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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초반 상황

런타임(211.114) 2011.12.20 17:26:01
조회 2136 추천 2 댓글 6

 


인민군의 기습남침과 한강 방어선

 

1. 전선붕괴


가. 인민군의 기습 남침
1950 년 6 월 25 일 새벽 4 시, 38 도선에서 남쪽으로 향한 인민군의 포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인민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50 년 전의 6 월 25 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날 새벽에는 대마도 해협을 통과하던 태풍 " 엘시" 의 영향으로 38 선 일대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38 선으로부터 불과 40 ㎞ 후방에 위치한 서울시민들은 전쟁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기습남침은 인민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개전(開戰)과 동시에 38 선은 무너지고, 서울은 불과 사흘만에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국군의 주력은 한강이북에서 붕괴되었다.
이때 인민군이 최초 3 일과같은 속도로 진격을 계속했다면, 그들의 계획대로 신생 대한민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멈춰섰고, 국군은 전선에서 삼삼오오 후퇴하는 철수병력을 재편성하여 한강 방어선을 편성 할 수 있었다.

이로써 국군과 인민군은 6 월 29 일부터 7 월 3 일까지 5 일간에 걸쳐 한강을 마주보고 대치하게 되었다.

 

 

북한에 파견된 소련군사 고문단에서는 남침계획, 즉 선제 타격계획을수립하였는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인민군이 38 선을 돌파하여 신 속 한 진격으로1 개월 이 내 에 한반도를 석 권 할 경우미 군 은 개입하지 않을 것 이 다.

(나) 인민군이 38 선 돌 파 시 후 방 지 역 에 있는국군 4 개사단은 서울북방으로 증 원 될 것이 다 .

(다) 인 민 군 1 군단은 서울 북방에서 공격하여서 울 을 점령하며,인 민 군 2 군 단 은 춘천북방에서 공격하여 수원 방향으로 공격하여 서울 북방에 증 원 된 국군 주 력 을한강 이 북 에 서 격멸한다.

(라) 서울 점 령 시 경우 남 한 지 역 에 서 는 대 규 모민중봉기가 발생하여 국 군 의 조직적인저항력이 상 실 될 것이므로 신 속 한 전과확 대 로 군산 - 대전 - 대구 - 포항선까지진 출 한 다

(마) 이 어 서 잔존 저항세력을 소 탕 하 면 서목포 - 여수 - 마산 - 부 산 선 까 지 진출한다.
<소련 군사 고문단이 수립한 선제 타격계획>



 

나. 개전직전 정부와 국군의 대응

1950년 5 월 30 일 남쪽에서는 제헌의원에 이어 제 2대 민의원 총선거가 실시 결과는  자유당의 참담한 패배였다.

선거 후에는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군 수뇌부도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채병덕 참모총장은 6 월 10 일 사단장과 연대장을 교체하는 대규모 인사이동을 단행하였으며, 아울러 부대배치 조정 등 혁신적인 조치들을 잇달아 시행하게 되었다.

또한, 5∼6 월 위기설 등에 따라 계속되어 오던 비상경계령이 토요일인 6 월 24 일 00 시를 기하여 해제됨으로서 많은 장병들이 그동안 미루어 둔 농번기 휴가를 떠나고 나머지의 많은 장병들에게도 외출 외박을 허용함으로써 6 월 25 일 개전 시에는 대부분 부대의 1/2∼1/3정도 병력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반면, 춘천 정면의 6사단의 경우는 사단장 김종오 대령에 의해 외출 외박이 통제됨으로써 대부분의 병력이 영내에 잔류하고 있었다.

한편, 6월 24 일 토요일 밤, 육군본부 고급장교와 미군사 고문단은 때맞추어 준공된 육군본부의 장교 구락부개관식에 참가하고 있었다.

개관식 연회가 끝난 것은 새벽녘이어서 군의 수뇌부는일요일인 6 월 25 일 아침에는 대부분 늦잠에 빠져있었다.


