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5억년 버튼
꿈 속에서 너를 봤다.
남색 긴 머리가 하안 이마를 가로지른 너는, 그 매끄러운 머리칼이 온통 흐뜨러진 채 푸른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리스, 너 떄문이야.
전부 네 잘못이야, 네가 모든 걸 망쳤어.
그 만용 때문에 네가 모두를 죽인거야.
네가 망가트렸어. 계획도, 세상도.
너 때문에 모든 게 무너졌어.
바닥을 보며 흐느끼는 너.
듣기만 해도 밀려오는 슬픔에 순간 숨이 멎었다.
그런 너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못박힌 듯.
내 학생에게 가야 해.
꿈이던 아니던, 네가 우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리질렀다.
움직이지 않는 입으로, 떨지 않는 성대로 외쳤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리스!"
몇 번이나 그렇게 소리쳤을까.
마침내 네가 눈물 젖은 얼굴로 날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분필로 그린 그림이 흑판에서 지워지듯, 그 서러운 장면은 내 망막 한켠의 어둠 속으로 흩어져...
***
[ "크윽?! 헉! 허억...!" ]
[ "눈이..." ]
분명 눈을 떴는데도 주변이 어둡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눈이 흐리고, 팔다리가 저리다.
[ "으으..." ]
팔을 끌어안는다.
몸이 차갑다.
뱃속은 비어 있는데 속이 뒤집어질 듯하다.
[ "읍... 우욱..." ]
[ "여긴... 어디야?" ]
알 수 없는 기계음, 모터가 도는 소리, 그리고 차가운 바닥이 느껴진다. 이게... 대체...
< 드디어 깨어났군요. 선생. >
이질적인 기계음이 날 부르자 모골이 송연한 느낌이 든다.
공포와 함께 생존본능이라도 깨어난 건지 즉시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 몸을 일으킨다. ]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어둡고 차가운 공간. 쇠로 이루어진 서버실이 원통형이라면 이렇게 생겼을까.
그리고 한가운데,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기계장치가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헤세드의 본체보다 조금 더 큰 둥근 기계는 바닥과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그것이 아무 동작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런 기계는 끝내 모른척 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런 것에 신경쓰는 대신 아픈 머리를 붙잡고 몸을 추스르는데 한창이었겠지.
.
.
.
그 기계가 푸른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 "...당신은 누구지?" ]
혼란과 공포 속에서, 선생은 기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 질문부터 하는 겁니까?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본기는 당신에게 현재 상황을 먼저 설명드리고 싶군요. 조금만 참아 주시길. >
[ "난 분명 비대위에서 회의중이었을텐데..." ]
[ "여기는 어디야? 다른 애들은?" ]
< 이곳은 관측우주의 가장 변두리.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이 주인공이 되지는 못할 장소입니다. >
[ "관측... 뭐?" ]
< 그리고 질문이 늘어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
찰나의 정적이었음에도 영원 같던 침묵이 지나고, 기계는 사실을 고한다.
< 키보토스는 멸망했습니다. >
< 그렇게 지칭되는 공간은 물론, 해당 명칭으로 지칭되던 계 안의 모든 생명 또한 이미 제거되었음을 알립니다. >
[ "...뭐라고." ]
침묵. 그러나 이번 침묵은 선생에 의해 탄생했다.
선생의 침묵은 곧 절망의 감정으로 물들고 다시 공간 전체가 울릴 법한 비명과도 같은 떨림으로 전환되었다.
격정 속에서 그가 말했다.
[ "거짓말, 거짓말이야." ]
[ "네가, 네가 한 짓이야?!" ]
[ "아, 아로나! 아로나! 아로나는 어디있어!!" ]
마치 그 반응을 원했다는 듯, 그러나 대답해줄 생각은 없다는 듯, 기계는 일부러 느리게, 선생의 반응을 기점으로 말을 이었다.
< 더불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려야겠군요. >
[ "키보토스가 멸망했단 건 거짓말이지?" ]
[ "그게 사실이면 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
< 본기를 지칭하는 이름은 AL-1S라고 합니다. >
선생의 사고가 정지했다.
[ "아... 리스...?" ]
< 우선 설명을 돕기 위해, 영상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로봇이, 'AL-1S'가 허공에 빛을 쏘자, 홀로그램을 통해 어떤 영상이 출력되었다.
***
―여행 시작부터 약 91억 9300만년 째, 탑ㅡ
어두운 재질의 철판처럼 맨들거리는 벽과 바닥 한 켠에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난생 처음 기차를 탄 아이처럼, 소녀는 즐겁게 떠들기 시작한다.
< 안녕하세요, 아리스입니다! >
< 갑작스럽지만 아리스, 우주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예전부터 상상만 하던 우주 용사입니다! >
.
.
.
***
영상이 끝나고ㅡ 선생은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했다.
[ "...이전 세계는 멸망한 게 확실해?" ]
< 예. 확실히 사라졌습니다. 수 없이 해당 좌표를 관측했지만 이제는 흔적도 없습니다. >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된 건지..." ]
[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어?" ]
< 알겠습니다. 앞서 재생해드린 파일보다는 설명에 긴 시간이 소요될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질문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질문해주시길. >
[ "...그래." ]
이윽고 'AL-1S'는 아리스의 오랜 여행 이야기를 시작했다.
