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Лучшее - враг хорошего."소련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하는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은 클라우제비츠와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더 좋은'은 '충분히 좋은'의 적이다.’ 2차대전 참전용사였던 고르시코프 제독은 이후 소련 해군의 제독이 되고 소련 해군의 역량 강화에 힘을 쏟을 때 이 역시도 실천하였다.
냉전기 소련 해군이 NATO 해군, 특히나 미 해군을 상대로 절대적 우위를 점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만 15척에 이르고 훨씬 더 고도화된 전투함과 항공기, 핵무기,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의 보호를 받으며 해군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소련은 유럽과 중국을 직접 맞대고 있기 때문에 해군이 아닌 육군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어줍잖게 해군력으로 미국을 따라잡겠다 나섰다가는 바다에 나가서는 잘 싸우고는 돌아올 항구는 뺏기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고르시코프 제독은 소련 해군의 역량 강화에 나설 때 ‘더 좋은’ 해군보다는 ‘충분히 좋은’ 해군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거대한 항공모함보다는 강력한 타격력을 가진 미사일순양함을 건조하였고 NATO 해군의 접근을 방해하기 위한 잠수함 전력과 지대함/공대함 전력을 크게 늘렸다. 이들은 미 해군을 무너뜨리고 산타 모니카 해변에 장갑차를 내려놓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딱 원하는 장소, 원하는 순간에 상대의 대형 수상 전력을 격파하고 필요한 역량을 투사할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북대서양을 장악하는 건 택도 없지만 발트 해의 NATO 해군을 빠르게 제압하고 덴마크와 노르웨이 사이에 공수부대를 내려 둘 사이를 차단하는 건 가능하단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완성품이 좋지 않다는 건 다 알고 있다. 키예프급 항공순양함이나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중항공순양함을 보면 이게 항공모함은 항공모함인데 미사일이 달린 건 순양함 같고 순양함이라 하기엔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NATO 기준으로도, 심미학적, 기술적 기준으로도 비정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딱 원하는 곳 일대의 제공권과 제해권, 접근거부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항공모함이건 미사일순양함이건, 그걸 섞어 끓인 부대찌개건 충분하다.
고르시코프의 전략은 고르시코프의 사망과 소련 붕괴 이후에도 그 후신인 러시아에서 이어졌다. 소련 붕괴로 비대했던 대형 수상함 전력과 특수전력들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상당수의 전력을 스크랩, 해체하고 자신들의 핵심 방어 지역을 보호할 수단을 유지하는데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함들, 특히나 부대찌개 전력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오히려 더 확고하게 접근거부 전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온 뒤에야 다시 대형 수상함 전력을 키우고, 대외적 활동이 가능한 전력을 갖추는데 주력하였지만 러시아 해군의 기조는 분명 ‘더 좋은’보다는 ‘충분히 좋은’에 더 가까웠다.
이번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도 러시아 해군은 그 가치에 주목했다. 터키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닫고 비협조적으로 일관하고 있기에 바렌츠 해와 극동의 주요 전투함들이 들어올 수 없자 흑해에 있는 전력만으로 최대한 우크라이나 해군을 압박했다. 다만 러시아 해군 입장에서도 흑해는 중요도가 낮은, 상대적으로 변변찮은 해역인 건 사실이기에 압박을 확실히 가할 수 있는 전투함은 하나 뿐이다. 슬라바급 순양함 모스크바함이다.
모스크바함은 그 함선 위에 붙어있는 거대한 미사일 발사관이 증명하듯 접근거부를 이끌어내는데 최적화된 군함이다. 단독으로 미 해군 항모전단 하나를 막아서는 장판파의 장비와 같은 펀치력, S-300 미사일의 해상형을 탑재해 지역과 함대에 우산을 씌워줄 수 있는 방공력을 가지고 있다. 한 척이 얼쩡거리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어지간한 전투함과 항공기가 올 수 없게 한다. 누구든 마하 2.5의 속도로 날아오는 1톤의 폭약을 견딜 수 없다. 모스크바함이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해군은 주요 전투함들을 자침시킬 수밖에 없었고 오데사에 역량을 모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즈미이니 섬 전투에서 별다른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함을 필두로 한 러시아 해군 상륙전력이 오데사로 들이닥치면 서방으로부터의 보급로가 끊기게 되고 대도시 하나를 상실하는 위기가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이 붕괴할 때 16개 국가로 쪼개졌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르게이 고르시코프로부터 교육을 받은 건 러시아 해군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해군도 그의 후예다.
