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역본인, 길(조대호)과 서광사(김진성) 발췌 번역 비교입니다.
비교는 길, 서광사순입니다.
I권(Α)
1. 앎은 감각에서 시작해서 기억과 경험과 기술을 거처 학문적 인식에 이른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다양한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이 그 징표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각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의도가 없을 때도—사람들 말대로—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1권(A)¹
1장 감각, 기억, 경험, 기술, 학문, 지혜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² 이 점은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어떤 감각들보다도 특히 두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긴다.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떤 것도 행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말하건대 무엇보다도 보는 것을 선호한다.³
1 1권(Α)은 "형이상학"에 대한 입문 성격의 글이다. 철학사에서 중요한 전거(奠居)가 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과 플라톤 철학에 대한 서술이 1권의 곳곳에 담겨 있다.
2 여기서 '안다'(eidenai)는 것은 원인을 통해 앎을 가진다는 뜻이다(981a 24-30, 3장 983a 25-26, "자연학" 194b 18-20 참조). '본래'(physei)는 날 때부터 장애가 있어서, 또는 다른 이유 때문에 앎을 욕구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다는 말이다("토포스론" 134a 5-11, "자연학" 199b 14-18 참조). 앎에 대한 욕구에 대해서는 "에우데모스 윤리학" 1244b 26-29 참조.

2. '지혜'(철학)의 특징들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관념들을 취해 보면, 그로부터 곧 사정이 더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것에 대해 개별적으로 학문적 인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음, 어렵고 사람이 알기 쉽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데, 왜냐하면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어서, 감각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요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학문분야에서나 더 엄밀하고, 원인들에 대해 가르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지혜롭고, 학문들 중에서는 자기 목적적이요 앎을 목적으로 선택된 것이 파생적 결과들을 위해서 있는 것보다 지혜에 더 가까우며, 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예속된 것보다 지혜에 더 가까우니, 그 까닭은 지혜로운 자는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내리고 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그의 말을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혜와 지혜로운 자들에 대해 이런 종류의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안다는 특징은 필연적으로 보편적인 학문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속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밑에 놓여 있는 것들을 모두 알기 때문이다.²³ 하지만 이것들, 즉 가장 보편적인 것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기에 가장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감각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첫째가는 것들을 가장 많이 다루는 학문들이 가장 엄밀한 것이니, 왜냐하면 더 적은 수의 원리를 전제로 삼는 것들은 부가적 설명들을 필요로 하는 것들보다 더 엄밀하기 때문인데, 예컨대 산수가 기하학보다 더 엄밀하다. 또한 가르치는 능력에서 보면,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학문²⁴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그런 능력을 갖는데, 왜냐하면 각 대상에 대해 원인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가르침을 베풀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겨냥한 앎과 인식활동은 최고의 인식 대상에 대한 학문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그 자체를 위해서 인식활동을 선택한 사람은 최고의 인식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이니, 최고의 인식 대상에 대한 학문적 인식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인식이다. 한편, 첫째가는 것들과 원인들이 최고의 인식 대상인데, 왜냐하면 바로 이것들에 의해서, 그리고 바로 이것들로부터 다른 것들이 알려지는 것이지, 그것들 밑에 놓여 있는 것들에 의해 그것들이 알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각 행동의 지향점을 아는 학문은 학문들 가운데서 가장 선도적인 위치에 있고 그에 예속된 학문에 비해 더 선도적인데, 그 지향점은 각자에게 좋은 것이요, 전체적으로 볼 때 자연 전체 속에는 가장 좋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논의 전체로부터 따라 나오는 바, 우리가 찾는 이름은 (하나의) 동일한 학문에 붙는 것이니, 그 까닭은 그것은 바로 첫째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학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좋음과 지향 대상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23 보편적인 것에 대한 학문적 인식을 가진 사람은 '그 밑에 놓여 있는 것'(ta hypokeimena), 즉 그 보편자에 포함되는 것을 모두 안다. 그런 뜻에서 보면, 가장 보편적인 것을 아는 사람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가장 보편적인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있다' 혹은 '~이다'. 따라서 '있음'('~임', einai) 또는 '있다'('~이다', esti)는 모든 것에 속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VII 4, 1030a21 참고). 그래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지혜는 있는 것('~인 것', on)에 대한 탐구, 즉 존재론(ontology)이 된다.
24 '이론적 학문'이라고 옮긴 'theōrētikē'는 'theōrein'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이 동사는 본래 한 나라의 사절(theōros)의 참관활동을 가리키는데, 우리말로는 '구경', '관찰', '관상', '관망', '관조' 등의 말로 옮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theōria, praxis, poiēsis로 나누는데, 이것들은 각각 순수 학문의 이론적 활동, 정치적 행동을 비롯한 실천적 활동,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제작활동에 해당한다. 'theōrein'을 보통 '관조'(觀照)라는 말로 옮기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에 따라 '(이론적으로) 고찰하다'라고 옮긴다. 'theōria' 역시 '이론적 고찰', '이론'이라고 옮긴다.



