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서관_2층
“저 책들만 읽으면 끝이야?”
“응? 아, 응.”
나는 해질 대로 해진 양피지에 고개를 처박은 채 엘리가 가리킨 곳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끝.
그렇다 그 책들만 읽으면 끝이다.
오늘의 일과가 끝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 연구가 끝이라는 얘기다.
엘리와 처음 만난 지 3주 하고 이틀이 지난 지금,
우리는 도서관의 두 번째 층의 첫 번째 방에 있고, 우리들 사방에는 첫 번째 책장 중에서도 첫 번째 줄의 책들이 꺼내진 채 어지럽게 쌓여져 있었다.
옥상부터 2층으로, 역순으로 연구해온 엘리의 해괴한 방식 덕에,
우리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처음의 첫 공간에 있는 것이다.
이 몇 주 동안 한없이 많은 지식과 추측이 모였지만 여전히 정답을 찾기엔 부족했다.
책에 낙서를 할 수는 없어서 적어댄 두꺼운 노트가 몇 권은 된다.
그것만으로도 학계가 주목할 만한 자료가 되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그렇게 한 여정의 끝에서,
한 낮의 적막한 방은 사각거리는 연필소리와 팔랑거리는 종이소리만이 겨우 채우고 있었다.
“그 책 좀 건네줄래?”
“이거?”
“아니, 그 옆에 거.”
“여기.”
“고마워.”
엘리는 책보다는 걸레에 가까울 정도로 더러워진 두루마리를 받고, 읽던 책 옆에 펼쳐 놨다.
그리고 분주하게 자신의 노트에 이것저것 써가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핀 겸에, 척추를 곧게 세우고 기지개를 폈다.
창문 밑에 책들이 한 뭉텅이 쌓여있다. 아침부터 계속 연구해서 다 털어낸 열 몇 권이다.
그리고 반대쪽, 책장 아래에도 책 한 무더기가 놓여져있다.
엘리가 방금 가리켰던, 아직 연구하지 않은 마지막 책들이다. 이쪽도 어림잡아 10권이 넘는다.
그만큼 단서가 남아있으니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힘에 부치는 것도 사실이다.
창문 밖으로 내려뜨린 따사로운 햇볕이 엉망이 된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이제 막 오후가 되었을 뿐이지만, 나도 엘리도 아침부터 쉬지 않고 연구한 탓에 조금 지쳐있었다.
“엘리.”
2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건만, 못들은 건지 무시하는 건지
엘리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책을 두 권씩 뒤적거리고 있었다.
“엘리!”
“응?”
“좀 쉬었다 하자. 벌써 두 시야.
우리 5시간동안 연속해서 연구한 거 알아?”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엘리는 드디어 책에서 눈을 때더니 앙상한 등을 곧게 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주방일은? 또 C 혼자-”
“‘또’는 뭐야 ‘또’는.
아니야, 내가 C한테 부탁했어. 오늘만 쉴 수 있겠냐고.
모처럼 연구가 막바지니까.”
“그렇구나.
C에게는 몇 번을 감사해도 부족하겠는데.”
“C에게‘는’?
내 일까지 재쳐두고 달려와 준 나는 안 고맙고?”
“넌 항상 자기 일을 재쳐두잖아.
그리고 보나마나 나한테 발견의 순간을 뺐기기 싫어서 온 것일텐데”
“...부정할 수가 없군.”
우리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가볍게 웃었다.
햇빛이 닿지 않는, 방 입구 쪽 벽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기대 발을 쭉 뻗고 앉았다.
서늘한 벽돌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시원함이 척추와 날개뼈를 감쌌다.
갑작스런 편안함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요란한 꼬르륵 소리와 함께 공복이 느껴졌다.
나는 옆에 둔 가방에서 차가운 보냉병을 꺼냈다.
“오늘은 급하게 나오느라 음식은 못 가져왔지만 음료는 있어.
시원-한 아이스커피야.”
도르륵 뚜껑을 열어 바닥에 놓고 냉기가 스며든 검은 커피를 쪼르륵 따랐다.
냉커피였지만, 도서관의 퀴퀴한 냄새에 익숙해졌던 탓인지, 우리들의 콧방울은 금방 진한 원두냄새로 가득 찼다.
호록.
“맛있네.”
“응. 맛있어.”
한 모금, 그것만으로 영혼까지 시원해지는 듯 했다.
게다가 때 마침 창문을 통해 몰래 들어온 기분 좋은 바람이 우리의 머리칼과 어깨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모든 게 멈춘 듯 했다.
쾌적할 정도로 차가워진 등, 편하게 쭉 뻗은 다리, 입 안에 도는 쌉쌀함, 땀을 식히는 잔바람
다갈색 고서 위에서 햇빛에 노랗게 반짝이는 먼지, 그리고 내 팔뚝에 착 붙은, 엘리의 부드러운 어깨.
