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
· An-225, 꿈은 다시 한 번 날아오른다. · '모스크바함 침몰', 더 좋지는 않아도 충분히 좋은 · '마리우폴 전투', 선의 도시에서 방황하며 · '즈미이니 섬 전투', иди нахуй! · '미하일 고르바초프', 세 번째 선택을 한 세상 · '우크라이나 추계 공세', 노란색 혜성 · 'HIMARS와 MLRS', 오리 사냥 · '도네츠크 공항 수복', 사이보그를 기억하며 · '민간의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당신의 부대에 후원하세요 · '러시아 부분동원령 선포', 주사위는 던져졌다 · '노르트스트림 파괴', 잠가라 밸브로부터의 단절 · '푸틴의 점령지 병합 연설', 역사가 알려주는 무게의 진실이란 · '러시아의 대규모 공습', 에스컬레이터의 전원이 켜지는 거라면 · '헤르손 탈환', 우크라이나 행진곡 · '달과 폴란드를 향한 로켓', 밝음과 어둠을 향하여 · '역사의 풍경', 당당하게 방랑하는 화가, 역사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 17 - B-21 레이더
B-21 레이더
Raider. 침입자. 다른 이들의 집에 들어가 무언가를 훔쳐오는 자들은 흔히 도둑이라 부른다. 그들은 강도와 절도를 하고자 하며 조용히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쏙 빼온다. 그러나 침입자는 다르다. 침입자는 단순히 조용히 들어갔다 조용히 나오는 자가 아니라 쳐들어가는 자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깊숙히 들어가 자신이 들어왔다는 흔적을 아주 강하게 남기고 돌아온다. 도둑은 있던 것이 없어지는 빈 공간을 느끼게 한다면 침입자는 빈 공간이 아닌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온다. 그리고 침입자는 한 명이 아니라 항상 여럿이서 들어간다. 그래서 Raider에는 항상 -s가 붙는다. 레이더스. Raiders. 침입자들이다.
침입자는 도둑이 아니며 무리를 지었기에 당당하다. 은밀한 동시에 그 존재를 드러내며 그들은 무리를 짓고 있기에, 자신감이 넘치기에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갖고 있다. 세상에는 Thieves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상징하는 이들은 없으나 Raiders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상징하는 이들이 있다. 라스베가스 레이더스, 쌍방울 레이더스, 캔버라 레이더스 등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침입자의 호칭을 사용하며 라스베가스 레이더스나 캔버라 레이더스의 경우 팬들은 군단과 같은 분장과 규모, 분위기로 주변을 압도하는 힘을 보여준다. 미 해병대의 특수부대 역시 레이더연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들 역시 자신이 목표하는 지점을 완파해버리고 돌아온다.
미 공군의 신형 전략폭격기 B-21에게 Raider라는 이름이 붙었다. 레이더라는 이름은 1942년 미 공군-당시 육군항공대-와 미 해군이 합작하여 진행하였던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에서 따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의 분위기를 단숨에 전환하고 일본의 심장부에 허를 찌르는 타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침입자라 불리기 충분하고 특공대라는 이름이 붙기 충분했다. B-21 역시 둘리틀 공습의 주인공들처럼 은밀하게 들어가 타격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연고지 문제로 신음하던 NFL 스포츠팀과 2차대전사에 해박하지 않은 이상, Raider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미국인들에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이미지는 따로 있다. 중절모를 쓰고 채찍을 휘두르며, 나치 잔당들에 맞서는 훈훈한 외모의 고고학자. 그렇다. 인디아나 존스의 이미지다.
전세계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첫 작품 ‘인디아나 존스와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은 한국에서 처음 개봉할 때 ‘레이더스’라는 이름으로 개봉하였다. 또한 미국에서도 2편 이후에나 인디아나 존스라는 캐릭터가 부각되며 제목에 붙었지 첫 작품에서는 ‘Raiders of the Lost Ark’, 즉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이라는 명칭으로 개봉하였다. ‘레이더스’는 그냥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모험 액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캐릭터 중심의 영화 시리즈가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작품성 역시 오락성만큼 인정받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후보와 감독상 후보까지 올랐었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 중 하나기도 하다.
