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라노 대성당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고 이탈리아는 문화와 무역의 중심지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되었음.

중소 국가들로 분할되어 있던 이탈리아(1494년)
당시 이탈리아는 봉건제가 자리잡지 못해 수많은 중소 도시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음.

통합되어 있지 않은 이탈리아는 이때부터 약 반세기 동안(1494~1559)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등 유럽 강국들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이게 바로 이탈리아 전쟁임.

이탈리아 전쟁은 많은 의미로 이전과는 다른 전쟁이었음. 중기병에 올인하거나 궁병 화력에 올인하는 등 단조로웠던 이전과는 달리 다양한 병종을 활용한 제병연합이 받아들여지면서 전술적 유연성이 발달하였고, 특히 화약 생산법이 널리 퍼지면서 화약을 활용한 열병기가 발달했음. 또한 기병을 무력화 시킬수 있으면서 적 보병에도 유용한 파이크 방진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파이크를 운용하는 전문 직업군 용병이 중요해지고, 이에 따라 보병 방진의 전력이 중요해졌음.

이탈리아 피렌체를 정복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Charles 8th 제위기간 : 1483~1491)
이탈리아 전쟁의 스타트(1차 이탈리아 전쟁 1494~1495년)를 끊은건 백년전쟁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를 몰아낸후 절대왕정을 이룩한 프랑스였음.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직접 원정을 떠나 피렌체와 나폴리는 점령했지만 베네치아의 반격으로 격퇴됨.

1518년 그림(1518_Altdorfer_Sieg_Karls_des_Grossen_ueber_die_Awaren_anagoria)에 묘사된 프랑스 중기병 장다르메(Gendarme)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기병 강국이었음.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중기병을 중요시하다보니 대규모 전투에서 중기병 돌격으로 적을 섬멸시키고 승리를 쟁취하는, 어떻게 보면 구식 봉건적인 전투를 선호했는데 중기병 중심 편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위스 용병 등 용병 장창병들과 포병을 적극 활용하였음.

El Gran Capitán(위대한 장군) 스페인의 영웅 곤잘로 데 코르도바(Gonzalo Fernández de Córdob).
그 다음으로 이탈리아 전쟁(2차 전쟁 1499~1504)에 뛰어든 것은 700년간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끝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을 몰아낸 스페인군임. 스페인군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상대하면서 경보병과 경기병을 적극 활용한 게릴라전의 달인이 되어 있었으며, 또한 스페인 북부의 초석광산에서 쉽게 원료를 얻을 수 있어 화약병기를 대량으로 운용해 총병과 포병, 파이크보병방진을 결합한 세련된 테르시오 전술을 활용하였음.
스페인군을 이끈 지휘관은 레콩키스타를 승리로 이끈 스페인의 영웅 곤잘로 데 코르도바였음. 코르도바는 기동력을 활용한 게릴라전, 참호 구축, 총병과 포병의 화력 집중을 통해 프랑스군과는 비교도 안되는 적은 병력으로 승리를 이루었음. 스페인군에 맞선 프랑스군은 어버버하다 농락당했고(이와 관련된 체리뇰라 전투는 나중에 쓸수도 있음), 스페인은 나폴리 등을 점령함.

이후 발발한 3차 전쟁(1508~1516). 외국 군대가 이탈리아를 유린하는걸 지켜보던 교황 율리우스 4세(Julius 4th)는 " 야 이참에 교황청이 이탈리아 통일각 아니냐?" 하면서 외세를 끌어들여 이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망상을 하게 됨.
우선 교황 말은 거지 발싸개만큼도 안 들어쳐 먹던 베네치아를 혼내주겠다고 프랑스를 끌어들였다가 베네치아 군을 격퇴한 후,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자 스페인 군을 끌여들여 프랑스 군을 격퇴한 후, 스페인도 쫒아내겠다고 신성로마를 뜰여들이려다

신성로마 - 스페인 제국 황제 카를 5세.
신성로마제국 황태자와 스페인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 5세에 의해 스페인과 신성로마가 합스부르크 가문 아래 통합되면서 결과적으로 이탈리아를 합스부르크에 넘겨버리게 됨. 카를 5세 지배 하에 통합된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하는데.....
이제부터 중략. 쓸거 너무 많음. 파비아 전투 전 부분만 설명함.

