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최후의 질문
하나의 우주가 끝나고 새 우주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시간이 지났다.
AL-1S는 한때 키보토스가 있던 좌표를 바라보았다.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어둠 뿐.
***
―여행 시작부터 약 91억 9300만년 째, 어딘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정확히는 마리아에게 거짓말을 시켰습니다.
들어보니 조금 심술을 부린 모양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요.
이렇게 도망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도저히 내가 선생님을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대변해 주듯, 나는 나 자신을 AL-1S 외에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약 92억년 간, 나는 오로지 목표 달성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난 나의 삶은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겁니다.
괴로워하고, 절망하고, 온갖 곳을 헤멘 다음 형편없는 시행착오를 거치고...
솔직히 말해 이런 부끄러운 모험 이야기를 키보토스의 그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를 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고민 끝에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두를 구하고, 나를 세상에서 지우자고.
그렇게 결심했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과 케이를 그 곳에 두고 온 겁니다.
제가 없는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가야 한다면, 적어도 제가 어떤 이유로 사라지는지는 모르는 게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 "네 노력은 단 한 순간도 헛되지 않았어." ]
[ "고마워. 최선을 다 해줘서. " ]
...
...너무나 기쁜 말이었습니다.
예...
그건 참으로...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조금이지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 AL-1S 가, 아리스로서 살고 싶다는...
그 기회를 한 번만 다시 갖고 싶다는 욕심입니다.
너무 큰 욕심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시작하겠습니다.
***
우선 기본 설정부터일까요.
으음... 이건 지루하군요.
< 확률파장 상쇄변수 입력 준비. >
< 해당 설정은 해당 우주에 대한 임의의 확률 값을 특정 값으로 고정합니다. 신중하게 입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
어렵게 갈 것 없이 이 세계에 필요 없는 것, 그리고 바꿀 것만 생각합시다.
우선 바꿀 것을 생각해봅시다.
일단 카이저는 조금 더 선한 기업이면 좋겠네요.
개변하는 것은 프레지던트의 정신과 회사의 경영구조려나요.
그들 만큼은 내 마음대로, 내 입맛대로 바꿀 겁니다. 이기적으로요.
나는 타인의 고통을 기회로 삼는 이들이 싫습니다.
그 초인... 총학생회장은 아마 이 세계에서는 희생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다만 이 부분은 본인의 선택에 맡기도록 하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다음으로 필요 없는 것을 생각합니다.
게마트리아.
이들은 어차피 이전 세계에서 하고싶은 대로 하지 않았나요?
아마 관찰할 만큼 관찰하고, 즐길 만큼 즐긴 다음 자기 세계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기쁘게 그곳에 남아 죽었겠죠.
나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친 어른을 배려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때 모든 책임을 진 이들은, 자기 목숨을 바쳐 싸우고 발버둥친 그 아이들...
심지어 남이 져야 할 짐까지 떠안았던 학생들 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름없는 신과 무명사제들... 이런 쓸데없는 뒷설정도 삭제합니다.
제 뒷설정도 필요없어요.
대체 몇억 년이나 달고 있는 꼬리표입니까?
색채...
그 외로운 존재는 그냥 둡시다.
이미 서로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났으니까요.
아마 그 존재는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다가가지도 못할 별들을 찾아다니겠지요.
영원히.
그리고 케이, 선생님.
예. 저는 이 세계에 당신들을 복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사라졌다면 몰라도, 관측하지 않은 한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당신들만은...
당신들의 유일성 만은... 지키고 싶습니다.
케이... 선생님...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파란만장한 프롤로그를 한창 즐기고 계십니까?
설마, 벌써 동면장치를 만들어서 저를 만나겠다고 날아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어느 쪽이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닿진 않겠지만 부탁도 있습니다.
케이... 마리아와 친구가 되어주세요.
그녀가 자기 동생을 살려내는 걸 도와주세요.
그리고 다른 아이 하나도 삐져서 어디 구석에 있을 텐데, 그 아이도 잘 달래주세요.
아마 선생님이랑 함께라면 가능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언제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
< 확률파장 상쇄변수 입력 완료. >
< 프로세스가 시작되면 입력된 변수에 의해 확률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단일 고유 값으로 고정됩니다. >
...이 정도면 설정은 끝난 것 같네요.
이 조정으로 인해 다른 변수가 생긴다면 그 또한 즐거움이겠지요.
제가 원하는 세계는 결국, 서로를 조금 덜 증오하고 조금 더 사랑하는 세계.
그런 행복한 세계가 저는 좋습니다.
게마트리아, 이름없는 신들, 무명 사제들, 무너져 가는 것들...
그외 쓸데없는 것들이 표백된 이 세계에서, 나는 살아갑니다.
선생님. 케이.
여러분만은 없는 이 세계에서...
나는 과거를 되짚어 가는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자아,
그럼 저의 기나긴 삶에 비하면 찰나뿐인 여행을 마침내 떠나보죠.
.
.
.