그러한 모든 것이 한 조각의 행복이 되어 나의 가슴 위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엘리는... 고향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뭘 할거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이 정지된 시간을 깨트리고 그녀에게 닿았다.
평소라면 절대로 말하지 않을 ‘이름’을 굳이 언급해서 그런 건지, 막 졸려던 참에 갑작스런 질문을 받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질문의 내용 때문에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엘리는 아주 조금 놀라며 어깨를 움찔였다.
엘리는 눈을 껌뻑이고는 나를 올려다 보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건너편 책장과
책장에 반쯤 가려진 채 햇빛 아래서 반짝이는 책 무더기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겨우 입을 열었다.
“아직... 생각해본 적 없어.”
“정말?”
“그도 그럴게...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걸.”
엘리는 아이스커피 사이로 바닥이 보이는 컵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부모님을 제외한 동족은 전부 어렸을 때 헤어져서 아는 사람도 없고
부모님도 정말 거기에 계실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그냥 막연히 고향을 찾아야겠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그 고향에서 뭘 해야 할지는... 생각해본 적 없어”
엘리의 목소리에서 울적한 느낌이 감돌았다.
아 이러려던 게 아닌데.
“그, 그래도 고향에 가면 하고 싶은 게 생길거야.
분명 그 쪽 사람들도 환영해줄 거고.”
“아마도, 그 사람들은 그렇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는 뭘 해야 하지?
사람들은 고향에 가면 뭘 하는 거야? 뭘 해야, 고향이... 고향이 되는 거야?”
엘리가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걱정스러움이 조금, 의문이 한줌, 그리고 불안함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였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내 실언의 후회 때문인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앨리가 쳐다보던 그 황금빛 책무더기로 시선을 옮겼다.
“그 때... 그 남자 얘기 했잖아.”
앨리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학자... 고고학자들에게 내 존재와 민족의 존재가 유린당한 것...
그것 때문에 네 고향을 찾는 거잖아.
그러니까...네 고향이 남들을 위한 것이 아닌, 너의 집이 되길 원한다고 했잖아.”
앨리가 말없이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특별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내 말은, 오히려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 남들과 다를 것 없이 어울려 사는 것이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 아닐까?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꼭 어떤 일을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그런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위해서,
그런 일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고향을 찾는 것... 이라고 생각해.”
나는 어느 새 엘리의 작은 손 위에 내 손을 살포시 포갠 채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투명한 눈동자는 황금빛 햇살 아래서 비취색으로 반짝였다.
내가 너무 뚫어지게 본 탓인지, 귓불이 붉어진 엘리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커피 컵을 내려다봤다.
“응... 그렇네... 그럴지도 몰라.
고향을 의미있게 만들 필요는 없는거야. 고향 자체가 의미 있는 거니까...”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안하더니 엘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고마워. K.
고마워.”
엘리의 옅은 분홍색 입술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속눈썹 아래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작은 에메랄드빛 태양이 눈 부셔서, 나는 황급히 일어섰다.
“돼, 됐어. 별거 아냐.
그보다 일! 일하자. 너무 오랫동안 쉬었다.
오늘 안에는 끝내야지!”
“응, 그렇네. 다시 시작하자.”
엘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까지 펼쳐놓았던 책으로 가더니, 창문 밑의 이미 연구를 끝낸 책 무더기를 뒤적거렸다.
“엘리? 뭐해?”
“응? 왜?”
“이미 끝낸 책들은 왜 다시 보는 거야? 놓친 부분이라도 있어?”
“무슨 소리야? 이 책들은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
이 책들만 읽으면 끝이라며.”
“아니, 저쪽, 책장 밑에 있는 책들을 읽으면 끝이랬지.
아직 안 읽은 건 그 쪽이니까.”
“뭐? 그 쪽 책은 내가 아침부터 연구했던 것들이야.
이미 끝낸 거라고. 네가...”
엘리의 목소리가 한 순간 떨리더니,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온 몸에 소름끼치는 오한이 느껴졌다.
하면 안 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엘리도 그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또 우리 모두가 그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책으로 가득한 좁은 방에 가득한 정적이 우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에... 엘리...”
나는 겨우 입술을 때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만 겨우 불렀다.
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책들, 우리가 이미 연구를 끝낸 책들로 어질러진 방바닥을 바라보며,
혹은 그 무엇도 보지 않으며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 때 엘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표정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좌절과 공허, 분노와 슬픔,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그녀의 존재에 어울리지 않는 빛깔을 띠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저기... 엘리...”
나는 조금 전보다 큰, 그러나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한 번 더 불렀다.
천천히 다가가 그 왜소한 어깨에 손을 올리려 하자-
“지금은...”
엘리가 말했다.
조금도 떨리지 않는, 매우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한 없이 무거운 감정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냥 가줘...
나중에... 얘기하자.”
“하지만...”
