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07. 우주를 여행하는 아리스를 위한 안내서

― 여행 시작으로부터 3개월째, 방주. ―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게임을 하는 시간이 조금 줄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규칙적으로 변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리스는 처음 몇 주간은 TSC호 내에서 할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게임에만 몰두했습니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실에 있던 게임들을 너무 많이 클리어해버린 겁니다...

이걸 아리스가 깨닫는 데 3주가 걸렸습니다.

게다가 깨달았을 때는 벌써 회차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을 제외하고도 패키지 게임 38개를 클리어해버린 후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터넷도 안 되니 온라인게임을 즐길 수 없다는 점이 정말 뼈아픕니다...

유즈랑 키웠던 아리스의 얼음파편 원소술사 빌드가 완성 직전이었는데 어째서 플레이할 수 없는 건가요...

고통스러워서 조금 울었습니다...

아 맞다! ◯월드도 그렇습니다!

저번에 완성한 4농축 밀렵단 정예를 써서, 펀치 스킬만으로 재트래곤 잡기 챌린지를 하기로 했는데 이것도 못 했습니다!

심지어 운동바보에 사나움 특성이었는데...!

아아... 그나마 이 게임은 로컬로도 플레이가 가능하니 다행인 걸까요? 기존 세이브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습니다만... 아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그러다 문득 남은 게임을 확인하고 싶어서 부실의 게임 수를 전부 세 본 것이 어제의 일입니다.

현재 부실에 있는 게임은 시리즈별로 묶지 않고 각각 세면 총 1532개... 그 중에서 지금까지 아리스가 클리어한 게임이 424개... 아, 이제 425개. 남은 게임은 1107개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들 중에는 지뢰찾기, 핀볼, 틱택토, 테트리스 같은 것들도 있으니 실제로는 좀더 적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리스는 틱택토 같은 걸 무한히 반복해서 할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결국 아리스는 하루 중 게임 시간을 6시간으로 제한했습니다.

...뼈 아픈 제한 플레이이기는 하지만 신작 게임을 살 수 없는 지금, 조금이라도 게임을 오래 즐기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게임시간을 제한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리스는 새삼 자신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정말 다행인 점은 회차플레이가 가능한 게임들이 아직 많이 있다는 겁니다!

아리스의 엄격하지 않은 기준으로는 이미 클리어한 게임들 중에서도 100개가 넘는 게임에 회차 플레이 요소가 있습니다!

이런 게임들은 엔딩 종류가 다르거나, 플레이어블 캐릭터 특성이 다르거나, 개별스토리가 존재하거나, 엔딩 후 플레이가 가능하거나, 매 회차마다 전혀 다른 컨셉플레이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발◯스게◯트 시리즈, 문◯ 시리즈, 림◯드, 롤◯코스터 ◯◯쿤 시리즈, 다◯소울 시리즈, 유◯파 시리즈, 패◯독스 시리즈!

정말 갓겜입니다!

...갑자기 얼마나 게임을 하고 있어야 아니스의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목표 행성은 언제쯤 도착하는 걸까요? 메인 시스템 패널이 있는 조종실에 가 봐도 적혀 있는 말들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에 코토리 선배가 작성해준 자동항법장치 설명서가 있을텐데... 그걸 한번 읽어봐야 할 것...

"우와!"

그렇게 생각하던 중 마침 TSC호의 옆을 지나는 행성을 보았습니다.

갈색 땅 위로 잔잔하게 퍼져 있는 구름같은 것이 햇빛을 받아서 은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정말 멋진 행성입니다.

아리스는 지금껏 저렇게 커다란 행성이 TSC호 옆을 지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행성이 큰 걸까요? 아니면 TSC호가 행성 가까이 온 걸까요?

아무튼 너무너무 내려가보고 싶게 생긴 행성입니다!

항법장치는 잠깐 끄고 내려가면 될 것 같으니 잠깐만 내려갔다 와야겠습니다!

"이게 끄는 버튼일까요?"

착륙 방법과 이륙 방법은 히마리 선배가 알려주었지만 항법 장치는 어떻게 조작하는지 잘 모릅니다.

일단 끄는 버튼 같은 게 있어 전원을 내리니 늘 웅웅거리던 소리가 조용해진 것이 느껴집니다.

이제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우주 용사의 첫 모험입니다!

***

괜히 내려왔습니다...

이곳은 춥습니다... 게다가 눅눅합니다...

눅눅함과 추움이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아리스는 처음 깨달았습니다...

착륙할 때 보였던 하늘은 또 왜 노란색인가요? 구름 색도 어쩐지 이상합니다.

아까는 예뻤는데, 아래에서 보니 어둑어둑합니다... 게다가 이상한 냄새로 가득합니다...

실망하고 TSC호의 해치를 다시 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뭔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아! 눈입니다!

하얀 눈송이 결정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모모이한테 배웠습니다! 눈송이는 혀를 내밀어서 맛보는 것이 상식입니다!

"에~"

혀를 내민 상태로 머리를 움직여 떨어지는 눈송이를 캐치하면...

치이익.

"케엑! 켁! 켁켁! 으엑!"

