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서관_옥상
“웬 음악이야?”
“아 이거? 스마트폰이라는거야. 기본적으론 휴대폰이지만...”
“스마트 폰이 뭔지는 알아.”
엘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내 말은 갑자기 음악을 왜 트느냐는 거야.”
“그냥... 적적해서? 왜, 끌까?”
“아니 뭐 틀어도 상관은 없는데... 오늘은 얘기 들으러 온 거 아니야?”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옥상의 한 구석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벤치에 앉은 엘리가 말했다.
어제 약속한대로 나는 당장 오늘부터 왔고, 그녀는 모든 지식에 우선하여 그녀 개인의 과거를 들려주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곧바로 그 민족의 생리와 역사로 넘어가고 싶지만... 200년간의 역사를 생생한 기억으로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렇지. 응 얘기해줘.”
나는 그녀의 건너편에 있는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19세기 초, 독일에서 태어났어. 트리어라는 변방의 작은 마을이지.”
엘리는 조심스럽게, 무거운 입을 열어 얘기를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서 내 주변에도 몇 가구의 친척 정도만 있었어. 그래서 길게 사귈 수 있는 친구는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불행하지 않았어.
적긴 했지만 친족이 있었고, 무엇보다 솔직히 조금 부유했거든.
근 100년간은 평화로웠어. 주변에서 몇 번의 전쟁이나 혁명이 있긴 했지만 내가 사는 곳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 그 때의 유럽처럼, 나도 황금빛 미래를 기대했어.
하지만 그런 기대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지.”
“세계 대전이구나.”
벨 에포크를 떠올리며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말했다.
엘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계속했다.
“첫 번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영국으로 이주했어. 그 과정에 거의 모든 재산을 잃고 그나마 있던 친척과도 완전히 헤어졌지.
정말로,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 이 세 명만 남게 됐어.
하지만 부모님은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어. 오래지 않아, 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는 데에 불편함은 없을 정도가 됐지.
그런데 그 평범한 생활을 만끽하기도 전에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났어.”
“그 때도 피신했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엘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영국이었기에 우리는 대륙의 피해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많이 긴장하고 경계하기는 했지만 너무 심각하게 느끼지는 않았지.
그런데 어느 날,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하늘이 불바다로 뒤덮였어.”
“...혹시 살던 곳이...”
“런던. 런던 대공습의 불길은 모든 걸 집어삼켰어. 내가 방금까지 있던 시장은 깡그리 날아갔고, 나는 방금 산 물건들을 내 던지고 죽어라 달렸어.
그렇게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는데...
집이 없었어.”
“무슨 소리야?”
“모든게 다 무너졌었어. 거대한 잿더미에서 탁한 회색 연기가 뿜어 나오고 있을 뿐.
우리 집도, 이웃집도, 그 거리에서 보던 풍경도 전부 무너졌어. 불타는 재를 미친 듯이 뒤엎으며 부모님을 찾았지만 거기에는 계시지 않았어.”
엘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두는 게 잘하는 짓일까, 지금이라도 멈춰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뭐라 말을 걸 새도 없이 그녀는 계속했다.
“그 곳에서 몇날 며칠을 기다렸어. 잿더미 앞에, 옆에, 혹은 속에 쭈그려 앉은 채,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폭발음이 들리면 공포를 느끼며 계속 기다렸어.
하지만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어.
그러다 쓰러졌고, 지나가던 경찰인지 행인인지에 의해 병원에, 그리고 빈민원으로 옮겨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항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전쟁이 끝나고, 내가 성장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생기자, 나는 또 다시 이사했어. 이번에는 좀 더 멀리, 미국으로.”
“그럼 부모님을 찾는건...”
“딱히 그 때도 포기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종전 직후의 런던에서 어린 소녀 혼자 살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어.
그래도 미국은 다르리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고, 화물선에 몰래 탔지.
과연 미국은 다르더라. 유럽이 구세계니 미국은 신세계라고 해도 되겠지. 거기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
물론 신세계라고해도 어린 소녀가 할 만한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럽에 있을 때보다는 나았어.”
엘리의 말투가 다시금 침착해졌고, 나는 자세를 고쳐 앉은 뒤 계속 귀 기울였다.
“정말로, 몸 파는 것만 빼고 다 했어. 더러운 일, 어려운 일, 위험한 일, 물론 불법적인 일도 개의치 않았어.
