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는 화이트데이라면 질색이었다. 168cm정도 되는 시원한 키, 샛별처럼 빛나는 눈동자, 오뚝한 코, 새하얀 치아, 티 없이 깨끗한 피부 등 빈약한 몸매를 제외하곤 많은 이들이 좋아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즉, 그녀의 외형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은근 많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연인의 명절인 화이트데이 때 사탕이나 간식거리 하나 받지 못하는 사람에겐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뒤처리도 고생이었고 슬쩍 고백해오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마음고생이 심한 편이었다.
평소 인기가 제법 많은 편이었지만, 남자친구를 가진 세월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연애 불신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인 뒤에 자신에게 고백하는 경우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서 싫었고, 본인에게 고백했다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도 슬쩍 찔러봤던 것으로 느껴져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본인의 마음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본 것이 문제였다. 나만을 바라보고 차인 뒤에도 언제까지고 나만을 바라봐 줄 것이 확실한 상대라면 사귈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까진 그런 상대를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번 화이트 데이도 결국 혼자 보내야 할 것 같아."
"기준을 적당히 타협하는 건?"
"싫어.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 바라볼 사람이어야 해."
예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등학교 동창인 윤희에게 푸념을 내뱉었다. 이미 대학교에서 연인을 사귄 윤희는 한창 커플 염장질을 할 때라서 상담상대로는 별로였지만, 화이트데이를 준비하면서도 시간을 내준 사람이 이 녀석 뿐이었다.
윤희는 예나의 고민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 기준을 충족시킬 사람이 이제부터 나타난다 하더라도 화이트 데이에 맞춰서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학교에서 선후배들로부터 사탕과 고백 러쉬가 쏟아지겠지만 거절하면 얼마 못가 각자 제 짝을 찾아간 것에 속앓이를 할 것도 알고 있었다. 거의 연례행사였으니까.
윤희는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쪼옥 빨면서 예나의 얼굴을 살짝 살펴보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안 가서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뭔데?"
"소개팅 시켜줄게."
"뭐?"
윤희는 이죽 웃어 보이며 손가락을 튕겨보였다. 그 모습에 예나는 살짝 두려움마저 느꼈다. 엉뚱한 생각을 할 때에 보이는 버릇이었고, 저런 행동을 해서 잘 된 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친구 중에 게이가 있거든. 남장하고 걔를 만나는 건 어때?"
"어째서?"
"생각해봐. 어찌어찌 게이가 네게 반하게 만들고 난 뒤에 여자라고 밝히는 거야. 그러면 너를 싫어하게 되거나, 너 말고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게 되거나 둘 중하나겠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았지만 예나에게는 이론적으로는 조금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했다. 게이를 함락시키면 적어도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게 될 수 있으니까. 다만 그럴 경우… 다른 남자와 바람을 핀다는 리스크가 존재했다.
"다른 남자와 몰래 바람 필 가능성은?"
"바람 필 정도로 못된 인성을 가진 애는 아니니까. 속는 셈 치고 화이트데이 비워놔!"
"으응…."
예나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친구가 저렇게까지 생각해서 주선해주는데 거절하기도 미안했고, 화이트데이 하루만 만나고 쿨 하게 헤어져도 뒤탈 없어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화이트데이를 혼자 보내는 것은 이제 질색이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추억을 쌓고 싶었다.
"근데 남장 잘할 수 있어?"
윤희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미심쩍다는 듯이 예나를 훑어보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어찌어찌 남자라고 우길 수 있는 키였고, 몸매는 빈약한 편이라 압박 붕대 같은 별다른 조치도 필요 없었다. 다만 길게 기른 머리카락과 목소리 정도가 거슬렸다.
"어떻게든 해 볼게."
"난 그날은 바쁘니까 못 봐주긴 해도 톡으로 연락하면 조언정도는 해줄 테니까. 막히면 연락해."
"응."
이후에 소개팅 장소를 톡으로 받았고, 예나는 두근두근한 가슴으로 이불을 끌어안으며 화이트데이만을 기다렸다. 보통 화이트데이는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빠르게 닥쳐왔지만, 이번 화이트데이만큼은 그 날짜가 너무도 느리게 찾아온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게이라는 점이 깨긴 했지만… 단 하루만이라도 특별한 데이트를 해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의미가 남달랐다.
