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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그녀에게선 연락 한번 없었다. 그런 짓을 하고 내 쪽에서 선톡을 보내는 것도 이상했기에 그저 계속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메시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일요일 자정이 되자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가 원했던 것이 플라토닉 관계였다면. 난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째깍거리는 시계의 소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항상 혼자 잠자리에 들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빈자리가 만들어내는 메아리가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다시 휴대폰을 켜보지만, 여전히 선생님에게서는 답장이 없다.
관계란, 서로가 원하는 걸 주고받는다는 전제하에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선생님이 원하는 플라토닉 관계를 줄 수 없었고 선생님은 내가 원하는 더 진하고 깊은 어른의 관계를 줄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둘은 랜덤채팅에서 만났던 첫날부터 어긋나 버렸는지도 몰랐다.
결국, 그날은 시계가 너무나 시끄럽고 휴대폰 불빛이 지나칠 정도로 밝아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크서클을 화장으로 가린 뒤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오늘 요행으로 선생님이 지나가는 걸 마지막으로 보고 단념하기로 했다.. 마지막이니까 얼굴을 보는 것 정도는 용납되겠지.
그리고 나는 오늘은 우리 반과 옆 반 모두 수학 수업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다른 반 수업에 들어가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너무 스토커 같고, 뭔가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잠이 쏟아지는 멍한 정신으로 무너지는 눈꺼풀을 겨우겨우 지탱했지만, 한계가 찾아왔다. 생리통이 심하다는 알기 쉬운 거짓말을 하고 또 체육을 땡땡이쳤다. 다행히 지난번 땡땡이 이후 딱 한 달 여만이었다. 의심 없이 보내주는 체육 선생님에게 감사를 표했다.
낡은 하얀 커튼과 딱딱한 침대, 먼지 냄새가 나는 흰 이불. 빈말로도 아늑하다고 할 수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보다야 편했기에 이불을 턱 밑까지 올리고 눈을 감았다. 새까만 세상이 펼쳐졌다. 양호실은 조용했다. 바깥에서 작게 들려오는 체육 수업 소리, 윙 거리는 냉장고 소리. 내가 뒤척이면서 나는 소리. 천천히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 그런 고요 때문에 또 버려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음악 소리로 고요를 묻어버리고자 몰래 숨겨온 아이팟을 꺼냈다. 교실에 잠시 들러 챙겨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을 꽂고 재생목록을 터치한 순간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 아니, 사람들이 들어왔다. 발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알아챌 만큼 나는 섬세하지 않다. 하지만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는 고요하던 심장을 시끄럽게 흔들었다.
"은정아, 잠깐! 여긴 양호실......"
"그냥 부재중 팻말 달아놓고 문 잠가 버려. 나 솔직히 못 참겠어."
"얘가 진짜!"
얼굴을 몇 번 보진 못했지만 양호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잔뜩 달아올라서 양호 선생님을 몰아붙이고 있는 목소리는, 내가 주말 동안 들었던 목소리보다 조금 더 강했고 약간 더 낮았다. 목소리에서 느껴질 리가 없는 라일락 향이 났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모른 척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양호 선생님의 제지하는 말에 옅은 신음이 조금씩 섞여들고 그 뒤를 와이셔츠를 벗기는 듯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뒤따르자 나는 왜인지 참을 수 없었다.
아이팟을 체육복 주머니에 욱여넣고 일부러 들리라는 듯이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난폭하게 젖혔다. 안쪽까지 들어왔다면 내가 있는 걸 알아챘겠지만 그녀들은 야한 짓에 정신 팔렸는지 기초적인 부분에서 실수했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본 것처럼 수학 선생님과 양호 선생님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이려고 하는 눈물을 애써 삼키고 상의를 전부 탈의하기 직전인 두 사람을 지나쳐 양호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소리 나게 쾅 하고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일락 향기가 여운처럼 남아 내 주변에 맴돌았다.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엄청난 존재감의 향기였다.
양호실 밖에서 두어 걸음을 걷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수학쌤이든 양호쌤이든 뒤따라올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왜냐면 지금 수학쌤을 본다면 필시 울어버릴 테니까. 주말 동안 저질렀던 나의 비행을 전부 까발려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 수학 선생님을 곤란하게 할 수 있을까? 수학 선생님을 상처입힐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양호실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현명했지만, 복수심과 분함이 그런 이성의 통제를 방해했다.