게다가 신체만 어렸지, 웬만한 사람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았으니 수완도 좋았고 요령도 있었어.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 살만큼 살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
물론 여전히 성장이 더딘 몸으로 한 곳에 머무는 건 위험했기에 미국에서도 계속 이동해갔어.
동부에서 서부로. 뉴욕, 시카고, 덴버,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무렵...
그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
단어도 단어거니와 엘리의 어조가 미세하게 달라졌기에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내 비밀을 얘기한 사람이자, 처음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자, ...내 처음을 줬던 사람.”
그녀는 짧게 한 숨을 쉬었다.
“그 당시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혁명... 아니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을 때였어.
미국은 막 승리도 없는 전쟁을 끝낸 후였고, 먹고 살기에 바쁜 나조차도 세상이 은근히 변해가는 게 눈에 보였지.
70년대 초반... 아니 60년대 후반이었을 거야.
그 날은 주말이었지만 사장의 부탁으로 가게에 나와 잠깐 일을 도왔고
해안가의 안개가 아직 하얗게 빛나던 낮에 퇴근을 했어.
금문교 아래를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더라. 내가 떨어트린 게 있다며.
그가 내게 건네준 건 분명 내 것이 아니었어. 하지만, 나는 받아들었지. 그렇게 시작됐어. 그와 나의 관계는.
지금도 왜 그 때 그걸 받았는지 모르겠어. 사실, 그가 건네준 게 무엇인지도 기억이 안나.
그냥 그의 총명한 눈빛과 상냥한 미소만 어렴풋 기억에 새겨졌을 뿐.”
엘리는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각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어째선지 나도 조금 즐거워져서 물었다.
“그 시기의 젊은 남자가 가볍게 말을 걸었다라... 히피였어?”
“아니,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어.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고 하더라고. 완전한 학도 타입이었지. 사실, 고고학도였어.
꽤나 건실한 사람이었고, 나랑 알게 된 후로는 우리 가게의 단골이 되었지.
우리는 점점 아무래도 좋은 얘기를 나눴고, 별 목적 없는 산책을 같이 나섰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이 되었지.
사귀게 되고 1년 후, 그는 나에게 모든 걸 알려줬어.
가정사, 꿈, 자신이 연구하고 또 공부하고 있는 것들, 대학생활 등.
하지만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 그도 그럴게... 누가 이 얘기를 믿겠어.
물론 거짓말 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
“정말로 사랑했구나.”
그렇게 가볍게 내뱉은 말에, 엘리는 문득 내 얼굴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래서... 결국은 얘기했어.
그가 알고 싶어하기도 했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전부 털어내고 싶었거든.
물론 그도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내 몸에 난 상처가 금방 아무는 것을 보거나,
일반인은 모를만한 근현대 유럽의 세세한 부분을 생생하게 말해주니 점점 믿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날 믿어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었지.
나는 그에게 내 민족 뿐 아니라 내 개인적인 과거, 그리고 부모님과 고향에 대한 얘기를 했어.
몇 십 년 만에, 내 그리움을 스스로 되짚은 때였지.
하지만 그 이후로 그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이상해졌다니?”
“그는... 데이트를 할 때도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우리 관계보다는 내 민족과 생리에 대해 더 묻기 시작했고
가끔씩 그가 다니는 대학이라도 방문하면 다른 사람들의 강한 시선을 느꼈지.”
“혹시 그 남자가 네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던 거야!”
너무 갑작스럽게, 엘리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그 날 저녁엔 폭우가 내렸어.
나는 그로부터 우산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고 대학으로 향했지.
노크를 하고 그의 연구실로 들어갔는데, 그는 없었어.
그 대신, 언젠가 봤었고 또 들었던 적 있는 그의 교수와 동료들이 있었지.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뒤의 누군가가 문을 닫았고
그들이 나를 중심으로 둘러싸는 바람에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못했지. 그리고...”
엘리는 마지막 단어를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날 의자에 앉히고는 질문을 해댔어.
너의 민족은 어디서 왔느냐, 정확히 얼마나 사느냐, 걸린 적 없는 병 혹은 더 자주 걸리는 병이 있느냐.
병원에 간 적이 있다면 어느 병원에 갔느냐, 이 문자를 본 적이 있느냐 등...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했고, 나를 불러내서 내 모든 걸 파헤치려 했던 거야.