1525년, 프랑스에 반역하고 합스부르크편으로 붙은 부르봉 공작(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III,_Duke_of_Bourbon)이 이끄는 합스부르크군이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공성하기 시작함. 이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참에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가겠다고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병력 4만을 이끌고 이에 맞섬.

병력이 열세인 합스부르크군은 이탈리아로 후퇴함.

프랑스군은 이를 추격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왔고, 합스부르크군 지휘관 라노이(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de_Lannoy,_1st_Prince_of_Sulmona)는 밀라노를 방어하는건 무리라고 판단, 스페인군 9000을 파비아에 남기고 본대를 후퇴시킴.

밀라노에 무혈입성한 프랑스군은은 10월 28일 파비아를 공격하기로 함.

파비아 북쪽에서부터 접근한 프랑스군은 비스콘티 공원 성벽을 허물고 비스콘티 공원에 진입함.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주력 병력과 고용한 란츠크네히트 병력을 이끌고 공원 북서쪽에 주둔하고 파비아 성 동쪽과 서쪽에 각 4천의 병력을 배치한 후 주력 중 일부를 동쪽 공원 성벽쪽으로 배치해 다가올 합스부르크군을 견제함.

10월 31일, 프랑스군 포병이 배치를 마치고 파비아에 포격을 시작함. 프랑스군은 가교를 건설해 약 6천명의 병력을 티치노(Ticino) 강 남쪽으로 보내 파비아를 완전히 포위함.
파비아 주둔 스페인군에게 식량은 1년치 정도로 넉넉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용병들에게 지급한 돈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지휘관 de Leyva(https://en.wikipedia.org/wiki/Antonio_de_Leyva,_Duke_of_Terranova)는 교회에 있는 금을 징발해 용병들에게 지급했다는 카더라가 있음.

11월 중순, 마침내 파비아 동쪽과 서쪽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프랑스군이 돌입함. 프랑수아 1세는 직접 동쪽 성벽을 공격했지만 우수한 스페인군의 화력에 격퇴당하는데 여기서 약 1천명 가량의 프랑스군이 죽었다고 함. 이후 계속되는 비에 포병도 파비아에 화력을 퍼붓지 못하자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감. 직접적인 공격에서 막심한 피해를 보았던 프랑스군은 파비아를 말려죽이기로 결정하고 파비아에 있는 스페인군의 식량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리도록 함.

프랑스군이 파비아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남부 제노아에서는 친 합스부르크 세력과 친 프랑스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하였고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남쪽을 공격하던 병력 6천과 제노아 용병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https://en.wikipedia.org/wiki/Andrea_Doria)의 함대를 고용해 제노아를 점령함.(나중에 안드레아는 프랑스가 임금을 체납하자 1528년 스페인 편에 붙음. 이후 안드레아 도리아는 기독교 함대 지휘관으로 오스만 함대와 맞섰음)

6천명 가량의 프랑스군은 쉽게 제노아를 얻었지만 스페인 해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려 한다는 소식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계속 남하할수밖에 없었고 대신 합스부르크를 배신한 란츠크네히트 Black Band 약 5천 병력을 고용해 그 자리를 메꿈.(초록색 부대마크)

프랑스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5천 가량의 합스부르크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했지만 곧 black band 와 프랑스군의 협공에 격퇴당함.

다음해인 1525년 1월, 스페인 해군을 이탈리아에 상륙시키지 못한 합스부르크는 어쩔수 없이 양면전선을 형성하기로 함. 합스부르크군이 스위스 본토를 공격하자 프랑스군에 고용되어 있던 스위스 용병 중 5천명 가량이 본국을 지키기 위해 철수했고, 병력이 넘치는 합스부르크는 란츠크네히트 16000명을 추가로 이탈리아에 투입함. 이제 이탈리아에 전개된 양군의 병력은 비슷해졌고, 합스부르크군 지휘관 라노이는 파비아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함.

노란색으로 표시된 비스콘티 공원은 약 5마일에 걸쳐져 펼쳐져 있었는데 약 5미터 가량의 벽으로 둘러쌓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미라벨로 성이라는 작은 중세 성이 위치하고 있었음. 공원 내부는 숲과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음.