“부탁이야.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엘리는 그렇게 말하며 뒤 돌았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이 엘리의 정면을 덮쳤고
그 탓에 역광에 휩싸인 그녀의 작은 뒷모습은, 거뭇한 실루엣으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며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그 때 바로 뒤에 있던 책무더기가 내 발꿈치에 닿아, 와르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깜짝 놀라며 힐끗 엘리를 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고
그저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검은 뒤통수만이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방금 무너트린 책을 넘어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한 발 한 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마다 묵직한 중력이 내 어깨와 발등을 짓누르는 듯 했다.
서늘한 그림자를 벗어나, 도서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리쬐는 태양빛이 갑작스레 내 이마를 깊숙이 찔렀고
나는 현기증과 함께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일어설 생각도 힘도 없었다.
도서관의 입구. 좌절로 가득한 내부와 끔찍이도 뜨거운 한 낮 사이에서, 나는 그저 앉아있었다.
엘리의 연구는 실패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녀가 발견 한 것은, 몇 년간의 연구가 다 쓰레기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고향에 한없이 가까이 갔지만, 결국 닿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녀의 고향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엘리는 지금 이 순간 뭘 하고 있을까.
지금도 뜨거운 창문 앞에서, 공허만을 응시하며 말없이 서있을까.
엘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
나는 모른다.
분명, 그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태양은 미치도록 밝았다.
나는 눈이 너무 부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땅바닥에 깔린 채 길게 늘어진 거뭇한 그림자만이 나의 갈 곳 없는 질척한 감정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 숙소_K와 C의 방
“언니!”
숙소 방으로 돌아오니 C가 나를 반겨줬다.
나는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었다.
“C. 다녀왔어.”
“수고하셨어요.”
C가 내 가방을 들어주며 말했다.
“내가 무슨... 수고는 네가 했지.
오늘 일 쉬어서 미안해.”
“괜찮아요. 오늘 별로 바쁘지도 않았고, 어차피 언니도 휴일은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빨리 오셨네요. 저녁 늦게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응. 그랬지.
그냥 조금... 빨리 오게 됐어.”
나는 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바지에 흙먼지가 묻었겠지만
엘리 생각에, 그리고 그 생각을 C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기에 침대 걱정을 할 겨를이 없었다.
C가 나를 따라 내 옆에 앉았다.
“...오늘도 그 아가씨 만나러 가신 거예요?”
“응. 연구가 막바지라서...”
“그렇구나... 연구는 잘 되고 있어요?”
C는 상냥하다.
오늘 일을 쉰 나와 면식도 없는 엘리를 걱정해주니.
그녀에게는 거짓말을 못하겠다.
“...응. 잘 되고 있어.”
“그렇구나.”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르자, 그제야 나는 표정도 목소리도 숨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한없이 좌절하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뭔가 큰 문제가 있음을, C는 진작에 느꼈을 것이다.
“언니.”
“응?”
C의 상냥한 목소리에 나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목소리와 표정을 꾸미며 대답했다.
“제게는 언니가 항상 우선인 거 알죠?”
C가 내 손을 살며시 잡아줬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저한테 말해주세요.
그야 저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못미더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손은 몰라도 어깨정도는 빌려줄 수 있어요.”
“고마워 C.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
그래도 무슨 일 생기면 꼭 알려줄게.”
“...약속이에요?”
“그래. 약속.”
나는 미소와 함께 C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아직 저녁 준비 시작 안했지?
샤워만 하고 바로 도와줄게.”
“그냥 쉬세요. 오늘 하루 통째로 쉬기로 했잖아요.”
C가 나를 따라 일어서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일이라도 해야지.
지금은 일 하고 싶어.”
“...알았어요.
그럼 먼저 주방에 가 있을 테니까 샤워하고 천천히 와요.”
“응. 빨리 갈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대충 품에 담아 방을 나왔다.
그리고 닫힌 문에 힘없이 기댄 채 한 숨을 쉬었다.
“하아......”
너무 깊은 한 숨이라 순간 C에게 들릴까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뒤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샤워장으로 향했다.
오후엔 정신없이 일을 했다.
그날따라 일이 많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제정신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C의 일까지 죄다 뺐으며, 숨돌릴 틈 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소등시간까지 무사히 머릿속이 텅 빈 채 있을 수 있었다.
“언니. 잘 자요.”
C가 하품을 하며 불을 껐다.
“응. C도 잘 자.”
방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고, 온도는 딱 좋게 따뜻했다.
이불은 빠져들 듯이 푹신했으며 한나절동안 쉬지 않고 연구하고
또 남은 한나절 동안 일을 한 탓에, 몸은 매우 지쳐있었다.
어떻게 봐도 잠을 자기에 완벽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감고 별을 세어봐도, 간간히 들리는 C의 숨소리의 새근거림에 귀기울여도,
팔로 무릎을 껴안아 몸을 웅크려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이 오기는커녕 머릿속이 점점 깨어가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바빠서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솟아올라,
내 마음은 어느새 잡념과 사념으로 가득한 열대우림처럼 변해버렸다.