그들의 어조는 상냥했지만 내가 의자에서 일어서기라고 하려면 강한 손아귀로 내 팔을 붙잡았어.
나는 너무... 너무 무서웠고... 바보같은 얘기지만... 그 때마저 그가 빨리 와주기를 바랬어...
그 당시에는 그가 관련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구나.”
“그래. 그들이 무슨 질문을 퍼부어도 내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울먹이기만 하니까 결국은,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또 보자’며 날 내보내줬어.
난 그 후에도 병신같이 몇 십 분 동안 그를 기다렸고, 결국 그의 집으로 갔었어.
노크를 해도 아무도 없고 문은 잠겨있더라.
하지만 언젠가 그가 열쇠를 숨겨둔 곳을 본 적 있어서 몰래 들어갔어.
이전에 왔던 때처럼, 집 안은 깔끔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너무 깔끔했어.
나는 또 거기서 그를 기다렸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그의 집 곳곳을 뒤적거렸어.
어쩌면 그때 나는 그가 그들이 했던 것과는 관련 없다는 증거를 찾으려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찾지 못했지. 오히려 반대였어.”
“무슨 뜻이야?”
“지금도 기억하는 그의 책상 서랍, 밑에서 두 번째 서랍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어.
혹시나 해서 열어봤더니 그의 집 열쇠로 열어지더라.
그 서랍 속에는 낡은 종이뭉치가 가득했고, 그 밑에는 새 것 같은 논문 하나가 있었어.
두려움과 불안감을 겨우 추스르며 검은 표지를 넘겼어.
속표지에는 <용의 민족의 역사에 관한 연구: 발원지와 생태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지.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겼어.
거기에는 내가 했던 모든 말과, 그것을 통해 추정할 만한 사실들,
그리고 그 교수들이 나를 에워싸고 퍼부었던 질문들과 그에 대한 가설들이 가득했어.
책의 중반부터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어.
내 손이 너무 떨려서 책을 들 수조차 없었고, 내 눈물이 활자와 시야 위에서 뿌옇게 번져갔거든.
곧 손 뿐 아니라 다리에도 힘이 없어졌고, 나는 내가 놓쳐버린 그 검은 책과 함께 마룻바닥에 주저앉았어.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흐느껴 울었어.
배신감과 절망감. 충격과 불안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우고 넘쳐흘러 나를 질식시키는 듯 했어.
바닥에 쓰러져 거의 널브러진 채 슬픔을 토해낸 지 몇 분 후, 마루는 내 얼굴만큼이나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됐고
가까스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내 마음 속에는 또 다른 감정이 피어올랐어.”
엘리의 호흡은 점점 침착해갔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더 들어갔고
또렷한 눈동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뚫어버릴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분노. 증오. 혐오.
축축하게 젖은 내 마음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했고, 바로 방금 전과는 반대로 온 몸에 힘이 넘쳐흘렀어.
나 스스로가 더 이상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부들대는 힘이 손과 발에서 느껴졌지.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못한 채, 그의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어.
책장을 무너트리고, 책상을 뒤엎고, 책이란 책은 전부 찢고
전등을 깨트리고 브라운관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 박살내고...
그렇게 해도 화가 풀리지 않더라. 뭔가, 뭔가 다른 게 필요했었어.
나는 다시 그 논문이 있던 서랍으로 돌아갔지. 그 논문 위에 있던 낡은 종이들을 하나씩 살펴봤어.
잠긴 서랍 안에 있던 것이니 뭔가 중요한 것이었겠지 싶었거든.
과연, 그것들은 중요한 것이었어.
그 논문, 내 민족에 관한 연구자료들을 압축시켜 모아놓은 자료들이더라.
그의 생각이나 오류, 가설 등등이 뒤섞여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
그걸 이해한 후에 내가 뭘 해야 할지는 명백했어.”
“불태웠구나?”
“뭐? 아냐, 훔쳤어.”
“훔쳤다고?”
“그 때 나는 분노로 머리가 가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게 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었어.
인정하기 싫지만, 그게 나로썬 행운이기도 했어.
사실상 그 연구자료 덕분에 내 고향에 대한 단서를, 또 계기를 갖게 됐으니.”
“그것도... 그렇네...”
“아무튼, 그렇게 난장판을 일으키고, 이웃집이 신고한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자료를 모두 챙기고 도망쳤어.
