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메르시가 보고싶어 쓴 글 1
앙겔라 치글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빤한 시선에 뒷통수가 뚫릴 것만 같았다.
원래 있던 보건의가 출산 휴가를 썼다며, 1년만 보건의를 맡아달라는 아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맡기 전에는 쉽게 생각했다. 논문도 쓰고 쉴 시간을 가질 겸 해서 맡은 일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아나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박사님."
다른 아이들은 앙겔라에게 '치글러 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빤한 눈으로 앙겔라를 또렷하게 바라보며, 박사님, 하는 호칭을 쓰는 것이었다.
기실 앙겔라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박사라는 호칭도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학교라는 배경에서는 선생님이라 불려야 한다는 자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결코 앙겔라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이라고 해야죠."
"박사님은 박사님이잖아요."
"여기는 학교고, 저는 보건선생이죠. 그러니까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러야 해요."
"임시잖아요. 얼마 후면 다시 박사님으로 돌아갈 건데, 굳이 임시 호칭을 불러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임시여도 교사는 교사예요."
"그래도 박사님이라고 부를래요."
이 대화도 벌써 몇 번이나 되풀이 한 대화다. 아이는 앙겔라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차별적으로 부르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호감은 달갑지 않다. 앙겔라는 학생과 어떠한 식으로든 추문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다.
앙겔라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대부분은 외국인 의사인 점에 놀랐으며 그 다음엔 그녀의 외모에 호감을 나타냈다. 앙겔라는 그런 감정들이 얼마 가지 않아 사그러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제 할 일만 했다. 보건실에 찾아온 아이들을 치료하고, 빈 시간에는 논문을 썼다. 친근하게 말을 거려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사무적으로 대하는 앙겔라의 태도에 얼마 못가 지쳐 떨어져 나갔다.
아이만 빼고 그러했다.
그냥 그 때 모른척 했어야 했을까. 앙겔라는 아이와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
별 거 없는 만남이었다.
집 근처 편의점에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눈에 들어온 골목길에서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던 아이를, 임시라고는 해도 교사인 앙겔라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이의 옆으로 가 담배를 빼앗아들며 어린 나이에 흡연을 시작하면 폐암에 걸릴 위험이 높으니 피우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더니 묘한 시선을 보내왔었다. 그걸로 인연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이가 양호실로 쳐들어왔다. 보건의로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 아이들의 관심이 시들해져, 이제 겨우 한가로움을 느끼려던 시기였다. 아이는 마치 제 방문을 열듯이 양호실 문을 벌컥 열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아, 어제의……."
"송하나예요."
아이가 씩 웃으며 제 이름을 말했다. 어제는 교복에 명찰이 없어서 몰랐는데 분홍빛 명찰색을 보니 3학년인 모양이었다.
송하나. 들은 적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장의 조카라고 했던가. 미국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다른 아이들보다 한살 더 많다고 했다.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라는 동료 교사의 조언이 있었던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저 담배 끊었어요."
"그래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상 옆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무릎을 모아 앉아 그 위에 턱을 괴고 앙겔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태 학생들이 앙겔라에게 호기심을 보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외모 때문에 이골이 날 정도로 주목을 받으며 살아왔던 앙겔라도 조금 당황할 정도였다. 앙겔라는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나요?"
"심장이요."
심장질환인가? 양호실에서 해결이 될 수준이 아닌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청진기를 꺼내드는 앙겔라에게 아이가 웃어보였다.
"어제 박사님을 보니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 뛰더라고요."
"…네?"
"아무래도 한눈에 반한 것 같아요."
"……."
앙겔라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살면서 고백 같은 건 수도없이 받아왔다. 까마득하게 어린 여자애에게서 고백 받은 건 처음이지만, 별다를 것도 없었다. 앙겔라는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만족하고 있었기에 제 삶에 다른 사람을 들여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 앙겔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그저 빙글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이튿날부터 등교하듯 양호실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매일매일 찾아와서는 앙겔라의 가운 주머니에 사탕이나 껌 같은 것을 한무더기씩 안겨주고 갔다. 앙겔라는 군것질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보이면 그것을 나누어주곤 했다. 그러자 아이는 그걸 또 어떻게 알고는 앙겔라에게 찾아와서 종알종알대며 불평을 해댔지만, 애초에 학생한테 뭔가를 받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가운 주머니에 사탕을 채워넣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앙겔라는 꿋꿋이 무시하려고 했지만, 어느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하나 양, 왜 저한테 사탕이나 껌을 주는 거죠?"
"제가 좋아하거든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제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제가 좋아하는 걸 주는 게 뭐가 어때서요?"
