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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불건전] 크리스마스는 휴방합니다 -1-

백갤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1.10 23:58:56
조회 790 추천 22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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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 소리에 벌컥 문을 열었다가, 옆집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무안해지는 수연이었다.


수연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문을 닫았다. 부끄러움에 식어버린 가슴이 반동이 되어 수연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설레발은 죄악이라더니, 수연은 순간 본 아주머니의 멍한 표정을 떠올리며 두 눈을 질끔 감았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먹 쥔 손으로 신발장을 괜히 툭 치고 수연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신발장 거울에 비추어 산타 드레스를 입은 새빨간 얼굴의 자신이 보였다. 율이가 크리스마스에 입으면 귀여울 것 같다며 말했던 산타 드레스, 괜히 색기를 부려보겠다고 조금 내린 가슴팍이 허전했다.

하아, 왠지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문득 돌아본 동그란 벽걸이 시계 속 시간은 17시 50분.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10분이나 남아있었다.


지금도 생생한 옆집 아주머니의 오묘한 표정. 부끄러워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수연은 침대로 가는 대신 다시 한번 문 앞에 섰다. 지금까지 기다리던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놀라는 그녀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명 산타 언니 작전, 키패드를 누르는 중 갑자기 문이 열리며 산타가 나온다면 그 율이라도 분명 놀랄 거라는 생각이었다.


놀라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자 수연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꽤 긴 만남이었지만, 수연은 율의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슬그머니 뒤로 다가와서 자신을 번쩍 든다던가, 휴대전화를 뺏어 가서 머리 위로 들곤 돌려주지 않는다든가 하는 율의 짓궂은 장난에 당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조금 키가 크다고 사람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그 건방짐. 오늘이야말로 놀라는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서 평생 놀려줄 생각이었다.


뭐, 조금이라도 그녀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문득 본 신발장 앞 거울에는 빨간 산타 드레스를 입은 자신이 헤벌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연이 크리스마스날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린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제는 산타 할아버지가 부모님이란 걸 아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건 10년도 전에 졸업한 어엿한 숙녀였지만, 떨리는 마음만큼은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사랑의 힘일까, 오히려 그때보다 더 기대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율이와 사귀게 된 후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 기대하던 크리스마스 데이트는 율이의 갑작스러운 스케줄로 할 수 없었지만, 집안을 은은하게 비추는 둘이 함께 꾸민 트리의 불빛과 정성스럽게 준비한 파티 음식의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크리스마스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어딘지 쑥스러웠다. 수연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괜히 시계를 돌아보았다. 은은하게 틀어놓은 캐럴 노래 사이로 째깍째깍 초침 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3분밖에 안 지났네.”


1분 1초가 하루 같다. 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학창 시절 재미없는 국어 수업을 들을 때보다도 시간이 늦게 가는 느낌이었다. 지루할 때만 시간이 늦게 가는 줄 알았더니 너무 기대해도 시간은 늦게 가는 모양이다. 괜히 다리가 아파져 와서, 수연은 몸을 꼿꼿이 세워 허리를 쭉 폈다. 아침 일찍부터 음식을 만드느라 바빴으니 몸도 조금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율이는 약속 시각을 지키지 않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찍 오는 타입도 아니었다. 거의 30분 전부터 문 앞에서 조마조마 율이의 발소리만을 기다리는 자신이 조금 주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문 앞에 앉아서 주인이 돌아오는 것만을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다.”


멍멍, 언젠가 보았던 커다란 레트리버를 상상하며 산타 모자를 고쳐 쓰고 있던 수연의 얼굴이 일순간 밝아졌다. 잠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정말로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수연은 현관문에 착 달라 붙어 귀를 기울였다.


“~~집이에요.”


조금은 높고 상쾌한 목소리,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율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수연의 입가에 지어졌다.


“~~층이에요. 엘리베이터요? 에이, 코 앞인데 무슨 엘리베이터를 타요~”

이제는 확실하게 율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질수록, 수연의 얼굴엔 기대가 아닌 약간의 실망이 떠올랐다.


‘누구랑 통화 중인 걸까?’


들려오는 율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지도, 꾸미지도 않은 즐거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늘 수연의 집으로 오는 사람은 당연하겠지만 수연의 연인인 서율, 한 사람뿐이었다. 물론 카톡 친구라곤 50명도 안 되는 수연과 다르게 이곳저곳 발이 넓은 율이기에 자신이 아닌 누간가와 즐겁게 통화를 하는 것 정도는 수연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크리스마스날 다른 사람과 즐겁게 통화하는 연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역시 조금 싫은 기분이 들었다.


통화 중이라면, 산타 언니 작전도 실행할 수 없다. 수연은 찝찝한 마음속에서도 적어도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전화를 끊기를 바랬다.


“~~다. ~~요?”


그래도 그 바람이 통했는지, 방금까지만 해도 또렷하게 들리던 율의 목소리가 마치 멀어진 것처럼 흐릿하게 작아졌다. 콩콩거리는 발소리도 뚝 하고 끊겼다. 전화를 끊은 걸까? 율이 전화를 끊는 걸 확인하면 바로 튀어 나갈 생각으로 수연은 현관문에 귀를대고 바깥 상황에 집중했다.


“~~요, 아하핫.”


일순간 즐거워하는 율의 웃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통화는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내가 듣고 있을까 봐 목소리를 줄인 걸까? 율의 즐거운듯한 웃음소리가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수연이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담아두고, 수연은 크게 한번 심호흡했다. 율이 바람피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따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율은 분명히 솔직하게 대답해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다.


두근두근, 수연의 가슴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금방이라도 집으로 올 것 같았던 율의 인기척도 이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현관문에 대고 있던 탓에, 왼쪽 뺨이 시리게 아팠다.


