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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전쟁 -05-

김유식 2003.04.02 14:31:06
조회 2661 추천 0 댓글 0

  1999년 11월 8일. 월요일. 오전 1시. 서울시 강동구 성내 2동.

- 탕탕탕!

"문 열어! 문 열란 말야 이 새끼들아!"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2층 집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대문 앞에는 여자 말고도 어깨가 떡 벌어지고 머리가 짧은 두 명의 젊은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둘 다 빌려 입은 것 같이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있었으나 한 사내는 광택이 나는 검정 색 구두를, 다른 사내는 흰 색의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묘한 대조를 이뤘다. 여자는 벌써 10분 째나 앙칼진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정작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야이 개새끼들아! 너네가 평생밖에 안 나오고 살 것 같냐? 빨리 안 열어?"

  고음의 여자 목소리에 하나 둘씩 동네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 보고, 밖으로 나와보았다가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며 쳐다보는 어깨들의 눈초리에 기겁을 하고는 모른 척 하기에 바빴다. 잠시 후, 주민의 신고를 받고 온 듯한 순경 두 사람이 다가왔으나 이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돌아가 버렸다. 순경이 완전히 돌아간 것을 안 여자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문 열어! 문! 내 돈 갚아!"

  이때, "땡"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자 세 사람은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사내가 현관문을 세차게 흔들어 열다가 그만 현관의 유리가 깨지고 말았다.

  거실에서는 금새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얼굴의 40대 주부가 힘없이 그들을 맞았고, 주부 뒤에는 중학생 정도의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베개를 들고 잠옷 차림으로 떨며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문이 열려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짙은 화장의 여자가 화장대 위를 흘끔 보더니 팔을 휘저어 모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김 사장! 이런 건 사서 뭘 해? 돈부터 갚고 살아야지!"

  자다가 깬 듯한 남자는 이부자리를 한 쪽으로 치우더니 묵묵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머리맡을 뒤져 일회용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이려는데 구둣발의 사내가 라이터를 빼앗으며 말했다. "돈은 없어도 담배는 사 피우는 게벼 잉?"

  사내는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주며 한 마디 더 던졌다.

  "아따! 천 삼백 원 짜리 피우고 댕기는구만..."

  다시 여자가 큰 소리로 다그쳤다.

  "언제 줄 거야? 응? 언제 줄 거냐고! 내 돈 이천만 원 빨리 줘야지!"

  거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핍박당하고 있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같이 우는 소리 같았다. 빚 독촉을 하던 여자는 마루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남자의 어깨를 세차게 잡아 흔들었다.

  "야...김 사장. 내가 지금 다 달래니? 이자도 필요 없으니 원금만이라도 줘! 돈이 없으면 조금씩이라도 줘야지!"

  이때 남자가 피우고 있던 담뱃불이 여자의 팔뚝에 닿았다. "앗 뜨거워!" 외마디를 지르며 팔을 감싸 쥐고 물러나는 여자 뒤로 구둣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미 씨부럴 놈이 돈 갚으라니깐 담뱃불로 지진다야..."

  놀란 얼굴의 남자가, "안 다쳤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오." 하면서 다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따.. 징한 새끼...그러구두 담배 빠는구마잉. 돈은 도대체 언제 줄 거요?"

  "....."

  지금까지 아무 말 없던 흰 운동화의 사내가 바지춤을 잡고 허리띠를 풀더니 안방 구석에 있는 20인치 TV에 대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누님. 지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부러여. 변소가 어딘 지두 모르것구...어허 시원타!"

  빚 독촉을 당하던 남자의 고개가, 방안에서는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에 궁금했는지 수평을 이뤘다가 황급히 꺽였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남자는 참담한 표정이 되어 담배만 더욱 세차게 피워댔다. 여자가 말했다.

  "김 사장. 있으면 지금 돈 내놓고, 없으면 언제 줄 건지 말해."

  "우리 누님 바쁘신 분잉께잉. 싸게싸게 주소."

  검정 색 구두의 사내도 거들었다.

