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볼라키아 제국 측에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중대한 사항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것 같더군. 세리나 드라큐로이 특사의 관대함에 감사해라.”
엄한 표정의 단장이 한 말을 들은 하인켈은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
“아니, 그러니까…! 특사님께… 사의를… 표합니다.”
한숨을 쉬며 한 말에 곧바로 매서운 눈초리를 느낀 하인켈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하지만 말하는 본인도 얼마나 자신이 한심한 추태를 보였는 지 알고 있어서 수치심만 늘어날 뿐이었다.
기사단장―― 빌헬름 반 아스트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자신의 아들, 하인켈의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밀 기세로
날카롭게 노려보고만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하인켈은 빌헬름의 눈빛이 두려워하게
됐을까.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시선이 칼날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겁을 먹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는 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작은, 연약한
동물처럼 공포만을 느끼고 있었다.
“――. 이상. 물러가도록. 이 사건에 대한 임명 책임에 대해서는 나중에 부단장에게 묻도록 하겠다… 아마도, 현인회 쪽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던 거겠지.”
“그건…”
“이상, 하인켈 아스트레아.”
다시 한 번 명령을 반복하자 하인켈도 빌헬름이 더 이상 이 안건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눈치 챘다. 그래서 그는 간신히 “네”하고
답하며 단장실에서 나갔다.
하인켈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체로 나가는 걸 본 빌헬름은 이마에 소을 갖다 댔다.
“베르톨 님… 아버님께서는
저런 개념 없는 녀석들은 어떻게 감당하셨던 겁니까? 제가 뭘 해야 당신처럼 될 수 있을지…”
기사단장이 아닌, 고뇌에 빠진 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
위병소에서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하인켈은 끝없는 자기 비하 속에
빠진 채 걸어갔다.
눈빛과 표정 관리, 한심한 말투, 자신의
속마음을 무심코 뱉어버린 멍청함에, 그리고 빌헬름이 크게 실망하게 만든 자신의 태도까지. 완벽할 정도로 최악의 답만 골랐다.
“이렇게 반성하는 것도 의미가 있나.”
그는 이마에 손을 짚으면서 비틀비틀 걸어갔다.
빌헬름 앞에서 움츠러들고, 기사로서 제대로 된 결과도 내놓지 못했고, 늘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드라큐로이 사절께서 정말로 알라가 일은 덮으신 건가…?”
사실이라면 이건 빌헬름에게조차 보고하지 않고 비밀을 간직하게 된 결과라고 봐야 할 거다.
빌헬름이 실망하게 된 원인인 그 호위 임무 당시, 제국의 사절인 세리나
드라큐로이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암살 위협을 피했다. 그 중 하나는 제국에서 내려온 황명을 거역하고
그 늑대인간을 해방시킨 거였다.
“――.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군.”
해방된 늑대인간, ――알라가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도망가든, 그는 영원히 고통받으면서 떠돌이 신세로 살게
될 것이다. 그 감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젊은 검랑, 세리나 드라큐로이는 자신의 부모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저렇게 타인하고는 다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걸까.
그런 이들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둘의 공통점이라면, 그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자신의 무력함을――,
“――아버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인켈은 그 목소리를 듣자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길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와 맑은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
“라인하르트.”
하인켈의 시야에 아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어느새 집에 도착해버린 모양이다. 잔디를 밟으면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많이 닮은 라인하르트를 안아줄 준비를 하고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오셨어요, 아버지? 할 일을 다 마치고 오신 건가요?”
하지만 아이는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 다 마치고 왔단다. 아버지… 기사단장님하고도 얘기를 다 하고 왔고.”
“그럼 오늘은 쭉 저택에 계실 건가요?”
“그래야지. 같이 식사
준비라도 도와드릴까? 괜찮죠, 어머니?”
쭉 핀 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이던 하인켈은 라인하르트를 꼭 안아주고, 그를
쓰다듬으면서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사람을 바라봤다.
“당연한 거 아닐까?”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자가 한 쪽 눈을 감으면서 웃었다
“내 아들이 음식이 차려지길 기다리는 남자로 자라도록 키운 기억은
없는데? 내가 키운 아이는 일상의 모든 세세한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아이였는 걸?”
