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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불건전)여름이었다모바일에서 작성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1.11 20:05:18
조회 401 추천 12 댓글 1
														

    햇살은 더 이상 나긋하지 않았다.

  운동장 모래흙이 땡볕에 바싹 말랐다. 교문 밖 아스팔트 바닥에선 흐릿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땀으로 젖은 몸은 꼭 녹아내리는 것처럼 열을 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렸다. 이마에 송글하게 맺힌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늘은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만큼, 간신히 마주하고도 눈이 시릴만큼 청명했다.

  부는 바람마다 열을 품었다. 언젠가부터 바람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근처에 그 흔한 그늘조차 없어, 그저 서 있는게 고역이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나는 교문 앞, 우뚝 선 시계탑 밑 자리를 지켰다. 시계탑의 분침이 한바퀴를 돌고, 짧았던 그림자가 한 시간만큼 길어진 뒤에야 저 멀리서 여자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름이었다. 기다리는 것조차 고역인.

  "많이 안 기다렸지?"

  여름은 눈이 크다. 얼굴은 좀 까무잡잡한데, 그것 때문에 보는 재미가 있다. 머리는 까만 단발을 하고 있다. 이 더위에도 머리카락에선 윤이 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까만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모양이 보기 좋아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목선은 가늘고, 어깨는 둥글고, 팔에는 잔 근육이 붙었다. 손가락에는 잔 흉터들이 많지만, 길쭉한 게 본판은 예쁜 손이다. 다리는 길게 쭉 뻗었으면서 가늘다. 종아리 선이 단아한 곡선을 그리고, 흰 운동화 위로 드러난 발목은 지나치게 굵지도, 지나치게 얇지도 않다.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본인은 안 그렇다고 하지만, 분명 거짓말이다.

  "……많이 기다렸어?"
  "응."
  "조금 늦는다고 이야기 했는데…….”
  “한 시간 전에 했지. 약속 시간도 한시간 전이었는데."

  매미가 울었다. 그것도 아주 우렁차게. 어쩌면 여름이 입을 다물어서 더 크게 들리는 걸지도 모른다.

  "변명은 그게 다야?"
  “미안……."
  "당연히 그래야지. 만나자고 한 것도 넌데."

  여름에겐 꼬리가 달리지 않았지만, 왠지 달려있는 것처럼 축 늘어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웃음이 나올것만 같아서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 가져왔어?"
  "어? 어. 당연히 가져왔지."
  "그럼 빨리 찍고 가자. 나 더워."
  "그래. 다 찍으면 내가 쏜다. 우리 설이 힘들었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나 니네 설이 아니야."

  여름이 날 불러낸 이유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있을 학교 축제 때문이었다. 축제 때 '여름' 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연다고 했다. 거기에 자기도 작품을 내는데 그 모델로 나를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어봤더니 마스크가 좋아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이 마음에 들어 승낙했다.

  "일단 여기서 찍을까? 시계탑, 우리 학교 명물이잖아."

  그 자리에서 세 장을 내리 찍었다. 여름은 언제 풀이 죽었냐는듯 금방 눈빛이 진지해졌다.

  표정이 많은 애였다. 해처럼 웃다가도 좀만 뭐라하면 금세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가끔은 땡볕처럼 화를 냈다. 여름, 정말로 자기 이름처럼 사는 애였다. 여름을 보고 있으면 금방 시간이 갔다. 여름방학이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른 것처럼, 여름은 여름과 닮았다.

  "설아, 얼굴 좀 펴."
  "더워서 힘든데."
  "아아, 그러지 말구."

  먹히지도 않을 애교가 웃겨서 픽 웃는 순간에 여름이 셔터를 눌렀다.

  "잘 나왔다."

  왜인지 해사하게 웃는 여름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많이 찍은 것 같은데."
  "에이, 우리 설이 어려운 걸음 했는데, 아예 뽕을 뽑아야지. 앞으로 딱 열 장만 더 찍자, 응?"

  체감상 마흔 장은 찍은 것 같은데, 여름이 더 찍자고 보챘다. 이 땡볕에 지치지도 않는지 아직도 팔팔하다. 앞으로 한참은 더 끌려다닐 걸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좀 쉬었다 갈까? 음……. 저번에 빙수 좋아한다고 했지? 요 앞에 새로 생긴 데 있으니까 거기 갈래?"

  벌써 손목을 부여잡았으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는 꼴이 정말 강아지랑 똑같았다. 분명히 꼬리가 없는데 자꾸만 꼬리가 보이는 듯하다.

  "그래."
  "그래? 그럼 빨리 가자. 아, 덥다. 우리 설이 많이 더웠겠네."

  손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그러고보니 붙잡힌 팔목에서 축축한 습기가 느껴졌다.

  "으, 안에 들어오니까 좋다. 그치?"
  "한결 낫네."