"…하나 양이 좋아한다고 해서 제가 좋아하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박사님. 나는 지금 박사님에게 나를 인식시키는 중이에요. 어쩌다가 제가 지금 드리는 이 사탕이나 껌을 보게 되면 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말이에요."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 이야기인가? 앙겔라는 조금 머리가 아파왔다. 계속 무시하려고 했는데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앙겔라는 이번에도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
"박사님!"
학교 밖에서 아이를 다시 만난 것은, 그 주의 휴일, 집 앞 슈퍼에 다녀올 때였다.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짐을 뺏어들더니 친근하게 그녀를 불렀다. 목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아챈 자신이 싫어서 앙겔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학생. 여기는 무슨 일이죠?"
"저도 이 아파트 살아요!"
오, 이런. 무시하고 싶은 아이를 계속 마주치게 생겼다. 앙겔라는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미간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비닐봉투를 보고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사님 의외네요. 왜 죄다 3분 요리밖에 없어요? 맛 없잖아요. 그리고 박사님은 뭔가 요리 잘 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귀찮아서요. 그리고 그럭저럭 먹을만 해요."
"이런 거만 먹으면 질리지 않아요? 저 요리 잘 하는데, 제가 요리해드릴까요?"
"아뇨,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이런 것만 먹다가는 건강 상해요."
"필요한 영양분은 모두 섭취하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아이의 손에서 앙겔라가 다시 봉투를 뺏어들었다. 성큼성큼 집으로 향하는데 아이가 졸래졸래 따라왔다. 앙겔라는 휙 돌아서서 아이를 보고 말했다.
"하나 양, 전 학교 밖에서까지 하나 양과 얽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여기서 이만 헤어지죠."
"박사님 105동 1308호에 사시죠?"
"…그걸 어떻게 알죠?"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제 주소를 언급하는 아이를 흡사 스토커 보듯이 경계하는 앙겔라에게 아이가 말했다.
"저 그 윗집 살거든요."
"……네?"
"지난 달에 이사오셨잖아요. 저 박사님 가끔씩 봤는데, 박사님은 저 못 보셨나봐요."
"……."
앙겔라는 앞으로의 생활이 몹시도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습격당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
아이는 평일이면 밥먹듯 양호실에 놀러왔으며-용건이 없으면 오지 말라고 했더니 상사병으로 시작하여 별의별 병을 이유로 앓아 누웠다-, 휴일에는 온갖 요리를 들고서 앙겔라의 집을 찾았다. 처음에는 매몰차게 돌려보냈더니 음식만이라도 받아달라고 하도 사정을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받았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별 생각 없이 먹어봤더니 생각보다 훨씬 맛있어서 놀랐더랬지.
다음날 빈 그릇을 가져다주며 잘먹었다고 했더니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맛있었냐고 되물었다. 맛있게 먹은 건 사실이었으니 그렇다고 하자 아이가 뿌듯하게 웃었다. 요리를 잘 한다는 건 사실인 듯 했다.
처음 물꼬를 트자 그 다음부터는 생각보다 쉬웠다. 아이는 요리 연습이라는 핑계로 주말마다 앙겔라의 집을 찾았고, 요리만 덥석 안겨주고 돌아가곤 했다. 양호실에서처럼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올 거라 생각해서 잔뜩 경계하던 앙겔라는 의외의 행동에 놀랐지만, 그 뿐이었다.
요리연습이라는데 뭐 어때. 논문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니 그 외의 일은 생각하기 귀찮았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3개월이나 지나 있었고, 휴일 아침,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요리를 들고 찾아온 아이의 얼굴을 앙겔라는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날라리 같던 이미지에 비해 아이는 생각보다 착실한 것 같았다. 적어도 매주 음식 요리를 핑계로 딱 보기에도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할 인상은 아니었는데. 앙겔라는 제 안에서의 아이에 대한 인식을 한단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갈래요?"
타인에게 무심한 앙겔라였지만, 3개월 동안이나 아무 대가 없이 맛있는 요리를 덥석덥석 받아먹은 지라 양심이 좀 찔렸다. 커피 한 잔 가지고 될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더 이상은 요리를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 할 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환히 웃으며 앙겔라의 집에 발을 들였다.
손님용 실내화가 있긴 했지만 그걸 누군가가 신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사온 이래로 단 한 명의 손님도 들지 않았던 앙겔라로서는 큰 결심을 한 셈이었다. 아이가 앙겔라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며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하나 양의 집은 윗집이니까 구조가 같을 텐데 그렇게 쳐다볼 게 있나요."
"당연히 있죠! 저희 집엔 이렇게 많은 책들은 없거든요."
아닌게아니라, 복도 통로에서부터 발코니를 제외한 거실의 두 벽면에 이르기까지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딱 보기에도 어려워보이는 두꺼운 원서들이 어지러이 꽂혀있는 걸 보고 아이가 감탄을 터뜨렸다.