2장 지혜의 특징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에 관해 갖고 있는 견해들을 든다면, 이로부터 (다루고 있는 문제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우선,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대로 모든 것들을 안다고 믿는다. 그것들 낱낱에 대한 상세한 앎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려운 것들과 사람들이 알기 쉽지 않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 이가 지혜롭다고 믿는다(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쉬우며, 결코 지혜라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앎의 영역에서, 더 정확한 사람이, 그리고 원인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문들 중 그 자체를 위해 그리고 그것을 알려고 하여 선택한 학문이 그로부터 나온 결과물들 때문에 고른 것보다 더 지혜이며, 또 더 지배적인 학문이³⁰ 종속된 학문보다 더 지혜라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명령을 받지 않고 명령을 내려야 하고, 또 그가 남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덜 지혜로운 사람이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이만큼, 우리는 지혜와 지혜로운 사람들에 관해 가지고 있다. 이 특징들 가운데 '모든 것들을 안다'는 특징은 보편적인 앎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꼭 갖고 있다. 이 사람은 보편적인 것 아래에 드는 사례들을 어떤 점에서³¹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은, 즉 가장 보편적인 것들은 사람들이 알아내기에 가장 힘들다. 그것들은 감각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³² 그리고 학문들 중 가장 엄밀한 것들은 으뜸가는 것들을 가장 많이 다루는 학문들이다. 다시 말해, 더 적은 원리들을 끌어대는 학문들은 원리들이 추가된 학문들보다, 예를 들어 산학(算學)은³³ 기하학보다 더 엄밀하다.³⁴ 더 나아가, 원인들에 관한, 이론에 관련된 학문에는 또한 가르침의 능력이 더 많이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각 사물에 관해 원인을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이해와 앎은 특히 최고의 인식 대상에 관한 앎에 들어있다(왜냐하면 앎 자체를 위해 앎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최고의 앎을 선택하려 하며, 이것은 최고의 앎의 대상에 관한 앎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으뜸가는 것들과 원인들이 최고의 앎의 대상들이다.³⁵ 바로 이것들 때문에, 이것들로부터 다른 것들이 인식되지만, 이것들이 자신들 아래에 드는 것들을 통해 인식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문들 중 종속적이기보다는 지배적인 것으로서, 무엇을 위해 우리가 각각의 일을 행해야 하는지를 아는 학문이 가장 지배적이다. 그것은 각 사물의 좋음(善)이며,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 속에 깃든 지고(至高)의 선(善)이다. 이렇듯, 앞서 말한 모든 점으로 보건대, 우리가 찾는 이름(지혜)은 같은 학문이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학문은 으뜸 원리 및 원인에 관한, 이론에 관련된 학문(이론학)이어야 한다. 좋음과 '무엇을 위해'(목적)는³⁶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30 여러 학문(또는 기술)들이나 능력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상하 존속 관계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도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정치학이 가장 지배적인(architektonikē) 학문으로 등장하며, 전략술, 경제학, 연설술과 같은 학문, 기술들은 정치학에 종속된다고 기술되어 있다(1094a 26-b 2 참조). 그렇다고 정치학이 지혜(형이상학)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정치학은 지혜가 생기도록 힘쓸 뿐이며, 지혜를 위해 명령을 내리지, 지혜에게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다(같은 책, 1145a 6-11 참조).
31 '어떤 점에서'는 '잠재적으로'(dynamei)를 뜻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보편적인 앎)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등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란 것을 '잠재적으로' 알고 있다. "뒤 분석론" 86a 22-27 참조.
32 여기서 앎(인식)은 '개별적인(특수한) 것'(to kath' hekaston)에서 '보편적인(일반적인) 것'(to katholou)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이 구체성을 더 많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자연학" 184a 21-b 14 참조).
33 arithmetikē를 흔히 '산술학'(算術學)으로 옮기는데, 비슷한 개념인 '술'과 '학'이 불필요하게 반복되기에, '산학'이라 옮겼다. iatrikē를 '의학'이나 '의술'이라고 하지 '의술학'이라고 하지 않는다. 14권(Ν) 2장 1090a 14 참조.
34 더 적은 수의 원리들에서 출발하는 학문은 더 단순하고 더 추상적인 학문으로서 더 정확하다. 예를 들어, 기하학(幾何學, geōmetrikē)은 수에 대한 원리들에다 크기에 대한 원리들을 추가하기 산학(算學, arithmetikē)보다 엄밀성이 떨어진다. "뒤 분석론" 1권 27장과 플라톤의 "필레보스" 56c 참조.
35 모든 증명하는 학문은 실체나 모순율과 같은 으뜸가는 것, 즉 원리들을 전제한다. 이런 것들은 앎의 대상, 즉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nous, 직관적 파악) 또는 ('이성'의 뜻을 포함한 넓은 뜻의) 지혜(sophia)의 대상이다("뒤 분석론" 100b 5-17. "니코마코스 윤리학" 1140a 33-35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앎'(epistēmē)은 nous와 구분되지 않는, 확장된 뜻으로 쓰여서 '추론적인 앎'보다는 '직관적인 앎'이라는 의미에 가깝다("뒤 분석론" 72b 19, 88b 36 참조).
36 '무엇을 위해'의 원어는 to hou heneka이다. 이 용어는 행위나 생성, 변화의 목적을 나타낸다. '무엇을 위해'에서 '무엇'이 바로 그 목적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고딕체로 썼다.