  여름은 딸기 빙수를 하나 시켰다. 둘이 먹기에도 양이 많았지만, 남는 건 자기가 다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고마워. 도와주겠다고 해서."
  "알면 좀 일찍 오지 그랬니."
  "설마 아직도 꽁해있는거야? 오래가네."
  "오래 기다렸으니까."
  “에이, 기분 안 풀 거야? 아, 미안해에. 우리 설이 이쁘게 찍어줄라고 준비 좀 하느라 늦었지이."

  웃으면 안 된다. 웃으면…….

  "와 웃었다."
  "아니야."
  "에이 웃는 거 맞네 뭘."

  눈을 마주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사실 우리 설이라는 말, 좋아하지? 좋으면서 싫은 척 하는거지?"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진동벨이 울렸다.

  "아, 나왔나보다. 얼른 갔다 와."
  "내가 가? 내가 사는데?"
  "오늘 한 시간이나 늦게 온 애가 누구더라?"
  "아 맞다, 저는 대역죄인이었죠. 얼른 댕겨오겠습니다, 마님."

  그렇게 잠시동안 여름을 쫓아냈다. 저런 소리를 하면서 들이대면 나도 표정을 숨기기 어렵다. 꼭 여름처럼 될 것만 같다. 나까지 더위를 먹어, 나도 모르게 속에 쌓인 말들을 내뱉어 버릴 것만 같다.

  "저기요."

  나를 부르는 낯선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부른 참이었다. 곤란했다. 아니, 곤란한 정도가 아니다.

  "혹시 윤설 맞으세요? '여름날' 부른."
  "아, 아니에요."
  "에이, 맞네. 컴백은 언제해요? 저 진짜 팬인데."

  심장이 빠르게 뛴다. 처음엔 손끝만 떨리다가 이제는 온 몸이 덜덜 떨린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시원하기만 하던 에어컨 바람이 이젠 차갑다. 간신히 달싹이던 입술조차 꾹 닫혔다.

  “저기, 괜찮아요?”

  허파에 서리가 낀 것처럼 가슴 속이 시렵다. 온 몸에 하얀 눈꽃이 피어난 듯, 몸 곳곳이 차갑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시야가 하얗게 흐려진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저, 저기요! 숨 쉬어요, 숨!”

  그래, 숨을 쉬어야 한다. 숨을 쉬어야…….


***


  그 아몬드 케이크는 팬이 보낸 선물이었다. 포장을 열자 고소한 향기가 폴폴 풍겼다. 손바닥만한 파운드 틀에 딱 혼자 먹을만큼만 담겨있었다.

  그걸 먹었다. 금기였다. 팬이 준 선물 중 식품은 먹지 말라고 다들 그랬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지만, 버릴 때마다 남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아몬드 케이크에는 청산가리가 들어있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케이크에 독극물을 넣은 것이다. 내 팬이라고 자칭했던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메마른 겨울이었다.


***


  그 뒤로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가끔 거리에서 내 노래가 들려올 때마다, 혹은 누군가 나를 알아볼 때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온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병원에서는 그게 공황발작이라고 했다.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나만을 바라보던 무대 위에서조차 그저 행복했다. 그 시절이 그리워, 매일 밤 예전 꿈을 꿨다.

  계절이 바뀌고, 나는 학교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차라리 자퇴를 하는게 어떠냐고 권유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아지고 싶었다.

  학교 측에서 어떤 언질이 있었는지 대부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호기심에 내게 말을 걸었던 애들도 발작 증세를 목격한 뒤로는 관심을 껐다. 시간이 느리게 갔다. 하루가 무지하게 길었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저녁까지 잠을 잤다. 나아지는 것 하나 없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렀다.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봄이었다.


***


  교실 창가 옆에 자란 왕벚나무에 꽃이 졌다. 그 자리를 새파란 이파리가 메웠다. 햇살은 여전히 나긋했으나, 저번 주보다는 더 더워졌다.

  점심 시간이었지만 나는 급식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발작 증상이 호전됐어도 사람이 많은 곳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고, 밥을 다 먹은 애들이 돌아오기 전에 교실을 나섰다.

  구교사 뒷편, 야트막한 언덕에는 낡은 페르골라가 있었다. 외진 곳이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다. 페르골라의 등나무 기둥을 타고 기어오른 장미 덩굴이 천장마저 뒤덮었다. 그 덩굴마다 무수한 장미 봉우리가 분별없이 돋아났고, 움튼 봉우리마다 옅은 장미향을 품었다.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 때에, 장미 냄새가 몸에 스며들 때에, 눈을 감으면 모든 것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청산가리를 먹던 순간, 온 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던 때가 흐릿해졌다.

