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환상이 걷히기 시작하자 라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현실에 적응하려 애썼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자마자 그는 허리춤을 더듬었고, 곧 센티널 블레이드의 칼자루에 왼손을 갖다 댈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져 나오는 그의 주인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초인적인 재생 능력이 강렬한 빛에 빠르게 손상되어 가는 시신경 세포를 복구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태양같이 빛나는 눈 속에서 겨우 희미하게 보이는 눈동자를 찾아 똑바로 바라보고 나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불경한 것이, 우리 종을 파멸로 이끌었구나.'

라의 마음에 속에서 거대한 분노가 솟구쳐 올라왔다.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인 이것이, 수만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우리 종족을 기만해 오다가, 종국에는 불경한 힘으로 자신을 위한 돌연변이 노예 군단을 만들어 그 절반을 파멸의 힘에 바치고 인류 전체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도대체 무엇이 인류를 위했다는 것인가?' 그 동안 바친 세기에 달하는 충성심이 모두 배신감으로 바뀌자, 이제 그는 마음 속으로 앞에 있는 오만한 생물을 죽이기 위해 수천 가지의 방법들을 계산하고 있었다. 종족 전체를 대신해 이 가늠할 수 없는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야 했다.

황제는, 여전히 기계와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는 그로부터 마치 수백, 수천만의 존재들에게 동시에 응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제는 그 황금빛 눈으로 자신의 영혼의 장막을 통째로 벗겨내 모든 것을 읽고 있었다. 이미 그것은 패배한 싸움이었다. 지금 움직인다면 그의 존재는 세상에 없게 될 것이고 이 모든 추악한 비밀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으리라. 이제 그에게 남은 기회는 오로지, 수천만 분의 일보다도 못한 가능성, 말로서 그의 집중력을 흩뜨리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 뿐이었다.

라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제 생각을 읽고 계시겠지요." 그는 목소리에 담긴 분노를 억누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것이 당신이 수만년 간 행해 온 일의 결과입니다. 당신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을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리낌없이 제게 보여주며 이해를 구하는군요."

+ 이미 네게 보여주었다시피 짐이 행한 모든 것들은 종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

"무엇이 필수불가결했다는 것입니까? 당신은 종교가 그 사악한 것들을 키우는 근원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종교를 만든 자는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이 인류의 적이 아니라면 어째서 이런 기만행위를 한 것입니까?" 라가 왼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옥좌를 향해 약간 전진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인이라면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 짐이 고대에 퍼뜨린 가르침이 없었다면 인류는 문명의 길에서 벗어나 천 년도 버티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었다. 짐은 무지한 고대 인류를 통제하기 위해 사랑과 평화라는 통합의 기본 요소를 종교화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오해로 인한 갈등과 비극이 동반되었으나 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

"당신은 인류를 차가운 우주로 이끌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는 테라 - 솔라 세그멘툼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많은, 더 큰 위협에 노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입니까?" 라가 다시 한 번 옥좌로 약간 전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큰 움직임은 아니었다.

+ 위험을 두려워 한 인류종은 모두 멸종했으니라. 고대 테라에서 1천년기에는 바다로 나아가지 못한 민족이, 2천년기에는 하늘을 날아보지 못한 민족이, 3-4천년기에는 우주로 나아가지 못한 민족이 도태되었다. 이처럼 인류가 우주로 나아가지 못했다면 도태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었고, 이는 다른 모든 외계 문명에게도 동일한 조건이었다. 인류가 태양계에서 벗어나 가장 가까운 외계 지성체의 문명들과 조우했을 때, 그들 중 하나는 스스로를 가상의 세계에 가두어 놓고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종족은 완전히 소멸되어 어떤 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항성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류의 운명이 이와 같았으리라. +

"그렇다면 어째서 인류에게 이마테리움을 소개하고 은하계의 끝자락까지 뻗어 나가게 만든 것입니까? 초광속 항행 방법은 워프보다는 비효율적이나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은 만족하지 못하고 인류가 알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게 만들고, 가면 안되는 곳에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인류는 오염되었고 당신이 원하는 통제는 더욱 힘들게 되었습니다." 라가 센티널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약간 들어올렸다. 검집에서 날이 드러났다.

황제는 계속 라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곧바로 대답했다. + 인류의 탄생 이전부터, 오염된 지성체의 수는 이 은하계가 품은 별들의 숫자와 같았다. 이는 가장 현명하다 자부했던 오래된 종족이 멸종을 앞두고 자포자기 속에서 벌인 행위에서 비롯된 결과였느니라. 만일 짐이 워프를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그 '오류'에 도달하여 제거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우리 종족의 무지 속에 더 빠른 파멸을 선사해주었을 것이다. 또한 워프는 오로지 워프로 상대할 수 밖에 없으니 내가 인류에게 이를 가르쳐야 했을 또다른 이유이다. +

"그렇다면 어째서 스스로 불경한 힘을 거래하여 그것을 손에 넣은 것입니까? 그리고 그 힘으로 프라이마크라는 결함을 가진 반신들과 그 아랫 것들을 만들어 파멸의 군세에게 넘어가도록 방치했지요.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웹웨이의 실패도 이 때문 아닙니까?"

+ 그 역시 필수적이었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

"그것은 필요가 없었고,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커스토디안이 전광석화와 같이 칼을 뽑아 주군의 면전에 들이댔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이고자 했다면 칼이 다 뽑히기도 전에 죽어 있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황제는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마냥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 라 엔디미온. 너는 짐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너는 모든 분야에 정통하며 테라의 모든 역사를 잘 알고 있느니라. 네가 직접 해보겠느냐? + 라는 황제의 말에 혼란스러워 했으나 곧 자신의 의지에 반해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