‘엘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엘리는 몇 십년간 고향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또 몇 년간 같은 일념 아래서 저 낡은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실패했다.
그보다 더 분명할 수가 없는 실패를 겼었다.
나라면 어떡할까.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엘리는 견딜 수 있을까?
죽지 않는 민족이라고 해서 죽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일생의, 단 하나의 의미가 사라졌는데, 정말로 견딜 수 있을까?
잡념은 생각이 되었고 생각은 걱정이 되더니 이내 곧 비관을 향해 내려떨어지기 시작했다.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차가운 사막의 밤 속에서 홀로 오들오들 떨고 있을, 그 얇은 얼음장같은 마음이
금방이라도 부숴지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C, 자?”
조용히 C를 불러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조금 후에 또 다시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제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용히 한다고 했건만 일어나는 순간 스프링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잠깐 멈춰서 윗 침대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발끝으로 서서 C의 침대를 올려다봤다.
C는 떨어질 듯이 침대 난간에 얼굴을 기댄 채 평온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C의 뺨에 살짝 굿나잇 키스를 해준 뒤 두꺼운 외투를 대충 걸쳐 입고 조용히, 조용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는데, 무언가가 내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도서관에 도착했을 땐 잘 여문 보름달이 은하수에 걸린 채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엘리를 놀래키지 않으려 조용히 도서관으로 들어와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내 온몸에 소름끼치는 오한이 지나갔고, 나는 플래시의 밝기를 높이며 방 구석구석을 뒤졌다.
다행히 아무런 쓸데없는 잡소리가 적힌 편지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엘리가 유서를 쓸 애도 아니지만.
나는 방을 나와 계단을 올랐다.
마치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처럼, 모든 층의 모든 방의 모든 구석을 확인하며 계속 위로 올라갔다.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야밤이었고, 무지하게 추웠으며,
내 마음에 가득 채우는 건 설레임이 아니라 미친듯이 흔들리는 불안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옥상에서 엘리를 발견했다는 점은, 그 때와 같았다.
“엘리...?”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쉰 소리로 엘리를 불렀고
내 말을 듣지 못한 그녀는 옥상 한 쪽 구석, 돌기둥 밑둥에서 창백한 달빛을 겨우 피한 채
웅크린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가까이 다가갔고 그럴수록 엘리의 흐느끼는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우리의 거리는 불과 2미터도 채 되지 않았는데 엘리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무릎에 얼굴을 처박고 어깨를 조금씩 떨고 있었다.
“엘리.”
이번에는 들었는지 엘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밤이 깊어 달빛은 사그라지고 있었고, 그마저도 돌기둥의 그림자에 가려진 엘리에게는 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얼굴이 참혹할 정도로 일그러진 채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엘리가 숨을 헐떡이며 질척해진 입술을 열었다.
“k... K?”
“그래. 나야.”
“여기는... 왜... 지금...” 훌쩍.
엘리는 끅끅대며 우느라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나는 대답 대신 옆에 앉아 내 어깨를 그 작은 어깨에 찰싹 붙였다.
엘리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축축하게 젖은 두 시선은 길을 잃은 채 양 무릎 사이에 힘없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엘리에게는 더 이상 그 어떤 힘도, 의미도, 열정도, 희망도, 마음도 없어보였다.
죽어가는 새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리는 그 애달픈 심장박동소리가, 이 깊은 밤 밑바닥에 내려깔렸다.
그리고 그 진동은 나에게까지 전해져와, 내 심장마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괜찮아.”
나는 엘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내 품으로 당겼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고, 내 쇄골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떨리는 날숨이 내 가슴을 간지럽혔다.
“괜찮아. 울어도 돼.
마음껏 울어도 돼.
아무도 못 들으니까 마음 놓고, 울고 싶은 만큼 울어.
괜찮아.”
그 말에, 엘리는 몸을 내 쪽으로 기대고는, 내 품에 파고든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 가슴팍이 눈물로 깊게 젖어 들어갔다. 그 작은 몸무게에 짓눌린 마음이 무거워졌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뭐가 괜찮은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괜찮다는 단어만 반복했다.
엘리의 울음소리는 더 커지고 더 애처로워졌다.
그 앙상한 두 팔이 내 등을 둘러싸 껴안았고,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절벽의 끝에서 붙잡을 것이라고는 나뿐이라는 것처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늑골이 좁혀지고 척추가 압박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숨 쉬기가 더 편해졌다.
엘리가 울음을 내쉴 때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엘리를 좀 더 깊숙히 껴안았다.
“괜찮아.
...너에겐, 내가 있어.
네 옆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드디어 ‘괜찮다’의 의미를 이해한 나는, 그렇게 말했다.