수연은 거의 달라붙듯이, 몸을 현관문에 밀착시켜 다시 한번 소리에 집중했다. 입을 가린 듯 웅얼거리는 율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띠리링~’


그리고 그 작은 목소리를 덮듯이, 도어락이 열리며 내는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수연의 몸이 앞으로 휙 쏠렸다. 그러고 보면 율은 언젠가 수연이 준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꼬꾸라지는 머릿속에서 수연은 문득 그 사실을 떠올렸다. 왜 율이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서프라이…. 우아앗?”


금방이라도 자빠질 것처럼 몸이 앞으로 쏠릴 때만 하더라도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것은 차디찬 바닥이 아닌 푹신한 패딩과 익숙한 향수 향이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자, 익숙한 재질의 하얀 롱패딩이 수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뭐, 뭐야? 갑자기 튀어나오고..”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단순한 것 같았지만, 그 익숙한 목소리에 수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방금까지 가슴속을 꽉 채우던 긴장감이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져갔다. 언젠가 자신이 선물해준 플로럴한 향수의 향과 함께, 그렇게 고대하던 현실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야, 누가 문을 그렇게 휙휙 여냐?”


들뜬 목소리를 감출 생각도 없이 수연은 말했다. 산타 언니 작전은 실패. 놀라는 율의 표정을 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아쉬운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깟 놀란 표정, 그깟 전화 통화. 지금껏 바보 같은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에 율이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거였다.


이렇게 안겨있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저 눈앞의 율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인사의 키스 정도는 평범하겠지? 수연은 잠시 율의 품에 얼굴을 비비다, 눈을 꼭 감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키스를 조르듯 조금 발돋움을 했다.


“자, 잠깐 언니?”


만나자 마자 키스를 조르는 것은, 아무리 스킨쉽이 잦은 수연이라고 해도 역시 처음이었다. 처음이긴 했지만….


당혹감 섞인 율의 목소리에 수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은, 잠깐 언니 잠시만요….”


수연의 어깨를 조금 밀어내는 율의 손. 아주 조금 밀렸을 뿐인데 수연에겐 그것이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차마 눈을 뜰 엄두도 나지 않았다. 수연은 율과 조금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거부당했다는 충격보다도, 당혹감 섞인 율의 목소리가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미, 미안, 역시 만나자마자, 조금, 오버였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고.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수천 번이라도 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율이는 키스를 거부할 아이가 아닌데…. 아니, 만나자마자 키스해주라고 하면 누구라도 당황했겠지, 그래도 기분 나쁘게 사람을 밀까? 설마 방금의 통화가 정말로 바람? 울렁거리는 마음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수연의 모습에 율은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거로도 상처받는 게 박수연이란 사람이었지. 율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자신의 손을 감싸는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수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거절당한 것은 쇼크였지만, 손을 잡아주는 율의 손은 언제나처럼 다정한 느낌이었으니 조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연의 시야를 채운 것은 율의 얼굴이 아닌 렌즈가 세 개 날린 그녀의 휴대전화였다. 그 뒤로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율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언니, 저 지금 방송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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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율이랑 합방을 하게 됐어요. 휴방 아니었냐고요? 당연히 장난이었죠, 제가 크리스마스에 뭐 할 일이 있겠나요.”


크리스마스, 연인과 집에서 단둘이. 방금까지만 해도 수연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대가 영혼 없이 내뱉는 말과 함께 빠져나갔다. 크리스마스에 뭐 할 일이 있겠나요, 그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서 수연 자신이 듣기에도 조금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정작 자신과 크리스마스에 할 일이 있었던, 연인님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수천 명의 시청자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수연은 괜히 애꿎은 책상만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언뜻 보이는 자신의 짧아진 손톱이 바보 같았다.


“언니 집에 오는 건 완전 오랜만이네요, 뭐. 그게 크리스마스라는 건…. 좀 그렇지만”


아하하, 하고 멋쩍은 듯 웃는 율에게 수연은 당장이라도 ‘뭐가 그런데’라고 툭 쏘아붙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자신이 얼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 시간만을 기대했는지 율은 알까? 방송을 허락한 것은 수연 자신이었지만, 역시 방송을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언니도, 음, 내년에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이랑…. 뭐, 그럴 일은 없겠네요.”


“뭐야 그게, 흘려들을 수 없겠는데?”


마음은 공허해도 말은 술술 나오는 걸 보면, 나도 방송 중독인 모양이다. 능숙하게 율의 말을 받아치면서도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 수연이었다.


당연하게도 둘의 연애는 모두에게는 비밀이었다. 당장 방송 제목만 해도 ‘[연율합방] 솔로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였으니까.


“나라고 크리스마스에 너랑 방송하고 싶은 줄 알아?”


“그건 피차일반이거든요.”


“진짜, 나이도 어린 게 한마디를 안 져 아주.”


“와, 나이 차이 얼마나 난다고 진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해요, 완전 꼰대죠?”


이런 무의미한 말싸움을 왜 해야만 하는 걸까. 책상 아래로 억지로 잡은 손을 수연은 조금 꽉 쥐었다. 하지만 눈앞의 율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율이 아무런 저항 없이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는 게 삐진 동생을 달래는 언니 같은 느낌이 들어서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언니 그 옷은 뭐에요?”


“어?”


툭 내뱉듯 무신경하게 율이 던진 한마디. 그 한마디에 수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진짜 안 어울리는 거 알아요? 언니는 음, 산타보다는 루돌프가 어울릴 거 같은데.”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마음 한편에는 이건 방송일 뿐 율이가 잊어버릴 리가 없다고 믿는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녀의 걸림 없는 목소리와 태연한 시선이 불안하다는 자신도 있었다.