병력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았음.
1. 파비아에서 농성중인 6천명 가량 스페인군. 파이크병과 총병으로 이루어진 테르시오 부대로 지휘관은 스페인 용병대장 de Leyva임. 식량은 많았지만 돈과 화약이 떨어져 가고 있었음.
2. 이를 지원하는 합스부르크군은 약 22300명 정도로 파비아를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군 동쪽에 주둔지를 차렸음. 마찬가지로 무리하게 병력을 추가 파견해 용병들에게 지급할 돈이 떨어져가고 있어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야 했음.
4. 파비아 서쪽에 프랑스군 약 5천과 중포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5. 프랑스 국왕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 약 8천명과 프랑스 경기병대 약 1000명이 포병대와 함께 파비아 동쪽을 포위하고 있었으며 비스콘티 공원 동쪽에서 접근해올 합스부르크군에 대비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음.
파비아 남쪽에는 프랑스군 약 1천명이 다리를 막고 있었고
3. 국왕 프랑시스는 비스콘티 공원 북서쪽에서 중기병 3200명, 란츠크네히트 Black Bands(합스부르크를 배신한 집단임) 3000명, 프랑스 보병 2000명 가량과 다수 포병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음.
파비아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합스부르크군 병력구성은

란츠크네히트 12000명(파이크병과 총병),

스페인군 5000명(정예 총병대 3000, 경기병 히네테스 2000), 이탈리아 용병 3000명 정도에 독일 기사 1500명, 용병 중기병 800기 가량이었다고 함. 파비아에 도착한 후 지휘관은 이탈리아 용병대장 페스카라 후작(https://en.wikipedia.org/wiki/Fernando_d%27%C3%81valos)으로 변경되었음.

프랑스 군은 총합 26200 정도로 프랑스 보병 6000명(총병과 일반 보병대), 스위스 용병 8000명(파이크병), 란츠크네히트 black bands를 포함한 용병 9000명(파이크병), 프랑스 기사 2000명, 맨앳암즈 기병 1200명 가량이었음.

Bad War, by Hans Holbein the Younger,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트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
양군은 스위스 용병, 란츠크네히트 등 파이크병이 주력이었는데
약 3주간의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하였고, 합스부르크 지원군은 소규모 기병대를 보내 포위망을 남쪽으로 우회해 파비아에 보급품을 전달하고 명령을 하달하는데 성공함. 명령 내용은 우리가 포로 신호를 보내면 성 밖으로 나와 싸우란 것이었음.
2월 셋째주, 합스부르크군은 다급해졌음. 돈이 다 떨어져가서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용병들이 전투를 거부할 조짐도 일어나고 있었음. 지휘권을 이양받은 페스카라는 큰 피해 없이 후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대로 대치상태를 이어가다가는 보급과 임금 체납으로 사기가 떨어진 합스부르크군이 와해될 것으로 보고 선공을 결정함.

페스카라의 계획은 간단했는데 포병대가 주둔지에서 포격을 퍼부으며 시선을 끄는 동안 본대는 북쪽에서 비스콘티 공원 벽을 무너뜨리고 몰래 잠입, 프랑스 국왕이 주둔중으로 예상되는 중앙의 미라벨로 성을 공격해 프랑스 국왕을 생포하는 것이었음. 프랑스 국왕은 미라벨로 성에 없었지만 아직 합스부르크군은 그걸 모르고 있었음.

선두에 있던 스페인 머스킷부대 약 3000명(초록 부대마크)은 프랑스 국왕이 있을것으로 예상되는 미라벨로 성을 점령하기로 했고 그 뒤로는 경기병 1000 가량과 경 포병대가 이를 지원하기로 함. 그 뒤로는 중기병대와 란크흐네히트가 주력인 보병대가 조용히 따라왔음.
이제부터는 좀 더 깔끔한 영상으로 대체함.

2월 23일 밤 10시경, 합스부르크군이 움직이기 시작함. 비스콘티 공원 벽 주위를 동던 프랑스 기병대는 이를 발견하였으나 지휘관은 합스부르크군이 후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국왕이 있는 본대에 보고하지 않았고, 자정쯤 비스콘티 북쪽에 도달한 스페인 공병대는 성을 부수기 시작함. 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합스부르크군 주둔지에 있던 포병들은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퍼붓기 시작함.

합스부르크군 포병대가 시선을 끌어준 덕에 동쪽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24일 새벽 4시에야 상황을 파악하고 적을 맞이하기 위해 병력을 전개함.