내 다리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쪼그려 앉아서 얇은 양호실의 나무문에 귀를 대어 봤다. 잘 들리지 않았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던가. 두 사람은 안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만약 나의 등장으로 그녀들의 열기가 식어버렸다면 나름 나쁘지 않은 복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동시에 겨우 그런 거로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졌다. 선생님이 내 마음을 쥐고 흔들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무르팍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러자 참았던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눈물로 수분이 전부 빠져나와 버린 탓이었을까? 코가 막힌 덕에 라일락 향의 역겨운 여운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쪼그린 채로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버려진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일 줄 몰랐다. 이미 부모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서 익숙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이 내 마음속에서 샘을 이루고 있을 때,
"여기서 뭐 하니?"
듣기 싫으면서도 정말로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뻔뻔하다는 감상을 접어두고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선생님이 있었다.
아직 양호실 문은 굳게 닫혀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변을 일깨워준 건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선생님에게서 라즈베리 향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역한 라일락 향기와 달리 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달콤한 향기.
그 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내가 좋아하는 수학 선생님. 라즈베리 향을 품은 예쁘고 귀엽고 순수한 선생님. 수줍음 많은 선생님은 갈색 눈동자에 진심을 담아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퍼지는 것처럼 보였다. 새하얀 피부가 새빨갛게 변했다. 정말 라즈베리 같아.
"너……"
너라는 말 한마디만 꺼낸 채 멍하니 입만 벌리고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 하지만 멍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해봐도 지금 상황은 선생님이 두 명인 것 같았다.
창문으로 나가서 빙 둘러 온 건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일부러 할 이유가 없다.
혹시 초능력이라도 쓰시는 건가? 더 터무니없는 가정이었다.
전부 내 환상인가? 그나마 제일 말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비눗방울 같은 환상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허공에 들린 채 굳어있는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 날의 감촉. 피부가 한층 더 붉어졌다. 홍조가 전염이라도 되는지 내 귓불과 목덜미에도 열이 올랐다. 지금 열을 잰다면 필시 보건실로 끌려가 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문 모를 사과를 하고 복도를 달렸다. 누가 주의를 주는 것 같았지만 그런건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교사를 한 바퀴 빙 돌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달리느라 지친 가슴을 움켜잡으며 주저앉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체육 시간 땡땡이 그만 칠걸.
끊어버리려 했던 운명의 붉은 실은 생각보다 단단했나 보다.
*
점심시간이 되었다. 잠이 부족하면 식욕도 떨어지는 모양이라 나는 급식을 굶고 대신 집에서 가져온 빵을 뜯어서 우물우물 씹었다. 이미 밥을 먹고 온 그룹 친구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선생님을 생각했다. 수학 선생님? 또 다른 선생님?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혹시 내가 모르는 우리 학교의 괴담이나 비밀 같은 게 있나? 수업도 가십도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것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눈앞에 있는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 우리 학교에 혹시 얼굴이 엄청나게 닮은 쌤들이 있냐?"
뜬금없는 질문에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아 너무 눈치가 없었나? 눈길이 따가웠다. 하지만 나는 주눅 들지 않고 무심한 듯 빵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혜정이라고 하는, 뜬 소문이나 시답잖은 소식들을 좋아하는 녀석이 맞장구치듯이 대답했다.
"혹시 은정 쌤 이랑 은하 쌤? 두 분 쌍둥이라고 하던데."
그에 맞춰 옆에서 음료수를 빨라 마시던 정아가 맞장구 치듯이 물었다. 이 둘은 항상 붙어다니면서 티격태격하는 주제에 묘하게 손발이 잘 맞았다.
"진짜? 근데 그게 누구야?"
"상급반 수학 가르치는 쌤이랑 물리 쌤이래. 그 수학 시간마다 복도 지나가는 엄청 이쁜 쌤."
"아, 기억났다. 맨날 땅만 보고 다니는 쌤 맞지?"
"어! 옷도 엄청 잘 입잖아."
"공부도 잘하고 예쁜 데다가 옷도 잘 입는다니 존나 불공평하네."
내가 던진 주제가 순식간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창때인 우리라서 떨어지는 나뭇잎으로도 종일 수다 떨 수 있었지만 역시 언제봐도 대단한 수다 능력이었다. 눈치 없이 던진 것 치고는 꽤 괜찮은 화제였을까. 그래도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완전히 닮은 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왁자지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내 신경이 집중되었다.
"분명 남자들한테 인기 많겠지."
"내가 저 스펙이었으면 벌써 의사 남편 한 명 꼬셨다."
"야, 의사랑 판검사들 눈 존나게 높아서 안 돼. 특히 니같은 성격이면."
"내가 어때서?"
"바로 그런 성격."
"이 년이 갑자기 왜 시비 털고 지랄이야."