인디아나 존스는 ‘레이더스’에서 이곳저곳을 침입하며 성궤를 찾아 추적한다. 중남미의 정글에서, 네팔의 술집에서, 이집트의 사막에서 원주민, 나치, 현지 용병들에 맞서 그리스도가 남겨둔 성궤를 찾아간다. 매리언과 살라 등이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하며, 성궤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간다. 그가 보물과 유적들을 만나는 순간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상징적인 첫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중남미의 황금 여신상과 똑같은 무게의 모래를 바꿔치기하는 장면, 바로 등 뒤에서 둥근 바위가 굴러오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인디아나 존스가 다녀간 공간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그들은 앞서 말했던 고전적인 의미의 침입자이자 약탈자와 같은 존재는 아니나, 적이나 비밀의 깊은 속까지 파고 들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궁금해하는 비밀을 결국 찾아오며 나치를 궤멸시켜 버린다. 그는 앉아서 책을 파며 과거만을 보지 않고 밖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바꿔놓는다.
그가 그렇게나 힘들게 찾아온 성궤는 미 국방부의 기밀 물품이 되어 51구역 어딘가에 조용히 잠들어버리기에, 시리즈 전체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기운이 풍기기에, 인디아나 존스가 하는 짓은 고고학자라기보다 도굴꾼이나 특수부대원에 가깝기에 그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순 있다. 그러나 그가 주인공인 시리즈를 오리엔탈리즘적이라 비난할 수는 있더라도 인디아나 존스라는 캐릭터만큼은 내뿜는 아우라와 인상이 여전히 날카롭고 문제에 맞서는 힘이 강하다.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굴하지 않는 자세, 끝까지 해보려는 의지와 역사를 향한 탐구욕. 그가 고고학자가 아니라 침입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동료들과 함께 침입자가 되어 나치 독일이나 사이비 종교단체, 소련군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는 걸 생각하면 영화 속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진정한 침입자라 부를 수 있다.
흔적을 남기기 위해선 그만큼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미국이 과거 개발했던 B-2 스피리트와 F-117 나이트호크의 경우 이미 상당한 수량이 배치되었거나 곧 실전배치를 앞둔 뒤에야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드러났었다. 특히나 F-117의 경우 그 존재를 숨기기 위해 부던하게 노력하였다. 이는 똑같은 스텔스기인 F-22나 F-35와는 다른, 이들의 특성에 기인하고 있다. 이들은 전략폭격, 그것도 은밀하고도 정밀한 전략핵공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존재를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B-21도 똑같이 전략핵공격 임무를 수행할 항공기기에 그 존재가 전면으로 들어나는 경우는 상당히 나중에나 찾아올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B-21의 공개는 상당히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빠르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온 미국인들이 지켜보는 슈퍼볼에서 광고가 이루어졌고, 폭격기의 이름은 공개적으로 모집하였다. 미국은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전투기의 이름을 모집하여 명명한 적이 없다. 더더욱 전략임무를 수행하는 전략폭격기에게, 외형조차 모르는 존재에게 명명을 시도해본 적은 없다. 그렇기에 B-21 행보는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는 미국이 B-21에게 거는 기대가 보통 수준이 아니란 걸 반증한다. 미국은 B-21 전략폭격기를 통해 공중로부터의 죽음의 규모와 무게를 완전히 바꿀 작정이다.