새벽 5시쯤 선두에 있던 스페인군 총병 3000여명은 성벽에 뚫은 구멍을 통해 비스콘티 공원 북쪽 숲속에 짐입하였고, 주변의 성문을 염. 이 성문으로는 합스부르크군 경포병대와 경기병대가 진입하였는데, 해가 떴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프랑스군은 이를 파악하지 못했음.

새벽 5시 30분, 동쪽에 주둔중인 프랑스 기병대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진하다가 합스부르크 기병대와 교전을 시작함. 안개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어 프랑스 보병과 포병, 스페인 머스킷 총병들은 적과 교전하지 못했고, 이 와중에 합스부르크군 경포병대는 호위 없이 전진하다가 프랑스군 기병에 전멸하고 포를 빼앗김.

시끄러운 소리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기병대를 보냄. 이들은 숲에 숨어있는 스페인 총병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 교전 중인 합스부르크 경기병들을 측면에서 공격해 격퇴한 후 본대로 돌아와 합스부르크군이 공격했지만 모두 격퇴했다고 보고함.

이 때, 사정없이 포격을 퍼붓던 합스부르크군 포병대가 포격을 잠시 멈추더니 단발로 세발을 순서대로 발사함. 이 신호를 들은 파비아 주둔군은 북쪽으로 나와 파비아 동쪽에 있던 프랑스군이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차단함.

6시 30분, 숲에서 숨어있던 스페인 총병들이 숲에서 나와 미라벨로 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함. 이들은 곧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에 격퇴되어 다시 숲속으로 후퇴했고, 이 와중에 합스부르크 본대가 열린 성문을 통해 비스콘티 공원으로 진입함.

먼저 진입한 란츠크네히트 장창병들은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프랑스군은 이에 맞섰지만 수적 열세에 밀리기 시작함.

상황을 파악한 프랑수아 1세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숲 너머로 포격을 명령했고, 합스부르크군은 이 포격에 피해를 입은것으로 보임. 합스부르크군은 우선 스페인 히네테스 기병 2천여명으로 프랑스군을 낚았는데, 프랑수아 1세는 여기에 낚여 프랑스 중기병 4천명을 직접 이끌고 돌격함.

프랑스 중기병들은 스페인 기병을 격퇴했지만 곧 란츠크네히트에 포위당하고 스페인 총병대의 공격을 받음. 이때쯤 동쪽의 스위스 용병대도 합스부르크군에 격퇴됨. 프랑스 포병대는 앞에 있는 아군 중기병에 가려 적에게 포격을 퍼부을수 없었고

프랑스군에 고용되었던 Black Band 변절 란츠크네히트 4000명과과 프랑스 중보병 2000명이 나서 전황을 뒤집으려 했지만 동쪽의 스위스 용병을 정리한 합스부르크 란츠크네히트들이 몰려오자 그대로 전멸하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포로로 잡힘.

프랑스군은 전면패주했고, 서쪽에서 파비아를 포위하던 프랑스군과 대열을 유지하며 후퇴한 스위스 용병들을 제외한 많은 프랑스군이 후퇴중 사살되거나 강을 건너다 익사함.
프랑스군은 약 15000명이 전사했고 합스부르크군은 최대 3천명 가량이 전사했다고 함. 여기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프랑스 중기병들은 귀족들과 기사 등 지휘관으로 프랑스의 주요 전력이었음. 손실하면 쉽게 다시 양성해낼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던 것.

이렇게 프랑스 군이 패배하고 국왕이 포로로 스페인으로 압송되면서 프랑스의 패배로 끝나는것처럼 보였지만,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루이스(Louise of Savoy)는 재빨리 잉글랜드, 교황청, 오스만에 사절을 보내 지지를 얻어 합스부르크에 대항했고, 합스부르크 역시 자금의 소모가 막대했기에 전쟁을 지속할수 없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듦. 이후 1526년 조약을 통해 풀려난 프랑수아 1세는 파리로 돌아가자마자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를 포기한다는 내용을 제외한 조약을 모두 파기함에 따라 합스부르크는 아쉬운 승리로 만족해야 했음.

이후 프랑스의 지지를 얻은 오스만 술탄 슐레이만 1세는 혼란한 틈을 타 다시 한번 유럽 정복의 꿈을 꾸게 되는데....
참고 영상 : https://youtu.be/mcprW-tXuaA, https://youtu.be/Smh9pEIFa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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