“저도 이제 어른이라고요, 어머니. 언제까지 저를 아이 취급하실 건지…”
“그건 어려울 것 같아. 태어났을
때부터 쭉 봐왔으니, 네가 어렸을 때의 모습이 계속 기억에 남아 있는 걸.”
입가를 가리면서 하인켈의 어머니, 테레시아가 웃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유약해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테레시아를 상대로 한 번도 말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웃음을 보자 투지가 사라졌다.
하지만 하인켈의 팔에 붙들려 있던 라인하르트는 몸을 돌리고 테레시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하지만 조부께서는 늘 식탁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계시는 걸요.”
“…그러게 말이야. 그
남자는 늘 그런 사람이라. 정말, 검 밖에 못 휘두르는 남자라니까. 그러니까, 라인하르트, 너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되지 마려무나. 누군가를 모범으로 삼을 거라면 하인켈을 보렴. 알겠니?”
“네, 할머니. 아버지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겠습니다.”
“어머니, 부탁이니까 언성을
조금 낮춰주세요. 어떻게 표현하셔도 결국은 저만 불편해진다니까요.”
할머니와 손자의 따뜻한 대화를 들으면서 하인켈은 한숨을 쉬었다.
하인켈이 일하러 집을 떠나 있는 낮 시간 동안 라인하르트는 테레시아나 그림, 캐롤
부부와 같이 지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라인하르트의 마음
속 하인켈의 이미지는 날이 가면 갈수록 올라가기만 했다.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그 칭찬들을 듣는 라인하르트를 볼 때마다 하인켈은 가시방석을 밟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버지의 몸이 굳은 걸 눈치챈 건지, 라인하르트가 갑자기 그를 힘껏
껴안으면서 물었다. 하인켈은 “아무것도 아냐.”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라인하르트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무 문제 없단다! 그냥
이번 일이 좀 힘들었어가지고, 지쳤거든. 그래도 아빠는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단다. 오히려 내 동료들이 더 힘들었을 거야.”
“같이 일하시는 분이라면… 마코스
씨죠?”
“응? 내가 알려준 적이
있었나? 안 까먹고 잘 기억하고 있었구나. 장하네.”
아들을 쓰다듬으면서 하인켈은 저택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 마코스 아저씨가
맞아. 이번에는… 응, 나를
많이 도와줬지. 대단한 사람이란다.”
“…아버지도, 대단해요.”
“당연하지. 우리 아들은
잘생기고 훌륭하게 자라줬는 걸.”
팔에 안겨 있는 아들에게도, 그리고 옆의 어머니에게도 칭찬을 듣자
하인켈은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그는 진심으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처지에 걸맞지 않은 칭찬은 하인켈을 갉아먹는 독이나 다름없었지만, 자신을
동경하는 아이와, 어머니가 해주신 칭찬은 검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아내가 칭찬해 준 붉은 머리와 하늘빛 눈, 이 두 가지만이 하인켈이 아스트레아 가문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3
딱딱한 바닥에 앉아있는 채로 그는 마음을 다스린 후,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경을 써 본적이 없었던 자신의 체내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변화와 정지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짜증나는 로즈월 녀석이 알려줬었다.
낮에는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마법의 격류 속에 갇혀 있었고, 일몰
후에는 정신을 완전히 비우고 앉아서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반석, 마코스 길다크는 금술을 사용해서 정말로 피부까지 암석으로
변한 채, 왕립마법연구학회에서 고요한 밤을 지내고 있었다.
“――누구냐?”
눈을 감은 채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마코스의 명상을 누군가가 방해했다.
정확히는 명상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체내를 감도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보아 타인이 보더라도 언제든지 전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이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소리도 표시도
없이 잠입한 그 존재를.
다만,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그 존재를 느꼈을 때,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아이인가?”
아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키가 지나치게 작았다.
마코스의 무릎에 닿을 정도의 키였다. 고급진 옷을 입은 것을 보아하면
귀족의 아이일 것이고, 그 붉은 머리와 푸른 눈을 보면――, 어디
가문의 출신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나잇대에 걸맞는 존재라면――,
“라인하르트, 인가.”
“――――”
“하인켈 아스트레아의 아들, 맞나?”
“――네,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이름을 확인했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던 소년은 하인켈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의 정체를 시인했다. 그 도발에 마코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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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키아 제국 측에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중대한 사항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것 같더군. 세리나 드라큐로이 특사의 관대함에 감사해라.”
