 QR코드가 마음에 걸렸다.

"은혜야, 여기 이 QR코드 한 번만 스캔해줘."

"응? 아, 알았어."

괜찮냐는 질문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와 조금 당황했지만, 은혜는 곧 민희의 말대로 자신의 휴대폰을 켜서 QR 코드를 스캔했다. 카메라 앱을 누르는 가는 손가락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여러 번 각도와 화면 밝기 등을 바꿔가며 스캔했지만 QR 코드는 읽히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자메시지를 촬영하자 qr 코드만 시꺼멓게 변한 채로 촬영되었다.

은혜가 보여준 촬영된 문자메시지 사진까지 보자 민희는 더더욱 이 문자가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알았다. 낚시 문자나 악성 코드류의 메시지라면 쉽게 탈 수 있는 링크를 제시하지 번거롭게 스캔해야 하는 QR 코드를 줄 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무단 촬영을 막는 최첨단 기술까지 들어가있었다. 공학 계열이었지만 IT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세부 전공이었기에 민희는 그런 쪽의 지식도 풍부했다. 방금 본 사진은 분명 몇 주 전에 발표된 암호화 기술이었다. 미국 국토안보부와 국정원에서 거액의 연구비를 댔다는 흉흉한 뒷소문이 돌기도 했던 암호화 기법은 소규모 피싱 조직 따위가 쓸 수 있는 레벨의 기술은 절대 아니었다.

따라서 이 문자는 적어도 대한민국 정부 또는 그에 준하는 기관에서 보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민희는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20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 돌았던 기분 좋은 적막은 이미 거북한 고요로 변질되어 있었다. 이 문자대로라면 아마 피난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곁에 있던 은혜의 휴대폰은 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작위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자신은 선택되었고 은혜는 선택받지 못했다.
순간 머릿속을 지나간 건 의문이 아닌 분노였다. 왜 자신만 선택되고 은혜는 선택되지 않았는지. 은혜만 두고 살아가는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은혜를 두고 혼자 떠난다는 걸 민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충돌의 여파로 발생한 불과 흙먼지가 서서히 대기를 잠식하는지 검은 하늘에 주황색 불순물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불길한 그 색깔을 보자 정말로 종말이 다가오는 것만 같아 힘이 잔뜩 들어간 민희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은혜는 계속해서 떨고 있는 민희를 바라보았다. 털털하고 거침없는 민희. 운동신경도 좋고 목소리도 커서 항상 그녀는 앞에 나섰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만들어낸 모습이란 걸 은혜는 잘 알았다. 왜냐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민희는 은혜처럼 소심하고 자신감 부족한 성격이었으니까. 민희의 겉모습은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만들어낸 나름의 방패였다. 금이 가고 삐걱거리는 위태로운 방패. 은혜는 방에서 인형을 꼭 껴안은 채로 훌쩍이며 자는 민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럴 때마다 은혜는 슬쩍 민희의 곁으로 가서 손을 꼭 잡아주곤 했다. 인형과 달리 뜨거운 사람의 온기를 느끼면 민희는 눈물을 뚝 그치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런 민희를 보면서 은혜도 함께 행복한 꿈속으로 들어갔고 그 때문에 저녁에는 다른 침대를 썼지만, 아침만 되면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매일같이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보는 사랑하는 연인의 맨얼굴을 보며 피식 미소짓는 것이 두 사람의 소중한 일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민희는 떨고 있었다. 매일 밤 인형과 베개를 안고 은혜나 엄마의 이름을 부를 때처럼. 이윽고 푸르른 달빛이 붉은 색깔을 띠자 은혜도 세상이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좋은 민희는 일찌감치 눈치를 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눈앞에서 떨고 있는 민희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은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운전대에서 떨고 있는 민희의 오른손에 자신의 왼손을 살포시 포개었다.

차디찬 손가락을 감싸는 따스함에 민희가 놀라서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하늘빛을 받아 따뜻한 모닥불의 색깔을 하고 있는 은혜가 눈에 들어왔다. 손은 따스하고 부드러웠지만,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자그마한 떨림이 전달되고 있었다. 자신의 떨림인지, 은혜의 떨림인지. 조금 전 까지 머리를 혼란스럽게 휘젓던 불안이 스멀스멀 떨리는 손끝으로 빠져나갔다.
자동차 전면 유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아직은 평온해 보였다. 불그스름한 달빛이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민희는 오른손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을 머리에 아로새기며 자신의 떨림을 천천히 죽여갔다. 그러자 차창 밖의 세상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졌다. 멸망이니 계획이니 생각할 필요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 은혜만 있으면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떤 짓을 해서라도 은혜를 데려가자는 생각을 하면서 민희는 액셀 페달에 무게를 실었다.