“걸을 수 있겠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그러지 못하길 바랬다.
다행이도, 엘리는 내 팔을 잡으며 말없이 내게 기댔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엘리를 안아들었다.
거의 1시간 넘게 운 덕인지, 엘리는 많이 진정됐다.
호흡도 잔잔해졌고 어깨의 떨림도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목을 끌어안고 내 가슴에 보드라운 뺨을 붙였다.
뭐, 그 편이 더 안전하니 좋긴 하지만...
...내 쿵쾅대는 심장소리를 그녀가 듣지는 않을까, 괜히 걱정이 됐다.
1층 방에 들어와, 이전처럼 나무 침대 위에 그녀를 살며시 놓았다.
그 방은 처음 왔을 때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전에 두고간 밧줄이 무슨 장총마냥 벽에 걸려있는 걸 제외하면.
엘리는 눕는 대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직 자고 싶지 않은 듯 했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이다.
“엘리.”
나는 옆에 나란히 앉았다.
엘리가 나를 돌아봤다.
내가 손바닥으로 닦아준 덕인지 그 하얀 얼굴은 눈물 자국이 조금 있을 뿐, 많이 깨끗해졌다.
“슬플 때는 뭘 해야 하는지 알아?”
엘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지고 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200년이나 살았는데 그런 것도 모르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가방 속에서 크고 검붉은 유리병을 꺼냈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괴로울 때는,
술을 마시는 거야.”
나는 양 무릎 사이에 레드와인을 끼우고 낑낑거리며 코르크 마개를 땄다.
그리고 마개를 허벅지 옆에 두는 순간 내가 와인 잔을 안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잔 있어...”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엘리가 나무잔을 가져왔다.
언젠가 그 컵으로 내가 가져온 음료수를 마셔본 적 있었다.
나뭇결은 거칠었고 군데군데 손때가 묻은데다가 니스 칠이 다 벗겨진 탓인지
음료 맛이 미묘하게 이상했던 기억이 있다.
이 고급 와인을 저기에 따랐다간 분명 망치고 말겠지.
“완벽해.”
나는 두 잔 가득, 찰랑거리게 포도주를 채웠다.
한 잔을 엘리에게 건네주니, 엘리는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그 나무잔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나... 와인 마셔도 돼?”
“왜? 미성년자야?”
썰렁한 개그를 치곤 나 혼자 어이없이 웃었다.
“술은 처음이라... 그리고 좀 많은 거 같은데...”
“200년 넘게 살면서 술을 한 번도 안 마셔봤다고?”
“어쩔 수 없잖아...
이 외모로 살 수도 없고, 술을 마실만한 여유나 일도 없었는 걸.”
“뭐, 그럼 이제 한 단계 어른의 계단을 올라가야지.
으음, 역시 고급은 다르네.”
난 두 모금같은 한 모금을 들이켰다.
과연, 맛이 좋았다. 이런 와인을 고르다니 역시 C는 요리인인가보다
“이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은걸...”
엘리는 쓴웃음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 모금 홀짝이고는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너도 마시다보면 이런 어른이 될 거야.”
그 말을 하자마자 엘리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180살 가까이 연상. 어마무시한 나이 차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다니.
나는 힐끗 엘리를 쳐다봤다.
엘리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연간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오열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우리, 정말로 가까워졌구나.
“자, 자. 한 잔 더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의 잔에 레드와인을 쪼르르륵 따랐다.
“아직 자늘 다 비우지도 아나써...”
그렇게 홀짝이더니, 벌써부터 혀가 꼬였나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계속해서 와인을 따랐다.
그러다가 문득, 작은 나무 잔을 내려다보니
그 와인색 수면 위에 담긴 엘리의 미소가, 찰랑거렸다.
똑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자 컵을 반쯤 채운 와인에 아주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아... 다 떨어졌네...” 딸꾹, “어떡한다...”
우리 둘은 어느새 방바닥으로 내려와,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다리를 쭉 핀채 앉아있었다.
엘리도 나도, 취할 대로 취해있었다.
“충부니 마셔짜나. 더 마시려고?”
“아니... 머 그것도 그러킨 한대...” 딸꾹
“이거 사실 C랑 마시기로 한 거라...”
“와... 쓰레기네...”
엘리가 그렇게 말하며 실없이 웃어댔다.
미소를 지은 건 몇 번인가 봤지만 이렇게 바보처럼 웃는 건 처음 본다.
바보.
“내가 누구 때문에 가져온 건데.
글구 딱히 쓰레기라도 상관없어.” 너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히히히히히히.”
이제는 실성한 것처럼 웃는 엘리가 마지막 남은 와인을 한 입에 들이켰다.
왠지 내가 얘를 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눈물 젖은 눈가에 붉은 자욱이 생기는 것보다는
레드와인이 묻은 입가에 빨간 흔적이 남는 나을 것이다.