그 길로 가게를 그만두고 짐을 다 챙겨, 다음 날이 되기 전에 캘리포니아를 떠났지.
새로운 도시, 새로운 집, 새로운 삶 속에서 나는 새로운 목적을 갖게 됐어.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알아낸 정보와 그의 자료를 토대로
내 고향으로 추정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알아냈고, 돈이 필요한 만큼 모이는 즉시 직접 탐사를 다녔어.
거의 전 세계를 다니느라 돈은 금방 떨어졌고. 그럴 때면 또 다시 돈을 벌었지. 그러기를 몇 십 년 동안 반복했어.”
“그리고 이 곳에 도착했구나.”
“그래. 마지막의 마지막에. 시도한 횟수만큼의 실패 끝에, 여기에 도착했어.
그리고 너희들처럼, 텅 빈 황무지를 발견했지.
네 친구들이 여기에 탐사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수색했지만
이 광활한 대지에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그 때의 기분은... 정말 그냥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정말 웃기게도, 포기한 채 다시 원래 삶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 남자가 떠오르더라.
결국 ‘뿌리 없이는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
그런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그와 느꼈던 행복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마지막, 새로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탐색을 시도했어.
그러다가 결국 검붉은 암벽 사이에서 네가 발견한 그 틈을 발견했고,
나머지는 어제 말했다시피 도서관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여기서 살면서 연구를 한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일어섰다.
아직 성치 못한 왼다리가 휘청거리자, 내가 황급히 따라 일어나 부축해줬다.
그녀는 감사의 표기로 작게 끄덕이고는 곧게 일어서며 내 눈을 바라봤다.
“이게 처음으로 말하는 내 전체의 인생 이야기야.
이것보다는 길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짧았네.”
그렇게 가볍게 웃는 그녀의 흰 어깨에 새빨간 노을빛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을 털어낸 듯한, 혹은 그 무엇도 쥘 수 없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막 불타오르려 하는 서쪽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옥상 난간으로 좀 데려다줄래?
노을을 보고 싶어.”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내 쪽으로 기울이며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의 양 어깨가 옥상에 겨우 걸친 초저녁에 맞닿자 그녀는 돌난간 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리고 해가 지는 저 자홍색 하늘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엘리가 입술을 열었다.
“내가 왜 고향을 찾는 지 알아?
물론, 부모님을 찾고 싶기도 하지. 그래 그 남자같은 인간에게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기도 해.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 남자와 함께 했을 때, 그래서 처음으로 외부인에게 나에 관해 모든 걸 솔직히 얘기 했을 때,
그리고 그 남자가 그 모든 것을 받아줘서 내 얘기들이 농담거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해졌을 때.
난 그 때 행복을 느꼈어.
평범을 느꼈고, 비로소 일상을 느꼈지.
이게 내가 고향을 찾는 이유야.
나는 그 일상을, 그 평범한 행복을 다시 느끼고 싶어.”
그렇게 말을 마친 그녀의 뺨과 귓불이, 입술과 같은 색으로 붉게 타올랐다.
나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단어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저녁놀의 구슬픈 색깔이 스며든, 어찌할 수 없는 적막함이 우리 사이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침묵을 조심스레 으스러트렸다.
“슬슬 해가 지고 있네.
이제 돌아가봐야하지 않아? 접시닦이라도 저녁 준비는 해야지.”
엘리가 또다시 웃으며 돌아봤다.
이번엔 홀가분하고 가벼운 미소였고, 오히려 그렇기에,
그 순간 내 가슴 한 구석에선 애처로움이, 표현할 수 없는 빛깔로 사무쳤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쥔 오른손을 내 가슴에 올렸다.
“나는... 나는 절대 그 남자같은 짓을 하지 않을거야.”
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눈을 봤다.
나는 얘기를 계속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내가 바라는 건 도서관의 정보뿐이야.
혹시라도 발굴팀이 이 곳으로 오려한다면 내가 막아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네가 고향을 찾는 걸 도와줄게.”
떨리는 입술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동그랗게 뜬 엘리의 눈은 이내 사뿐히 감기더니 곧 눈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럼, 이제 내 말 믿어주는거야?”
모르겠다.
어쩌면, 바보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엊저녁처럼, 그리고 그녀가 마지못해 자기 얘기를 했던 방금 전 처럼,
그 촉촉한 눈망울과 보드라운 목소리에선 어떤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숨어있었다.