***
< ...이것이 지금까지 선생을 태운 방주와 '아리스'의 여행 기록입니다. >
[ "아리스...너는... 그럼 날 위해서..." ]
[ "너는 괜찮았던, 거야?" ]
<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 "...괴롭지 않았던 거야?" ]
< ...괴로웠습니다. >
[ "...미안해. 내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
[ "네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지도..." ]
<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본기도 수억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지만 선생이 깨어 있었더라도 별 차이는 없었습니다. >
< 그리고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런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
[ "그, 그렇지..." ]
[ "그럼... 아리스는... 혹시라도..." ]
[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 ...예 있습니다. >
[ "그걸 전부 말해줘. 솔직하게." ]
[ "원망이던, 분노던 무슨 말이던 해도 좋으니까." ]
< ...... >
< ...선생, 당신을 데리고 키보토스를 떠난 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나의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오랜 시간입니다. >
< 그래서 할 말을 정리하는 게 쉽지 않군요. >
< ...... >
AL-1S는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한참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당신을 더 이상 선생으로 볼 수조차 없다는 겁니다. >
< 이제 당신이 마치 나의 자식처럼, 또는 나보다 우선하여 이 세상에 존재했던 거대한 무엇인가로 느껴집니다. >
< 이 모순되는 인식을 정리할 길이 없습니다. >
< ...선생이 말했었죠. 나는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고. >
< 선생이여, 이제 나는 신이 되었습니다. >
< 안타깝게도 이 클래스는 한번 취득하면 다른 클래스로의 전직에 큰 어려움이 생기는 듯합니다. >
< 말하자면 귀속이군요. >
<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
[ "..." ]
< 그리고 당신이 깨어나기 전까지, 나는 바위를 진 시시포스였습니다. >
< 나는 성간 여행 내내 키보토스와 같은 환경의 행성을 찾아다녔습니다. 실패했지만... >
<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테라포밍이 가능한, 그나마 비슷한 행성을 찾아다녔습니다. >
< 이 마저 실패하고, 나는 결국 나이 어린 항성을 찾아 새로운 태양계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
< 그리고 그 안의 행성들 중 하나에 새로운 인류를 창조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만. >
< 그간 수 많은 파괴와 창조가 반복됐습니다. 이 또한 많은 실패가 동반됐지요. >
< 결론적으로 나는 91억 9263만 1770년 135일 13시간 31.35초를 당신을 위한 프로세스에 소비했습니다. 이는 성간여행 시간을 포함한 기록입니다. >
< 나는 노력했습니다. >
< 오로지 히마리 선배의 첫 번째 임무, '선생님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해서 선생님을 구하도록' 하는 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
< 예. 다름 아닌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
[ "...너는 그 긴 시간동안..."]
< 지난 일은 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
< ...... >
< ...선생이여, 이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
< 나의 계산이 정확하다면, 당신은 당신이 이전에 살아가던 키보토스의 적어도 문화적, 문명적 관점에서 동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기간에 존재하던 인구의 보편적 인식을 기준으로 >
< 또한, 적어도 지금까지 관찰되었던 당신의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정의할 때 >
< 적어도 이 행성에서 당신이 '삶'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
[ "..." ]
< 나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
< 이 말 외에 더 할 말이 없습니다. >
< 따라서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질문하겠습니다. >
[ "..." ]
< 선생이여, 과거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이 곳에서 삶을 이어나가지 않겠습니까. >
[ "..." ]
[ "나는..." ]
선생이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짐짓 슬픈 듯 말했다.
[ "...못본 새 아리스가 너무 많이 커버렸네."]
[ "...더이상 선생님의 가르침은 필요 없겠구나." ]
< 그럴... 지도요. >
다시 침묵이 이어지다, 선생이 내려놓듯 말했다.
[ "...알겠어. 그렇게 할게." ]
< 현명한 선택입니다... >
<이제 당신은 깨어났고 나는 의무를 잃었습니다. >
< 나는 이제 곧 작동을 멈출 것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본기가 5억 8천만년 전부터... >
[ "그런데 말이야 '아리스'." ]
[ "너도 같이 나가지 않을래?" ]
< ...예? >
기계는 잠시 굳어 있다가 말했다.
<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 아직도 저를, 학생을 책임지고 싶으신겁니까? >
< 뭔가 오해하고 있군요. 당신이 나를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럴 방법도 없습니다. >
< 잊으셨습니까? 오히려 내가 당신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몇십억년 간. >
[ "그렇지. 정말 고마워. 아리스도, '너'도" ]
< ...의도 해석 불가. >
[ "너는 아리스가 아니잖아." ]
< 어떻게 아셨습니까? 앗. >
선생님에게 장난을 들킨 학생 같은 말투.
당황한 'AL-1S'에게 선생이 말했다.
[ "왜냐면, 너는 나한테 약간 화가 나 있는 것 같았거든." ]
< 그게, 무슨... 물론 맞지만요. >
[ "아리스라면 아마 처음에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 ]
[ "'선생님, 어디 아픈 덴 없습니까? 괜찮은 거 맞습니까?'" ]
["아니면... '배고프진 않으십니까?' 라던지."]
<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얼토당토않은 짐작을 하십니까? 어머니는 거의 92억년 간... >
[ "그야, 아리스는 아리스니까." ]
[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장 슬프고 괴로운 순간마저도" ]
[ "히마리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자신을 탓하는 착한 아이니까." ]
'AL-1S'가 완전히 말을 멈추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