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벌써 10월인가..."
주변을 둘러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단한 겉옷을 걸치고 있어 자연스럽게 그런 감상이 나오고 만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더위보다는 서늘함이 먼저 느껴지는 시기.
가을이 짧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르다고 느껴지는 건, 분명 이 한 달간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겠지.
인터넷 방송을 해본다거나 친구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 본다거나...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
전부 다 언니랑 만났기 때문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쓴웃음이 나온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자, 바로 앞에 있는 스크린도어에 한 여자애가 비쳐보인다.
익숙한 얼굴을 가진 그 여자애의 이름은 윤성아.
평범한... 아니 평범 미만의 고등학생이다. 공부는 싫어하지만 게임은 좋아하고, 대인관계는 어려워하지만 최근에 알게된 여성과는 가까워지고 싶은 여자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구? 그야 나니까.
스크린 도어에 반사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조심히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있자, 문득 의문이 든다.
...언니가 키스할 때 보던 내 모습은 어땠을까...
지금은 그저 밋밋해보이는 여성이 눈에 보이는데, 언니의 눈에도 그런 식으로 보였다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연나랑 언니..."
언니는 굉장히 예뻤는데...
그 날의 기억을 천천히 곱씹고 있자,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스크린도어에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 붉게 물들어 있겠지.
"지금 OO역 방향으로 가는 ..."
아. 열차 왔다.
이윽고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
그 후로 1시간 쯤 지났을까.
나로서는 다소 생소한 역에 도착해, 역의 입구에서 가만히 서 있기로 한다.
언니와 만나기로 한 장소지만 들어본 적은 있어도 가본 적은 없는 지역. 눈에 들어오는 낯선 풍경에 몸에서 힘이 빠지질 않는다.
그 상태로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을까
"성아야?"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음색이 들려온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꿀을 가득 숨겨놓은 듯한 목소리.
캠 같은 거 없이 목소리만으로 방송을 시작해도 충분히 성공할 거라고 생각되는 매력이 담겨져 있다. 뭐, 이미 방송으로는 충분히 인기있지만.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나랑 언니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언니!"
와아~! 나랑 언니다!
계속 기다리고 있던 탓일까. 언니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몸이 그 쪽으로 향하게 된다.
"성아는 어쩐지 강아지같네~"
"강아지요?"
응? 갑자기?
뜬금없는 내용에 고개만을 갸웃거리고 있자, 언니는 "그게." 라며 운을 뗀다.
"멀리서 봤을 때는 날이 잔뜩 서있었는데, 날 보자마자 안심한 것처럼 반겨오니까 말야."
"제가요?!"
물론 언니를 보자마자 기분이 업되기는 했지만 그걸 당사자한테 지적당하면 순수하게 부끄럽다.
아니 정말로 민망하니까...
당혹감에 휩싸여 언니를 바라보고 있자, 심술궂은 미소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거야~"
"윽..."
그 말에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게 된다.
"딱히 그런 건..."
당황함을 애써 누르며 가까스로 쥐어짜낸 답은 단순히 얼버무리는 말.
아니, 거짓말이라도 언니를 좋아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다고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민망하구...
하지만 내가 내뱉은 말이 오답이었던 걸까, 언니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작게 몸을 떤다.
"흑... 나는 성아를 엄청 좋아하는데 성아는 아니었나보네..."
내 눈에도 뻔히 보이는 우는 시늉. 하지만 그 파괴력이 엄청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좋아한다구요..?"
딱히 좋아한다는 소릴 들어서 말해준 게 아니라구? 물론 기쁘기는 하지만...
결국 언니의 계략에 넘어가자, 언니의 우는 시늉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장난에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다시금 미소짓기 시작한다.
"후후. 그렇지이~?"
"정말..."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체력이 다 빠진 기분이다.
뭐, 언니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긴 했지만... 그래도 이 거리감은 역시 백합 영업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몰려온다.
"그러면 슬슬 갈까?"