“여러분은 어때요? 언니 조금 웃기지 않아요?”


농담이지? 방송이라서 그러는 거지? 장난이라고 말해줘, 나를 안심시켜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기를 바라며 눈을 마주쳐 보았지만, 율은 슬쩍 위아래로 수연을 훑어보더니 미련 없이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걸림도 없다는, 시원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울렁거리던 가슴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응? 아 뭐야, 언니 설마 삐졌어요?”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수연은 대답없이,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율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율도 그제서야 조금 미안해졌는지, 책상 아래로 수연의 손을 다시 잡아왔다. 언제나처럼 따듯한 율의 손가락이 손등을 두번 두들겼다. 진심이 아니라는 뜻일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일까.


고작 산타 드레스 하나로 이러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언젠가 인터넷 쇼핑몰을 보던 그녀가 말했던, "언니 이런 거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이런 산타 드레스 입고 크리스마스 파티하는 거, 언니가 입으면 완전 귀여울 것 같은데."라는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율이 추천해 준 옷을 자신이 까먹을 리가 없었다.


맞잡은 율의 손은 언제나처럼 따듯했다, 하지만 감출 수 없는 서운함이 마음 한구석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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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방송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나랑 보내기로 했잖아.”


소파에 앉아서 아끼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로 있는 힘껏 떼를 쓰는 수연의 모습은 정말로 어린애 같았다.


다행히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살하고 싶은, 수연의 키스 시도는 율이 황급히 카메라를 꺼준 덕분에 수천 명 앞에서 생중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율의 계정은 여전히 방송 대기 상태로 켜져 있었다.


“아니 언니 들어봐요, 크리스마스에 휴방하면 시청자들이 별로 안 좋아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 이미 휴방 공지했어. 애초에 시청자들이 나보다 중요해?”


“언니는 원래 그런 캐릭터고 저는…. 언니, 나 이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좀 도와줘요.”


슬며시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율의 손을, 수연은 거칠게 쳐냈다. 언제나처럼 슬쩍 넘기려고 하는 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분명히. 크리스마스는. 우리 집에서. 단둘이. 보내자고. 말했어.”


울컥하는 마음에 말이 군데군데 끊겼지만, 수연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서운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방송을 안 한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해?”


신경질적으로 수연이 던진 쿠션을, 율은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챘다.


“언니, 저 이미 생방으로 언니랑 합방하러 간다고 말했단 말이에요. 조금만 도와줘요.”


집 앞에서 재잘재잘 떠든다 싶더니만 방송이었던가. 입안이 썼다. 율이 통화를 한다는 생각에 어울리지도 않는 질투를 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럼 셀카라도 찍어서 올리면 되잖아!”


“조금만 해줘요. 언니, 4시간 아니, 3시간 만이라도. 크리스마스 파티는 밤늦게 해도 되잖아요.”


율은 식탁 위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파티 음식들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언니 좋아하는 케이크도 사 왔어요. 내일은 온종일 놀아드릴 테니까, 네?”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있을 때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아이를 타이르는듯한 말투를 하는 율이었다. 솔직히 그런 율의 태도가 수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건, 이제는 익숙하다면 익숙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고 싶을까?


“진짜 웃긴다 너.”


“언니도 제 맘 알잖아요. 조금만 도와주세요.”


“그럼 내 맘은 왜 몰라주는 건데!”


제 맘 알잖아요, 한 마디에 수연의 머릿속 무엇인가가 뚝 하고 끊기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파티를 준비하던 그 마음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널 기다리던 내 마음을 왜 몰라주는 걸까.


“그래, 해, 방송. 근데 너 혼자 해. 자, 여기 방음실 열쇠”


수연은 신경질적으로 소파 옆 탁자 위에 놓여있던 방음실 열쇠를 손에 쥐어 율에게 뻗었다.


“언니.”


수연의 그런 행동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율. 언니를 부르는 목소리도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수연은 이를 악물고 율을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눈을, 율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떼쓰는 아이를 내려다보는 표정.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런 율의 하나하나가 울렁이는 수연의 가슴속에 자꾸만 돌을 던져댔다.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울렁이는 가슴이 파도가 되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수연이 내던진 열쇠는 율의 뺨을 맞고 떨어지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


내던진 쿠션을 잡았을 때처럼 열쇠도 잡아챌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철렁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열쇠를 맞은 율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은 수연의 마음이었다.


수연은 두 눈을 질끔 감았다. 이 상황에서도 우리 이쁜 율이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지 하는 감정이 앞서는 자신이 역겨웠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열쇠를 줍는 율의 표정에 아파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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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째깍,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율은 고개를 돌려 버린 수연을 가만히 보면서, 손안에 들린 열쇠를 꽉 쥐었다. 시야가 조금 흐려졌다. 손안에 들린 열쇠는 그리 차갑지는 않았는데, 열쇠에 맞은 뺨은 시리듯 아팠다.


시작은 매니저의 카톡 한 마디였다. ‘크리스마스날 방송 안 하나요?’란 짧은 한마디.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하더라도 율 또한 크리스마스 휴방 공지를 내고 수연과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길 생각이었기에, 율은 별 대수롭지 않게 그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크리스마스 휴방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라며 장문의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한듯한 논리적이고 질서정연한 글. 그럴듯한 내용에 율이 조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니저는 한술 더 떠 수연과의 합방을 포함한 여러 가지 콘텐츠 기획안들을 하나둘씩 보내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미리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니저는 율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것은 매니저만의 생각이 아닌 율 자신의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고 결정한 일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애인을 만나러 간다는 소문이 돈다던가, 사실이긴 했지만, 하는 이야기는 그렇다고 쳐도 ‘크리스마스’란 ‘대목’이 주는 효과는 확실히 효과가 있어 보였다. 더군다나 매니저가 제안한 수연의 집 깜짝 방문이란 콘텐츠는 정말로 재밌을 것 같았다.