화이트데이가 찾아오자, 예나는 그동안 조금씩 연습한 남장을 해 보았다. 평범해보이게 와이셔츠에다 블레이저, 조금 타이트한 면바지를 입어보았다. 하이힐은 신을 수 없으니 구두 안에 깔창을 채워 넣고 살짝 걷는 연습도 병행하였다. 아무래도 발 사이즈가 구두에 적합하지 않아 애먹었지만, 어찌어찌 극복할 수 있었다.
화장은 일절 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남자에게 어울리는 롱 헤어를 검색한 다음, 고데기를 이용해서 살짝 웨이브를 주었다. 사실 언뜻 봐도 여자지만…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남자라는 컨셉이라고 우길 작정이었다. 실제로 여자처럼 예쁘장한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먹힐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띵리리리링♪
스마트폰이 벨소리를 내며 울리는 걸 확인한 예나가 화면을 보자, 영상통화라는 것과 윤희라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예나야. 준비는 다 됐어?】
"응. 어때?"
예나는 얼굴을 상하좌우를 보이며 어필해보였다. 고운 턱선과 가릴 생각도 없는 롱 헤어, 그리고 살짝 높은 톤의 목소리 등 아무리 봐도 여자인 것을 확인한 윤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여자잖아.】
"아니야! 이건 게이에게 어필하는 예쁘장한 남자라는 컨셉이야!"
윤희는 설명에 납득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화장도 안 한 원판이 저래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단념해보였다.
【…어쩔 수 없지. 원래 예쁘장한 남자라고 미리 소개했으니까. 대신 행동거지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
"오케이!"
【그럼 약속 장소로 늦지 않게 와.】
"응. 곧 출발할게."
예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여자얼굴에다가 제법 남성스러운 복장이 묘한 중성미를 더해줘 사람들의 시선이 평소보다 꽂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드디어 처음으로 혼자 보내지 않는 화이트데이였다. 잘 되어서 자신만 바라보는 남자로 조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보자… 아직 20분 전인데."
첫 인상을 좋게 주기 위해 2,30분정도는 늦는 코리안 타임 따위는 무시하고 카페 안에 진입했다. 그러나 윤희와 소개팅 상대는 먼저 카페 안에서 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일찍 왔다고 자부한 예나는 급격히 부끄러워져 평소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착석했다.
"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 아니에요. 저희도 방금 왔어요. 그보다도 약속 시간 전인걸요."
예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살짝 귀여운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살짝 들어보였다. 모자를 살짝 비뚤어지게 쓰고 있고, 목까지 간신히 덮는 보브 컷을 한 가녀린 체구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펑퍼짐한 후드티로 크게 꾸밀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딱 봐도 예나보다도 확연히 작은 체구였다. 키가 160은 되면 다행일 정도였다. 적어도 키만큼은 '최소한' 본인과 비슷한 정도는 되길 원했던 예나는 살짝 불만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걸 따지고 들면 여자인 것을 들킬까봐 애써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런 예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희는 옆에서 얄미운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둘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예나는 반드시 나중에 따질 생각이었다.
"예정보다 빠르긴 한데. 잘 해보도록 해. 나는 먼저 돌아가 볼게."
예나는 당장이라도 붙들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윤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가버렸다. 결국 두 사람만 허무하게 남겨져 어색한 정적만 흐르게 되었다.
"저, 저기."
"저, 저기."
"머, 먼저 말하세요."
"그, 그쪽부터."
결국 이런 식으로 어색하게 대화가 끊어질 뿐이었다. 상대도 양 손으로 큰 컵을 들고 빨대로 달달한 커피를 빨며 예나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지독하게 소심해 보이는 모습에 예나는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색한 공기를 이대로 놔둘 생각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예…남이라고 합니다."
미처 가명을 준비하지 않아, 실수로 본명을 밝힐 뻔했던 예나는 잠시 한시름을 놓았다. 본인의 촌스러운 작명센스에 살짝 자괴감을 느낀 예나는 상대의 반응을 슬쩍 지켜보았다.
"저, 저는 수빈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근데… 확실히 예쁘게 생겼네요."
"가, 감사합니다. 조금… 콤플렉스지만요."
"그, 그랬나요? 죄송해요!"
수빈이는 허둥지둥하며 고개를 연신 숙여보였다. 좋게 말하면 귀여운 동물 같고, 나쁘게 말하면 비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예나의 예쁜 게 콤플렉스라는 대사는 남자라는 입장에서 짠 설정이라 저런 모습에 살짝 미안함을 느꼈다.