하지만 언니가 그렇게 말하며 이쪽으로 손을 건네오는 탓에
"...네."
아무래도 괜찮나. 하고 응어리진 감정들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고작 손 잡은 거만으로도 이렇게 되다니... 정말...
눈 앞에 있는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마주잡은 손의 온기가 너무 따스했기에
"그럼 어디를 먼저 갈까?"
"아, 저 옷 사고싶어요! 언니가 봐주시면 든든하니까요~"
나는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
그대로 언니와 함께 도착한 곳은 백화점 내에 있는 옷 가게였다.
뭔가 번쩍번쩍 거리는 게 세련되어 보이고 걸려 있는 가격표도 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학생 용돈으로는 조금 부담되는 가게.
뭐, 지금은 나도 언니로부터 방송 수익의 일부를 받으니까 문제는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저 끝에서 언니가 옷을 흝어보는 모습이 시선에 담긴다.
그 탓에 텅 비어버린 손을 괜스레 쥐었다 폈다 반복하게 된다.
어쩐지 가볍게 놓아버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네~ 나만 신경 쓰는 거 같고~
그대로 언니를 바라보고 있자, 금발의 여성은 옷에서 시선을 떼더니
"성아야."
이쪽을 쳐다보며 나를 부른다.
"입어보니까 어때?"
"네. 몸매가 드러나는건 조금 거부감이 있지만 옷은 괜찮네요."
내가 그렇게 답하며 과시하듯 팔을 들어올리자, 언니는 "그래?" 라고 말하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흝어보기 시작한다.
어쩐지 진지한 눈길로 보여지니까 조금 두근거리네...
"응응. 잘 어울려~. 그럼 이 옷도 괜찮을 거 같네..."
언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자신의 손에 쥐어진 옷을 들어올려 나에게 보여준다.
"이건 어때?"
"나랑 언니... 진심이에요?"
그 옷을 보자마자, 의도치 않았음에도 내 입에서 진지한 목소리가 나와버린다.
"응.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하지만 언니는 그런 내 반응에도 아랑곳않고 말을 이어나가기에
"아니아니아니, 그거 안에 다 비치는 거잖아요?!"
나는 경악하면서 언니가 선택한 옷이 갖는 문제점을 언급한다.
시스루 블라우스... 물론 다 보일 정도로 얇지는 않고 입는 방법에 따라서는 그렇게 노출이 심하지는 않지만, 뭐랄까 그 자체만으로 어쩐지 야한 옷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래도 이 원피스랑 같이 입으면 괜찮지 않을까?"
언니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손에 쥐어져 있는 원피스를 나에게 보여준다.
뷔스티에? 물론, 그 두개만 본다면 괜찮은 조합이라고는 생각하는데요....
다른 옷도 아닌 시스루인 탓에, 어쩐지 격렬한 거부 반응이 나타난다. 나 같은 애가 입기에는 과한 옷이랄까, 스타일이 좋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이런 옷은 입는데도 각오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들을 그대로 말하기는 민망한 탓에
"언니... 제가 이런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아요! 라는 뜻을 간접적이나마 전달했다.
제가 이런 옷을 입으면 나쁜 의미로 눈길을 끌 거라구요? 비웃음만 살 테니까!
나랑 언니는 내 말을 듣더니, 1초 정도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고민하고서는 살짝 눈을 찡그린다.
"확실히... 그건 싫은 걸."
윽... 물론 내가 말하기는 했지만 바로 긍정당하니까 조금 가슴이..!
"그, 그쵸?!"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지는 않네."
"예..?"
네..? 그, 그건 독점욕..?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기도 민망한 정도라는 건가요?!
마음 속에서 "어느 쪽이라는 건가요!" 라고 외치지만 안타깝게도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다. 게다가 정말로 후자라면 나 더이상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구..?
"아직 학생이기도 하니까 좀 더 건전한 옷으로 하는 게 나으려나."
"부탁드릴게요..."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언니가 옷을 들고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 대충이나마 매장 내의 옷들을 다 둘러본 거 같아, 나는 마음에 드는 옷들을 결정하고서는 언니한테 말을 건다.