"책이 정말 많네요. 박사님 이거 다 읽은 것들이죠?"
"책을 전시해놓는 취미는 없어서요."
"영어에 프랑스어에… 이건 어느 나라 말이에요?"
"독일어요."
"와. 박사님 되게 똑똑하시다."
실은 그보다 서너개의 언어를 더 할 수 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한참 어린 아이에게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들릴까 싶었기 때문이다.
"믹스 커피 뿐인데, 괜찮겠어요?"
"전 박사님이 주시는 거라면 뭐든 좋아요."
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앙겔라의 집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한 것 같아 보였다. 앙겔라는 아이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말하고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아이가 거실을 구경하는 사이 물은 금방 끓었다. 앙겔라는 커피잔 두 개를 들고 소파로 가서 한 잔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마셔요."
"네, 맛있게 잘 마실게요."
"흔한 커피믹스인데요, 뭘."
"이런 건 타주는 사람이 중요한 거죠."
아이는 기분이 정말 좋은 듯 연신 방실방실 웃어댔다. 이 얼굴에 대놓고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야하는 앙겔라의 속이 불편해졌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게 대체 얼마만이더라……. 의미없이 기억을 뒤지는데 아이가 빤히 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하나 양?"
"네. 그게, 박사님은 원래 뭐 하던 분이셨어요?"
"…대학 병원 의사였어요. 보건의 자리는 1년간 쉬면서 논문 쓸 겸 맡은 거고요."
"아, 그래서 맨날 양호실에서 뭐 읽느라 바쁘셨구나."
아이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걸린다. 앙겔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낸 것이 마냥 기쁘다는 미소 같다. 앙겔라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그런 감정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나이인데.
"더 물어볼 건 없어요?"
"음-, 당장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하나씩 알아가고 싶어서요."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네요."
"왜요?"
"이제 그만 찾아와줬으면 하거든요."
무미건조하게 내뱉어진 말에 아이가 행동을 멈췄다. 앙겔라는 일부러 아이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말했다.
"학교에서만이라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집은 달라요, 하나 양. 제 사적인 공간에, 아무리 하나 양의 호의라고 해도 이렇게 찾아오는 건 반갑지가 않아요."
"왜 갑자기 그러시는 건데요?"
"하나 양이 적당히 하다 지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끈기있네요. 그래서 직접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이웃사촌인데도요?"
"전 원래 이웃이랑 왕래 안 해요. 귀찮거든요."
아이가 몸을 움찔했다. 전면에 대고 귀찮다고 했으니 상처받을만 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앙겔라는 멈추지 않았다. 애매모호하게 가느니 딱 잘라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하지만 이제 이런 건 그만두기로 하죠."
*
아이를 그렇게 돌려보낸 후, 앙겔라는 다시 3분 요리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전과 다름없는 삶이 지속될 거라 생각했었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3개월 만에 입에 댄 3분 요리는 더이상 '그럭저럭 먹어줄 수준'의 음식이 아니었다. 아이가 3개월간 가져다 바친 음식 탓에 입맛만 높아진 까닭이었다. 그래도 배는 고프니 꾸역꾸역 참고 먹으려 했지만, 곧 반도 먹지 못하고 남은 음식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좀 굶고 말지 뭐. 어차피 배가 고파야만 밥을 먹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속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슈퍼에서 사 온 3분 요리는 그 주말 내내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른 몸에 밥을 먹지 않으니 살이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겨우 1주일만에 2kg가 줄어들자 앙겔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19살 어린 아이의 손에 위장이 넘어가 버린 듯한 상황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이 느껴졌다.
아이는 매일같이 양호실을 찾아왔지만, 할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앙겔라의 주위를 맴돌다 그냥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또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식탁 위에 3분 요리를 꺼내놓고 흡사 적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기를 10여분, 앙겔라는 미각을 포기하고 생존을 택하기로 했다. 이게 다 아이가 쓸데없이 요리 솜씨가 뛰어난 탓이라고 투덜거리며 전자렌지에 3분요리를 집어넣는데 현관벨이 울렸다. 인터폰을 통해 밖을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뭘까 싶은 마음에 문을 열자, 바로 문 옆에 놓여 있는 냄비와 거기에 붙은 포스트잇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박사님, 요새 너무 마른 것 같아 걱정이 돼요. 부담갖지 말고 그냥 드세요. 앞으로 양호실 안 찾아갈게요.]
이름은 써있지 않았지만 누가 쓴 것인지는 자명했다. 앙겔라는 그 포스트잇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나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기를 쓰고 쳐들어오더니,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기분이 이상했다. 포스트잇을 떼서 주머니에 넣고 냄비를 들어올렸다. 식탁 위에 내려놓고 열어보았다. 예쁘게 데코된 청경채에 둘러싸인 어향관자가 참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3분 요리를 앞에 뒀을 때는 조용했던 위장이 이제야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울렸다. 앙겔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제가 그어 놓은 선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요리 때문인지, 아이의 정성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파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일단 젓가락을 들었다.