머리로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지만, 마음속에선 어떤 올곧은 감정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선홍빛 초저녁이 검푸른 새벽으로 식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 유적지_현장
“K!”
물건을 훔치다가 걸리기라도 한 듯, 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교수님이 저 멀리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한 낮 아래에서도 여전히 검은 정장을 입고 계셨다.
나는 분홍색 보따리를 재빨리 등 뒤로 숨기며 다가갔다.
“네, 교수님.”
“어디가나?”
“아, 그냥... 산책, 이라도 가려고 했습니다.”
이 황무지에서 산책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 없었지만
교수님은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런가. 음... 주방 일엔 익숙해졌나?”
“네. C도 잘 가르쳐주고, 나름대로 요령도 생겼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아직도 발굴에 참여하지 못한 걸로 불만이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하하, 이렇게 된지 2주나 됐는데 당연히 익숙해져야죠. 괜찮습니다.”
“아 벌써 2주나 지났나? 시간 참 빠르구만. 그래도 얼마 안 있으면 다시 합류할 수 있을 테니 걱정 말게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주방 일이 나름 잘 맞기도 하고 여유시간도 있어서 괜찮더라고요. 천천히 불러주십시오.”
“아... 음... 그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교수는 적잖이 당황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항의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니.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정성스레 싸맨 분홍 보따리를 다시 안보이게 숨기고,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협곡의 틈새로 향했다.
“하아... 하아... 하...”
나도 모르게 달려온 탓인지 숨이 찼다.
하필이면 엘리도 3층에 있어서 계단을 오르느라 호흡은 더욱 거칠어 졌다.
“왜 그렇게 헐떡여?”
막 다 올라 계단에 걸터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엘리가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나는 왼손을 등 뒤로 짚고 허리를 기울여 뒤돌아 봤다.
엘리는 며칠 전에 내가 가져다 준 하얀 스니커즈를 신고, 적당히 만들어 준 간이 목발을 왼 겨드랑이에 낀 채
익숙하게, 그러나 어딘지 위태롭게 서있었다.
정말로 용의 민족인건지, 회복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입원할만한 상처였는데 그녀는 2주 만에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오를 정로 회복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환자는 환자다. 엘리가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닐 때마다 나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좀 뛰어오느라...
그보다 혼자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목발 하나만 짚고? 위험하잖아!”
“위험하긴 뭘, 너 없을 땐 항상 그랬어.
그리고 네가 올 때까지 얌전히 방 안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
“나로서는 가급적이면 그래줬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목발을 다루며 다시 책장이 가득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숨이 추슬러진 나도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뒤에서 내려다보니, 그녀는 이전에 내가 준 머리띠를 묶고 있었다.
붉은 고무줄에 묶인 채 살랑거리는 그 은빛 포니테일은, 방 안의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와 함께
한 낮의 햇빛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칼이 좌우로 움직일 때 마다 은은히 피어오르는 신비한 향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흔들리는 꽁지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 때문일까
내 뺨은 어느새 올라온 홍조와 미소로 가득 차려 하고있었다.
그녀가 앞서 걷고 있어서 다행이다. 이 한심한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래서 그건... 또 도시락이야?”
“아, 맞다. 응. 오늘 음식이 남아서 조금 싸왔어.”
나는 분홍색 보따리를 풀고 속에 든 따뜻한 찬합 세 개를 연이어 꺼냈다.
뚜껑을 여니 따뜻한 김이 흐릿하게나마 피어올랐고, 낡은 종이 내음이 가득한 방 한 켠에 짭짤한 냄새가 출현했다.
“조금...도 아니고 남은 것 같지도 않은데...?
또 음식 빼돌린 거야? 전에도 말했지만 이럴 필요는-”
“빼돌린 거 아냐!
...그냥 말 안하고 가져온 것뿐이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넌 좀 먹어야 돼.”
“그러니까 우리는 안 먹어도-”
“그래 살 수 있지. 그런데 꼭 살려고 먹는 게 아니야.
먹으려고 살기도 하는 거라구. 뭐... 영국에서 살았던 너는 이해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면, 음식이 맛 없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수저를 건네자, 엘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반대편에 앉아 숟가락만 받았다.
“젓가락은?”
“됐어, 숟가락이면 돼.”
“아직도 젓가락질 못하는거야?”