"괘, 괜찮아요. 알고 한 것도 아니고요."
"아니에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예나는 처음엔 키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볼수록 귀엽기도 했고, 보기보다 배려심도 있어보였고, 쉽게 바람필 정도로 대범해보이지 않은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특히 함락시키고 나면 자신만 바라봐줄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을 살짝 열어보였다.
"여기를 나서고 난 이후의 일정은 있나요?"
"아… 아직은 없어요."
소심하게 대답한 수빈이는 살짝 물기 어린 눈망울로 예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자리에서 자주 까여서 자신감이 없어진 걸까? 하는 생각이 든 예나는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제 딴엔 매혹적인 남자를 연기하기 위해 손을 과장스럽게 앞으로 내밀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여길 나선 뒤에 어디로 갈까요?"
수빈이는 활짝 웃어 보이며 예나가 내민 손 위에 살포시 작은 손을 얹으며 대답해보였다.
"이, 이 근처에 공원이 있는데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는 건 어때요?"
"좋은 생각이네요."
둘은 카페를 나서고는 바로 공원을 향했다. 아직 꽃잎도 채 피지 않은 앙상한 나무가 가득한 공원을 돌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분위기는 둘의 발자취를 곱게 꾸며주지는 못했지만, 행복 가득한 미소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부드럽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수빈이는 최선을 다해 예나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조잘조잘 귀엽게 떠들기 시작했고, 예나는 손을 꼬옥 잡고 초봄의 정취를 느끼며 나란히 걷고 있었다. 상대의 말재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이유는 몰라도 그 자체로 즐겁고 따뜻했다. 의외로 마음이 맞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착한 심성이 느껴지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작은 키와 후드 티 정도만 챙겨 입는 소개팅 패션센스 때문에 비호감이었지만, 어느새 부턴가 이 녀석을 어떻게 함락해서 나만을 생각하게 만들까 하는 궁리에 빠져 있었다. 사실 몇 달은 지켜보고 사람을 사귀려 했던 신중파인 예나가 알게 모르게 함락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는 공원 한 바퀴로는 너무도 짧았다. 예나는 출구 쪽을 무시하고는 다시 한 바퀴를 돌기 위해 방향을 슬며시 유도해보았다. 수빈이도 싫지는 않은 지 예나의 리드에 이끌려 공원을 다시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중간 쯤 돌았을 때였다.
"그럼… 제가 저기서 먹을 걸 좀 사올 테니까 여기서 쉬세요."
수빈이는 벤치에 예나를 앉히고는 길거리에서 파는 간식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쌀쌀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날씨임에도 햇볕은 노곤노곤하게 몸을 데워주었다. 손으로 턱을 괸 채 벤치에 앉아서 화이트데이 연인의 여운에 젖어 있을 때였다.
"화이트데이에 혼자야? 우리랑 놀래?"
어디선가 불량해 보이는 두 남자가 예나에게 접근해 왔다. 예나는 무시하고 고개를 휙 돌리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이 무시하면 다음 표적을 찾을 테니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람 말 무시하냐?"
그러나 예상과 달리 거칠게 손목을 잡아 일으키며 위협해왔다. 처음 겪는 상황에 예나가 당황해서 입을 살짝 벙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내 남자에게 손대지 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수빈이는 손에 들고 있는 와플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덤벼들어왔다. 체격만 봤을 때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뭐, 뭐야!"
"나, 남자?"
그 둘은 예나를 향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찌푸린 다음 팍 밀쳐버리고는 다음 표적을 찾아 떠나버렸다. 무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로 눈물이 나고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만약 수빈이가 없었다면 하는 생각에 절로 등골이 오싹해져왔다.
"고, 고마워요."
"우으… 죄송해요. 모처럼 간식을 사왔는데. 못 먹게 되었어요."
수빈이는 살짝 울상이 되어, 선 채로 찌그러진 와플을 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까지 사랑스럽게 느낀 예나는 찌그러져 내용물까지 새어나오는 와플을 받아든 다음 한 입 베어 물었다. 모양만 찌그러졌을 뿐이지, 맛은 괜찮다고 느낀 예나는 먹던 와플을 앞으로 살짝 내밀어보였다.
"맛있어요. 수빈씨도 한 입 어때요?"
"네? 네."
