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엔. 0엔이야."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가진 패가 많다.
예쁜 얼굴, 87G의 미드, 든든한 부모님 빽, 전세계에 통하는 화려한 연줄.
슈퍼 광고지마냥 발에 채이는 온갖 사교회의 초대장.
꺼내기만 해도 직원들이 그랜절을 하는 블랙카드.
그리고 자기 맘대로 써넣을 수 있는 백지수표.
그리고 그녀가 알고있는 최고의 구애법은, 개막부터 모든 패를 쏟아붓는 켄터키식 구애.
그 시각, 켄터키 출신의 친할머니인 오르펜은 손녀 생각을 하다 갑자기 재채기를 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손녀가 훌륭한 켄터키 호스걸로 자라난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자기가 가진 모든걸 동원해 '사토노' 영입을 시도하던 다이아에게, 사토트레는 웃으며 0엔을 불렀다.
당장 수표에 0을 써넣고 루팡다이브를 하려던 다이아를 제지한 사토트레가 말을 이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거라고 하잖아?
그게 바로 징크스 아닐까?"
"그걸 깨는걸 보여주면,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줄게."
"0엔을 지불해줘. 그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테니."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사토트레의 눈은 그 무엇보다 진지해보였다.
그 다이아마저 잠시 말을 잊고 고개만 끄덕거리게 할 정도로.
"그리고 옷은 제대로 입고 나가렴."
0.5초만에 벗어던진 치마랑 블라우스를 주섬주섬 다시 입으며, 다이아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다이아는 응애지만 바보는 아니다.
사토트레가 말한 '0엔'은, 공짜가 아닌 0의 가치를 가진 무언가다.
다이아의 신탁 계좌에는 0이 많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0을 살 수는 없다.
그녀 앞에 놓인 수수께끼이자 깨야 할 '징크스'에, 다이아 안의 호승심이 오랫만에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다이아의 수수께끼 풀기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얘기를 꺼낸 건 신뢰하는 가족이었다.
트레이너 왈, 자신과 결혼하려면 0엔을 가져오라는 말을 전했다.
그걸 들은 다이아의 아버지는 잠깐 고민하다 이내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다.
"현명하군! 역시 내 딸을 맡길 만한 재목이야!"
뒤이어 답을 깨달은 다이아의 어머니도 이내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게 뭔지 알려달라며 애교도 부려보고, 우는척도 하고, 바닥에서 뒹굴며 생떼를 부린 다이아였지만,
사토노 부부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네 힘으로 풀어보렴.'
'응원하고 있으마'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만 해준 부모님에게 삐진 다이아는 침실에 틀어박혔다.
학교에 돌아가서도 다이아의 수수께끼 풀기는 계속되었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전부 붙잡고 물어본 다이아.
0엔을 지불할 수 있는 물건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 수만큼의 답변이 돌아왔다.
키타짱이 준 씨앗은행 지폐는 답이 아니었다.
맥퀸씨는 '제로칼로리 비슷한거 아닐까요?' 라고 말했지만, 가져간 다이어트 콜라는 사토트레가 맛있게 마셨다.
크라짱은 '0엔짜리 물건이면 짝퉁을 말하는게 아닐까?' 라며 가짜 롤렉스를 줬지만, 역시 오답이었다.
후진씨는 0엔짜리 빈곤 생활인거야! 라고 말했지만, 사흘만에 두손두발을 다 들게 되었다.
박신씨가 한참을 고민하다 침대 밑 수트케이스에서 꺼내준 100달러 지폐 역시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비밀이라고, 슈퍼 뭐시기라 했지만 까먹넜다.
가장 연륜이 많아보이는 라모누씨. '시시한 남자네'라는 한 마디를 던지고 달리러 나갔다.
같이 간 맥퀸씨는 정신병자한테 뭘 기대했냐며 침을 뱉었다.
실제로 연륜이 많은 마루젠스키씨.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라며 웃었다.
이사장님. '기밀!' 이라고 써진 부채를 펼쳐보였다.
이사장 비서 씨. '좋은 남자네요~ 나한테도 그런 인연이 없으려나' 라며 웃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갔다.
평행세계의 다이아였다면 진작에 '켄터키식 구애'에 이어 '켄터키식 청혼' (본인 동의가 없는 포장이사)를 시도했겠지만,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사토트레의 모습은 다이아에게 납치감금이란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게 했다.
이제는 전 담당인 다이아였지만, 언제 트레이너실을 방문하건 항상 반갑게 맞아주고 이야기에 응해 주었다.
다른 담당을 맡고 나서도, 담당은 소중한 학생이지만 자신의 애마는 다이아밖에 없다고 공언했다.