“난 평생 포크랑 나이프만 써왔다고. 갑작스레 젓가락질을 하라고 해도 무리야.”
“정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숨겨놨던 포크를 건넸다.
“가져왔으면서 왜 말 안한거야...”
엘리는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보면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싫다고 하지만 정작 가져오면 항상 맛있게 먹는다.
“음... 여전히 맛있네.
이것도 그 아이가 만든거야? C... 였나?”
“응! C가 만들었어.”
“할 수만 있다면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너는 요리 안 해?”
“음... 나는 애초에 그런데 재능이 없달까... 괜히 도와줬다가 망치기 일수랄까...
설거지도 충분히 도움이 된달까...”
“그 아이가 불쌍하네. 너 같이 게으른 녀석이랑 같이 일해야 된다니.”
엘리가 장난스런 얼굴로 말했다.
“‘게으른’ 건 아니거든?
그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이제는 해독도 꽤 빨리 할 수 있고!”
“그건... 그렇네. 솔직히 조금 놀랐어. 그렇게 빨리 숙달하다니. 너도 학자는 학자구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 그렇다구. 게다가 최근엔 새로운 단서를 발견했어.”
“단서?
엘리가 분주히 움직이던 포크를 멈췄다.
“저번에 말했던 그 문화를 토대로 지역을 좁혀봤는데...”
“그건 나도 해봤어 하지만 겹치는 부분이 없거나 시대가-”
“끝까지 들어, 더 파고들어보니 그 문화가 대대적으로 변했던 시기가 있어.
즉 그 전에는 다른 형태였다는 거지.
그래서 변하기 전의 문화를 추적했더니 새로운 정보가 열렸어”
“...더 자세히 말해봐”
어느새 포크를 내려놓은 엘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연구를 시작한 초기엔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연구가 더뎠지만,
어느 정도 해독능력이 된 후부터는, 오히려 내가 이것저것 발견하기도 했다.
그 덕에, -비록 엘리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전보다 연구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연구의 진전 덕분인지,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엘리는 많이 변했다
처음엔 일체 안 하던 잡담이나 아무래도 좋은 수다도 곧잘 하게 됐고특히 내가 자주 가져다준 도시락도 이제는 완전히 당연한 듯이 먹게 됐다.
C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가져오는 건 힘들지만, 엘리가 맛있게 먹는 걸 볼 때면 다시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본인은 부정했지만- 살도 점점 붙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엔 혈색이 올랐고 화장 하나 하지 않은 입술도 점점 붉어지는 듯 했다.
무엇보다, 매우 미묘한 차이지만, 성격도 전보다 밝아졌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따라서 이 지역일 가능성은... 뭘 그렇게 웃어?”
“응? 아, 아냐.”
내가 다급히 얼버무리자 엘리는 이상하게 보면서도 다시 자신의 이론을 계속 설명했다.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내가 미소를 지은 이유가-
그녀의 민족에 관한 단서에 가까워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점점 생기가 있어져서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우리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서 그런 것인지를
이 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슬슬 가봐야 하지 않아?”
콧등이 닿을 정도로 양피지에 얼굴을 박고 있는 내게 엘리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 그녀 뒤의 네모난 창문을 보니
짙어질 대로 짙어진 청색 하늘엔 어느새 붉은 깃털이 곳곳에 수놓아져 있었다.
“아 정말이네, 저녁 준비해야 되는데!”
나는 황급히 일어났다. 그 바람에 내 무릎에 있던 양피지가 굴러떨어져,
엘리가 읽고 있던 낡은 고서를 반쯤 덮어버렸다.
“왜 이렇게 계획성이 없니. 정말 C가 불쌍하다니까.”
“너 도와주느라 그런거잖아.”
엘리의 가벼운 핀잔에 난 빈 도시락 통을 허겁지겁 챙기며 웃었다.
“내일은 내가 올 때까지 방 안에서 기다려!”
“매일 오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목발 짚으면 대부분의 곳은 갈 수 있고. 연구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러다가 또 다치면? 아무튼 올 거야. 따로 먹고 싶은 요리 있어?”
“음? 아...
...그럼, 저번에 가져다줬던 그 만두...”
“알았어, C에게 부탁해볼게. 나 진짜 늦었으니까 가볼게!”