수빈이는 귀까지 빨갛게 된 채로, 예나의 입 자국이 남은 부분을 살짝 깨물고 오물거렸다. 너무 대담한 짓을 했나 급격히 창피해져 얼굴이 빨개진 예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남성미가 느껴지지 않는 상대인데도 이상할정도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만큼 멋진 남자는 아니었지만, 예나는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수빈이와 그 수빈이를 소개해준 윤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 그 자리에서 있기 급격히 창피해진 둘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하면서도 콩닥거리며 시선이 마주쳤다 떨어졌다가 반복되고 있었다. 예나는 손을 폈다 내렸다 반복하다가 수빈이와 손끝이 스치자, 살포시 잡아보였다. 작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가슴 깊이 만족감을 채워주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손을 꼬옥 잡고 다니다가 오늘이 '화이트데이'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예나는 바로 제과점으로 향했다. 행사랍시고 사탕을 한가득 쌓아두고 파는 것이 떠올랐다. 애프터신청을 말로 하기보다, 사탕을 선물해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자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화이트데이고 본인이 일단 남성 포지션이니까 가능한 방법이었다.
"여, 여기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나는 안에 들어가서 빠르게 내용물들을 스캔해보았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예쁜 사탕들이 하트 모양으로 포장된 사탕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출혈이 컸지만 전혀 돈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을 수빈이가 시간을 버리는 것이 미안해서, 제과점을 나오자마자 곧장 오늘의 파트너에게 사탕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 까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바구니를 받은 수빈이는 눈물을 그렁그렁 눈가에 채우고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 역시 예나도 상정 외였기 때문에 당황하였다.
"호, 혹시 싫으신 건가요?"
수빈이는 양 뺨으로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사실 속이고 있는 게 있어서요. 이, 이건 함부로 받아선 안 될 것 같아요."
게이라는 것 말고도 속일만한 것이 있을까? 싶었던 예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이상으로 충격적일 비밀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소개시켜준 윤희를 생각하면 특정 범죄에 연루된 사람일 것 같지도 않았고.
"괜찮아요. 사실 저도… 속이고 있는 게 있어서요. 그러니까… 어떤 비밀이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저, 정말인가요?"
"네."
예나는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어 번 두들기며 자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본인도 사실 여자라는 걸 속이고 있으니까 그걸로 퉁칠 생각이었다.
"그, 그럼…."
수빈이는 머뭇거리면서 바구니를 받아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이 있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대강 눈치를 챈 예나는 용기를 내어 손목을 잡아끌고 골목길로 이동했다. 사실 이런 곳에서 첫 키스를 낭비하고 싶진 않았지만,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바로 수빈이를 벽으로 밀어붙인 다음 입술을 겹쳤다. 키스까진 기세 좋게 했지만 혀를 얽는 방법 같은 건 모르니까 그대로 둘 다 어색하게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서로의 체온과 뜨거운 숨결이 양 뺨을 간질이고 있었다.
이마 위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느낀 예나는 서서히 입술을 떼고는 잔뜩 상기된 수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촉촉한 눈빛과 매끈한 입술이 탐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키스를 할까 고민했지만, 더욱 민망해질 까봐 눈을 살짝 돌린 다음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모, 못해서 죄송해요. 사실 첫 키스였어요."
"사, 사실 저도요."
서로가 첫 키스를 가져갔다는 것이 행복해진 예나는 주변 상가를 둘러보았다. 어쩌면 이대로 진도를 끝까지? 같은 발칙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절대 상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으… 저, 사실은 그렇게 밝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탁이 있어요."
수빈이의 달아오른 뺨이 사랑스러워진 예나는 그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애프터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 줄 생각이었다.
"모, 모텔에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살짝 삑사리가 난 목소리로 귀엽게 외친 수빈이 때문에 당황한 예나는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골목이라 그런 일은 없었다. 솔직히 예나 입장에서는 완전히 마음을 함락시킨 다음에 데려가서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로 마음이 잘 통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그런 쪽 호기심이 있기도 했고.
"네, 네에…."
둘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손을 꼬옥 잡은 채, 모텔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분위기에 급격히 민망함을 느낀 둘은 도로 나가고 싶었지만…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서 사람이 무심하게 말을 거는 바람에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다. 예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카드를 내밀었다.
"두, 두 사람이요."
카운터 직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계산을 마친 다음, 카드를 하나 건네주었다.
"607호실로 가시면 돼요."
결국 예나는 카드를 받아든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상충된 감정이 치열하게 싸우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6층에 도달하였다.