엄한 표정의 단장이 한 말을 들은 하인켈은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
“아니, 그러니까…! 특사님께… 사의를… 표합니다.”
한숨을 쉬며 한 말에 곧바로 매서운 눈초리를 느낀 하인켈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하지만 말하는 본인도 얼마나 자신이 한심한 추태를 보였는 지 알고 있어서 수치심만 늘어날 뿐이었다.
기사단장―― 빌헬름 반 아스트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자신의 아들, 하인켈의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밀 기세로 날카롭게 노려보고만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하인켈은 빌헬름의 눈빛이 두려워하게 됐을까.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시선이 칼날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겁을 먹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는 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작은, 연약한 동물처럼 공포만을 느끼고 있었다.
“――. 이상. 물러가도록. 이 사건에 대한 임명 책임에 대해서는 나중에 부단장에게 묻도록 하겠다… 아마도, 현인회 쪽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던 거겠지.”
“그건…”
“이상, 하인켈 아스트레아.”
다시 한 번 명령을 반복하자 하인켈도 빌헬름이 더 이상 이 안건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눈치 챘다. 그래서 그는 간신히 “네”하고 답하며 단장실에서 나갔다.
하인켈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체로 나가는 걸 본 빌헬름은 이마에 소을 갖다 댔다.
“베르톨 님… 아버님께서는 저런 개념 없는 녀석들은 어떻게 감당하셨던 겁니까? 제가 뭘 해야 당신처럼 될 수 있을지…”
기사단장이 아닌, 고뇌에 빠진 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
위병소에서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하인켈은 끝없는 자기 비하 속에 빠진 채 걸어갔다.
눈빛과 표정 관리, 한심한 말투, 자신의 속마음을 무심코 뱉어버린 멍청함에, 그리고 빌헬름이 크게 실망하게 만든 자신의 태도까지. 완벽할 정도로 최악의 답만 골랐다.
“이렇게 반성하는 것도 의미가 있나.”
그는 이마에 손을 짚으면서 비틀비틀 걸어갔다.
빌헬름 앞에서 움츠러들고, 기사로서 제대로 된 결과도 내놓지 못했고, 늘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드라큐로이 사절께서 정말로 알라가 일은 덮으신 건가…?”
사실이라면 이건 빌헬름에게조차 보고하지 않고 비밀을 간직하게 된 결과라고 봐야 할 거다.
빌헬름이 실망하게 된 원인인 그 호위 임무 당시, 제국의 사절인 세리나 드라큐로이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암살 위협을 피했다. 그 중 하나는 제국에서 내려온 황명을 거역하고 그 늑대인간을 해방시킨 거였다.
“――.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군.”
해방된 늑대인간, ――알라가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도망가든, 그는 영원히 고통받으면서 떠돌이 신세로 살게 될 것이다. 그 감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젊은 검랑, 세리나 드라큐로이는 자신의 부모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저렇게 타인하고는 다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걸까. 그런 이들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둘의 공통점이라면, 그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자신의 무력함을――,
“――아버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인켈은 그 목소리를 듣자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길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와 맑은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
“라인하르트.”
하인켈의 시야에 아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어느새 집에 도착해버린 모양이다. 잔디를 밟으면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많이 닮은 라인하르트를 안아줄 준비를 하고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오셨어요, 아버지? 할 일을 다 마치고 오신 건가요?”
하지만 아이는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 다 마치고 왔단다. 아버지… 기사단장님하고도 얘기를 다 하고 왔고.”
“그럼 오늘은 쭉 저택에 계실 건가요?”
“그래야지. 같이 식사 준비라도 도와드릴까? 괜찮죠, 어머니?”
쭉 핀 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이던 하인켈은 라인하르트를 꼭 안아주고, 그를 쓰다듬으면서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사람을 바라봤다.
“당연한 거 아닐까?”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자가 한 쪽 눈을 감으면서 웃었다
“내 아들이 음식이 차려지길 기다리는 남자로 자라도록 키운 기억은 없는데? 내가 키운 아이는 일상의 모든 세세한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아이였는 걸?”
“저도 이제 어른이라고요, 어머니. 언제까지 저를 아이 취급하실 건지…”
“그건 어려울 것 같아. 태어났을 때부터 쭉 봐왔으니, 네가 어렸을 때의 모습이 계속 기억에 남아 있는 걸.”