3. 선대 철학자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시작이 되는 원인들³²에 대해 학문적 인식을 얻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왜냐하면 우리는 첫째 원인을 안다고 생각할 때, 각 대상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원인들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원인은 실체와 본질³³이고(왜냐하면 '무엇 때문에'³⁴라는 물음은 궁극적으로 정식³⁵으로 환원되는데, 그 첫째 '무엇 때문에'는 원인이요 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원인은 질료이자 기체³⁶이며, 셋째는 운동이 시작되는 출처³⁷이고, 넷째는 그것과 대립하는 원인, 즉 지향 대상과 좋은 것이다(이것은 모든 생성과 운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³⁸ 그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자연에 대한 저술에서³⁹ 충분히 고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먼저, 있는 것들에 대한 탐색에 발을 들여놓고 진리에 대해 철학을 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 왜냐하면 분명히 그들도 어떤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을 돌이켜보는 것은 지금의 탐구과정에 유익한 점이 있을 것이다.
32 983a24의 'tōn ex archēs aitiōn'은 뒤따라 나오는 'prōtēn aitian'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둘 모두 학문적 인식의 출발점 혹은 시작이 되는 원인을 가리킨다.
33 '실체'(ousia)와 '본질'(to ti ēn einai)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V 8, 1017b21 아래를 보라. 또한 'to ti ēn einai'의 구문적 특이성에 대해서는 1029b14에 대한 각주 참고. Ross, Metaphysics I, p. 127의 설명과 D.-H. Cho, Ousia und Eidos in der Metaphysik und Biologie des Aristoteles, Stuttgart 2003, S.68~74의 구문 분석 참고.
34 원어 'dia ti'는 '무엇 때문에' 혹은 '왜'로 옮길 수 있다. 'dia ti' 물음의 구조에 대해서는 VII 17에서 자세히 분석된다.
35 '정식'(logos)의 뜻에 대해서는 III 1, 996a2에 대한 각주 참고.
36 '기체'(hypokeimenon)는 '밑에'(hypo) '놓여 있는 것'(keimenon 〈keisthai〉, to lie)을 뜻한다. 이 말은 훗날 라틴어 'subjectum'으로 번역되었다. VII 3, 1028b36에서 기체는 '다른 것들은 그것에 대해 술어가 되지만 그것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술어가 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hypokeimenon'은 주로 i) 어떤 진술의 주어를 가리키기도 하고("범주론" 5장), ii) 어떤 성질의 담지자로서의 감각적 개체를 가리킬 때도 있으며, iii) 형상의 담지자로서의 질료(hylē)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어떤 것의 담지자나 또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37 '운동이 시작되는 출처'(hothen hē archē tēs kinēseōs)는 간단히 말해서 '운동의 출처'를 가리키는데, 로스도 'the source of the change'라고 옮겼다. 반면 보니츠는 원문 표현에 가깝게 'die 〈Ursache〉, woher der Anfang der Bewegung kommt'라고 옮겼다.
38 '지향 대상'(to hou heneka)과 '목적'(telos)에 대해서는 V 2, 1013a32에 대한 각주 참고.
39 "자연학" II권 3장과 7장 참고.


