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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탄] 작년까지 나는 레트로 가게에서 일을 했어

옹기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3.04 11:40:15
조회 5562 추천 99 댓글 9



이런 게시판이 있는 줄 몰랐는데 여기 되게 재밌다.
아무나 맘껏 썰 풀어도 되는 거지?
부족한 글 실력이지만 나도 여기 온 김에 주절주절 떠들어나 보려고.


1. 서두

작년까지 나는 레트로 가게에서 일을 했어.
그 왜 오래된 LP판이나 카세트테이프, 아날로그 카메라 같은 거 파는 곳 있잖아?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들이 테마인 곳 말이야.

생각보다 아날로그 특유의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덕분에 오픈 초에는 장사가 좀 되었고 나도 정신없이 바빴던 것 같아.
그래도 사장인 형님하고 많이 친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물건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과정 자체가 나름 재밌어서 돌이켜보면 꽤 즐거웠어.

그런데... 요즘 경기가 워낙 안 좋아야 말이지.
근처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는 걸 시작으로, 점점 사람이 왕래하지 않는 상권으로 변하게 되더라고.
진짜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딜 간 건지...
작년 이맘때쯤 사장 형님이 그러더라.
장사가 너무 안돼서 인건비를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정말 미안하다고.

뭐 어쩌겠어?
그대로 짐 싸서 나가야지.
일이 없어서 나도 눈치가 많이 보이던 차였거든.

그런데 형님이 나한테 좀 미안했나 봐.
가게를 곧 정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물품을 좀 챙겨주고 싶다고.

신나서 장난감이나 게임기 몇 개를 보던 차에 형님이 창고에서 큰 컴퓨터를 꺼냈어.
엄청 오래되어 보이는 하얀색의 구닥다리 컴퓨터.
정확히는 하얀색도 아니야.
색이 변해 노래진 것이 제대로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더라.

이런 물건이 왜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지?
좀 호기심이 생겼어.
형님 말은 손님들이 컴플레인을 너무 많이 걸었대.

형님이 말하길.
본인도 이 컴퓨터가 맘에 들어서 매장 구석에 고전 게임 돌리는 용도로 두려고 했다.
그런데 손님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이상하다.’ ‘깜짝 놀랐다.’ ‘귀신 쓰인 거 아니냐.’ ‘불쾌하다.’ 같은 말을 하며 따졌고,
그 말에 자신도 컴퓨터를 확인하다 심장 떨어질 뻔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작에 버리고 싶었는데,
진짜 귀신 쓰여있는 건 아닌가 찝찝해서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이게 진짜 귀신이 붙은 거라면 장사가 잘되면 좋을 건데...
안 풀리는 걸 보니 여기 두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버리든지 가지든지 해줬으면 좋겠다고.

이건 말이 가지라는 거지 저주받은 물건 짬처리하라는 건가 싶어 살짝 기분 나쁘기도 했지만.
나도 잘 모르겠더라.
애초에 비현실적인 거 잘 믿지도 않을뿐더러, 물건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으니 말이야.
얼떨결에 내가 가져가겠다고 해버리고 말았지.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돼.



2.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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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져와 컴퓨터를 켜니 소름이 쫙 돋더라.
Windows 95.
특유의 부팅 소리 알아?
드드득- 드드득- 소리가 방안을 울리는데. 와.
이런 거는 영상으로만 봐서 너무 신기했지.

감탄하던 차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탕화면이 켜졌어.
파란색 배경에 조잡한 그림과 그림 아래 관련 단어가 놓여있는 바탕화면.
기억해 보자면 엄청나게 놀라서 잔뜩 움츠러든 사람의 이미지와,
그 아래 ‘자지러지다’ 라는 말이 적혀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 바탕화면,
한 5~10초 간격으로 이미지가 계속 변화하는 거 있지.
마치 무언가 학습을 시켜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러다 갑자기
화면에 무언가가 떡 하니 나타나는데.
진짜 대비 없이 앞을 보다 너무 놀라서 바닥을 뒹굴었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사방이 벽으로 되어있는 장소가 화면에 나타났고.
새빨간 글씨로 ‘아’라는 글씨가 벽 전체가 도배되어 있었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런 식인 거지.
모든 벽면이 말이야.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진정이 안 되더라.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어.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게 뭔지 알 것 같은 거야.

화면보호기.

예전 컴퓨터에는 화면보호기 기능이 중요했어.
LCD 화면에는 그렇게 의미가 없지만,
그보다 예전 모니터에는 CRT 방식을 사용했거든.
문제는 CRT 방식은 같은 화면을 지나치게 오래 켜놓고 있으면,
화소가 타버려서 색이 누렇게 변색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돼.

그걸 방지하고자 생겨난 것이 화면보호기인데,
95 당시에는 이게 하나의 상징이라 재밌고 화려한 화면보호기가 많았던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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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의 하나가 ‘3D 미로’
제목 그대로 3D로 된 미로를 탐색하는 형식의 화면보호기인데,
이게 알아보니 사용자가 얼마든지 커스터마이즈를 쉽게 할 수 있는 형식이더라고.

다들 이걸 보고 놀랐구나.
화면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손님들이,
이 화면보호기를 보고 놀라 나자빠지는 상상을 해보았어.
충분히 납득 가능하겠구나 싶었지.

상황은 이제 알았겠다.
내친김에 원인도 더 알고 싶어졌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이미지를 수정한 것은 아닐까?
도대체 왜?