“엘리...”
“응?”
엘리가 웃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말햇찌만... 너에겐 내가 있어...”
“응...”
내가 조금 엄숙한 톤으로 말한 탓인지
엘리의 목소리도 갑작스레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는 너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나에게 중요... 소중해.”
엘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물론 내 커리어나 역사적 연구, 뭐 그런 것들에서 중요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친구로써, 널 아껴.
그러니까... 우리가 이 도서관을 다 뒤진 후에도, 그래서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해도,
그렇게 너가 나에게 알려줄 게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넌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심장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레드와인 때문에 내 머리는 알딸딸했고, 내 입은 가벼워졌다.
마음부터 혀까지 고속도로가 뚫린 듯, 취기어린 진심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네가 여기서 더 찾을 게 없고 그래서 더 있을 이유가 없다면,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받아줄 수 있어.”
나는 양 손으로 쥔 나무 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검붉은 수면은 미동 하나 없이 너무나 잔잔했다.
꽤나 취했음에도 이상하게 손은 떨리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야.
우리 교수님은 좀 까다롭고 엄격하지만,
그래도 이해심이 많은 분이셔.
그러니까, 네 얘기를 하면 믿지는 않더라도 분명 관심을 가지실거야.
그래도 안 되면 내가 때라도 써서 관심을 가지게 해줄거구....
아무튼 그래서... 만약 같이 우리나라로 돌아간다면,
우리 집에서... 그... 같이... 살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너만 괜찮다면, 응.
나는 완전 괜찮거든. 혼자 살고 있기도 하구...
너랑 같이 있으면 즐겁기도 하구...
그러니까...”
‘그러니까’를 한 50번쯤 말하고 나서 돌아보니,
엘리는 어느새 내 어깨에 작은 머리를 기댄 채 새근새근 졸고 있었다.
“아... 정말...”
언제부터 자고 있었던 걸까.
사람이 모처럼 진심을 털어놓고 있는데...
솔직히 좀 아쉬웠지만
어느새 꿈 속에 빠져 있는 엘리의 평온한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들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나는 그 웃음을 감출 생각도 안 했다.
“자 침대에서 주무셔야죠 할머니.
여기서 잤다간 감기 걸려요.”
나는 엘리를 안아들어 조심스레, 나무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엘리를 내려다봤다.
엘리는 한 손을 배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을 허리 옆에 늘어뜨린 채 푹 자고 있었다.
방 안 곳곳에 놓인 기름등으로부터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노란 불빛들은
엘리의 새하얀 피부와 선홍색 입술, 그리고 까만 속눈썹에 닿자
사랑빛으로 반짝여 내 가슴에 물들어갔다.
말없이 내려다본지 얼마나 됐을까,
나는 어느새 엘리 위로 허리를 기울여, 서로의 코가 맞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 검은 귀밑머리가 내려와 비단 같은 백금빛 물결과 뒤섞였다.
엘리의 따뜻한 숨결이 내 콧등을 간지럽혔다.
이백년의 숨을 내쉬었고 또 팔백년의 숨을 들이쉴 그 입술이,
천 년의 사랑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깊이서 우러나오는 미소로 가득찬 내 입술이
엘리의 입술에 맞닿아, 천천히 포개졌다.
두 개의 분홍 입술과 두개의 붉은 입술이 서로 교차하며 깊게 스며들었고,
깊은 숨과 마른 타액과 보드라운 사랑이, 그 속에서 뒤섞였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입술은 아니었다. 뭔갈 말하려 했는지, 무슨 꿈을 꾼 건지,
아니면 갑작스런 작용에 반사적으로 경련이 일은 건지, 엘리가 입을 약간 뒤척였고,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뒤로 재끼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방금까지 죽은 듯이 정지되었던 머릿속이, 갑작스레 폭팔이라도 할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인 행동과, 촉각과, 의미와, 관계와, 감정과, 마음 그리고 엘리가,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 쳤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이 의식이 과하게 뚜렷했고, 동그랗게 뜬 눈은 감을 수도 없었다.
엘리는 여전히 지각을 꿈 속에 숨겨둔 채 잠을 껴안고 있었지만
굳게 닫힌 속눈썹, 그 애틋한 속눈썹만은 내 진심을 말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방 밖으로,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달렸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검은 풀 숲 위를, 은색의 달빛 아래를
그러한 새까만 협곡 사이를,
그저, 달렸다.
호흡이 거칠어졌고 심장은 폭발할 듯이 쿵쿵거리고 있었다.
투명하고도 검푸른 사막의 밤이 날 차갑게 애워쌌지만
그 순간에도 붉게 상기된 내 뺨과 귓볼은 태양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 숙소_K와 C의 방
“언니. 언니이이.”
애교어린 목소리와 쉴 새 없이 흔들려지는 내 어깨에
나는 깊은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C가 보였다.