  김 사장이 꽁초만 수북히 쌓여있는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일어서면서 말했다.

  "지금 돈이 조금 있기는 있소. 많이는 안되고..."

  "거 봐요. 누님. 직접 받으러 오니까 주잖아요."

  어느 새인가 소변을 마치고 바지를 추스린 사내가 방 한가운데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사내의 입가에는 가벼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돈이 있다는 김 사장의 말에 희색이 만연해진 여자가 급하게 물었다. "얼마 있는데?"

  김 사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양복 안쪽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낸 후, 전화번호를 하나 확인하고는 수화기에 손을 뻗었다.

  "재미없는 수작부리면 너 죽구 나 죽구 하는 거여."

  잠깐 흰 운동화의 사내를 쳐다본 김 사장은 기분 나쁜 것을 애써 참으려는 듯, 역시 아무 말 없이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상대방이 나왔는지, "나다." 하며 말을 시작한 김 사장은 몇 번 긍정과 부정이 혼합된 대답을 하더니 "좀 가지고 와라."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리자마자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어울리지 않는 양복의 사내 둘과 짙은 화장의 여자는, 전화 걸던 김 사장의 말이  '좀 가지고 와라.' 였는지, '돈 가지고 와라.' 였는지 잘 듣지 못했다. 아마도 '좀'이나 '돈'이나 모두 돈 가지고 오라는 소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여자가 말했다.

  "오늘 다 주는 건 아닐 테고, 얼마 가지고 온대? 얼마나 걸려?"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 않으니 이, 삼십 분 정도면 올 거요."

  "있을 때 진작 줬으면 우리도 이런 실례 안 하는 건데 미리미리 주지 그랬어?"

  가져온다는 말에 다소 누그러졌는지 여자의 말투가 아까보다는 훨씬 조용하고 여성스럽게 변했다.

  "이십 분이라...누님! 우리 배도 살살 고픈데 야식이라도 시켜 먹읍시다."

  "형님. 거..좋구마. 족발에 소주 한 병 시키쇼."

   구둣발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마, 넌 위, 아래도 없냐?"

   흰 운동화의 사내가 주먹을 들어 치려는 기색을 보이자 구둣발의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미럴! 나가 시키면 될 거 아뇨?"

  "내가 시키지."

구둣발의 사내가 거실로 나가려고 하니 담배를 피우던 김 사장이 일어섰다. 이를 흰 운동화의 사내가 팔을 들어 제지했다.

  "어허! 김 사장은 여기 있어야지."

맥없이 다시 앉은 김 사장이 또 담배를 꺼냈다. 거실에서는 구둣발의 사내와 김 사장의 아내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구둣발의 사내는 야식 배달해 주는 곳의 전화번호를 묻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김 사장은 계속 애꿎은 담배만 피우고 있었고, 세 사람의 불청객은 히히덕 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김 사장의 아내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거실과 부엌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거실에 있던 딸은 아마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자는 모양이었다.

- 딩동

김 사장은 초인종 소리가 평소 때보다 더 요란하게 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는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방 안의 세 사람에게 들릴까봐 조마조마했지만, 그들은 "왔다!"고 외치면서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안방 유리창을 통해 대문 쪽을 넘겨다보기에 바빴다.

김 사장의 아내가 깨진 현관문을 제치고 슬리퍼를 끌며 나갔다. 김 사장은 아마 야식이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청객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 온 다음에는 아무도 나간 사람이 없으니 대문은 열려 있을 테고, 김 사장이 기다리는 사람은 대문이 열렸다면 바로 집 안으로 들어올 사람이었다.

역시 김 사장의 아내가 다시 거실로, 부엌으로 쪼르르 뛰어 가더니 작은 지갑을 들고 나가면서 "아저씨 얼마예요?"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아내는 일회용 용기에, 랩이 씌워진 족발과 양념, 쟁반국수, 소주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워매...거 겁나게 빠르구마잉"

  아무 것도 깔지 않은 안방 바닥에 주저앉아 랩을 벗기면서 구둣발의 사내가 말했다.

  "김 사장도 좀 드쇼?"