  모든 것은 꿈이 아니었을까, 내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누군가 내게 올 때 남모를 공포를 느끼는 것조차 아침이 되면 흐릿해지는 꿈이 아니었을까, 페르골라 벤치에 앉을 때면, 내가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장미를 따라 돋았다.

  하지만 페르골라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서면,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몸을 움츠려야 했다. 외출할 때 야구모자와 마스크가 필수가 됐고 늘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고 누군가 나를 알아보면 여전히 발작했다. 풀리지 않은 숙제를 미뤄두었으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당연한 것들에 용기를 내야 했다. 말을 먼저 거는 것, 내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 얼굴을 드러내는 것에는 가공할 만한 용기가 필요했다. 말을 먼저 걸면 그 뒤에, 이름을 이야기하고 그 뒤에, 얼굴을 드러내면 그 뒤에 청산가리의 맛이 떠올랐다. 온 몸이 얼어붙던 그 시린 순간이.

  용기를 내자. 페르골라 안에서 수백번도 더 넘게 다짐한 것들이 밖에서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모래알만한 크기로 산산히 부서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갔다. 다짐하고, 다시 다짐하고, 그저 다짐하기만 하는 시간들이. 나아지기 위해선 나아가야 했다.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걸 다 아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나는 영영 페르골라 안에 갇혀 있었을지도, 내게 여름이 오지 않았더라면.

  페르골라에서는 구교사 삼층 창문이 정면으로 보였다. 창문 너머, 밥을 먹고 돌아온 애들이 뭘 하는지 몰래 훔쳐보곤 했었다. 아주 가끔씩. 그 창문으로 여름을 봤다. 나에게 손을 흔들던 그 애를.

  사실은 그 전부터 여름을 알고 있었다. 조금은 독특한 피부색 때문에, 방송국에서 으레 보던 애들과 닮은, 늘씬한 팔과 다리 때문에, 마치 햇살처럼 웃는 그 미소 때문에, 여름은 눈에 띄었다.

  잘 웃는 애. 부럽네. 그게 여름의 첫인상이었다. 그저 그랬는데 인사를 받은 뒤로는 자꾸 눈길이 갔다. 그 애를 보고 있자면 그 긴 한 시간짜리 점심시간이 백미터 달리기를 하는 듯했다. 그 시간만큼은 느리지 읺았고, 괴롭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 시간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간혹 눈이 마주쳤다. 어쩌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오랫동안 그 인사를 모르는 체 하다 어느 날엔가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인사를 하는 날이 늘고, 그게 하루의 관례처럼 되어버렸을 때 나는 여름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처럼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랬다.

  여름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왔지만, 어느샌가 내 곁에 분명하고, 당연하게 자리했다. 여름이 없던 시간과 내게 온 시간은 서로를 가르는 경계가 희미했다. 계절의 경계와 다르지 않았다.

  당연한 것들에 용기를 내고 싶어졌다. 간절했던 때보다 더 간절하게. 다시 페르골라 안에서 수십 번의 다짐을 했고, 그러다 장미꽃들이 만개했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장미향이 페르골라 안을 가득 채웠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숨을 크게 들이쉬지 않아도 나는 장미향을 맡았다.

  장미 꽃이 만개한 날은 여름날이었다. 하늘이 시리도록 맑았다. 햇살은 더 이상 나긋하지 않았고, 구 교사와 언덕 사이 산책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미풍이 가끔 불었지만 열을 품었다. 언제부턴가 바람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페르골라 밖으로 나섰다. 그 날에, 완연한 여름이 와서.


***


  “설아, 윤설! 나 봐. 나만. 나만 보고 숨 쉬어.”

  어느새 여름이 왔다. 여름의 어깨너머로 바닥에 내던져진 딸기 빙수와 나를 둥그렇게 에워 싼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근대는 그 소리들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내 상상일 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내 눈 앞에 여름이 왔다는 거였다.

  여름을 보았다. 눈에 물기가 어리고, 그렇지 않아도 곱게 익은 까무잡잡한 피부가 한층 익었다. 꼭 머리에서 김이라도 내뿜을 듯 열이 잔뜩 올라서 나를 보고 있다. 내 어깨를 부여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입술도 덩달아 떨린다. 긴장을 한 건지, 불안해 하는 건지, 하여간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순간이 묘하게 기뻤다. 여름이 나를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위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여름을 봤다. 여름만을 봤다. 여름이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러면 전에 없던 안도감이 고개를 들었고, 그 안도감이 얼어붙던 내 몸을 녹였다.

  “그래, 그렇지. 천천히.”

  다시 숨을 쉬었다. 폐가 부풀어 올랐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꾹 다물어진 입술이 다시 열리고, 굳은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름을 안았다. 온 힘을 다해서. 여름의 품 안은 나를 녹여버리기 딱 좋을 정도로 더웠다.