“일어났어요?”
“으... 응...”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침대에 앉았다.
머릿속을 가득채운 숙취의 통증 사이사이로 전날 밤의 기억이 스쳐갔다.
엘리의 울음소리, 알코올의 쓴 맛, 내 입술에 포개진 분홍빛 부드러움...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으로 이 유적지가 떠나갈듯이 소리 질렀다.
“어,언니?
괜찮아요?”
“아... 응...
괜찮아.”
바로 앞에 C가 있다는 걸 깨닫곤 바로 손을 풀어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아 맞다. 아침준비 해야 되는데,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났지?”
“후훗, 지금은 12시 50분이에요. 점심 드시라구 깨웠어요.”
“뭐? 벌써?
왜 아침에 안 깨웠어?”
졸린 눈이 번뜩 떠졌다.
“깨웠는데 언니가 너무 푹 자고 있더라구요.
그렇게 깊게 자는 건 처음 봐서 그냥 나왔어요.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죠.
다들 먹은 뒤라 식당은 비어있으니까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편하게 드시면 돼요.”
천사다.
내 앞에 천사가 서있다.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
늦잠까지 잔데다가 일을 또 빼먹다니...”
“괜찮다니까요. 정말.
정 미안하면 오늘 점심 많이 드세요.
아침 안 먹은 만큼 많이 먹어야죠.
게다가 오늘은 특별히 언니가 좋아하는 뼈다귀 해장국이에요.”
이제 고마움을 넘어 미안해 죽을 것 같다.
이게 사랑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일까.
게다가 숙취인 것도 몰랐으면서 뼈다귀 해장국을 준비해주다니. 이 은혜는...
아, 와인.
그제야 C랑 꼭 마시자고 했던 와인을 다 비웠던 사실을 떠올렸다.
눈앞이 아득해진다.
부엌칼로 할복이라도 하면 이 죄가 씻어질까.
“저... 그... C...?
그 와이-”
“아 그러고 보니 언니, 찾았어요.”
“응?”
내가 너무 작게 말했던 탓일까, C는 내 말을 듣지 못하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 책 말이에요.
언니가 저번에 얘기한 노랗고 낡은, ‘용의 민족’이 나오는 책. 찾았어요!”
예상 외의 사건이다.
“교수님께 여쭤보려고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기다리면서 책장을 둘러봤는데, 거기에 있었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제목이 아니라 아예 책 자체를 발견하다니!”
C는 그렇게 말하며 언제부터인지 가지고 있던 책을 건네줬다.
받아 들어보니, 확실히 그 책이었다.
생각보다 더 작긴 했지만, 조금 빛바랜 노랑, 해진 모퉁이까지 모두 기억 그대로였다.
“그런데 꺼내는 건 좀 힘들었어요.
다른 책들 밑에 깔려있었거든요. 그래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어요.
마치 숨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아, 진짜 숨겨둔거면 어떡하지... 할아버지한테 혼나려나...”
C가 우두커니 선 채 걱정스런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그 책을 살펴보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 교수님께 잘 말하면 괜찮을 거예요. 후훗.”
“아... 응...
책 고마워. C.”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 다시 C를 올려다봤다.
“뭘요. 약속했잖아요.
그래도, 밥은 먹고 읽어요. 밥 다 식으니까.”
“응. 알았어.”
그 말에 C는 웃으면서 뒤돌아 방 문 쪽으로 향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식사 다 했으면 그냥 물에 담가만 놓으세요. 나중에 제가 씻을게요.”
“저기 C!”
C가 막 방문을 나서려다 뒤를 돌아봤다.
“네?”
“이 책... 왜 내가 찾아봤을 땐 안 나왔을까?
인터넷 검색도 하고, 대학 도서관 자료 검색까지 했었는데.”
“아, 그거. 저도 신경 쓰여서 조금 살펴봤는데.
그 책, 교수님이 직접 쓰신 책이더라구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제본까지 다 해놓고 출판을 안 하셨나봐요.
그래서 교수님 책장에만 있었던게 아닐까요?.
이제 정말 가볼게요!”
“아... 그렇구나.
...고마워 C!”
C는 정말로 급했는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문을 나섰다.
십 몇 페이지 정도를 대충 읽어보니 아무래도 교수님의 자서전 비슷한 것인듯 했다.
책은 10대 후반의 쓸데없이 상세한 기록으로 시작됐다.
1960년대부터 시작해서 (새삼스럽지만 진짜 교수님 나이 많기는 하다.) 그냥 얼마나 공부를 잘했고 얼마나 노력했고
어디로 유학을 갔고 무슨 역경을 부딪혔고 어떤 여자를 만났고 어떻게 차였고 어떻게 논문을 썼고 하는 등의, 아무래도 좋은 얘기들뿐이었다.