  흰 운동화의 사내가 김 사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권했다. 말이 권유지, '설마 먹지 않겠지?' 하면서 지껄인 것이라고 생각한 김 사장이 씁쓸한 마음으로 말했다.

  "난 됐소. 식기 전에 들 드시오."

  병따개를 달라고 했으면 가져다 주었을텐데 구둣발의 사내는 소줏병를 들고 입가로 가져가 이로 따려다가 "아이고.." 하면서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벌개진 얼굴로 소주병의 마개 부분을 화장대의 모서리에 대고 두꺼운 주먹으로 내리쳤다. "통" 소리가 나며 뚜껑은 열렸지만 화장대는 심한 흠집이 났을 것이 틀림없었다.

  김 사장은 속이 타는지 끙끙 소리를 내면서 담배 연기만 내뿜었다. 짙은 화장의 여자는 방바닥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족발에는 관심이 없는 듯 모른 척 하다가 사내들의 권유에 나무 젓가락을 들어 쟁반국수로 가져갔다. 그때였다.

  무언가 옆구리에 두껍게 신문지로 말아 넣은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귀신같이 들어왔는지 김 사장을 비롯한 네 사람은 사내가 대문과 현관, 거실을 지나는 동안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제일 큰 뼈다귀를 들고 뜯어먹던 구둣발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워매...깜짝이여. 벌써 왔는게벼?"

  흰 운동화의 사내는 직감적으로 새로 방 안에 들어온 사내가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 직감은 구두를 벗지 않고 들어온 사내의 발을 보고는 더욱 굳어졌다. 마시려던 소줏잔을 급히 내려놓고 김 사장에게 물었다.

  "온다던 사람이 저 사람이요?"

  김 사장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무 말 하지 않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새로 들어온 사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김 사장의 얼굴은 반갑기도 하면서 무언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김 사장 돈 주려면 빨리 줘. 우리는 이거 다 먹었어."

  방 안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짙은 화장의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말을 마치면서 슬금슬금 흰 운동화의 사내 뒤로 몸을 숨겼다.

  새로 들어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받을 게 총 얼마야?"

  세 사람은 순간 당황하였다. 김 사장의 백기사(白騎士)로 온 줄 알았는데 듣고보니 돈을 줄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그것도 그렇거니와 어려 보이는데 다짜고짜 반말을 쓰는 것도 그들을 놀라게 했다.

  "워매...잡것이 시방 어따 대고 말하는 겨?"

빚을 갚으려는 것 같은 사내의 말투에 안심한 구둣발 사내가 들고 있던 뼈다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입가에서 돼지기름이 번들번들하게 빛났다.

  "받을 게 모두 얼마냐니까?"

  "이천만 원이야. 이천만 원. 이자도 필요 없으니까 원금만 갚아주면 돼."

  싸움이 날 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짙은 화장의 여자가 급히 끼어 들며 말했다. 만약 싸움이라도 나게 된다면 오늘 돈을 받기는 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로 방 안에 들어온 사내가 옆구리로 손을 가져가더니 신문지로 말은 것을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툭- 소리와 함께 다섯 뭉치의 돈 다발이 떨어졌다. 남자가 말했다.

  "오백이니까 그거 먹고 떨어져라. 더 이상 찾아오지 말고."

  바닥에 떨어진 돈 뭉치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아졌다가 돈을 던진 사내의 말을 듣고는 잠시 어리둥절한 눈빛이 되었다. 흰 운동화의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돈 뭉치를 줍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뭉치를 누님이라 부르는 사람의 손에 쥐어주고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김 사장에게 말했다.

  "김 사장. 그럼 이제 천오백 남은 거야. 계산은 바로 하자고! 오늘 돈 있으면 더 주지?"

  김 사장은 덤덤한 표정으로 돈을 가져온 사내를 바라다보았고, 그 사내는 여자 앞으로 성큼 걸어가더니 다섯 개의 돈 뭉치를 도로 나꿔챘다

  "이걸로 끝낼 거면 이 돈 가져가고, 더 받아야 한다면 못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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