마지막에는 수연의 휴방 공지를 확인한 매니저 쪽에서 조금 주저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율이 앞장서서 자신이 수연을 설득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일 정도였다. 애초에 수연의 휴방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신과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서였다. 서로의 스케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물론 그런 율의 즉흥적인 결정에는 언니라면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애인으로서의 수연은 어린애 같은 성격에 조금 성가신 부분이 있었지만, 스트리머로서의 그녀는 훌륭한 선배이자 멘토였다. 방송 경력만 수년에 플랫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구독자층을 보유한 수연이라면, 당연히 크리스마스날 방송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둘만의 파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율 또한 아쉬운 일이었다. 그녀의 기대를 깨는 건 몹쓸 짓을 하는 것이란 자각도 있었다. 하지만 수연이라면, 자신이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언니 수연이라면, 당연히 애인으로서의 크리스마스보다 스트리머로서의 크리스마스를 우선시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언제나의 투정을 부리면서도, 이해해 줄거라고 믿고 있었다.


율은 열쇠를 맞은 뺨에 손을 가져갔다. 얼얼한 통증이, 차가운 열쇠의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가슴이 울렁거렸다.


“언니….”


무엇이라도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말을 더 잇지 못하는 율이었다. 격양된 수연의 반응에 조금의 섭섭함과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마음 깊숙이 묻어놨던 죄책감과 미안함이 떠올랐다.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밀때 보았던, 파티용품을 사러 갔을 때 보았던 언니의 행복한 미소가 여전히 생생한데, 지금은 수연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수연을 실망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시청자보다 수연이 중요한 것은 당연했다.


“역시 방송은….”


“..됐어.”


역시 방송은 취소할게요, 간신히 입을 연 율이었지만 수연의 목소리가 그것을 칼같이 끊었다. 단호하긴 했지만, 평소와 같은 수연의 목소리에 흐려진 율의 초점이 천천히 돌아왔다.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연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네?”


“됐다고, 방송하자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수연은 확실하게 말했다.


“파티는 내일 해도 되지만, 크리스마스는 오늘뿐이잖아. 해줄게.”


“어,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는데.”


놀랄 정도로 깔끔한 수연의 반응에 말까지 더듬는 율이었다. 수연이 이해해 주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믿고 있었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한 탓에 영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수연은 그대로였는데, 괜히 그녀를 의심한 것 같아 다른 의미의 미안함이 떠올랐다.


“억지는 무슨. 생각해봤는데 크리스마스가 중요한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에 너랑 있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


“언니….”


툭 던지듯 말했지만, 그런 수연의 말이 너무나도 멋지게만 느껴졌다. 기특함에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려다가 율은 황급히 손을 거뒀다. 평소와 같은 작은 키에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귀엽다는 감정보다는 멋있다는 감정이 앞섰다. 입고 있는 바보 같은 산타 드레스도 멋있게 보일 정도였다.


“아 맞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이요?”


갑작스러운 수연의 제안에 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가만히 율을 올려다보던 수연은 대답대신 조용히 손을 뻗었다.


“손이요?”


끄덕. 의미는 모르겠지만, 율도 천천히 손을 뻗었다. 수연의 손은 조금 따듯하고, 언제나처럼 작았다. 서로의 손이 맞닿자 수연은 이내 율의 손을 꽉 잡았다.


“...”


힘을 꽉 주는 듯 수연의 작은 손이 움찔움찔 떨렸다. 하지만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율의 표정에 수연은 할 수 없다는 듯 힘을 풀고 조용히 말했다.


“대신 오늘은 온종일 손잡고 방송할 거야.”


“네?”


뜬금없는 수연의 제안에 얼빠진 목소리가 나오는 율이었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수연은 고개를 휙 돌려 방음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요..?”


율의 얼빠진 질문에도 수연은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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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역시 언니 요리 잘하시네요.”


멍하니 있다가도 율의 칭찬에 정신이 돌아오는 수연이었다. 문득 본 휴대폰 시계가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길게만 느껴지던 합방도 어느덧 끝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이미 정리가 끝난 일이었다. 애인이기 이전에 율이의 멘토로서, 크리스마스 방송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이왕 하는 것 재밌게 해보자는 생각도 충분했다. 하지만 떨어진 텐션만큼은 어떻게 해서도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즐겁게 해보려고 하다가도 방구석에 놓인 선물이라던가, 율의 크리스마스 애인 관련 농담들을 듣다 보면 허무함이 몰려왔다.


이런 로우 텐션으로 길자면 길고 짧자면 짧은 5시간 남짓한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일취월장한 율이의 진행실력 덕분이었다. 그래도 율이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의 유일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라면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이 생긴 사람이 요리는 잘하더라고.”


그래도 끝이 보인다고 생각하니, 농담할 여유 정도는 생겼다.


“뭐에요, 언니 자기 객관화가 잘되어 있네요?”


“얘는 말을 참 이쁘게 해”


책상 아래로, 수연은 괜히 율의 손등을 꼬집었다.


두 사람의 손은 여전히 맞잡고 있었다. 율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듯한 눈치였지만 맞잡은 손을 떼지는 않았다. 이따금 율이 손잡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냐며 귓속말로 물어오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수연은 괜히 눈을 흘기며 그녀의 질문을 넘기곤 했다.