그렇게 말하며 타닥타닥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뒤에서 엘리가 그러다 넘어지겠다고 소리친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아, 엘리는 또 어떻게 내려오지? 아 몰라 목발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미 C가 내 일 까지 다 해버렸을거야.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C가 화내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 아이는 나에게 화내는 일이 없었다.
순식간에 1층으로 내려온 나는 도서관 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서관 문을 닫았던가...?
처음 발견한 이후로 줄곧, 도서관 입구에 달린 못생긴 나무문은 단 한 번도 닫혀있지 않았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출입하는 사람은 나뿐이고, 나는 문을 닫은 적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문을 연 순간, 지금껏 느끼지 못한 어색한 기분이 공기에 가득찼다.
나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와 같은 적막함이 도서관 주위를 감쌌다. 향긋한 풀냄새와 저녁놀의 붉은 향기가 위아래에서 퍼지고 있었다.
아무럴 것도 없는 초록 잡초들과 앙상한 회백색 나뭇가지들,
저 멀리서 우리를 감싸는 검붉은 장벽과 웅장한 도서관의 상아색 벽,
그리고 그 장벽과 도서관 사이,
그러니까 새빨간 배경과 아이보리색 피사체 사이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삐져나와 있는, 새파란 삼각형.
나는 천천히,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그 도형에게 다가갔다.
10발자국 하고도 조금 더 걸었을까,
알고 보니 그 파란색 삼각형은 아주 예쁜 원피스의 치마조각이었고,
그걸 입은 C가 무릎을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 숨어있던 탓에 조금, 삐져나와있던 것이었다.
“C...?”
신은 스포이트로 붉음과 노랑이 섞인 노을을 새파란 하늘에 한 방울 떨어트렸고,
그 한 줌의 초저녁은 서쪽 하늘에서 깊이 퍼져가더니,
어느새 푸름과 뒤섞여 하루의 끝을 예고하는 남청색으로 변했다.
# 유적지_K와 C의 방
“정말로! 미안!”
나는 허리보다 낮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내 짝짝이 양말과 우리 방의 바닥뿐이었지만,
공기만으로도 C가 매우 화나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때 이후로 나갔던 그 모든 산책이 전부 그 아가씨에게 간 거였어요?”
C는 엘리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엘리의 이름까지 언급했는데, C는 그 이름을 들은 적도 없다는 듯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감히 고개를 들 생각도 못한 채 허리를 접은 채로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렇지.
하, 하지만 발굴단 일을 경시한 적은 없어!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것도 말했듯이 협상을 위한 약속 때문이었고...
그러니까 제발 할아버지나 다른 분들에게 말하지 말아줘!”
“네, 들었어요. 경시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발굴단 일 얘기잖아요.”
C의 어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피며 고개를 들었다. C의 표정은 분노라기보다는 서운함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제가 같이 책 읽자고 했을 때 거절했던 것도, 머리 땋아주려 할 때 그 작은 시간조차 못 냈던 것도,
방 청소를 소홀히 한 것도, 요즘 언니가 늦게 들어와서 같이 샤워도 못했던 것도,
전부 그 아가씨 만나러 가서 그런 거잖아요!
게다가 요즘은 주방일도 자꾸 늦고, 음식이 사라진 것도 이제보니...”
“정말! 진짜 미안해!”
나는 다시 급속도로 허리를 접으며 정수리가 C의 무릎에 닿을 정도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조금 놀랐다. C가 화내는 이유가 그것 때문일 줄이야.
어쩌면, 어쩌면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미안...
그런데... 어디서부터 본거야...?”
나는 또 다시, 그러나 방금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제 C는 삐졌다는 표정으로 방 한켠에 시선을 내던지고 있었다.
“...언니가 교수님 앞에서 쩔쩔 매고 있을 때, 그리고 식당 보자기를 다 보이게 감추고 허겁지겁 뛰어갈 때. 몰래 따라갔어요.
그랬더니 언니가 몰래 굉장한 탑 속에 들어가더니 어떤 이쁜 아가씨랑 같이 제가 만든 음식을 먹고... 저랑은 한 적 없는 얘기하구...”
“아... 그럼... 전부 다 봤구나...”
정말로 미안해... 다시는...”
나는 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다가 멈췄다.
내가 말을 끝내지 못하자 어쩔 수 없는 침묵이 아주 잠깐 동안 우리 둘 사이에 들어왔다.