3장 원리 및 원인에 관한 옛 철학자들의 이론
분명히, 근원적인 원인들에 관한 앎을 얻어야 한다(왜냐하면 으뜸 원인을 깨달았다고 믿을 때, 우리는 각 사물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인은 네 가지 뜻으로 말해진다.⁵⁵ 그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실체, 즉 본질이라고⁵⁶ 부른다('무엇 때문에'는 마지막에 정의(定義)로 환원되며, 으뜸가는 '무엇 때문에'는 원인과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료나⁵⁷ 바탕(基體)이며,⁵⁸ 셋째는 운동이 비롯하는 곳(운동의 근원)이며, 넷째는 이것에 대립되는 원인, 즉 무엇을 위해(목적)와 좋음(善)이다(이것이 바로 모든 생성과 운동의 목적이다).⁵⁹ 이것들에 관해 우리는 자연에 관한 저술들에서⁶⁰ 충분히 살펴보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있는 것들에 대한 연구로 들어가 (사물의) 참모습에⁶¹ 관해 철학을 했던 이들을 또한 끌어들여 보자. 그들도 분명히 특정한 원리와 원인을 논의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견해를 검토해 보는 것은 현재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55 10장 993a 11-13 참조.
56 '실체'로 옮긴 ousia는 einai(있다 또는 ···이다)의 현재분사 여성형 ousa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말 그대로는 '(정말) 있는 것'을 뜻한다. 7권(Ζ) 3장에서 본질, 보편적인 것(보편자, to katholou), 유(類, genos), 바탕(基體, hypokeimeinon), 이 네 가지가 실체의 후보로 등장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한 사물의 형상(形相) 또는 본질에서 실체를 찾으며, '실체'란 말을 주로 이 뜻으로 쓰고 있다.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 쓴 그리스어 to ti ēn einai(the 'what it was to be', 어떤 것이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를 영어 번역어 essence에 맞춰 옮긴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예로 들면, '인간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또는 '어떤 것이 인간이다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란 물음이 되는데, 이는 인간의 본질을 묻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인간의 형상을 표현하는 정의(定義, horos)를 통해(예를 들어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답변된다. 이 용어의 반과거형 ēn(···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앞서 얘기된 사항이나 주어진 정의를 언급할 때 쓰이는 것으로 보고(12권 6장 1071b 3 참조), 보통 '철학적인 반과거형'(philosophical imperfect)이란 이름을 붙인다(7권 17장 1041a 30, 12권 6장 1071b 7 참조).
57 '재료'의 원어는 hylē로, 원래 나무와 관련된 모든 사물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즉, '숲, 수풀, 덤불, 나무, 재목, 가지, 줄기, 장작, 땔감, 편비내, 야생 열매' 등의 뜻을 가진 낱말이다("동물 탐구" 550b 8 참조). 이를 바탕으로, '날것, 목재, 재료, 원료, 구성 요소, 진흙, 바닥짐, 저장물' 등의 뜻을 가지기도 한다(플라톤 "필레보스" 54c, "티마이오스" 69a 참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어떤 것이 생겨 나오거나 어떤 것을 이루고 있는 재료'를 뜻한다.
58 '바탕'의 원어는 hypokeimenon(hypo ···밑에+keisthai 놓여 있다)으로 말 그대로는 '어떤 것의 밑에 놓여 있는 것'을 뜻한다. 형용사형으로도 쓰여 뒤의 명사, 예를 들어 실체, 물체, 재료를 꾸며 주기도 한다(그리스어-우리말 찾아보기 참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바탕'은 형상과 재료, 그리고 이 둘로 된 전제를 모두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흔히 '기체'(基體)로 옮겨지지만, 동사형인 hypokeis-thai도 같은 맥락에서 쓰이므로(7권 13장 1038b 5, 10권 2장 1053b 13, 14권 1장 1088a 26 참조), '바탕'이 더 적절한 번역어라 생각한다. '주어', '대상', '전제', '사례' 등의 뜻도 있다.
59 예를 들어, 씨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 위해 싹이 트고 자라는 생성의 과정을 거치며, 나는 야구 경기를 즐기기 위해 야구 경기장으로 가는 움직임(운동)의 과정을 거친다.
60 "자연학" 2권 3장과 7장 참조.
61 '참모습'의 원어는 alētheia이다. 숨겨져 있음을 뜻하는 어간 lēth 앞에 부정소(否定素) a가 붙어 만들어진 말인데, 말 그대로는 '숨겨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이 개념의 형용사 alēthes는 어떤 사물 내지 사태가 '실제로 또는 정말로 있음'을, 어떤 주장이나 진술이 '참임'을 뜻하며, 또 어떤 개인이 '솔직함 또는 바름'을 나타낸다. "형이상학"에서 alētheia는 존재론적으로 쓰여 사물이나 사태의 '참모습'(眞相 또는 實相, real nature) 또는 '궁극적인 본성'(ultimate nature)의 뜻으로 주로 쓰였지만, 4권(Γ) 3장 1005b 3에서처럼 사태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인 판단이나 언명 또는 문장의 '참임'(진리성)을 뜻하기도 한다.