21세기에 들어온 뒤로 미군의 전략폭격기들은 소수가 하늘 위에서 오랫동안 체공하며 한 지역에 장기간의 화력지원을 해주는 비행을 자주 보여주었다. 이는 소련의 붕괴에 따라 대량의 전략폭격기와 전폭기가 퇴역하였고 전략폭격기들의 전략핵공격 임무 부담과 비중이 줄어든 덕분이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면 이전보다 소수의 전략폭격기들이 오랫동안 한 공역에 머물러야 하며 그만큼 전략폭격기 본연의 임무와는 상관없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걸 의미한다. 분명 적국의 수도를 향해 순항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융단폭격으로 지형을 바꿔야 하는데 소말리아 앞바다의 해적을 잡거나 아프가니스탄 산골짜기에서 탈레반 잔당을 맞서야 한다. 그들의 존재 목적을 생각했을 때 참으로 상관없는 임무지만, 전략폭격기가 아니면 수행할 항공기가 적기에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미군의 전략폭격기 중 적국의 영공을 자유롭게 헤집고 다닐 수 있는 B-2 스피리트는 고작 20기에 불과하고 운영 가능한 공군기지도 손가락에 꼽는다. 1980년대에 개발되었기에 신규 생산도 불가하고 정비성은 낮고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 정작 가장 중요한 전략핵공격 임무를 수행할 폭격기가 적어질 수 있다. B-52가 노후화되고 이들의 임무를 대신해줄 B-1B들이 오랜 마당쇠 임무로 연식 대비 노후화, 조기퇴역이 이루어지는 걸 생각했을 때 이는 더더욱 나쁜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 B-21은 기성 장비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단가와 개발 난이도를 낮췄다. 이는 돌려 말하면 광학미채나 극초음속 비행과 같은 엄청난 기능과 기술은 기대할 수 없단 뜻이다. 대신 B-21은 대량생산과 대량배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B-2보다 더 적은 폭장량과 전투행동반경을 가질 것이지만 대신 더 많은 숫자의 폭격기들을 띄워 더 많은 전역에서 더 넓은 지역을 커버하며 더 자주 이륙할 수 있게 된다. 이제까지는 단 한 기에서 두 기의 B-2 폭격기 만이 중국이나 러시아, 중동 중 단 한 지역을 침범하며 종심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해적이나 테러리스트 잔당에 맞설 폭격기들을 띄워놓고도 수십 기의 B-21을 더 띄울 수 있다. 그렇게 이륙한 B-21들은 뭉치면 뭉칠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몇몇은 진보된 카운터 스텔스 체계에 격추당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걱정없이 모든 지역을 침범해 모든 것을 전방위적으로 타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결과물은 세계와 지리, 전황 모든 곳에 강렬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미국은 그 모습이 둘리틀 특공대의 모습과 같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인디아나 존스 일행과 같기를 기대하고 있다. 둘리틀 특공대와 인디아나 존스는 미묘하게 유비추론이 가능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 2차대전이라는 상당히 뚜렷한 선과 악의 전쟁에서 선을 추구하며 가장 깊은 곳의 수수께끼 같던 일본 열도를 뚫고 들어간 둘리틀 특공대, 성스러운 성궤와 성배, 그리고 진귀한 보물들을 찾아 나섰던 인디아나 존스는 미국이 새로운 폭격기에게, 새로운 하늘의 지배자에게 바라는 모습이다.
B-21 레이더가 대중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하기 얼마 전,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5편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 ‘인디아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의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세계는 또다시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악을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의 새로운 폭격기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지금까지 봤던 모습과 굉장히 닮았으며 어느 면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다를 거 없는 중절모를 쓴 인디아나 존스에 감동한다. 폭격기도 마찬가지다. 다를 것 없는 모습이기에 그들은 주어진 임무를 가장 잘 해낼 것이다.
장엄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뻔뻔하기 그지없으며 그 모습은 익숙하지만, 마치 괴도키드마냥 침입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 익숙함의 침입은 쉬이 막을 수 없다. 그건 침입자 하나만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레이더는, 석양이 지는 밤, 레이더스가 되어 하늘로부터 침입해올 것이다. 침입을 허용하는 순간 성궤가 열릴 것이며, 모든 곳에 죽음이 내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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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핑계로 군사 분야에 대한 글을 이것저것 써보는 중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이더스는 언제 봐도 재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숀 코너리가 나오던 3편이 가장 재밌고 그 다음은 1-4-2 순서로 재밌었습니다.
물론 B-21 레이더는 둘리틀 특공대의 영향이 훨씬 더 크겠지만, 진지하게 인디아나 존스의 영향이 아예 없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미국과 영화, 문화사에서 이 영화의 가치는 상상 이상으로 높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5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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