"이제 다른 가게로 갈까요?"
내 말에 언니는 "그럴까?" 하고 답했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다.
"무슨 일 있어요?"
"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시착해보고 갈래?"
응? 마음에 들었던 옷이 더 있었나?
"어떤 옷이요? 저는 상관없어요."
애시당초 제 옷을 봐주시는 걸요?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하자, 언니는 "고마워. 그러면 금방 가지고 올게."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몸을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찾는 옷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듯, 군더더기가 없어 묘하게 의문이 든다.
몇 번이나 살펴보셨던 걸까? 대체 어떤 옷이길래...
"어라?"
나랑 언니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 손에 들고 있는 옷들이 어쩐지 눈에 익다.
"건전한 옷으로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너무 아까운걸! 정말로 잘 어울릴거라 생각한단 말야!"
그게, 그 옷들은 앞서 언니가 권유했었던 시스루 블라우스와 원피스였으니까.
언니는 그렇게 외치지만, 내 생각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탓에, 나는 곧바로 거절의 말을 꺼내려 했으나
"안될까..?"
"윽..."
언니의 그 모습에 차마 강경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장바구니에 몰래 장난감을 넣은 아이의 표정이랄까, 시무룩하면서도 묘한 기대감에 부풀어있는 모습이 매우매우 귀엽다.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과는 다른 느낌...
"그래도..."
"나만 볼 테니까!"
"그러면 사는 이유가 없잖아요!"
어쩌지. 언니가 귀여운 억지를 부리는데... 아냐아냐 정신 차리자. 속아넘어가면 안된다구?
"뭐야, 이런 옷을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계획이라도 있는거야?"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니 이런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라..."
윽.. 묘하게 언니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는 듯 하다. 무슨 말을 해야 들어주시려나...
"이런 옷은 저한테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탓일까, 조금은 진지한 음성이 되고 만다.
어라..? 분위기를 헤칠 생각은 없었는데...
"어, 어쨌든! 그러니까 이 옷은 안 돼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눈 앞에 있던 금발의 미인은 방금 전까지 짓던 약해보이는 표정을 곧바로 지우고는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다.
"그럼 나랑 내기할까? 어울리는지 아닌지."
"엑.."
노선을 바꾸기라도 한걸까.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따라가질 못하고 있자, 언니는 계속해서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내가 이 옷을 시착하고나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라고 판단된다면 자신이 그 옷을 사줄테니 다음에 제대로 입은 걸 보여달라는 것. 어울리지 않다면 내가 원하는 다른 옷들로 바꾸어 사주겠다고 한다.
"한 번 입어보기만 해보면 되니까?"
"언니..."
내기라...
언니의 이런 기세는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당황스럽다는 건 변하지 않은 탓에,
"알겠어요. 그 정도야 뭐..."
언제나의 흐름으로 가볍게 승낙하는 말을 꺼내게 된다.
정말... 응? 그러고 보니...
"어느 쪽이든 저한테 좋은 거 아니에요?"
전부 다 내가 선물받는 거잖아?
"그렇지?"
"에? 그럼 싫어요. 저는 받고 싶은 게 아닌..."
냉정하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언니의 내기가 어느 쪽이든 날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 탓에, 곧바로 언니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말을 꺼내자
"한다고 했지?"
"엣..? 아니.."
언니가 내 손을 잡고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인다.
"할거지?"
그렇게 말하며 한층 더 몸을 기울여오는 탓에, 결국
"네..."
언니는 내 답을 듣고는 "좋아."라고 웃으며 내 손을 놓아준다.
어쩐지 처음부터 끝까지 언니의 페이스에 넘어간 듯 한데... 응? 근데 결정은 누가 하는거지?
"그것보다 어울리는 건 누가 판단하는데요? 가게 점원분?"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언니의 표정이 약간 험악해진다.
에?! 나 뭔가 실수했어?!