"근데 은정인지 은주인지 하는 수학쌤 여자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진짜? 대박이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소문이 날 정도로 헤프게 다닌 건가? 하긴 양호실에서 양호 선생님이랑 브래지어 차림으로 서로 애무하고 다닐 정도인데 누가 한 번쯤 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목격된 건 과연 수학쌤이었을까. 물리 쌤이었을까. 애초에 물리 쌤은 어떤 사람인 걸까? 내가 만나던 사람은 수학일까 물리일까.
"쌍둥이면 둘이 성격도 닮았어?"
이야기의 주제에 벗어나지는 않으면서 내 궁금증을 해소할 말을 고르고 골라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우리 반은 문과인 데다가 통합과학 과목도 늙은 화학 선생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물리 선생님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혜정이의 발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넓은 모양이었다.
"좀 다르대. 수학쌤은 다들 잘 가르친다고 난리인데 물리쌤은 목소리도 기어들어 가고 수업 시간에 실수도 존나 많이 하고. 좀 덜렁대고 낯가림 심하대. 수업 중에 울었다는 말도 있던데?"
혜정이가 막힘없이 물리 선생님에 대한 정보를 술술 풀어냈다.
"와, 울었다고? 진짜 대박 사건인데."
"근데 또 머리는 이상하게 좋다네? 개인적으로 질문하면 말도 안 되는 풀이를 보여주신단다. 아무도 이해 못 하는데 정답은 맞대."
"근데 김혜정 넌 대체 그런 거 어디서 듣는 거냐?"
"내 중학교 동창이 이과반 상위권이라서."
"니랑 지인짜 안 어울리는 친구네."
"아까부터 자꾸 성질 긁네? 그 날이냐?"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잡소리를 뒤로하고 내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아들어갔다. 지금까지 수학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물리 선생님이었고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데이트할 때, 집에서 덮쳤을 때의 표정과 반응이 전부 설명되었다. 하지만 퍼즐이 맞아들어가면서 내 마음은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한 건 과연 수학 선생님일까, 물리 선생님일까.
첫눈에 반한 건 수학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채팅으로 그녀를 만날 때까지 쌓아 올린 선생님의 모습은 어디가 수학이고 어디가 물리였을까. 상냥하고 부끄럼 많은 선생님과 능력 있고 과감한 선생님. 나의 좋아함이 엉망진창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라일락과 라즈베리가 섞여서 괴상한 향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며 말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직 잠이 부족했던 걸까. 가벼운 현기증이 다시 밀려왔다.
"윤하 너 괜찮냐? 얼굴빛이 안 좋은데?"
넋 놓던 중에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자꾸만 선생님의 부드러운 손 감촉이 생각났다. 애써 태연한 척 괜찮다는 말을 돌려주었지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은 녀석들은 또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날이라 힘든 거냐?"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와, 윤하가 생각이란걸 한대. 얼굴빛도 그렇고 진짜 곧 죽는 거 아냐?"
정아가 실례되는 말을 뱉어서 나도 모르게 눈을 흘기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혜정이 정아를 제지하듯이 말을 이었다.
"넌 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잖아."
"그래서 무슨 생각? 남자냐? 이렇게 깊게 생각할 건 그거밖에 없지."
꽤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걱정한다기보다는 재밌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느낌이겠지. 그래도 그런 장난이라도 좋으니 나는 참고자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안 돌아가는 머리로 최선을 다해 지금 상황을 각색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두 명이 있는데.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그게 뭔 소리야. 좋으면 좋은 거지."
"둘이 너무 다른데 둘 다 조금씩 맘에 들어서......"
"양다리네, 양다리! 윤하 이 나쁜 년아~"
"아니, 나도 양다리는 싫어서 한 명만 고르고 싶어."
그러자 혜정이가 한숨을 쉬면서 한심한 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을.
"그런 건 니가 제일 잘 알잖아. 까놓고 말해서 지금 당장 손잡고 키스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어...?"
"그래, 그 사랑에 빠진 표정 보니까 이미 정했네. 상담 끝. 상담료는 나중에 노래방 쏴라."
혜정의 그 말에 떠오른 것은, 라즈베리 향이 진하게 느껴지던 데이트를 끝내는 순간에 나눴던 키스였다.
처음이 어쨌건 착각했건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상냥하고 수줍음 많고 겁쟁이인 그 사람이었다.
빵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멍하니 음식을 주물럭거렸다.
그것은 강한 죄책감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속물적으로 시작된 일종의 계약이었다. 상냥한 선생님은 처음부터 플라토닉 이상의 관계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멋대로 착각하고 충동적으로 라즈베리 선생님을 덮쳐버렸다. 설령 라즈베리 선생님이 다른 여자랑 만난다 해도 내가 화를 낼 구석은 없었는데.