따갑습니다! 엄청 따갑습니다! 혀가 데이는 것 같습니다! 이게 뭡니까? 모모이!

치이익.

"아앗! 옷이!"

뭔가 이상합니다. 소매에 떨어진 눈송이가 옷을 녹이고 있습니다!

방어력을 낮추는 슬라임입니까!?

아리스는 부랴부랴 함선안으로 들어와 바로 해치를 닫습니다.

이 지옥같은 행성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쿠구구구구구웅...

이륙하는 방법을 까먹어서 한참 헤맨 끝에 간신히 TSC호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착륙할 때와 비슷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함내가 마구 흔들립니다.

이 행성이 아까 내려오기 전과 비슷한 크기로 보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듯 합니다.

내려올 때도 몇 시간은 걸려서 낮잠까지 잔 것이 기억납니다.

"아아...어쩌면 좋죠..."

옷 상태를 확인해 보니 소매 부분에 구멍이 났습니다. 눈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요?

모모이와 미도리가 선물해준 아리스의 소중한 옷이... 아리스, 바느질 같은 건 할 줄 모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려가지 말 걸 그랬습니다. 최악입니다!

적어도 엔지니어부가 준비해준 우주복을 입었어야 했는데...

조종실로 돌아와 보니, 뭔가 경고메시지 같은 게 떠 있습니다.

태양광 패널 손상?

아까의 착륙으로 인해 뭐가 망가진 것 같습니다. 한 두개가 아닙니다.

이거, 고칠 수 있나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일단 외부 카메라 화면을 띄워 봅니다.

"히익!"

뭔가 TSC호 외부가 새까맣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평평하고 반짝거려야 하는 태양광 패널들이 하나같이 쭈글쭈글하고 새까맣게 됐습니다!

...어쩐지 아리스가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아무래도 아까 그 행성은 아리스의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행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RPG게임에서도 처음은 정보 수집이 최우선!

아무래도 아리스도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토리 선배가 적어주신 자동항법장치와 TSC호에 대한 설명서는 종이책과 USB 두 종류가 있었죠?

일단 손에 집히는 것이 보기 편할 것 같아서 책부터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경악합니다.

"이건 너무 큽니다 코토리 선배...!"

엄청난 두께입니다... 법전인가요? 예전에 법전으로 사람을 때리면 합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 이 책도 무기로 쓸 수 있을 듯 합니다...

책 두 권을 양 손에 끼고 부실로 돌아와, 부실에서 가장 작은 공간을 차지하는 곳으로 가 봅니다.

아리스의 허리 높이인 조그만 책장입니다. 책이 세로로 꽂히지 못하고 가로로 꽂혀 있습니다.

설명서를 잠시 소파에 내려놓고, 모모이가 게임 시나리오 작성을 위해 사놓은 채 한번도 읽지 않은 우주에 대한 책을 펼쳐봅니다. 아리스는 아예 긴 소파에 책처럼 가로로 누워 자리를 잡고 한 페이지씩 넘겨 봅니다.

"...코스모스는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 있으며, 미래에 있을 그 모든 것이다..."

***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책들을 읽어보면서 아리스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는 게임 뿐 아니라 책 읽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책에는 아리스가 궁금해 하던 것들에 대한 답이 적혀 있을 때도 있고, 거꾸로 아리스의 호기심이 더 커질 만한 질문을 남겨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아리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아리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문구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모모이가 쓴 시나리오처럼 생소하고 또 멋있는 것이어서, 아리스는 게임을 할 때처럼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순간은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밥을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리스의 감각이 둔해진 탓도 있습니다.)

이렇듯, 책이 게임 만큼이나 중독성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게임만 규제하고 책은 규제하지 않는 걸까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아쉬운 점은, 부실에는 게임에 비해 책들이 한참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아리스가 세어본 바에 따르면, 만화책과 그림 작법서, 코토리 선배의 설명서에 유즈의 프로그래밍 책까지 포함해도 고작 48권이 전부였습니다.

책을 전부 읽으면 아리스의 호기심도, 아리스의 감동도 결국 이런 식으로 한계를 맞는 것일까요...

너무 아쉬웠습니다. 아리스는 아직 알고 싶은 것이 많은데.

눈의 결정은 왜 각자 모양이 다른 걸까요?

저번에 맛보았던 눈에 혀가 데인 이유는 뭘까요? 왜 그렇게 따가웠을까요?

어째서 ◯플은 다른 기기들이 이미 통일한 C타입을 혼자서만 쓰기 싫어하는 걸까요?

무선충전이 되는 기기들은 어떤 원리로 기기를 충전하는 걸까요?

이처럼 세상에는 궁금한 것이 정말 많습니다.

언젠가 선생님이 깨어나시고 아리스가 임무를 완수해서 키보토스로 돌아가게 된다면 전부 알아낼 겁니다.

지금 궁금한 것들도, 앞으로 알고 싶은 것들도!

아리스는 궁금한 게 많으니 이유를 알아내는 것도 물론 한참 걸릴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도 미리 알아보는 게 좋겠지요!

우선 아리스의 스마트폰부터 분해해봐야겠습니다!

***

고장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