그 바람에 나는 고개를 숙인 것도 아니고 핀 것도 아닌, 약 140도 정도의 각도로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다시는...’ 뭐예요? 다시는 안 간다는 거예요?”
C가 다시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로 호통쳤다.
“그건... 조금... 말했다시피 중요한 일이라서...
약속했기도 하고...”
“하아...”
C가 깊은 한 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잡고 날 곧게 세웠다.
“됐어요... 엄밀히 말하면 뭘 하던 언니 자유고. 저도 언니를 속박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 분이 제 음식 칭찬해줬기도 하구...”
“그럼... 할아버지께 말은...”
내 목소리가 은근하게 높아지자, C는 힐끗 보고는 전보다 더 힘없는 소리로 대답했다.
“말 안해요.
애초에 언니가 뭐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저는 발굴단원도 아니니 상관할 바도 아니고.
그래도...“
C가 조금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매일, 시간 날 때마다 가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가끔은, 저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텐데...”
분노했던 C의 서운함은 어느새 아쉬움으로 바뀌었고 이제 막 상냥함으로 바뀌려 했다.
“언니랑 오랜만에 마시고 싶어서 몰래 술도 챙겨왔는데...
이거 좋은 거라구요? 언니가 요즘 시간을 전혀 못 내니까 같이 마시지도 못하잖아요.”
C가 가리킨 쪽에는 꽤나 비싸 보이는 와인이 방구석 한켠 잡동사니 속에 숨어있었다.
저런 술을 파는 가게는 여기서 차로 몇 시간은 가야 있는 대도시에나 있다.
한 달 치 장 보러갔을 때 샀던 걸까. 하지만 그 때는 열흘 전 이었을 텐데...
그렇다면 10일 전 부터 저 붉은 와인이 방구석에 놓여 있었는데도, 난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가.
C의 목소리는 어느새 더 깊은 서운함으로 빠져들려 하고 있었다.
“모처럼 언니랑 일하게 됐으니 좀 더 자주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미안해. C.
다음에 같이 마시자. 꼭 꼭 시간을 내도록 할테니끼. 응?.”
나는 깊숙이, C를 껴안으며 말했다.
내 두 입술 사이에서 나온 진심의 그녀의 머리칼의 기분 좋은 향기와 뒤섞여 C의 새하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C는 조금 놀란 듯 하더니 이내 내 등에 양 팔을 꽉 두르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파고들듯이 그 부드러운 뺨을 내 목덜미에 기댔다.
나는 더 가까워진 C의 귓볼에 대고 속삭였다.
“이 일도 조만간 끝날거야. 엘리의 다리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고 연구도 막바지에 이르렀으니까...”
“그 아가씨가 했던 말 그대로네요...”
“아, 음... 그렇긴 하지. 하하...
하지만... C도 이해해줬으면 해. 이건 정말 굉장한 발견이야.
이 연구면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거야. 우리 대학과 네 할아버지의 위상도 달라질 거구. 그리고-”
“그리고 언니의 경력도 화려해지구요?”
“응...? 뭐... 음... 그렇긴 하지.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 덜 다닐께.
C랑 같이 책도 읽고, 얘기도 하고, 방 청소도 도와주고, 주방일도 안 늦고, 샤워도 꼭 같이 할 테니까.”
“...그리고 그 아가씨랑 한 얘기는 저한테도 꼭 알려줘요.”
“응? 아, 그럴게.
역시 C도 관심 있구나. 하긴 그런 이야기에는 흥미없기가 더 힘들지.”
“아니 그런게... 됐어요...
아무튼, 꼭 약속하는거예요?”
“응, 꼭 그럴게.”
내가 좀 더 꽈악 껴안아주자, C는 그제서야 기분이 풀린 듯, 가볍게 웃었다.
들켰을 때만 해도 완전히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훨씬 부드럽게 해결되어 다행이었다. C가 화내는 부분이 조금 이해 안가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그런데 이 때, 실날같은 의문이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정말로 오직 내 경력 때문에 엘리를 돕는 걸까?
내가 C에게 열심히 해명할 때 내 머리를 한 순간 스쳐간 이미지는
박사학위를 받거나 발굴단을 전두지휘 하고 있는 내가 아닌,
드디어 고향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기뻐할 그 엘리의 미소였다.
꼬옥 안긴 C에게 어느새 격렬해진 내 심장박동을 들킬까, 나는 황급히 포옹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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