출판 안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 미국 유학부터는 뭔가 달랐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 기억이 연상되는 듯 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42 페이지의 두 번째 문단 첫 번째 줄 다섯 번째 단어는, 분명 ‘용의 민족’이었다.
계속 대충 펄럭이며 보느라 맥락을 전혀 몰랐던 나는 몇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거기엔 아직 실연의 아픔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던 교수님이,
금문교 아래에서 은발의 소녀를 만났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일하는 가게의 단골이 되고, 호감이 연심으로 바뀌고,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가 적혀져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거리는 손으로 한 장씩 넘기며 다시 42 페이지로 돌아왔다.
그 소녀는 자신을 용의 민족이라 고백했고, 교수님은 처음엔 믿지 않았으나 결국 믿게 되었다.
여기서 내 손은 멈췄다.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건 엘리에 관한 이야기다.
년도, 도시, 만나 방식, 가게의 이름, 둘이서 나눈 대화까지. 모든 게 같았다.
그녀에게 들었던 얘기가 단지 교수님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종이를 찢지 않으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면서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 후의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지금까지의 서술 방식처럼 감정과 주관을 최대한 절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써내려갔기에
엘리가 말한 것 이외의 이야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날 그녀가 사라졌고, 자신의 집이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는 것 정도.
그 후에는 다시 아무래도 좋은 유학 얘기뿐이었다.
엘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나 연구 얘기는 없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걸까, 아니면 실패한 연구라서 적지 않은 걸까.
애초에 이 책이 어떤 목적으로 써진 것인지조차 몰랐으니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수님, 내가 엘리에게 꼭 데려가겠다고 말하면서 언급한 그 ‘교수’가
엘리의 과거를 짓이긴 그 남자라는 사실이다.
가슴 어딘가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걸리는 듯 했다.
나는 엘리를 이런 인간에게 맡길 뻔 했다.
안 된다.
엘리에게 또 다시 그런 고통을 줄 수는 없다.
믿었던 교수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그를 축으로 하던 발굴단과 대학 자체에 대한 믿음도 순식간에 썩어버렸다.
다른 사람에게 데려가봤자, 분명 교수에게 엘리를 데려다 줄 뿐일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엘리를 맡길 수 없다.
하지만, 고향을 잃고 희망을 잃고 모든 걸 잃은 엘리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안 된다.
엘리를 지켜줘야 한다.
내가, 엘리를 지켜줘야 한다.
나의 마음속은 어떤 숭고한 의무감과 거룩한 믿음이 가득했고
그 사이에서 실낱같은 희열이 나도 모르게 피어올랐다.
나는 책을 거칠게 닫아 침대 위로 집어던진 후, 웃옷을 대충 걸쳐입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양말도 신지 않은 채 허겁지겁 황무지를 가로질러 뛰었다.
그런 내 모습을 저 멀리의 몇 명인가가 주목하는 듯 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식당을 지나치면서 매콤구수한 냄새가 은은하게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눈 앞의 검붉은 협곡만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협곡 속으로 들어가 좁은 틈 사이에서 거친 암벽들에 온 몸이 긁히며 생각했다.
엘리에게 뭐라고 하지? 교수의 정체를 알려줘야 하나? 나 혼자서 엘리를 어떻게 데리고 나가지?
C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아냐 C도 결국 교수의 혈육이야. 믿을 수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엘리는 일어났을까? 어젯밤, 내 말을 어디까지 들었을까?
혹시 교수에 관한 걸 듣고는 이미 교수에게 찾아간 건 아닐까?
나는 불안감에 휩싸인 나머지 허황된 비관을 머릿속에 우겨넣었고,
너무 성급하게 달린 탓에 수풀에 걸려 넘어질 뻔 했을 때만 겨우 생각을 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를 바로잡고 달리다보면 또 다시 욕망과 착각이 뒤섞여 내 모든 감정을 훼집어놓았다.
어쩌면 엘리가 고향을 찾지 못한 것은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와 같은 민족 사람이라고 해서 그녀를 지켜준다는 보장이 어딨나?
순진한 엘리는 거기서도 당하기만 할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동족이 아닌, 그녀를 진정으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 나 이외엔, 그 누구도 엘리를 지켜줄 수 없다.
그리고 네 번째로 넘어질 뻔 했을 때, 바로 앞에서 협곡의 끝을 알리는 태양이 반짝였고
나는 터져 나오듯이 협곡에서 빠져나와 엉거주춤,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거친 숨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헐떡이던 호흡은 금방 멈췄는데,
그건 도서관 입구에서, 어느새 깨끗이 다 나은 두 다리로 기운 차게 뛰어나오는 엘리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었다.
“K! 새로운 단서를 찾았어! 우리가 간과했던 게 있었어!
이제야말로 고향을 찾을 수 있다구!”
끔찍하게 밝은 햇빛이 내 이마를 꿰뚫었고뒤늦게 현기증을 느낀 나는, 무너질듯이 휘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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