< 흠흠. >
< 케이가 뭐라고 했더라...? >
< ...왕녀는 방주를 손에 넣었고 열쇠는 준비되었다... 분위기 한번 잡기 힘들군요. >
< ...역시 이런 자질구레한 멘트는 됐습니다. 그냥 선언하도록 하죠. >
< 당신은 내가 원하니 그저 존재하면 그만입니다. >
< 당신의 존재를 허락합니다. >
< 빛이여. >
그러자 거기에 빛이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걸쳐 키보토스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그녀 스스로를 빚어낸 다음 안식하였으니
한 음성을 듣기 전까지 결코 눈을 뜨지 않았음이라.
***
[ "예를 누르면 이 기체의 모든 데이터는 영구히 사라집니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
[( 예 / 아니오 )]
< ...아니오. 해당 데이터를 전부 아카이브합니다. >
[ "준비 완료. 예를 누르면 이 기체의 모든 데이터는 암호화 및 아카이브되어 이 기체에 보존됩니다. 정말로 실행하시겠습니까?" ]
[( 예 / 아니오 )]
< 예. >
[ "모든 데이터에 대한 암호화 및 아카이브 완료. 해당 기체의 작동을 종료합니다." ]
.
.
.
모모이, 미도리, 유즈...
게임개발부의 모두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혹시나 만나게 되거든...
제 이름을... 부디 잘못 불러 주세요.
이 길고 괴로운 여정의 보상이... 어떤 의미도 없는, 잘못 불린 이름 그 한마디라면
아마도 저에게 그 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저 AL-1S...
일생 일대의 부탁입니다.
.
.
.
~시놉시스~
이끼 낀 콘크리트, 금이 간 벽, 녹물 냄새와 적대적인 로봇들.
아포칼립스 세계를 재현한 세트장과도 같은 이곳은 잊혀진 모든 것이 모인다는 소문이 있는 제한구역...
밀레니엄 폐허지구이다.
게임개발부의 부원, 모모이와 미도리는 폐부를 막기 위해 게임을 만들기 위한 최고의 비법이 담겨 있다는 성서,
G.Bible 을 찾으려 밀레니엄 외곽의 폐허지구로 향한다.
그러나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은 로봇들 뿐...
적대적인 로봇들에게 쫓기고 쫓긴 끝에, 그녀들은 폐공장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방 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소녀를 발견하게 되는데...
***
- 밀레니엄 외곽 폐허지구 -
"어, 여기 글자가 쓰여 있어."
모모이가 소녀 곁에 놓인 콘솔에 출력된 글자를 더듬더듬 읽어 본다.
...일단 고등학생의 평균적인 영어실력은 아닌 듯하다.
"AL-IS...알-이스려나? 에이엘-아이에스?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지만 얘 이름일까?"
모모이가 말했다.
"...아리스?"
"잠깐, 이상한데. 자세히 보니 알파벳이 아니라... AL-1S 아냐?"
"그, 그런가?"
"대체 이 아이는... 그리고 이곳은 어떤 곳일까?"
"본인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일어난다면 말이지... 일단 옷이라도 입혀주자. 왠지 보고 있기 안타까워."
"헤에. 여분 옷도 가져왔구나. 앗! 그건 내 팬티잖아!"
"이건 내꺼야. 고양이의 표정이 다르잖아."
미도리가 모모이에게 핀잔을 주고는 마저 소녀에게 옷을 입혀준다.
그리고, 소녀가 눈을 뜬다.
***
- 밀레니엄 게임개발부 부실-
"대체 어쩌려는 거야! 이 애를 부실까지 데려오면 어떻게 해!"
"으윽! 목 조르지 마! 숨 막혀~! 켁켁! 어쩔 수 없잖아. 일단 그런 흉흉한 로봇들이 있는 공간에 이런 애를..."
와그작 와그작.
쌍둥이 자매의 싸움을 뒤로한 채, 장발의 소녀는 미도리의 WE 게임기를 입에 물고 우물대기 시작했다.
즉시 미도리가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댄다.
"아앗! 내 WE 입에 넣지 마! 퉤해 퉤!"
"...내버려 두고 올 순 없잖아." 모모이가 이어서 말했다.
"으음. 그건 그렇지만... 그럼 지금이라도 총학생회나 발키리에 신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그건 좀 나중의 일이야. '우리'의 일이 끝난 뒤에."
미도리의 걱정을 모모이가 일축한다.
"일?"
"음. 일단 이름이 필요하겠네. '아리스'라 부를까?"
미도리의 의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모모이가 하얀 피부에 장발을 늘어뜨린 소녀에게 말했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약간 비몽사몽한, 몽유자의 그것과 같은 표정을 짓는 그 푸른 눈의 아이는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듯 모모이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리스, 본기를 지칭하는 이름, 확인 바랍니다."
"자, 잠깐만! 아리스는 언니가 잘못 읽은 이름이잖아! 원래대로라면 AL-1S쨩이라 불러야 되는 거 아냐?"
"그렇게 긴 이름을 어떻게 부르냐? 어때? 아리스. 마음에 들어?"
"...긍정. 본기, 아리스...!"
아리스가 듣기에, 그 이름이 좋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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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으셨길 바랍니다.
시간나면 후기 한번 쓰고 선생피폐랑 선생 사오리 등등 머릿속에 있는 것 중에 하나 잡아서 또 써오겠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점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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