"왜, 왜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여줘도 괜찮으니까."
정말로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었던 건가요?!
그러면 사는 이유가 없는 거 아니냐구요... 뭐, 언니가 어울린다고 한다면 상관없긴 한데...
"알겠어요. 저도 딱히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래서 어떻게 결정할 건데요?" 라고 묻자, 언니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킨다.
"제가요?"
"응. 네 맘에 드는지 아닌지로."
"아니, 제 맘에 드는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어울리는지 여부가..."
"내가 고른 옷이 어울리지 않을 리 없잖아? 너가 입고싶은지 아닌지만 결정하면 된다구."
순 억지라고는 생각하지만, 자신이 틀릴 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언동. 굳이 하나하나 반론을 제기할 기력도 없었던 탓에
"정말... 알겠어요. 그러면 입어보고 올게요?"
"응. 기다리고 있을게."
웃으며 배웅하는 언니를 뒤로하고 시착실을 향한다.
시착실 안.
묘하게 침착해질 수가 없다.
이 낯선 공간에서 갈아입기 때문일까.
"우와... 생각보다 너무 얇은데..."
물론 지금 입고 있는 옷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시선을 거울로 향하자, 분홍색 속옷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보인다.
차라리 검은색 속옷이라면 모를까, 분홍색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는 탓에 묘한 수치심이 든다.
게다가 꽤나 섹시한 옷 스타일과는 다르게 속옷 디자인은 너무 촌스러워서 언밸런스함이 올라온달까...
적어도 이너라도 주세요!
"얼른 원피스도 입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착의를 끝마친다.
시착실에서 나오자 언니가 나를 보고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뭐, 그럴 수 밖에 없으려나~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도 그럴게, 원래 복장으로 다시 갈아입고 나왔으니까.
"그런 표정을 지으셔도... 아, 그것보다 내기는 없던 거로 해도 될까요?"
다른 게 아니라, 속옷 탓에 어울리는지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원피스를 입은 상태로도 속옷 어깨끈이 보여, 시선을 끌었으니까.
물론, 원피스 어깨끈으로 가린다던지 여러가지를 시도할 수는 있었겠지만 언니한테 일방적으로 선물받기는 싫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 나름 적당한 변명이기도 하구?
"응? 어째서?"
당연히 그 상황을 모르는 언니는 그렇게 물어오지만
"시스루잖아요? 그러니까 그..."
어라..? 내 입으로 입고 있는 속옷이 촌스럽다고 고백해야 하는거야..?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급격하게 수치심이 올라온다.
동경하는 사람한테 그런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은데요?!
"그..."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버벅이자, 언니는 얼굴에 물음표가 뜬 거 같은 표정이 된다.
아으아... 말할 수 밖에 없나...
"그... 적어도 어울리는 속옷이라도 입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설명을 할수록 고개가 바닥을 향하더니, 이내 나의 시야에는 내 다리밖에 보이질 않는다.
으아아아! 차라리 죽여줘...!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아무래도 내기는 없던 거로 해야겠네."
언니는 몇 초 정도 가만히 있다가 그렇게 말해오지만, 어쩐지 이해했다는 듯한 그 태도가 굉장히 찝찝하다.
학교에서 남자쌤한테 조퇴하고 싶다고 부탁하면 이해했다는 듯한 그런...
"자자. 그럼 다음으로 갈까?"
민망해 죽을 거 같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니는 계속해서 다음 장소로 나를 재촉한다.
※
"으아.. 지쳤어요..."
"뭐, 두 시간 정도 쉬지도 않고 돌아다녔으니까."
우리가 있는 곳은 백화점 내에 벤치.
잠깐 쉬고싶다고 말하자, 이 곳에 앉아 휴식을 취하자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도 언니가 같이 봐준 덕분에 보람은 있지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놓여 있는 쇼핑백을 들어올린다.
"후후. 성아가 다 잘 어울린 덕분이라구?"
"아뇨아뇨. 언니도 아니고 그럴 리가..."