1주일만에 먹는 아이의 요리는 평소보다 배는 더 맛있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친 앙겔라는 화장실 거울 앞으로 가서 제 얼굴을 들어다보았다. 볼살이 아주 약간 빠져보이기는 했지만, 얼핏 보면 1주일 전과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할 수준 같았다. 주머니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다시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앙겔라는 포스트잇을 현관문 옆 신발장에 붙여놓았다. 별 생각 없이 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가 있었다. 아침에 출근 할 때나 저녁에 퇴근할 때마다 아이가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 저녁으로 아이가 생각났다.
아이는 포스트잇에 써진 말을 지켰다. 하루아침에 조용해진 양호실의 분위기가 앙겔라는 적응되지 않았다. 아이가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무사하며 논문을 읽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너무 조용하니까 오히려 집중이 되지가 않을 정도였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지만 그조차도 뭔가 어색했다.
속이 답답해진 앙겔라는 학교 뒤 소각장으로 향했다. 교사들 사이에선 흡연장소로 통하는 곳이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려는데,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한테는 담배피지 말라고 해놓고선, 박사님은 담배 피우는 거예요?"
"하나 양……."
꼭 1주일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앙겔라는 무심코 아이의 얼굴을 눈으로 더듬었다. 아이는 약간 얼굴 살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입끝에만 살짝 매달린 미소 때문인지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
"…왜 하나 양이 여기 있는 거죠? 설마 담배 아직도 피고 있나요?"
"아뇨, 저 끊었다고 했잖아요. 쓰레기 버리러 왔어요. 이번 주 당번이라."
아이가 등 뒤의 소각장을 가리키며 그리 말했다. 앙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박사님은 담배 안 끊으실 거예요?"
"…전 성인이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성인인데. 저 만 19세예요."
"교복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안 되죠."
"와, 치사해. 얼른 졸업을 하든 해야지, 정말."
아이가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인양 자연스러워서 앙겔라는 아이가 1주일간 양호실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단 사실을 깜박 잊을뻔 했다. 그 점을 떠올리자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이 열렸다.
"양호실은……."
"네?"
"…양호실에는 왜 갑자기 안 오겠다고 한 거예요?"
"아."
말을 꺼낸 차에 그냥 해버리자, 아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박사님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처음부터 불편하다고 했을 텐데, 뭘 새삼스레…….. 이제와서 불편할 게 있나요."
"그래요? 안 불편하면 양호실 놀러가고 싶은데."
"…양호실은 놀러오는 곳이 아니에요."
"어차피 수시로 대학 갈 거라 수업도 안 듣는데요, 뭐."
아이가 발치에 놓여있던 작은 돌을 툭 차며 말했다. 앙겔라는 쥐고 있던 담배를 담배갑에 집어넣었다. 마주치면 불편할 거라 생각했던 아이는 막상 마주치자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듯 했다.
"어향관자, 잘 먹었어요."
"어땠어요? 그거 꽤 자신작이었는데."
"맛있던데요."
아이가 싱긋 웃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짓고 있던 웃음과는 다른 진짜 웃음이었다.
"그럼 요리 연습 계속 해도 돼요?"
"……."
앙겔라는 고민했다. 거절하자니 미각을 포기해야 할 것 같고, 받아들이자니 아이에게 여지를 주는 것 같다.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아이의 제안에 끌리고 있다는 것임을 인지했다. …그래, 이러다 보면 지쳐서 그만 두겠지. 그 날이 과연 올까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다음부턴 커피라도 마시고 가요."
아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앙겔라를 쳐다보았다. 앙겔라는 제가 말해놓고도 후회했다. 그냥 받기만 뭐해서 별 의미없이 말한 거였는데, 제 공간 안에 타인을 들이게 되는 빌미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한번 내뱉은 말을 취소하기도 뭣했다. 아이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을 보니 취소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만 가볼게요."
"양호실 가시는 거죠?"
"네."
"같이 가요!"
"…어디 아픈가요?"
"아뇨, 그런데 박사님 안 따라가면 심장이 아플 것 같아서요."
대충 의미를 알 것 같은 발언에 앙겔라는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주말마다 집에 찾아올 아이니 양호실인들 안 쫓아올까. 다시 시끄러워질 양호실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오는데, 또 그게 그리 싫지만은 않아서 마음이 복잡하다.
"박사님, 같이 가요!"
뒤에서 쫓아오든 말든 앙겔라는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끝.
어제 쓰다가 배고파서 저녁먹으러 가며 끝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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