II권(α)
1. 철학연구에 대한 일반적 고찰
진리에 대한 이론적 고찰¹은 어떤 면에서는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 쉽다. 그 징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합당하게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가 완전히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은 각자 자연에 대하여 무언가 말을 하고 혼자서는 진리에 기여하는 것이 전혀 없거나 그 기여의 정도가 사소하지만, 그것들이 함께 모이면 그로부터 무언가 대단한 것이 생겨난다.
1 993a30 "hē peri tēs alētheias theōria".
2권(α)¹
1장 철학적 탐구에 관한 일반론
진리에 관한 연구는 어떤 점에서는 어렵지만, 어떤 점에서는 쉽다. 이는, 한편으로 어느 누구도 진리를 딱 맞게 얻을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진리를 전혀 얻지 못하지는 않아서 저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해 무엇인가 참인 것을 말하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또는 조금밖에 진리에 이바지하지 못하지만 모두 한데 모이면 꽤나 많은 양이 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1 2권(α)은 1권(Α)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의 입문 성격을 띤 짧은 글로서 1권을 보충한다. 에우데모스(Eudemos)의 조카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로도스(Rhodos)섬 출신의 파시클레스(Pasikles)가 쓴 글이라고 고대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였다. 주석가 알렉산드로스는 2권(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임을 확신하면서도, 3장의 995a 14-19를 근거로 "자연학"의 서문이 되어야 할 저술이라고 판단을 내린다.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철학이 진리에 대한 학문⁵이라고 불리는 것은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론적인 학문의 목적은 진리이고, 실천적인 학문의 목적은 행동이기 때문이다(설령 실천적인 사람들이 사실이 어떤지를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관계적인 것이나 눈앞의 문제⁶를 고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인을 모르고서는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에 따라서 다른 것들에 같은 이름이 속한다면, 그런 이름의 근거가 되는 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으로 그런 이름을 갖는다(예컨대 불이 가장 뜨거운데, 그것은 다른 것들에 속하는 열기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에 오는 것들이 진리가 되게 하는 원인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이다. 그런 까닭에 항상 있는 것들의 원리들은 필연적으로 〈항상〉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히 특정한 때 진리가 아니고, 그것들을 진리이게 하는 다른 어떤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이 다른 것들을 진리이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사물들에 있어서 그것의 있음의 정도와 진리의 정도는 서로 상응한다.
5 993b20: "epistēmē tēs alētheias".
6 993b22는 로스를 따라 'ou to aidion all' ho pros ti'로 읽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론에 따르면, 올바른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중간'(to meson to pros hēmas)에 오는 행동을 선택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II 3, 1106a 29 아래 참고.


그리고 철학을 '진리의 학문'이라 부르는 것은 옳다. 이론에 관련된 학문의 목표는 진리이고, (윤리학, 정치학 등) 실천에 관련된 학문의 목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⁸ 다시 말해 실천학자들이 사물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숙고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영원한 것이⁹ 아니라, 현재의 특정한 것에 관련된 것을 연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원인 없이는 참을 알지 못한다. 각 사물은, 자신이 가진 특정 성질로 말미암아 또한 다른 사물들이 그와 비슷한 성질을 가질 때, 다른 사물들보다 훨씬 많이 그 성질을 갖는다. 예컨대, 불은 가장 뜨겁다. 그것은 또한 다른 것들에게, 그 뜨거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¹⁰ 가장 참인 것은 나중의 것들에게 그 참임의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들의 원리들이 항상 가장 참임에 틀림없다. 그것들은 한때만 참인 것은 아니며, 또 그것들의 있음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도 있지 않고, 그것들이 바로 다른 것들에 대해 그 있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사물은 있음에 관계하는 방식으로 또한 진리에 관계한다.¹¹
8 6권(Ε) 1장과 11권(Κ) 7장 참조.
9 로스(Ross, 1924, 1권)를 따라, to aition kath' hauto(원인 그 자체) 대신 to aidion(영원한 것)으로 읽었다.
10 있음(존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참임(진리)에서도.
11 어떤 사태의 있음(존재, to einai)과 그것에 대한 생각이나 말의 참임(진리, alētheia)은 서로를 함축하는 관계를 갖지만, 다시 말해, 어떤 사태가 있으면, 이 사태가 있다고 말하는 진술은 참이며, 또한 이 사태가 있다고 말하는 진술이 참이면, 이 사태가 있는 것이지만, 사태의 있음(또는 없음)은 생각이나 말이 참임(또는 거짓임)의 원인이다. "범주들" 14b 10-22, "앞 분석론" 52a 32 참조.

IV권(Γ)
2.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뜻에서 있는 것, 즉 실체를 탐구하고, 하나와 여럿,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반대자들, 그리고 있는 것과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을 탐구해야 한다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⁴ 하나와의 관계 속에서, 즉 어떤 하나의 자연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쓰이는 것이지 동음이의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⁵ 그 사정은 이렇다. '건강한'은 모두 건강과의 관계 속에서 쓰이는데, 어떤 것은 건강을 지켜준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을 낳는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의 징후라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의 수용자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리고, '의술적'이라는 말 역시 의술과의 관계 속에서 쓰인다(그 까닭은 어떤 것은 의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의술에 본성적으로 적합하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의술의 작용이라는 뜻에서 '의술적이다'고 불리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쓰이는 다른 말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⁶
4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핵심 테제인 "to de on legetai men pollachōs"는 "'있는 것'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라고 옮길 수도 있다.
5 "범주론" 1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용어의 쓰임과 관련해서 대상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 예컨대 실제 사람과 그림 속의 사람은 모두 '동물'(zōion)이라고 불리지만 두 경우 '동물'이라는 용어는 의미가 똑같지 않은데, 이 경우 실제 사람과 그림 속의 사람은 'homōnyma'('이름만 같은 것' 또는 '同音異意적인 것들')라고 불린다. 둘째로 사람과 소에 대해서는 '동물'이라는 용어가 적용될 뿐만 아니라 적용된 용어의 의미도 똑같다. 이런 경우 사람과 소는 'synonyma'('同意적인 것들')이다. 셋째로는 'parōnyma'('파생적인 것들')가 있는데, 예컨대 '문법학'이라는 말에서 '문법학자'라는 말이 파생되었고, '용기'에서 '용기 있는'이라는 말이 파생되었는데, 이런 것들은 'parōnyma'라고 불린다. 이 구분에 따르면 '있는 것들'은 동음이의적인 것들도 아니고 동의적인 것들고 아니며, 파생적인 것들에 가깝다. 왜냐하면 있는 것들은 모두 첫 번째 뜻에서 있는 것(prōton on), 즉 실체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다만 있는 것들 사이에 통용되는 '하나와의 관계'(pros-hen relation)는 엄밀한 뜻에서의 '하나에 따르는 관계'(kata-hen relation)와 구별해야 한다(1003b12 아래 참고). Ross, Metaphysics I, p. 256 참고.
6 VII 4, 1030a32 아래 참고.