나는 컴퓨터에 저장된 있는 이미지들을 보관하는 폴더를 찾아봤어.
신기하게도 정말 많은 이미지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더라.
컴퓨터 용량을 거의 가득 채워서 말이야.

조잡한 그림과 그 그림 아래 관련 단어의 조합.
마치 누군가에게 단어 공부를 시키는 듯한 이미지들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곳에는 마치 저주하는 듯한 괴상한 이미지들도 섞여 있었어.
아까 보았던 화면 보호기와 비슷한 느낌의.
사람을 위협하고 겁주기 위한 이미지들이었지.

방에서 혼자 이런 이미지들을 찾아보고 있으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더라.
원인을 떠나서 충분히 저주받고 괴상한 물건임에는 분명했어.

조사를 이어가다 확장자가 .EXE 인 프로그램을 발견했어.
제목 – ‘아아아아’
무언가의 실행파일.

뭔데 이건 또?
누르면 또 무슨 일이 생기는데?

솔직히 무섭더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어.
눌러봐야지.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이었어.

의외로.
파일은 생각보다 멀쩡했어.
지금 시점에서 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잘 만들어진 어린이용 학습 공부 프로그램이더라고.

지금까지 봤던 컴퓨터에 저장된 단어 이미지들 있지?
그게 다 이 프로그램에 사용하는 이미지들 같더라고.

숫자를 공부할 수 있고.
단어도 공부할 수 있고.
마음껏 그림도 그려볼 수 있는.
말 그대로 친절한 학습 프로그램 말이야.

상용화된 프로그램일까?
처음 보는 프로그램이기는 한데 너무 옛날이니 알 수가 없지.
검색을 좀 해봐야겠다 싶었어.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이런저런 활동들을 마무리하고,
이것저것 추가로 살펴보고 있으니 아래 무언가가 나타났어.
안경을 쓴 남자 캐릭터였지.

눌러보니 옛날 도스 화면 같은 구성의 창이 나타나더라.
안경 쓴 남자가 말을 걸었어.

“오늘도 정말 수고 많았어! 대단해!”

대답해야 하나?
나도 키보드 자판을 이용해 말을 걸었지.

“너는 누구야?”

답변이 왔어.

“나는 너의 아빠야.”

내가 물었어.

“이름은?”

답변이 왔어.

“내 이름은 -





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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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여, 안녕! 클릭 한 번으로 컴퓨터가 움직인다.’
‘밤새 줄 선 사람들, Windows 95 출시 열기 후끈’

90년대, 윈도우 95가 국내 도입되었을 때는 정말 뜨거운 감자였어.
그 전까지의 컴퓨터는 전문가나 매니아층이 주로 사용하는 복잡한 기기였거든.

그러다 마우스 클릭만으로 작동되는 컴퓨터가 나왔으니, 반응이 어땠겠어?
이른바 컴퓨터 디지털 시대의 시작인 셈이지.


이건 그런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야.

조사와 검색을 통해 재구성된.
실제로 존재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전제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는 이야기.

여기서만 이야기할 만한 이야기니.
어디 가서 흘리지는 말아줘.

그의 이름을 여기서 밝히진 않겠어.
찾아보니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신문 기사가 몇 개 나오더라.

‘자폐 딸 위해 직접 만든 학습 프로그램… 홀로서기 돕는 아버지의 사랑’
‘홀로 자폐 딸 키우는 아버지, 직접 만든 교육 프로그램 화두’

90년대, 홀로 아이를 키우던 아버지가 있었어.
그에게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자폐증의 딸이 있었지.

딸은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있었어.
언어 발달이 늦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반응이 전반적으로 부족했지.

그런 딸이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고 집중을 했던 게 컴퓨터였어.
아버지로서는 컴퓨터가 절대 놓치지 못할 동아줄로 보였겠지.

아버지는 딸과 컴퓨터로 소통하기 시작했어.
말이 소통이지 화면보호기에 글을 보여준다거나,
이미지를 삽입해서 관심을 유도한다든가 하는 일차원적 수준의 노력들.

그런 노력들이 어떠한 결실로 이루어졌어.
아버지가 원하던 형태는 아니었겠지만.
아동용 교육 프로그램의 선구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게 되었지.
그만큼 컴퓨터는 뜨거운 관심사였으니 말이야.

아버지는 상업화를 원하지 않았어.
이유는 그저 추측할 뿐이야.
딸과의 추억거리를 세상에 공유하고 싶지 않았겠지.
다른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어.

다만, 그다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 신문 기사가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어.

‘가족이 가장 안전해야 하는데... 자폐아 가정의 부끄러운 민낯’
‘어떻게 이런 일이, 자폐아 친부 O폭력의 충격적인 실태’

... 실제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어.
이러한 기사들이 나타난 뒤로 그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거든.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만 같았어.

그런데 말이야,
그 시기 이후로 교육 프로그램 개발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더라?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지만 말이야.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결론적으로 의문점이 드는 부분은,

남겨진 딸에 대한 이야기야.

모든 자료를 파악하고 난 뒤에 본 화면 보호기가

나에게는

마치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소리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무언가를 뺏기기 싫다는 것처럼 보여서.

혹여나 누군가가 찾으러 오지는 않을까 싶어.

차마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방 한구석에 이 컴퓨터를 놓아두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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