모스크바함의 침몰이 미사일 공격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나 일단은 우크라이나의 의견이 상대적으로 그럴 듯하고, 앞뒤 맥락상 주제와 더 밀접하니 미사일 공격에 의해 모스크바함을 격파했다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 해군은 러시아 해군보다 상황이 훨씬 더 열악하다. 위에서 말했듯 주요 전투함을 지침시킬 수밖에 없었고 즈미이니 섬의 경비대를 구원해줄 수도 없었다. 러시아 해군이 흑해를 돌아다니며 압박하는 상황에 정면으로 맞설 해상 전력은 없다. 미사일 고속정이 그나마 대항 가능한 전력이지만 전쟁 초기 나포당하며 전력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해군이 못해볼 상황이 아니다. 러시아 해군도 전체 전력이 집중된 것이 아니며, 모스크바함이 있어도 그를 보조해줄 다른 대형 수상전투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딱 하나의 전투함을 공격하기에는 ‘더 좋은’ 무기는 없지만 ‘충분히 좋은’ 무기가 있다.
바이락타르 무인공격기와 넵튠 지대함미사일. 이들보다 모스크바함을 공격하기에 더 좋은 무기는 차고 넘친다. 심지어 이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다. 보도에 따르면 넵튠 지대함미사일 발사대는 딱 하나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해군은 바이락타르로 모스크바함의 신경을 다른 방향으로 집중시키고 그 사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미 지난 몇 차례의 바이락타르를 이용한 견제가 있었고 지대함미사일을 통한 공격도 없었기에 방심하기엔 충분하다. 거기에 CIWS를 전부 돌파하고 타격한 것도, 모스크바함을 예인하는 과정에 폭풍우를 만나 결국 침몰시킨 것도 운도 따라줬다 믿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해군은 이번 전쟁 내내 고르시코프 제독의 전략을 그대로 따르며 러시아 해군에 한 방을 계속 날려주고 있다. 즈미이니 섬처럼 맞설 수 없는 곳은 과감하게 버리기도 하고 베르댠스크에 모여있는 러시아 상륙함들은 비대칭 전력인 탄도미사일 공격을 통해 파괴하였다. 무인공격기를 통해 부담없이 정찰과 타격, 정보습득을 이루어내고 가장 결정적 순간에 가장 강력한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 기함을 파괴하였다. 이제는 역으로 우크라이나 해군이 접근거부를 통해 러시아 해군 전투함들을 오데사와 우크라이나 인근 해역에서 밀어낼 수 있으며 오데사에 묶여있는 상륙저지 전력을 마리우폴이나 헤르손으로 보낼 수 있다. 이미 졸전을 펼치고 있는 러시아군에게 싱싱하고 사기가 드높은 전력이 다가오는 건 식은땀이 흐르게 할 것이다. 러시아 해군도 강력한 방공 및 타격 자산과 상륙자산을 잃은 만큼 오데사 상륙이 불가하다. 점점 서쪽으로 밀려 세바스토폴 인근에서만 얼쩡거리게 된다.
세바스토폴을 장악하는 건 택도 없지만 헤르손 인근의 러시아 해군을 빠르게 제압하고 헤르손과 크림 반도 사이에 증원부대를 보내 둘 사이를 차단하는 건 가능하단 말이다.
전쟁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가 있다.
이는 한편 역설적으로 우크라이나 해군의 상대인 모스크바함이 고르시코프 제독의 전략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했듯 중/항공순양함 같은 비정상적인 전투함들은 혼자서 제공권, 제해권, 접근거부를 이루어낼 수 있다. 러시아 해군은 모스크바함 하나를 통해 우크라이나 해역 전부를 통제하길 바랬고 그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피격되거나 상실되면 그 모든 걸 단숨에 잃게 된다. 미국이 항공모함은 항공모함답게, 상륙함은 상륙함답게, 방공구축함은 방공구축함답게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소련과 러시아의 전략과 사정도 이해해야 마땅하나 모스크바함은 전략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며 전략의 한계도 그대로 보여주는 교보재다.
그래서 미사일 타격이 아닌 탄약 유폭에 의한 침몰도 말이 된다. 한 전투함에 너무 많은 미사일과 탄약을 탑재하고 있기에 이를 관리하며 통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한 척으로 너무 비대한 역할을 책임지다보니 임무의 과부하, 자잘한 문제에 대한 관리 미흡이 예상될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미사일 하나, 포탄 하나가 불량을 일으키고 그걸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면 거함의 침몰도 가능하다.
우크라이나 해군은 앞으로도 ‘충분히 좋은’ 무기를 활용할 것이다. 서방의 지원에 따라 ‘더 좋은‘ 무기도 손에 들어올 것이다. 기함을 잃은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로서는 방법이 없다. 러시아 해군이 헤르손을 얻고 싶고 오데사를 함락하고 싶다면 ‘충분히 좋은’ 무기를 찾아내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소비에트연방영웅의 전략은 ‘더 좋은’ 전략은 아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해군에게는 ‘충분히 좋은’ 전략이다.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은 ‘더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좋은’ 상황이다. 모스크바가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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