입가를 가리면서 하인켈의 어머니, 테레시아가 웃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유약해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테레시아를 상대로 한 번도 말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웃음을 보자 투지가 사라졌다.
하지만 하인켈의 팔에 붙들려 있던 라인하르트는 몸을 돌리고 테레시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하지만 조부께서는 늘 식탁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계시는 걸요.”
“…그러게 말이야. 그 남자는 늘 그런 사람이라. 정말, 검 밖에 못 휘두르는 남자라니까. 그러니까, 라인하르트, 너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되지 마려무나. 누군가를 모범으로 삼을 거라면 하인켈을 보렴. 알겠니?”
“네, 할머니. 아버지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겠습니다.”
“어머니, 부탁이니까 언성을 조금 낮춰주세요. 어떻게 표현하셔도 결국은 저만 불편해진다니까요.”
할머니와 손자의 따뜻한 대화를 들으면서 하인켈은 한숨을 쉬었다.
하인켈이 일하러 집을 떠나 있는 낮 시간 동안 라인하르트는 테레시아나 그림, 캐롤 부부와 같이 지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라인하르트의 마음 속 하인켈의 이미지는 날이 가면 갈수록 올라가기만 했다.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그 칭찬들을 듣는 라인하르트를 볼 때마다 하인켈은 가시방석을 밟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버지의 몸이 굳은 걸 눈치챈 건지, 라인하르트가 갑자기 그를 힘껏 껴안으면서 물었다. 하인켈은 “아무것도 아냐.”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라인하르트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무 문제 없단다! 그냥 이번 일이 좀 힘들었어가지고, 지쳤거든. 그래도 아빠는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단다. 오히려 내 동료들이 더 힘들었을 거야.”
“같이 일하시는 분이라면… 마코스 씨죠?”
“응? 내가 알려준 적이 있었나? 안 까먹고 잘 기억하고 있었구나. 장하네.”
아들을 쓰다듬으면서 하인켈은 저택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 마코스 아저씨가 맞아. 이번에는… 응, 나를 많이 도와줬지. 대단한 사람이란다.”
“…아버지도, 대단해요.”
“당연하지. 우리 아들은 잘생기고 훌륭하게 자라줬는 걸.”
팔에 안겨 있는 아들에게도, 그리고 옆의 어머니에게도 칭찬을 듣자 하인켈은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그는 진심으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처지에 걸맞지 않은 칭찬은 하인켈을 갉아먹는 독이나 다름없었지만, 자신을 동경하는 아이와, 어머니가 해주신 칭찬은 검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아내가 칭찬해 준 붉은 머리와 하늘빛 눈, 이 두 가지만이 하인켈이 아스트레아 가문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3
딱딱한 바닥에 앉아있는 채로 그는 마음을 다스린 후,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경을 써 본적이 없었던 자신의 체내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변화와 정지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짜증나는 로즈월 녀석이 알려줬었다.
낮에는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마법의 격류 속에 갇혀 있었고, 일몰 후에는 정신을 완전히 비우고 앉아서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반석, 마코스 길다크는 금술을 사용해서 정말로 피부까지 암석으로 변한 채, 왕립마법연구학회에서 고요한 밤을 지내고 있었다.
“――누구냐?”
눈을 감은 채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마코스의 명상을 누군가가 방해했다.
정확히는 명상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체내를 감도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보아 타인이 보더라도 언제든지 전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이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소리도 표시도 없이 잠입한 그 존재를.
다만,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그 존재를 느꼈을 때,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아이인가?”
아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키가 지나치게 작았다.
마코스의 무릎에 닿을 정도의 키였다. 고급진 옷을 입은 것을 보아하면 귀족의 아이일 것이고, 그 붉은 머리와 푸른 눈을 보면――, 어디 가문의 출신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나잇대에 걸맞는 존재라면――,
“라인하르트, 인가.”
“――――”
“하인켈 아스트레아의 아들, 맞나?”
“――네,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이름을 확인했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던 소년은 하인켈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의 정체를 시인했다. 그 도발에 마코스는 눈을 떴다. 그동안 하인켈이 아이를 애지중지하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 반대도 사실이었군.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어떻게 온 거지?”
“입구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로즈월은 물론이고, 로즈월이 이렇게 경비를 엉망으로 하게 놔둔 러셀에게도 한 마디를 해야 되겠는데.”