  내가 시도때도 없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여름은 내게 왔다. 힘든 내색 없이 나를 붙잡고, 나를 발작의 구덩이, 옛 기억으로부터 끄집어 내었다. 여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내가 얼마나 왔는지가 보였다. 집구석에서 교실 맨 뒷자리로, 교실 맨 뒷자리에서 페르골라가 있는 언덕으로, 페르골라가 있는 언덕에서 여름의 눈 앞으로……. 여름의 얼굴은 내가 냈던 무수한 용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선물처럼, 여름은 내 눈 앞에 있었다.

  휴우, 하고 여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를 마주 안았다.

  “다행이다.”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닌데.”

  여름의 손이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한 시간이나 세팅했던 머리가 산발이 되어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내게 닿는 그 손길이 그저 좋아서, 여름이 내 옆에 있다는게 그저 좋아서, 사소한 일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뒤로 여름과 나는 빙수 카페를 나왔다. 내게 말을 걸었던 사람에게는 여름이 그 사정을 설명했다.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길래, 그럴 필요 없다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름은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지 않았는다는걸 뻔히 알면서 돌아가는 건 싫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잖아. 무리하지 마.”
  “힘든 거 맞는데 무리하는 건 아니야. 약속했잖아. 네가 만족할 때까지 모델 해준다고.”
  “안 그래도 되는데…….”

  어느샌가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었다. 뭉친 구름이 태양을 등지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 두 방울쯤 콧잔등에 떨어졌다. 조금 있으면 세차게 퍼붓는 소나기가 내릴 것이다.

  이러면 사진은 이제 못 찍겠네. 여름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들으라는 듯했다. 흘긋흘긋 곁눈질로 나를 보는데 왠지 모르게 여름이 아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을 거다. 그건 분명히…….

  “안 가.”

  돌이켜보면 청산가리를 먹은 이후의 모든 시간들을 나는 발악으로 채웠다. 모든 것들이 되돌아가기 위한 발악이었다. 예전 그 때, 다시 오르지 못한 무대를 추억하며, 그 무대 위에서 받던 무수한 사랑들을 그리워했다. 진짜 저주는 내가 청산가리를 먹었다는게 아니라 그 뒤로 예전 일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고집 부리지 말고. 화낸다?”

  여름을 만난 뒤로 나는 더 이상 예전 일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받았던 무수한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수였을 적 일을 꿈으로 꾸는 일조차 사라졌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고집들이 녹아 흐물해졌다.

  여름을 만나고 난 뒤부터 그랬다. 내게 인사를 건네서, 그 미소를 내게 비춰서, 내게 와 줘서, 그런 하찮은 이유만으로 나는 내가 그리워하던 과거를 묻어두기로 했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발작이 오기 직전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무언가 토해내고 싶은 충동이었다.

  여름과 함께 있고 싶었다. 이 충동을 품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좋아해.”

  어떤 감정은 언어로써 내뱉고 나서야 자각되곤 한다. 여름을 향한 나의 감정이 그랬다. 그래, 여름이 좋았다. 한여름 햇살 같은 열기가, 미풍같은 손길이, 탄 것처럼 까만 머리카락이, 여름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진 않지만, 여름에게 만큼은 여전히 사랑받고 싶었다.

  뒷걸음질 치려는 여름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게 잡지 않았다. 쉽게 뿌리칠 수 있을 텐데도 여름은 그저 쩔쩔 맬 따름이었다.

  “좋아한다고.”
  “으, 응. 나도 우리 설이 좋아.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얼굴이 붉다. 내쉬는 숨이 묘하게 열기를 품고 있다. 시선은 갈 곳을 잃었고, 혓바닥이 딱딱하게 굳었으며, 이마에서 열이 난다.

  “나도 너랑 같아, 여름아.”

  그 순간에 세찬 비가 쏟아졌다. 머리카락이 젖고,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옷을 흥건하게 적셨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비를 피해, 서둘러 거리를 떠나는 것이었지만, 꼭 나와 여름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는 듯했다.

  흠뻑 젖은 여름의 뺨을 어루만졌다. 여름은 꼭 고장난 것처럼 보였다.

  “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거라고 생각하는데.”

  알고 있었다. 내가 페르골라에 앉아 있을 때부터. 실은 내가 여름을 본 게 아니라 여름이 날 보고 있었다고, 내가 여름에게 간 게 아니라 여름이 내게 온 것이라고.

  여름의 표정을 보았다. 표정이 다양한 애지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표정이었다. 그 큰 눈이 더 커지고, 입술이 자꾸만 달싹이고, 미간이 움찔대는게 곤란해 보이지만, 눈치는 묘하게 싫지 않은 눈친데 볼이 새빨겠다. 그 붉어진 뺨을 따라 빗물이 눈물처럼 흐른다.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그 순간은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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