4권 (Γ)
2장 있는 것과 그것의 여러 가지 뜻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해지지만, 하나인 것에, 어떤 한 가지 실재에 관계 맺어, 한 이름 다른 뜻이 아닌 방식으로, 있다고 말해진다.⁸ 마치 '건강한 것'이 모두 건강에 관계 맺어, 어떤 것은 건강을 지켜 줌으로써, 어떤 것은 건강을 만듦으로써, 어떤 것은 건강의 징후임으로써, 어떤 것은 건강을 받아들임으로써⁹ 건강하다고 말해지듯이, 그리고 '치료하는 것'이 치료술(의술)에 관계 맺어 말해지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은 치료술을 가짐으로써 치료한다고 말해지며, 어떤 것은 치료술에 자연적으로 적합함으로써, 어떤 것은 치료술의 행위임으로써 치료한다고 말해진다.¹⁰ 그리고 이것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쓰이는 다른 말들이 또한 있을 것이다.
8 '있다'고 말해지는 모든 것들은, 즉 있는 것들은 어떤 한 가지 실재(mia tis phy-sis), 즉 실체(ousia)에 관계 맺어 있다. 실체가 아닌 나머지 존재('범주')들과 실체는 서로 이름과 정의(定義)가 같은 '한 이름 한 뜻인 것들'(synōnyma)도 아니고, 서로 이름만 같은 '한 이름 다른 뜻인 것들'(homōnyma)도 아니다("범주들" 1장 참조). 실체가 아닌 나머지 존재들은 으뜸 존재인 실체와 맺는 다양한 방식의 관계(pros ti)를 통해 규정된다.
9 예를 들어, 운동은 건강을 지쳐 주며, 약은 건강을 만들어 주고, 좋은 안색은 건강의 징후이며, 몸은 건강을 받아들인다. 5권(Δ) 23장 1023a 11-13 참조.
10 7권(Ζ) 4장 1030a 35-b 3 참조.

V권(Δ)
4. '퓌지스'(physis, 생성, 본성, 자연물)³⁵
'퓌지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뜻한다. (1) 자라나는 것들의 생성이 퓌지스인데, 예컨대 '위'(y)를 늘려 장음으로 발음할 때 그렇다.³⁶ (2) 자라나는 것 안에 내재하면서 자라남이 유래하는 첫 구성부분³⁷이 퓌지스이다. (3) 자연적으로 있는 것들 각각에서 일어나는 첫 운동이 그것 자체의 본성에 따라서³⁸ 그 안에서 일어날 때 그 운동의 출처가 되는 것이 퓌지스이다. 다른 어떤 것에 의해 크기가 증가하는 것들을 일컬어 '자란다'고 하는데, 이는 접촉과 유기적 통일성의 소유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배의 경우처럼 유기적 결착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한다.³⁹ (i) 유기적 통일성⁴⁰과 접촉은 서로 다른데,⁴¹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접촉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있을 필요가 없지만,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어 함께 자라는 경우의 것들에는 동일한 어떤 것이 그 둘 안에 속해서 이것이—접촉과 다른 방식으로—유기적 통일성을 지니는 성장을 낳고 그 둘이—성질의 측면에서는 아니지만—연속성이나 양의 측면에서 하나가 되도록 한다.
35 이 장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자연학" II권 1장의 'physis'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설명을 함께 참고.
36 'physis'에서 'y'를 길게 발음하면 '자라나는 것들의 생성'(hē tōn phyomenōn genesis)을 뜻한다.
37 1014b17-8의 'ex hou phyetai'는 어떤 것이 생기거나 자라날 때 그 출발점이 되는 부분을 가리키는데, 로스는 이것을 'the inherent stating-point of growth'라고 옮겼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장(生長)의 내재적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알렉산더(357, 14)는 질료를, 보니츠(Metaphysica, p. 228)는 여컨대 씨앗을 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ex hou phyetai'는 1014b18 아래에서 제시하는 운동의 원리, 질료, 본질 등을 모두 포괄하는 표현일 수 있다.
38 1014b19의 'hēi auto'를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서'라고 옮겼다. 예컨대 동물은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해 운동하지만, 또 어떤 때는 힘에 의해 운동할 수도 있다. 어떤 개체에서 일어나는 자생적 운동의 출처가 곧 퓌지스이다. 1013a 5-6에 따르면, 예컨대 심장이나 뇌가 그런 뜻에서 퓌지스에 해당할 것이다.
39 1014b18 아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내적 원리를 퓌지스라고 부르면서, 이런 뜻의 퓌지스를 둘로 구분한다. 즉, i) 자생적 생장의 경우 운동의 원리와, ii) 타자 의존적 생장의 경우 운동의 원리가 있다. 타자에 의존하는 생장의 경우 운동이 일어나는 방식은 다시 둘로 구분된다. 예컨대 영양섭취 과정에서 음식물과 신체의 접촉(haptesthai)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접촉에 의해 살과 뼈가 함께 붙어 자라기도 하고, 영양분을 얻은 어미에 의존해서 배(胚, embrya)가 자라기도 한다. 여기서 앞의 경우는 '유기적 통일성'(sympephykenai)에 의한 성장에, 뒤의 경우는 '유기적 결착'(prospephykenai)에 의한 성장에 해당한다.
40 '유기적 통일성'이라고 옮긴 'symphysis'(organic unity—Ross) 안에는 '함께 자람'의 뜻이 담겨 있어, 유기체의 '유기적 생장'으로도 풀어 옮길 수 있을 것이다.
41 '유기적 통일성'(symphysis)과 '접촉'(haphē)에 대해서는 XI 12, 1069a5-12 참고.