갑자기 덮쳐지면서 선생님은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을까. 그렇게나 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까지 나를 원망하지 않고 선생님은 마지막 상냥함을 흩뿌려주었다. 말없이 연락을 끊은 것도 나름의 배려였을까. 아니면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주였을까.
"나중에 쏠 테니까 나 보건실 좀 갈게."
"그래, 오늘은 그냥 땡땡이 쳐버려!"
복잡한 마음과 죄책감을 정리하고 싶어서 조용한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친구들은 꺄아꺄아 거리면서 계속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번에는 서로에게 연인 후보가 있는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이야기들을 뒤로 한 채 나는 복도를 힘없이 걸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몰래 꺼내었다. 새로운 메시지가 1개.
두근거림이 떨림이 되어 손끝으로 내려갔다. 약한 소름이 등과 어깨로 돋아났다. 앱 아이콘을 터치하자 노란 채팅앱의 배경이 떠올랐다. 대화목록이 뜨기까지 걸리는 1초가량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1층 과학실로 와 줄래?'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이물감을 뱉어내기도 전에 내 다리가 움직였다. 3층에서 1층까지 쏜살같이 내달렸다. 굴러떨어지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과학실의 위치를 찾으려 복도를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과학실은 서쪽 출구 끝에 자그맣게 있었다. 처음 알았다. 뭐 그녀의 존재도 오늘 처음 알았으니까.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손으로 난폭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쾅 하는 소리가 났고 동시에 과학실에서 누군가 깜짝 놀란 듯 히익거리는 비명이 들려왔다.
푸른 컬러렌즈를 뺀 갈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실험용 책상에 올려져 있던 수업 교재가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가 났다.
편안한 라즈베리 향이 과학실을 천천히 채운 탓인지 급격히 달아올랐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문을 조심스럽게 밀어서 닫고 나는 한걸음 두 걸음 선생님에게 향했다. 사과하기 위해서. 그 이상을 바랄 순 없었다. 왜냐면 잘못을 저지른 건 나니까. 염치없이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용서해주기를 비는 수밖에.
눈을 꼭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더욱더 진해진 라즈베리 향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마치 선생님이 내 몸 안에 들어온 듯한 감각이 내 체온을 서서히 올리고 있었다. 콩닥대는 가슴을 손으로 눌러버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더는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구차한 변명보다는 간결한 대답이 훨씬 진실성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짧은 사과의 말을 전했다. 떨리는 가슴에 얹은 손이 같이 떨렸다. 다리도 떨리고 있는 걸까.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은데 그러면 선생님에게 더 상처를 줄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붉어진 얼굴로 눈을 피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의미일까.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의 반응이 무서웠다. 욕을 먹거나 뺨을 맞는 것도 각오했는데도 무서웠다.
버림받는 게 너무 무서웠다.
'잘못을 저지른 주제에 뻔뻔하기도 하지.'
마음속의 날카로운 삼각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도 그럴 게 난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눈길을 피한 선생님을 두고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떨리는 다리가 바닥에 붙어버려 그것도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도피는 눈을 찔끔 감는 것이 전부였다.
암흑 속에서 점점 강해지는 라즈베리 향이 얄밉게 느껴졌다. 라일락 향기는 맡는 것조차 숨이 막혔는데 라즈베리는 내 심장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떨림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내 품으로 라즈베리가 안겨 왔다. 코앞에서 퍼지는 달콤한 향기. 등과 가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 그리고 폭신함.
목덜미를 훑는 숨소리.
골반에 맞닿는 따뜻함.
선생님이 내게로 서서히 녹아들어 오고 있었다. 떨리는 눈꺼풀을 올리자 바로 옆에 선생님의 갈색 머리칼이 선명했다.
"괜찮아. 선생님은 괜찮아."
귓가에서 울리는 달디 단 목소리는 너무나 상냥하게 내 가슴을 후벼팠다.
죄책감이 형태가 되어 눈에서 흘러내렸다. 내가 이렇게 울보였나. 분명 라즈베리에는 독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로 이상해질 리가 없을 테니까.
등을 토닥여주는 손에 맞춰 나의 흐느낌이 과학실에서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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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신 분도 계셨겠지만 사실 여주인공과 만난 선생님은 여주인공이 처음에 반했던 선생님이 아니었답니다.
다른 여자랑 야외플을 하던 것도요
즉 여주가 오해하고 급발진해서 멋도 모르는 쌍둥이 선생님을 덮쳐버린 거랍니다 ㅠㅠ
복선을 깔긴 깔았는데 어디까지 전해졌을지는 모르겠어요
똥글 봐줘서 감사해요 ㅠㅠ 에필로그도 꼭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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