둘은 매우 어색하게 카드를 찍고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혹시라도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서 분위기를 망치거나 하진 않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저, 우, 우선 씻고 올게요!"
수빈이는 곧바로 샤워실로 들어가서 물을 틀고 씻기 시작했다. 예나는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와 호스를 통해 쏟아지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릴 때마다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농축된 시간처럼 느껴져 왔다.
"다, 다 씻었어요."
"바로 씻을게요!"
수빈이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가운을 입고 나오자마자, 예나는 바로 샤워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이상 시각적인 자극이 온다면 어째선지 참을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예나는 뜨거운 물로 씻으며 몸도 마음도 진정시키고 있었다. 여기서 나오면 본인이 여자라는 걸 바로 드러내야 할 때였다. 만약 거절당한다면 슬프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젠 물러설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불쾌한 기분을 줄까봐 꼼꼼히 씻어나갔다.
안에서 머리를 털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건조해지자 보송보송해져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어째선지 지금이라면 뭐든 잘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나는 안에 있는 가운을 걸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슬림한 체형을 감사하게 되었다. 만약 풍만한 체형이었으면 나오자마자 들킬 테니까.
"나, 나왔어요."
조명을 거의 다 꺼서 희미한 빛을 받고 있는 수빈이는 이미 침대에 무릎 꿇고 앉아서 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묘한 위화감이 예나를 덮쳐 왔다. 분명 얼굴만 봐도 살찐 체형은 아닐 텐데, 이상할 정도로 가슴 언저리가 두꺼워보였다. 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 옆에 살며시 앉아 보았다. 조명이 어두워서 착시를 보는 것으로 여겼다.
"죄, 죄송해요! 사실 '예남'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속였던 걸 용서해 주세요!"
수빈이는 곧장 예나의 양 뺨을 붙잡고는 입술을 살짝 거칠게 겹쳐왔다. 예나는 그걸 받아들이며 끌어안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그저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빈쪽에서 가운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커다랗고 부드러운 가슴이 볼륨을 자랑하며 예나 앞에 드러나 보였다.
"으, 으웁?"
입술을 맞추고 있던 예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하여 서둘러 수빈이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수빈이는 있는 힘껏 버티며 맞대고 있는 입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수빈이는 체중을 싣고 예나 위에 올라타 목에도 귀엽게 키스를 해 보였다.
"저… 사, 사실 여자였어요. 사실 예남 씨에게 반하게 될 줄 몰라서… 더 이상 속이고 싶지 않아졌어요!"
각오를 다진 눈망울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어떤 거절도 받아들일 태세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숨기고 있던 비밀이 '여자'라는 정체를 예상도 못했던 예나는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져 왔다. 본인도 여자라는 걸 속였으니 결국 퉁치는 것이긴 한데… 괜찮은가 의문이었다.
"자, 잠깐만요! 기다려 주세요! 저도!"
"여자지만! 예남씨가 만족할 만한 사람이 될 테니까!"
그리고는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예나의 아래쪽에 손을 대고는 그대로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그 부분을 더듬어본 다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예남… 아니 예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저도 사실 여자였어…요. 아까 말한 비밀…이…."
예나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윤희는 혼자 키득거리며 두 친구가 헛물을 켰을 상황을 상상하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욕도 즐겁게 들어 줄 생각이었다.
띵또로로로롱♬
영상통화가 울리고 이름에 예나가 떠있는 걸 확인한 윤희는 히죽 웃으며 전화를 받아 보았다.
"여보세요?"
【일부러 그런 거지?】
"물론이지. 화이트데이에 쓸쓸해하는 두 친구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어. 만족했어?"
【그래! 만족했어! 네가 소개시켜준 여친 최고더라!】
"응?"
윤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예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 윤희와 눈이 마주친 예나는 씨익 웃어보이며 옆에 손짓을 해 보였다. 오히려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쪽은 윤희였다.
옆에서 수빈이가 나타나 예나와 뺨을 찰싹 붙이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윤희는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약 올라서 눈물을 질질 짜는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저 행복한 표정은 뭐지? 싶었다.
【소, 소개시켜줘서 고마워. 우리끼리 잘 해나갈게.】
"응? 으응…."
그리고는 곧장 예나가 수빈이의 뺨에 쪽 하고 키스를 하자, 마음이 복잡해진 윤희는 곧바로 통화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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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까지 이왜백 하신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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