5권(Δ)
4장 자연³⁷
'퓌시스'(physis)는 (1) 누군가가 physis에서 y(윕실론)을 길게 발음하면 그렇게 보이듯이,³⁸ 자라는 것들의 발생을 뜻한다. 그것은 또 (2) 자라는 것이 맨 처음 자라나는, 자라는 것 안에 들어있는 것을³⁹ 뜻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3) 각 자연물 안에서, 이것이 자연물인 한에서 움직임이 맨 처음 나오는 근원을⁴⁰ 뜻한다. 어떤 것에 닿아 함께 자라거나, 배아(胚芽)처럼 그것에 덧붙는 식으로 다른 것을 통해 성장을 얻는 것들은 자란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함께 자람은 닿음(접촉)과 다르다.⁴¹ 닿는 것들의 경우, 닿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야 하지만, 함께 자라는 것들의⁴² 경우, 둘 안에 동일한 것이 있고, 이것이 그 둘을 단순히 닿는 대신에 함께 자라게 하고, 질에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연속과 양의 면에서 그 둘이 하나가 되도록 만든다.
37 '자연'(physis)의 의미들에 관한 논의는 "자연학" 2권 1장에도 전개되어 있다.
38 '자람(성장)'은 physis의 어원적 의미다. 실제로, phyesthai(자라다)의 y는 그 변형에서 대부분 길게 발음된다. physis는 '자연', '자연물', '본성', '실재', '자연의 과정'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며(그리스어-우리말 찾아보기 참조), "자연학"에서는 기술의 뜻을 가진 technē에 대조된 개념으로 주로 쓰인다. 여기처럼 '발생' 또는 '생성'(genesis)의 뜻으로 쓰인 예는 "자연학" 193b 12와 플라톤의 "법률" 892c에서 찾아볼 수 있다.
39 씨나 알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0 운동인(causa efficiens)을 말한다. 이때의 physis는 '자연력'으로 옮길 수 있다.
41 11권(Κ) 12장 1069a 5-12 참조.
42 뼈와 근육을 '함께 자라는 것들'(sympephykota)의 예로 들 수 있다.

VI권(E)
1. 신학, 즉 있는 것 자체에 대한 학문은 다른 이론적인 학문들, 즉 수학이나 자연학과 다르다
우리는 있는 것들의 원리들과 원인들을 탐구하되, 분명 있는 것인 한에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건강이나 좋은 상태에는 원인이 있고, 수학적인 것들에도 원리들과 요소들과 원인들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사고의 학문이나 사고에 일정한 방식으로 관여하는 학문¹은 모두—더 엄밀하거나 더 단순한—원인들과 원리들을 다룬다.
1 '사고의 학문'(epistēmē dianoētikē)은 아래의 1025b21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실천학'(praktikē)이나 '제작학'(poiētikē)에 대비되는 '이론학'(theōretikē)을 가리킨다.
6권(Ε)¹
1장 으뜸 철학
우리는 있는 것들의 원리들 및 원인들을 찾고 있는데, 그것도 분명히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이 갖는 원리들 및 원인들을 찾고 있다. 건강과 좋은 신체 상태에는 원인이 있고, 수학적인 대상들에도 원리들과 요소들과 원인들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추론적인 학문이나 또는 적어도 추론적 사유와 관련된 학문은 (상대적으로) 더 엄밀하거나 더 단순한(느슨한) 원인들과 원리들을 다룬다.²
1 11권(Κ) 7장과 8장에 6권(Ε)의 내용이 다시 간추려져 있다.
2 학문의 '엄밀성'(akribeia)에 관해서는 1권(Α) 2장 982a 25-28, 13권(Μ) 3장 1078a 9-28, "뒤 분석론" 1권 27장 참조.