수연은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손을 잡는 이 행위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율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었다. 이번 방송에 아무런 저의도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애인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율이의 목소리에 불안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연은 지치지도 않고 손을 계속해서 잡아주는 율이가 고마웠다. 5시간 동안 한 손만을 쓰는 건 분명 불편할 텐데도 그녀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왜 한 손만 쓰냐는 시청자들의 질문에도 “온종일 한 손만 쓰기 미션이 있어서요.” 하면서 능청스럽게 넘기곤 했다. 고맙고 대견한 감정. 이런 게 분명 부모의 마음일 것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언니 미래의 애인은 뭔가 부럽네요.”


애인이란 말에 정신이 확 드는 수연이었다. 눈앞의 율은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맨날 먹을 수 있잖아요.”


가볍게 손등을 쓰다듬는 느낌. 그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율이 가볍게 윙크했다. 캠에선 보이지 않는 윙크. 수연 하나만을 위한 진심이 담긴 윙크였다.


“뭐야, 칭찬해도 돈 안 나온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부모의 마음은 무슨, 영락없이 애인에게 푹 빠진 바보의 마음이었다. 히죽거리는 입을 숨길 수가 없어서, 수연은 무언가를 찾는 척 허리를 아래로 숙였다. 어디서 그런 기특한 말을 배워왔는지 참.


수연이 고개를 숙이자 율이 잠옷 겸 입은 돌핀 팬츠 아래로 그녀의 하얀 허벅지가 보였다. 율은 언제나 간지럽다며 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수연은 무릎베개를, 그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을 좋아했다. 약간의 벌을 겸해서, 오늘은 무릎베개라도 시켜볼까. 수연은 별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살짝 쓰다듬었다.


“하읏?”


야릇한 신음, 그리고 순간의 정적. 정작 놀란 것은 율보다는 수연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율의 야릇한 신음에도 놀랐지만, 지금은 방송 중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3만 명 앞에서 연인의 신음 소리를 생중계한 거야?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율은 생각보다 냉정한 모양이었다. 율은 이내 수연의 등을 팡팡 두들기면서 살짝 수연과의 거리를 벌렸다.


“아 왜 꼬집어요, 진짜. 이 언니는 칭찬해줘도 이런다니까.”


“아, 응, 미안.”


수연은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채팅창을 슬쩍 바라보았다. ‘방금 뭐야,’ 라던가 ‘???’ 하는 채팅들이 몇 개 올라왔지만, 그리 큰 반응은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던 것일까,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하여간, 제가 이러면서 산다니까요. 슬프다 슬퍼.”


채팅방 매니저들이 힘써주시는 것일까, 몇 안 되던 그런 채팅마저도 이내 금방 정리된 모양이었다. 평소와 같은 방송이었다. 율도 다시 수연의 음식 실력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두근거리는 수연의 심장을 뺀다면.


이따금 물어오는 율의 질문에 답한 것은, 거의 수연의 본능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율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시야 하단부에 살짝 보이는 율의 새하얀 허벅지에 온 신경이 쓸려있었다.


위에서 들리는 율의 야릇한 목소리, 살짝 떨리는 부드러운 허벅지, 혹시라도 들켰을까 철렁 내려앉은 심장. 그 오싹할 정도의 경험이 어째서인지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둘의 사랑이 플라토닉한 관계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에로스적인 느낌도 아니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감정이 겹치면 서로 몸을 겹치곤 했지만, 경험 없는 두 사람의 정사란 모범적일 정도로 정적인 것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일상에서의 일탈이, 수연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새롭게만 느껴졌다.


“방종은 언제 할 거냐고요? 글쎄요, 예정대로 11시쯤?”


순간 들려온 율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수연은, 살짝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10시 45분. 정말로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고대하던 방송 종료 시각이, 더더욱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그깟 허벅지 따위 15분 후에 마음껏 만지면 되는 일이었다. 수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잡념을 떨쳐냈다. 잠시나마 심연에 발을 디딘듯한 기분이었다.


“이 언니가 왜 이래.”


다행히 율도 수연의 행동을 어디까지나 실수로 받아들여 준 모양이었다. 수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그 갈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의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 응 힘내자 15분.”


“언니 사이다가 아니라 술 먹은 거 아니지? 술 취한 줄 알았어.”


수연이 마신 사이다를 집어들은 율을 보면서도 수연은 바보처럼 헤헤 웃을 뿐이었다.


“킁킁, 사이다는 맞는데….”


“야 너무 오바한다.”


사이다 캔을 다시 식탁 위로 돌려놓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율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수연의 모습에 율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수연도 그녀를 따라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푹 식어버렸던 크리스마스 파티의 기대감이 조금씩 고동치기 시작했다.


“하여간 곧 방종 시간이네요. 네? 술방이요?”


방금 율이 술 이야기를 해서 일까, 채팅창에선 술방 이야기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저야 좋죠, 하면. 근데 언니가 별로.”


솔직히 말해서 수연과의 술방은, 율에게는 치트키 같은 느낌이었다. 수연은 보기에도 그렇지만 술에 아주아주 약했다. 그리고 취한 모습이 재밌었다. 결국 두 사람의 술방이란 금방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수연을 율이 케어하는 것이 전부인 콘텐츠였지만, 수연의 주사는, 그저 구경하는것 만으로도 재미가 있어서 한번 술방을 하고 나면 구독자 수가 느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수연 또한 자신의 주량과 주사를 알기에, 율과의 합방이 아닌 이상 방송에서 술을 입에 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찌 보면 술방이야말로 재미와 희소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최고의 콘텐츠라고 볼 수도 있었다.


“아음…. 언니? 어쩔래요?”