일단 왕립마법연구학회는 왕국의 주요 시설 중 하나였다. 그러니 외부인이
이렇게 간단히 들어올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물론 정말로 경계가 느슨했을 리는 없었고, 로즈월과 러셀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즉, 이 늦은 밤에 돌아다니는 이 소년이 그만큼 이질적인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
어린 소년을 보면서 마코스는 충격을 감추기 어려웠다.
잘해야 다섯 살일 이 소년은 몸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있는 자세는 완벽했다.
일반인과 무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의 차이점은 서 있는 자세였다. 마코스의
직관적인 느낌으로 라인하르트의 자세는 심지어 검귀――, 아니 검성, 테레시아
반 아스트레아와 당당히 맞설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은 없는 건가?”
“…아버지께서 저에게는 아직 이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 그 남자다운
판단이군. ――지금 시점에서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겠지. 왜
여기에 온 것이지? 나를 만나러 온 것인가?”
그 질문에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확하게 틀어맞춘 것
같았지만 마코스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기 얘기를 하인켈이 아들에게 한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장소에 대놓고 나타난 것을 보면 좋은 의도를 품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를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에 빠져 있어서 라인하르트의 말에 대한 반응이 살짝 늦었다.
의미를 이해한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그 놈은 자기
아들한테 달려가서 동료가 너무 냉정하다고 징징거리기라도 한 거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마코스 씨 때문에 아버지가 괴로워했잖아요… 친구 아니었어요?”
“친구…? 그런 적이 있긴
했으려나?”
마코스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라인하르트는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마코스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소년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는 어떠한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타인을 자신의 요구를 따르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저 아이에게는 엄청난 운명이 느껴졌다――. 검성의 혈통에 걸맞지 않은
남자에게서 태어난, 자격이 차고 넘치는 수준인 저 소년은 아버지를 사랑했다. 지나칠 정도로/
그래서 동료도, 친구라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마코스는 경고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인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바로 이렇게 원인한테 직접 달려가서 하소연하는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아이라서, 그런 겁니까?”
“아니. ――하인켈이 너한테
시키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지.”
“――큭, 그런 건 아니…”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네 행동은 네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올 거다. 즉, 하인켈을 적대하는 이들에게나 도움을 주겠지.”
마코스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양반다리를 한 채 돌처럼 딱딱히 굳은 한 청년이 왕국의 가장 중요한 시설에 침입한 소년에게 침착하게 조언을 준다라. ――제 3자가 본다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마코스 본인도 놀랄 정도였으니.
그와 별개로――
“보장할 수는 없지만, 네
관점은 이해할 수 있다. 네가 하인켈이 시켜서 이 곳에 온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 아버지에게 좀 더 부드럽게 대해주실 겁니까?”
“말했다시피, 보장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건, 너지. 너도 언젠가 기사가 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부모의 말을 충실히
따르도록. 그런 놈이라 한들, 어쨌든 검귀와 검성의 아들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기사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 지는 잘 알고 있지.”
이 말이 라인하르트에게 얼마나 와닿았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변화는
생겼다. ――소년이 아니라 마코스 쪽에서.
천천히 바위의 모습이 사라지며, 마코스의 진짜 육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 분별 없는 소년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 같았다.
“답할 생각이 없는 건가? 버르장머리
없는 애송이 녀석.”
들은 건지, 아닌 건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년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몸의 변화가 아니었다면 있었던 건지 조차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소년은 환상처럼 사라졌다.
“확실히, 저런 애를 키우고
있다면 애지중지할 수 밖에 없겠군, 하인켈.”
저렇게 손이 많이 가는 소년이라면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야만 한다. 그
점은 마코스도 이해했다.
하인켈이 언젠가 검성의 가호를 물려받을 수만 있다면 그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마코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와의 사이에 있던 반감이 가라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끔찍한 최악의 가능성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아니, 지금은 괜찮겠지. 적어도 지금은… 이봐! 금술을
억눌렀다고! 로즈월을 불러!”
마코스가 고함을 질러서 잠들어 있던 직원을 깨웠다. 양반다리를 한
채, 그는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될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마코스가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그대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마코스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왕국을 끔찍한 상황에 끌고 내려갈 것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마코스 길다크는 언젠가 암석 같은 이마에
주름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검성의 운명이 미칠 더 큰 영향의 일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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