*

날이 밝자 밤에 있었던 일들이 속속들이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곧 NASA의 중대 발표가 방송되었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확률이 높다는 것. 그 밖에 혜성의 크기나 충돌 여파 등 당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대비할 수 없는 내용을 듣는 사람의 배려없이 나열만 하는 방송이 이어졌다. 민희는 듣고 있자니 짜증이 나서 라디오를 꺼버렸다. 은혜는 그저 묵묵히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서울을 나가는 길부터 슬슬 막히기 시작하던 고속도로는 지금 완전히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이미 한국에도 작은 파편이 두어 개 떨어져 수천 명이 실종된 상태였다. 행성이 뿜는 짙은 주황색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워 메케한 냄새가 났다. 차라리 어젯밤처럼 미약한 달빛으로 모든 걸 가려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민희는 점점 초조해졌다. 평택까지 앞으로 수 킬로미터였지만 좀처럼 차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멍청한 당첨자가 소셜미디어에 일시와 장소까지 캡처해서 올려버린 까닭이겠지. 나라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듯 QR코드를 암호화했던 기술은 텍스트에는 적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라는 정부의 거짓말이 기사화되었지만 이미 종말을 앞두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람들은 기지로 몰려들고 있는 분위기였다.

도로에 갇힌 채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강도를 당할 수도 있었고 하나둘씩 늘어나는 혜성 파편의 폭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도로에서 나가는 게 현명했다. 그러나 30분째 차는 한 발자국도 가지 못했다. 초조함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하려던 그때 민희의 눈에 저 앞에 가던 차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4인 가족으로 보이는 그들은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차를 버리고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빵빵거리는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를 무시하고 달려가는 그들의 몸집이 점점 작아지며 불타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본 민희는 슬쩍 휴대폰을 켰다. 명시된 날까지 겨우 2일 남았다. 정보통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마 명시된 날에서 하루 이틀 뒤 혜성이 충돌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늘 반나절 동안 겨우 5킬로를 이동했다. 이대로면 도로에 갇힌 채 종말을 맞이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민희는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은혜는 지쳤는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새근거리며 잠들어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편안한 침대에 실어서 비행기까지 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푹신한 침대도 따뜻한 보금자리도 모두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지금 지쳐있더라도 움직여야만 했다. 다홍색으로 물든 채 기분 좋은 표정으로 꿈속에 들어간 은혜를 민희가 꿈 밖으로 끌어내었다.

"은혜야, 걸어가자."

아직 잠이 덜 깬 듯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은혜가 민희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다홍빛 자연광을 받아 묘하게 야살스러워 민희는 얼굴을 붉혔다.

"이대로면 시간 내에 도착 못 해. 힘들겠지만 걸어가자. 짐은 내가 들어줄게."

평정을 유지한 채 다시 은혜에게 말하자 서서히 의식을 되찾은 은혜가 심각한 표정으로 밖을 둘러보았다. 민희쪽으로 두어 번 눈길을 준 은혜는 알았다는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은혜야, 내 손 꼭 잡아. 절대로 놓으면 안돼."

뒷좌석에서 백팩을 꺼내 등에 멘 은혜에게 손을 내밀면서 민희가 간절함과 초조함이 섞인 목소리로 부탁했다. 은혜의 얼굴 너머 보이는 지평선은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응, 안 놓을게. 꽉 잡아줘."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 전날 밤과는 다른, 뜨거우면서 묵직한 감촉의 손이었다. 민희는 목적지를 향해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키가 작은 은혜는 그런 민희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달리듯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논과 풀밭이 펼쳐진 대지를 가로질러 두 사람은 기지로 향했다. 은혜가 헉헉거리며 지친 숨소리를 냈지만 민희는 눈물을 머금고 그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그 생각뿐이었다. 급하게 달리던 은혜가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어버렸다.

"어어어?"

곧 다음 순간 넘어진 은혜를 따라서 민희도 은혜 위로 덥석 눕듯이 넘어졌다. 은혜의 짧은 비명이 울렸다. 민희가 서둘러 일어난 뒤 아직 넘어진 채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은혜의 어깨를 잡았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너무 달린 나머지 지친 탓이었다.

"괜찮아?"

"조금 긁힌 거 같아.... 아얏!"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나려던 은혜가 발목을 잡으며 주저앉았다. 놀란 민희가 은혜의 바짓단을 걷고 양말을 벗기자 붉게 부은 왼 발목이 보였다. 삔 것이 분명했다. 민희는 자신의 멍청함에 혀를 찼다. 조급한 나머지 은혜를 상처입혀버린 자신이 너무나 미워서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 뿐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민희 너라도......"

"그럴 순 없어! 무조건 같이 갈 거야!"

민희가 자신의 백팩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큰 목소리에 놀란 은혜를 아랑곳하지 않고 민희는 백팩에서 생수와 식량, 약품들만 적당히 챙긴 뒤 백팩은 저 멀리 치워버렸다. 비닐봉지에 방금 꺼낸 필수품들을 밀봉한 뒤 은혜가 메고 있는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은혜 앞에서 쭈그려 앉아 뒤로 팔을 뻗었다. 업히라는 표시였다.

"민희야......?"

"잔말 말고 빨리 업혀! 시간이 없으니까."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된 민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은혜가 어쩔 수 없이 미안한 표정으로 천천히 발목을 잡은 채로 일어서서 민희의 등에 기댔다. 은혜와 은혜의 가방을 짊어진 민희는 짓눌리는 어깨와 등의 아픔을 애써 무시하며 기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누런 색깔의 밭과 을씨년스럽게 우뚝 선 아파트들이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두 사람을 가로막듯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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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앱 줄바꿈 극혐이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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