솔직한 마음으로, 율은 술방을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자정을 넘기는 건 역시 마음에 걸렸지만, 술방이 인기 있다는 사실 하나 만큼은 수연도 알고 있을 터였다. 2만 명. 크리스마스 덕분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시청자가 몰려 있었다. 반응이 좋은 술방을 한다면 지금이 최고의 기회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어? 뭐라고?”


“술방이요….”


마지막 양심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수연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율은 잠시 눈을 돌렸다.


“아, 그래서 외로운 솔로들의 크리스마스는 술로 마무리하자, 이 말이지?”


가시가 돋친 듯 단어 하나하나가 날카로웠다. 적어도 마지막 한 시간은, 둘이서만 보내고 싶다. 그것이 서로가 합의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만큼은 지금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스트리머로서 이런 기회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시청자 수 2만명, 수연은 몰라도 율에게는 정말로 꿈만 같은 숫자였다.


“..”


말없이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수연에게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하자고 하면, 수연은 해줄 것이다. 그것은 방금의 경험으로도 알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죄스러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오랜만에.”


대답은 역시나 YES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수연의 승낙이 고맙고도 미안했다. 분명 엄청나게 실망한 표정이겠지, 율은 아까 소파에서의 수연의 표정을 떠올렸다. 차마 그녀를 올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율은 대신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어느샌가 놓고 있었던 손을 뻗어 다시 수연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처럼 손등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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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언니….”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고 있는 수연에게 율이 사과를 해왔다.


“응? 뭐가 미안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수연은 괜히 율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실망은,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마음은 왠지 편했다. 율이 방송 욕심이 있는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술방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율이 그것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이미 하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은 자신을 생각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이야기였다.

응,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


“자자, 들어가자 기다리겠다.”


별생각 없었는데, 냉장고 문이 조금 세게 닫힌 듯 '쿵' 하는 소리를 내었다. 깜짝 놀란 듯 토끼 눈을 하는 율에게 수연은 실수였다고 말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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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나 멀쩡해. 응 괜찮아.”


수연은 몸을 빳빳하게 세우고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몸을 휘청거렸다. 그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는 율이었다. 평소라면 맥주 한 캔에도 탠션이 오르는 수연이었는데, 오늘은 이미 두 캔째를 마시면서도 얌전하기만 했다.


“언니, 졸려요? 피곤해 보이네.”


전에도 이랬었나?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잔잔한 술방도, 어느 정도 수요층이 있다지만 채팅창의 분위기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술에 취해 난리 치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은 시청자도 율도 마찬가지였다.


“에구, 방송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언니 컨디션이 너무 안 좋네.”


그렇다면 굳이 방송할 이유는 없었다. 술방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수연이었지 율이 아니었다. 자신 혼자서 술을 마시는 방송을 2만 명이나 보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율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시간은 아직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끝낸다면 40분은 단둘이서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벌써 끝내면 안 되지.”


마우스를 조작하려는 율을 멈추듯 수연이 중얼거렸다. 수연은 잠시 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상체를 내려 율의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 언니?”


“아 편하다,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진짜 토하면 안 돼요.”


살짝 놀라긴 했지만 율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수연의 가느다란 숨결이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조금 야릇한 기분이 들었지만, 쓰다듬는 것과 다르게 소리를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 혼자서 어쩌라는….”


부비부비, 얼굴을 허벅지에 비비는 감각에 율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놓인 작은 뒤통수가 도리도리 흔들리고 있었다. 수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음, 역시 방종을 해야…. 하읏?”


허벅지에 닿은 이상한 감촉에, 율은 다시 한번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방금의 뒤통수가 아닌 수연의 옆얼굴이 보였다. 허벅지에 닿은 통통한 볼살 너머로, 선 분홍색의 혓바닥이 천천히 허벅지 안쪽을 훑었다.


“아 진짜 간지럽히지 말라고요~?”


처음에는 술 취한 수연의 실수라고만 생각했지만, 허벅지를 털어보아도 수연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율이 허벅지를 움찔거릴 때마다, 수연은 조금씩 허벅지 안쪽으로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숨결이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등골에 소름이 달렸다. 자극을 받는 곳은 하반신인데, 아찔한 감정이 머리까지 이어졌다. 저절로 거칠어지는 숨 사이로, 율은 겨우겨우 단어를 내보냈다.


“이 언니, 진짜, 취했나 보네….”


미쳤나 봐. 이 언니. 머리가 아찔했다.




여기까지 했는데도, 꿋꿋이 방송을 진행하는 율이, 수연은 솔직히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럴 때 대견하다고 말하는 게 맞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하여간 그런 대견한 율이라고 해서 딱히 멈추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허벅지를 꼬집었을 때 느꼈던 아찔한 쾌감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몹쓸 성벽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 지금의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단순한 복수였다. 처음에는 역시 하지 말자는 생각이었지만, 술이 들어가고 나니 자신을 자신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알게 뭐람, 적어도 새하얀 율의 허벅지만큼은 부드러웠고, 어쩐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자, 잠깐만요, 아 진짜 언니”


물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허둥거리면서 율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착 달라붙어 있는 수연은 한쪽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숨길 기색도 없이 수연은 노골적으로 입술을 허벅지에 붙이고 있었다.


“언니, 왜 그래요? 진짜, 부끄럽게.”


율은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수연의 귀에 속삭였다. 시청자들의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은 부끄러웠지만, 더 걱정되는 것은 수연의 계정이었다. 이런 정신 나간 짓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계정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왜? 계속 방송하지.”


슬쩍, 수연이 짓는 소악마 같은 미소에 율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술 취해서 하는 실수라고 믿고 싶었지만,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노골적이었다. 술에 취한 수연은 스킨쉽이 많아진다. 그것은 율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허벅지를 핥거나 물은 적은 없었다.


“방종할 거예요.”


“아니, 하지 마. 명령이야.”


