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에치사] 치사토 선배, 키스는 제로칼로리래요!

타에치사 · 2021.03.01 23:41:19

뒤에서 들뜬 발소리가 들려오자 하교 중이던 시라사기 치사토는 발걸음을 늦췄다.

평소의 그녀라면 경계했을 터였다. 어릴 때부터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파파라치와 스토커, 그리고 그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사생 팬에게 시달려 온 치사토는 발소리에 예민했다.

하지만 지금의 발소리는 예외였다. 봄날을 연상시키는 그 독특한 발소리는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치사토는 발소리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먼저 쭉 뻗은 다리가 자신만만한 걸음을 걷는다. 그때마다 그녀의 긴 검은 머리는 리듬을 타며 찰랑인다. 하얀 얼굴은 누가 봐도 고전파 미인이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가 섞여 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치사토는 숫자를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셋.

둘.

하나.

“치사토 선배, 해피 밸런타인이에요! 초콜릿을 안 주면 장난칠 거예요!”

따라잡자마자 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치사토의 한 학년 후배인 하나조노 타에였다. 타에는 두 손가락을 핀 양손을 마치 토끼 귀처럼 머리 옆에 올리고는 손가락들을 까닥이고 있었다.

“해피 밸런타인, 타에 짱.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오늘은 핼러윈하고는 다른 날이야.”

그리고 그 손동작도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려던 치사토는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다. 타에는 그저 토끼가 좋아서 그 모습을 흉내 냈을 것이고, 뜻이야 어찌 됐든 그걸 하고 있는 타에는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어쩐지 제 기억하고는 좀 다르다고 했어요.”

“후훗, 초콜릿은 많이 받았니?”

짐짓 모르는 체 물었지만, 사실 치사토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후배는 빼어난 외모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아이였다.

치사토의 생각을 증명하듯, 타에는 싱긋 웃고는 자기 가방 안을 보여주었다.

“당분간은 매일매일이 초콜릿 데이에요! 치사토 선배는요?”

하나같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태로 가방 안을 가득 채운 초콜릿들을 보던 치사토는 타에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으로 받으면 다른 팬들에게 미안하잖니. 그래서 소속사를 통해서만 받고 있어.”

“그것도 그렇네요. 아, 저번에 치사토 선배가 추천해준 동물 초콜릿 정말 좋았어요! 포피파 모두도 맛있다고 했고요.”

타에와의 대화는 그야말로 토끼 뛰듯이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화법에 익숙한 치사토는 어렵지 않게 대화를 따라갈 수 있었다. 참고로 포피파는 타에가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는 밴드 포핀 파티의 약칭이었다.

“그래? 다들 좋아했다니 고생해서 골라준 보람이 있네.”

해맑게 웃는 치사토였지만, 얼마 전의 기억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자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며칠 전, 언제나처럼 겁도 없이 3학년 교실로 치사토를 찾아온 타에는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포피파 멤버들의 초콜릿 파티에 가져갈 맛있는 초콜릿을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타에의 눈빛에 거절하지 못 한것도 있었지만, 초콜릿을 골라 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치사토는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덤으로 밸런타인 시즌에 둘이서 상점가를 돌아다니면 데이트 기분이 나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있었기에 치사토는 나름 기대를 했었지만....

“치사토 선배! 여기 이나고마메는 벌레를 갈아 만든 건가요?”

“그건 개도 먹을 수 있는 초콜릿을 만들 때 쓰이는 원료야.”

“치사토 선배! 여기 금박으로 장식된 초콜릿을 먹으면 나중에 화장실에서 황금이 나올까요?”

“글쎄? 아이돌은 화장실은 안 가서 모르겠네.”

“치사토 선배! 저기 점원이 아까부터 안 좋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데 뭐 잘못한 거 있으세요?”

“....”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스트레스가 몰려와서 치사토의 미간에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작은 주름이 생겼다.

“정말로, 고생이었지.”

“하지만 즐거웠어요.”

치사토가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타에는 생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몸에서 독소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치사토는 생각했다.

그래. 이 아이는 그런 아이였지.

“그렇네. 즐거웠어.”

그 뒤로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두 사람은 어느덧 타에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치사토는 타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후배의 기다란 손가락이 어느새 그녀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타에 짱?”

“...치사토 선배는 초콜릿 안 주세요?”

아주 짧은 순간 치사토는 멈칫했다. 하지만 곧 다시 평소대로 돌아온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미안, 올해는 바빠서 준비를 못 했네. 대신 화이트데이는 챙겨줄게.”

“그런가요. 하지만....”

타에는 마치 먹이를 찾는 동물처럼 킁킁대면서 치사토에게 다가왔다.

미인이 자기 몸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자 치사토는 부끄러워졌다. 혹시나 남들이 볼까 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주택가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뭐, 뭐니?”

“...치사토 선배에게서 초콜릿 냄새가 나요.”

거기까지 말하자 치사토는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는 가방에서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자, 여기. 시판되는 초콜릿을 녹였다가 굳힌 거에 불과하지만.”

치사토의 손에 들린 상자는 발렌타인 초콜릿의 포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엉성했다.

이래서 주기 싫었는데. 치사토는 아까 본 초콜릿들의 깔끔한 포장을 떠올리고는 더욱 침울해졌다.

하지만 타에는 그런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마치 보물이라도 받은 마냥 기뻐했다.

“와, 치사토 선배의 초콜릿! 평생 가보로 삼을게요!”

“아니, 늦기 전에 먹어주렴.”

치사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초콜릿을 껴안은 채 방방 뛰던 타에였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멈추고는 시무룩해졌다.

“왜 그러니?”

“죄송해요, 치사토 선배에게 줄 초콜릿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치사토 역시 그 사실이 조금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풀이 죽은 후배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괜찮아. 약속했던 것도 아니잖니. 게다가 체중 관리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먹을 수도 없었을 거야.”

“그래요...?”

체중 관리, 칼로리, 하지만 달콤한 것....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던 타에의 얼굴은 이윽고 좋은 생각이 든 듯 화색이 돌았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치사토 선배!”

타에는 치사토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저번에 잡지에서 본 건데, 키스는 제로칼로리래요!”

“응?”

치사토가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타에는 냉큼 둘의 입술을 포갰다.

그 갑작스럽고 달콤한 감촉에 치사토의 몸속에서 엔도르핀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마치 초콜릿을 먹은 것 같은 행복감 속에서, 치사토는 눈앞의 사람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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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이제야 올리는 밸런타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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