VII권(Z)
1. ‘있는 것’에 대한 탐구는 일차적으로 실체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탐구 대상이 되고 언제나 의문거리인 것, 즉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니¹³(왜냐하면 그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¹⁴ 그것이 하나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 이상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¹⁵ 수가 유한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¹⁶ 수가 무한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많이, 가장 먼저 그리고 전적으로, 그런 뜻으로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13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테스"(Sophistes) 244A 참고. 여기서 플라톤은 '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묻는다. "(······) '있는 것'(on)이라는 말을 쓸 때, 당신들이 가리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 왜냐하면 분명 당신들은 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이전에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14 밀레토스학파의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I 3, 983b6 아래 참고.
15 수를 모든 것의 원리로 내세운 피타고라스학파나 네 가지 뿌리들(rhizōmata)을 말한 엠페도클레스가 그런 사람들에 해당한다. D-K, 58 B 4, B 5와 31 B 6 참고.
16 아낙사고라스와 원자론자들은 각각 무수한 씨앗들(spermata)이나 원자들(atoma)이 모든 것의 원리라고 말한다. D-K, 59 B 4, 67 A 7, 68 A 37, A 57 참고.

7권(Ζ)
1장 실체는 철학의 근본 물음이다
그리고 정말, 예나 지금이나 늘 묻지만, 늘 어려운 물음은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⁶ 하나라고, 어떤 사람들이 하나보다 많다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⁷ 개수에서 한정된다고, 어떤 사람들이⁸ 무한하다고 주장했던 것이 바로 이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으뜸으로 있는 것(실체)에 관해, 이것이 무엇인지를 특히 비중을 두어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6 밀레토스학파와 엘레아 학파. 1권(Α) 3장 983b 20 참조.
7 피타고라스주의자들과 엠페도클레스. 1권(Α) 3장 984a 8 참조.
8 아낙사고라스와 원자론자(原子論者)들. 1권(Α) 3장 984a 11-16 참조.

XII권(Λ)
9. 신적 사유는 가장 신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그런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질료가 없는 대상을 사유하는 경우 사유와 사유대상은 하나이다
지성에 대한 논의는 몇 가지 의문을 낳는다. 일반적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현상적인 것들¹⁰⁹ 가운데 가장 신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그런 성질을 가질 수 있는지는 몇 가지 어려움을 낳기 때문이다. 만일 지성이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슨 위엄이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잠자는 자와 같은 상태에 있을 것이다. 한편 만일 그것이 사유하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사유를 주도한다면, 그것의 실체는 사유¹¹⁰가 아니라 능력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좋은 실체일 수 없을 터인데, 그 이유는 그것에 고귀함이 속하는 것은 사유함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의 실체가 지성이건 사유이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사유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유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사유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사유한다면, 그것은 항상 동일한 것이거나 다른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 지성이) 훌륭한 것을 사유하는가 아무것이나 사유하는가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추론을 통해) 사고하기에 불합리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것은 분명 가장 신적이고 고귀한 것을 사유하며, 변화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의) 변화란 더 나쁜 것으로의 이행일 것이며, 그런 것은 이미 일종의 운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109 로스(Metaphysics II, p. 399)의 지적대로, 여기서 말하는 '현상적인 것들'(ta phainomena)은 감각뿐만 아니라 지성에 드러나는 것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0 이 장 전체에 걸쳐 'noēsis'는 사유의 능력(dynamis)에 대비되는 현실적인 활동으로서의 사유를 가리킨다.


12권(Λ)
9장 신적인 이성의 존재 방식
이성과¹⁷⁸ 관련해서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이성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神)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성이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어려운 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1) 이성이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면, 이성의 품위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마치 잠자는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겠다. 그리고 (2) 이성이 사유하지만 다른 어떤 것이 이성을 지배한다면, 이때 이성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사유 활동이 아니라, 이보다 못한 잠재/가능 상태의 힘일 텐데, 이성은 가장 좋은(최고의) 실체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가치는 사유함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3) 이성의 본질이 사유 능력이거나 사유 활동이라면, 이성은 무엇을 사유하는가? 이성은 자기 자신을 사유하든지, 아니면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사유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사유한다면, 이성은 같은 것만을 항상 사유하든지, 아니면 매번 다른 것을 사유한다. 그렇다면, 고귀한 것을 사유하는 것과 아무런 것이나 사유하는 것은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전혀 없는가? 또는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이성이 그것들을 사유한다는 것이 이치에 어긋난 일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성은 분명히 가장 신적이고 가장 값진 것을 사유하며, 따라서 이성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성이 변한다면) 그 변화는 더 못한 것으로 되는 변화일 것이며, 이것은 곧 (움직이지 않는 것인 이성에게) 일종의 움직임을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178 여기서 '이성'(nous)은 '신'(theos) 또는 '신적인 이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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