“명령은 무슨 하읏….”


고개를 들려는 율을 멈추려는 듯, 수연은 손까지 사용하며, 율의 허벅지 안쪽을 간지럽혔다. 선 분홍빛 혀가 허벅지 안쪽을, 작은 손가락이 바지 안까지 들어와, 더욱더 깊은 곳을 살짝 훑었다. 순간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감각에, 율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술의 탓이 아닌, 기분 좋은 뜨거움이 하반신을 가득 채웠다.


책상 아래로 허리를 숙이고 있으니, 캠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도 수천 명의 사람이 방송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청난 배덕감에 정신이 아찔했다.


“이, 일단 방송 끄고 올게요.”


“방송 끄지 말라고 했어.”


“아 진짜 왜…. 아으….”


듣기 싫다는 표현으로, 수연은 율의 허벅지를 앙물었다. 부드러운 혓바닥과는 다른 딱딱한 감촉. 물린 곳은 아팠다, 하지만 그 감촉 너머로 슬그머니 느껴지는 부드러운 혓바닥이 아찔할 정도로 좋았다.


“율아 방송해야지? 시청자들 기다리겠다.”


수연이 율의 허벅지에서 입을 때자, 키스한 듯한 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젖은 촉촉한 입술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는 수연을 뒤로하고 율은 다시 고개를 들어 컴퓨터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이상했다.


“이 언니 완전히 갔네요. 아 진짜, 지가 술 먹자고 했으면서.”


자신이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니터 앞에 서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채팅창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웅성거리고 있었다. 당황한 것은 채팅 매니저들도 마찬가진 듯 무슨 일 있냐며 매니저 채팅을 보내왔지만, 율은 의도적으로 그 화제를 무시했다. 애초에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방송 언제까지 하냐고요? 원래는 한 1시까지 하려고 했는데….”


말을 흐리며 율은 잠시 수연을 내려보았다. 괴롭힘이 멈췄다 싶더니, 수연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율의 허벅지에 뺨을 대고 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는 짓은 정신 나간 짓인데도 얼굴만큼은 평소처럼 귀여워서 복잡한 감정이었다. 하여간 지금은 한시라도 빠르게 방송을 마무리하고, 수연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언니가 완전히 죽어버렸으니까. 이제 마무리…. 으….”


마무리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허벅지를 물어오는 수연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것은 율 또한 예측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신음을 입안에서 죽이고, 율은 황급히 두 눈을 감고, 잔잔한 바다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마무리, 해야, 해야죠, 네….”


잔잔한 파도는, 수연의 움직임을 따라 출렁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된 느낌이었다. 이제 방종 선언을 하면서 억지 미소를 지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럼 오늘 방송.”


“아냐 아냐, 나 아직 안 취했거든?”


율의 방종 선언을 끊으려는 듯, 수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벌써 허벅지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율이가 조금 더 대견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대견하다고 해서 그만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언뜻 보이는 시청자 수는 4,000명. 알게 뭐람.


“조금 피곤해서 누워있었더니 술이 확 깨네.”


겉으로는 느긋하게 말하면서도, 수연의 왼손은 분주했다. 율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숨소리가 손가락을 움직일수록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져서 조금 재밌었다.


“책상 아래에서 뭐 했냐고? 뭐 했겠어요, 그거 했죠. 그거. 무릎베개.”


속옷 안으로 들어온 수연의 손가락을 따라, 율의 하복부가 조금씩 움찔거렸다. 살짝 안으로 들어와, 짓궂을 정도로 안을 훑는 손가락. 살짝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괴롭히듯 찌르는 수연의 손톱. 수치심과 쾌락 사이에서, 율의 얼굴만이 붉게 물들어갔다.


“뭐 머리 무거울 것 같다고? 매니저님 저 친구 밴 좀 해주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하고는 있지만, 오싹한 기분은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살짝 거칠어진 율의 숨소리,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야한 소리, 공기 중에 떠도는 야한 냄새. 이 중에서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만을 위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 신율의 모든 것이, 이수연의, 나의 것이었다.


“내 머리 안 무겁지 율아?”


지금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수연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손가락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런 율의 모습을 더더욱 보고 싶었다.


“율아 대답해야지?”

푹 숙이고 있는 율의 턱을 잡고, 수연은 살짝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을 꼭 감고 쾌락을 참는 그녀의 눈 주변에는 이미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그 눈물조차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이 몸의 떨림을, 눈물을 거칠어진 숨소리를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율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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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진짜, 무슨 생각…. 이었어요…? 하아,”


화났다는 표정도, 분노한 목소리도 목덜미를 핥는 수연의 집요한 움직임에 조금씩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방송이 꺼질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은 언니였지만 맨살의 작은 가슴 너머로 느껴지는 고동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 애처로울 정도로 목덜미를 탐하는 부드러운 입맞춤은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율은 알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만큼은 진심이라고.


“그래도 안 들켰잖아,”


흐트러진 머리카락, 살짝 젖은 입술로 수연은 미소를 지었다. 나이도 많으면서, 웃을 땐 어린아이 같다.


“말은 잘해 아주,”


자신이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확실했기에, 율은 잠시 수연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뾰로통하게 말했다.


영정을 당하지는 않았으니 들키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율이의 선택 덕분이었지, 수연이 정신을 차리고 그 짓궂은 행위를 멈췄던 것은 아니었다.




“율아 대답해야지?”


속옷 안을 간지럽히는 수연의 손가락, 대답을 강요하는 수연의 간드러진 목소리.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의 끈. 그 사이에서 율이 선택한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우아앙, 싫어어어….”


울음이었다. 술기운, 부끄러움, 그리고 지금까지 수연에게 서운했던 모든 것을 끄집어내서 율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에, 유, 율아?”