휴일에는 다이아와 같이 시간을 보냈고, 사토노가의 가족 모임에도 가능한 대로 참석했다.
하지만 다이아의 루팡 다이브만은 번번히 피해냈다.
수백가지의 답을 내밀었지만 돌아온 건 고개를 젓는 또레나상의 모습.
몇년째 희망고문을 당한 다이아의 멘탈은 한계에 달했다.
18세 생일이 가까워지자 그녀의 스트레스는 최고조를 찍었고
방에 틀어박혀 손톱을 물어뜯으며 이를 가는게 매일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룸메가 피를 싸기 시작하자 슬금슬금 도망치던 키타산.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생각난거지! 뭔데! 답이 뭔데!"
"아니야 미친년아! 나 18세 된지 꽤 됐잖아? 은행계좌 만들려 하거든. 같이 가주라."
방에 처박혀만 있으면 뭐가 되겠냐는 키타산의 일침에 입을 꾹 닫은 다이아.
절친의 손에 질질 끌려나간 그녀가 도착한 곳은 사토노 소속의 은행이었다.
친구 좋은게 뭐냐며 잘 부탁한다는 키타산을 한대 쥐어패는 사이,
그룹 오너의 따님이 행차한걸 본 은행은 발칵 뒤집혔고
이내 지점장이 신발도 제대로 못 신은 채 뛰어나왔다.
그리고 사토노뱅크 역사상 가장 신속한 계좌개설이 이루어졌다.
자기 이름이 박힌 통장을 보며 웃는 키타산과 오늘도 공치겠구나 생각하며 한숨짓는 다이아.
그리고 그녀의 눈에 0이란 숫자가 들어왔다.
눈이 뒤집혀서 야 그거 줘봐! 라고 괴성을 지른 다이아에게 개쫀 키타산은 순순히 통장을 넘겼다.
잔고 0엔.
그리고 처음으로 다이아의 머릿속에 광명이 비쳤다.
어른이 되어야 만들 수 있는 개인 계좌. 어른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 자기 자신만의 책임의 시작.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모든 이의 출발신호. 잔고 0엔.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가진 패가 많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간다는 과정만은 돈으로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어른이 되는 다이아는 깨달았다.
블랙카드를 가졌고, 신탁계좌에 예금이 많고, 각종 잡무는 비서가 처리해주는
'사토노' 라면 볼 일이 없을 잔고 0엔.
어른이 돼서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에 나서는 '다이아몬드'라면
첫 계좌를 만들 때 당연히 보게 될 잔고 0엔.
그리고 트레이너는 기다리고 있었다.
'사토노'라는 신칸센을 타고 성공에 닿는 대신, '다이아몬드'와 같은 출발선에서 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생각한 답이 맞냐고 물었다.
수화기 건너편의 사토노 회장은, 딸이 첫 G1을 따냈을 처럼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이보다 명백한 답은 없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마법처럼 흘러갔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법적으로 은행계좌를 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사토노 그룹의 호텔에서 열린 다이아의 생일파티 다음날,
밤늦게까지 다이아와 사교댄스를 춰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한 사토트레.
트레이너실의 불은 벌써 켜져 있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자신의 애마인 다이아몬드.
어제 밤까지만 해도 실크 드레스를 입고 사토트레의 품 안에서 몸을 맡기던 그녀는
오늘은 교복을 입고 소파에 다소곳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답은 뭘까?' 라며 미소짓는 그의 눈 앞에, 빳빳한 새 통장이 내밀어진다.
오랫만에 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다이아는 잔고 0엔이라 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트레이너는 박수를 쳤다.
두 손으로 만드는 팡파르를 바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기어코 징크스를 깨내고야 만 자신의 애마를 위해.
"정답이다. 현금술사."
눈 깜짝하는 사이, 다이아의 치마와 블라우스가 하늘에 날았다.
루팡 다이브로 날아오는 다이아를 보며, 사토트레는 손을 뒤로 돌려 사무실 문을 잠궜다.
속옷만 입은 그녀가 트레이너를 바닥에 넘어뜨린다.
얼굴에 쏟아지는 키스를 받아내며, 지금의 담당에게 오늘 트레이닝은 쉰다고 문자를 보낸다.
다이아몬드는 훌륭하게 대금을 지불했고, 이제 그가 약속한 댓가를 넘겨줄 차례였다.
제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삶.
아쉬움은 하나도 없었다.
두 명이 병주해갈 인생이 지금 막 시작하니까.
핏발 돋은 눈으로 벨트의 버클을 푸는 다이아를 보며 사토트레는 자랑스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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