그렇게 서로 소소한 잡담을 나누다가, 문득 서로의 입이 멈춘다.
딱히 이야기가 끊겼다기보다는, 주위에 시선이 끌렸으니까.
주변의 소음 말고는 침묵만이 가득한 분위기
하지만 딱히 불편한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편하달까.
타인과 함께하는 게 늘 불편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은 변한걸까.
그건 좀 기쁘네...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던 중, 문득 "반대로 언니는 이 상황이 편할까?" 라는 의문이 올라온다. 그 탓에 나는 시선을 돌려 옆자리에 앉아있는 언니를 향한다.
언니는 가만히 정면을 향하며 앉아 있지만, 다행히도 언니 또한 이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야.
그 사실에 조금 안도감이 든 탓일까, 나도 모르게 언니의 다른 부분에 신경이 쏠린다.
굳이 말하자면 청바지의 찢어진 부분으로 살짝 보이는 맨다리나 숏 티셔츠를 입은 탓에 슬며시 보이는 배꼽, 자켓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쇄골같은...
다리부터 목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노출되는 살결이 계속해서 눈길을 끄는 탓에 어쩔 수 없다.
이윽고 그 위로 시선이 올라가자
'아, 속눈썹 길다... 저 머리는 탈색한걸까? 그런 거 치고는 머릿결도 좋아보이는데... '
늘 나에게 웃어주는 그 얼굴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정말로 예쁘네.."
그 순간 언니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그 눈은 살짝 놀란 것처럼 크게 떠져 있다.
어라? 혹시 나 입밖으로 냈나..?
"으, 응? 성아야..?"
"아뇨아뇨아뇨! 저도 모르게...!"
아니, 무심결에 말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언니도 어쩐지 민망하다는 듯 웃는다.
"뭐야 그게... 어쨌든 칭찬해줘서 고마워."
"아하하..."
으아아! 이 분위기 어쩔거야! 다른 화제! 얼른!
"그, 그것보다 머리는 언제부터 염색하셨어요? 그렇게 밝은 색은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아, 그게... 얼마 되지 않았다구? 대학생 때부터 했었으니까."
언니도 분위기를 수습해주려고 하는 게 눈에 보여서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언니가 검은 머리라... 보고싶네요. 저는 금발인 모습밖에 못 봤으니까 어쩐지 상상이 안 돼요."
"지금보다 훨씬 차분해 보이기는 했지."
머리색에 대한 얘기를 하자, 다행히도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뭐,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고등학생 때 사진 같은 거 없나요? 엄청 궁금한데요..."
내 말에 언니는 "보여줄게." 이라고 말하고는 지갑에서 대학교 학생증을 꺼내 나한테 보여준다.
알고는 있었지만 명문대의 학생증을 직접 보니까 신기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학생증을 쳐다보자, 한 여성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우와... 예쁜 건 똑같네요."
같은 사람이지만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지금의 언니는 화려한 미인이라는 느낌이라면 사진 속 검은 머리에 교복을 입은 여성은 단정한 미인이라는 느낌이다.
"고, 고마워..."
"어쩌다 염색을 하려고 하신 거에요? 역시 대학 데뷔? 아니면 방송?"
내 말에, 언니는 "글쎄..." 하고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뭐, 방송에서는 밝은 머리가 눈에 잘 띌 테니까."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뭐였지 방금...
"그보다 슬슬 갈까?"
어째설까. 방금 그 모습이 어쩐지 얼버무리는 듯 보였다.
단순히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평소의 당당한 언니와는 조금 달라서
"네. 얼른 가죠."
나는 더더욱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다.
※
윤성아 / 연나랑
대회 때 쓰고 끝난 다음에는 천천히 써야지 했는데... 제가 마감이 없으면 무진장 게을러지더군요. 그래서 그냥 모르겠다~ 하고 2월까지 뒹굴뒹굴거리다가 그래도 생각한 건 다 써야하지 않ㄴㅏ 싶어... 뒤늦게라도 다시 끄적여봅니다.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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