그 순간 채팅창도, 수연의 손가락도 부끄러움을 담당하는 율의 머릿속 한 부분도 모든 것이 멈추었다. 마치, 처음 태어난 아기처럼, 우렁찬 울음. 율은 울면서 손바닥으로 수연의 등을 팍팍 때리기 시작했다.


“아, 에, 얘가 취했나 보네. 아파! 야야, 왜 그만, 그만해.”


모든 것이 이상한 상황 속에서, 한 가지 진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연의 등을 때리는 율의 감정이었다. 퍽퍽, 손바닥으로 친다기보단 주먹으로 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명백하게 감정이 실린 공격이었다.


“우아아앙, 방송하기 시러어어어”


“야, 야 너 왜 그래 진짜. 아윽,”


갑작스럽게 달려든 율 때문에 훅하고 숨이 막혔다. 수연이 작은 것도 있지만, 율은 수연보다 15cm는 컸다. 그런 율이 수연을 안고 엉엉 울기 시작하자, 수연의 몸이 의자째로 휘청거렸다. 의도적일까, 율이 팔에 힘을 줄때마다 헉하고 숨이 막혀왔다.


“야, 숨, 숨 막혀.”


토닥이는 건지, 때리는 건지 모를 강도로 율의 등을 두들겨보아도 율은 진정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주며, 수연을 더더욱 밀어붙였다.


“아, 얘 미쳤다. 방종할게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압박 속에서, 수연은 간신히 손을 뻗어 방송 종료를 누를 수 있었다. 방송 따윈 아무렴 어떤가, 지금은 생존의 문제였다.


“미안해! 미안해, 율아. 내가 너무 심했지?”


방송 종료 안내와 멈춰버린 채팅창을 확인하고 나서 수연은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한 손으론 율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론 율이의 허리를 토닥토닥 두들겼다.


“우아아아아아앙, 그만할래~~”


“방송 껐어 율아, 진정해 진정.”


“방송 껐어?”


히끅거리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멈췄다. 수연의 몸에 밀착하던, 들썩이던 몸의 떨림도 그대로 사라졌다.


그 대신 들려온 얼음장 같은 차가운 율의 목소리에 그녀를 다독이던 수연의 손이 멈추었다.


“아, 응 방송 껐어.”


그러고 보면 율은 연기를 잘했다. 언젠가 배우 지망생이라고 했었지, 수연은 언젠가 게임을 하며 보았던 율의 연기를 떠올렸다.


“그래 방송을 껐다 이거지.”


“으응, 미, 미안해”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본능이 위험하다고 소리쳤다. 자신을 끌어안은 율의 팔에 어쩐지 힘이 더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언니는 가끔 보면 대단해, 아주.”


“아하하,”


칭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수연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웃고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 방송에서 스카웃 제의라도 들어왔나? 아님, 뭐 방송 접고 노가다나 하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율아, 잠시만 내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목을 조여오는 율의 팔에 수연은 헉하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변명은,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큰 것이 온다! 본능이 경고했기에 수연은 눈을 꽉 감고 충격에 대비했다.


“야 이 미친 년아아아아아!!!!”


아, 응, 대비해서 될 정도가 아니었네. 쨍쨍 울리는 고막과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수연은 언젠가 방음실 설치 기사가 말했던 최대 방음 데시벨을 나지막하게 생각해보았다.



----------------------------------------------------------------------------



“그래 허벅지는 그렇다 쳐, 근데 그 이상은…. 언니 진짜 변태야?”


윙윙, 머릿속이 울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동안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손 때문에 어깨가 아팠다.


“미안….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그래 미쳤었지. 다시 떠올려보아도 수연은 왜 자신이 그때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 때문에? 나를 봐주지 않는 율이가 미워서? 뭔가 귀신에 씐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진짜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잖아! 어쩔 거야! 내 신음소리 클립 떠서 돌아다니면!”


“내, 내가 잠깐 갤러리 가보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쓰더라. 다들 너 술 취해서 울었다는 이야기뿐….”


찌릿하는 율의 시선에, 수연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애초에 모든 일의 책임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망친 율에게 있었지만…. 차마 말을 꺼낼 용기가 수연에겐 없었다.


“아 그래? 고맙네, 별명 하나 만들어줘서. 즙율, 즙율이래 참 귀엽다 그치?”


“미안해….”


“쪽팔려서 진짜…. 언니 진짜 변태야?”


“아, 아냐, 정말로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취해서….”


그것 하나만큼은 사실이었다. 처음에 느낀 아찔한 감각은 수연 자신조차 헷갈릴 정도였지만, 이어지는 행위 속에서 수연이 느꼈던 것은 그런 아찔한 쾌락이 아니었다. 수연 또한 자신이 그런 이상한 성벽의 소유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찌릿, 다시 한번 살을 에는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수연의 전신을 훑었다. 무슨 말을 하랴, 수연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수연을 훑던 율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래도 뭐, 고마웠어요. 언니.”


침묵 속에서 나지막하게 내뱉은 한마디. 그 한 마디에 수연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율의 표정은 여전히 조금 뚱했지만, 그래도 아까의 분노는 많이 사그라져 보였다.


“방송 끝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날 억지로 방송하자고 한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율아아….”


대견이라는 말은 분명히 이런 곳에 쓰는 것이겠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마치 장성한 자식을 보는 것 같은 부모 기분에 휩싸여있었는데, 훅하고 풍겨오는 좋은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훌쩍 다가와 버린 율이가 내쉬는 거친 숨결에는 희미한 술 냄새가 느껴졌다.


“크리스마스는….”


율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티셔츠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하얀 쇄골이 뇌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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