 


다. 개전초기 전투


⑴ 피아의 병력배치


      황해남도(웅진)  문산          의정부                  춘천                   강릉
국군   17연대         1사단         7사단                   6사단                  8사단
북한 1군단 (5개사단, 1개 전차여단)    2군단(춘천:3개사단, 독립전차연대. 동해안:1개사단, 2개 연대)

 


⑵ 동두천 포천 지구 전투

인민군의 주공이 지향된 의정부 북방에는 국군제7 사단이 적성에서 사직리까지 47 ㎞ 정면에 배치

되어 있었는데 전차로 증강된 인민군 2 개 사단의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됨으로써 대전차 방어수단을갖추지 못한 국군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국군 제7사단은 작전 초기에 동두천-포천까지 피탈 당하고,26 일 13 시에는 서울의 관문이며 교통의 요충인 의정부마저 피탈 당하게 됨으로써 26 일 이후에는 서울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게되었다.

참고 동두천 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35
     포  천 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39
    


⑶ 개성 - 문산지구 전투

서북쪽에서 서울에 이르는 개성-문산- 서울축선에서는 국군 제1 사단이 청단에서 고랑포까지 약94 ㎞에 달하는 광활한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국군 제1 사단은 인민군의 강력한 초기 공격으로 0 9시30 분에 개성을 피탈당하자 임진강 후방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으나, 이마저도 인민군의 집요한 공격과, 인접지역인 의정부 축선의 붕괴로 지탱할 수가 없게되었다.

참고 개성.문산 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42
                         수기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696
        봉일천 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57

 


⑷ 춘천지구 전투
중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국군 제6 사단은 좌측으로는 의정부 전방의 제7 사단과 경계한 적목리로부터, 우측으로는 동해안의 제 8 사단과 백두대간을경계로 하여 84 ㎞의 광활한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6 월 19 일 생포한 포로의 진술과 정찰대가확인한 정보에 따라 수일 내에 인민군의 전면적 공격또는 국지전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사단의 자체적인 경계령을 하달하고 외출 외박의 통제와 아울러 전투 대비태세에 임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제6 사단의전투 준비태세는 적의 전면적인 공격에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인민군이 서부지역에서는 비교적 쉽게 국군부대들을 격파할 수 있었던 반면 춘천지역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춘천지역에서 수원방향으로 대우회( 大迂回)하여 국군부대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일거에 국군 주력을 격멸 시킨다는 인민군의 계획은 최초부터차질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춘천지역 제6 사단의 용전 분투는 인민군의 공격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써 한강 방어선 형성과 차후 낙동강 방어선까지 이어지는 지연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참고 춘천지구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66
                  수기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67



 

⑸ 의정부 반격작전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서울 사수를 위해 어떠한일이 있더라도 의정부를 지켜내야 된다는 굳은 결의를굳히고 재경지역 부대는 물론이고, 후방지역에서 서울로 이동하고 있는 부대들에게도 도착되는 대로 의정부지역에 투입하여 의정부를 탈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서 후방지역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는 부대들은적 전차를 막을 수 있는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고, 대오마저도 갖추지 못한 상태하에서 전선으로 내몰리게되었다, 그러나 최초부터 승산도 없이 무모하게 감행된 반격은 후방 지역에서 증원된 예비병력 까지도 붕괴됨으로써, 의정부의 실패가 곧 서울 함락과 아울러국군의 주력이 소진되는 사태까지 초래되었다.
  
  의정부 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42
 



 

라. 정부 및 국군 수뇌부의 전쟁지휘

⑴ 개전당일의 서울25 일
서울의 아침은 새벽에 내리던 비도 그쳤고 150만의 시민은 평상시와 같은 평온한 일요일을 맞이했다. KBS 라디오의 전쟁 제 1 보는 국방부의 요구로오전 7 시에 방송되었다. 그러나 방송내용은 실제와는다른 내용이었다.

이 때는 이미 인민군의 공격에 의해전방 경계진지가 무너지고 주진지마저 위협을 받고있는 상황이었으나 방송내용은 인민군의 전면공격을 알리면서도 "10 만 국군이 건재하니 전 국민은 염려하지말라!" 는 내용이었다.

방송의 목적은 일반 국민들에게 북한의 남침사살을알리는데도 있지만 휴가나 외박 중인 장병을 급히 원대 복귀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자극할 필요가없다는 것이었다.



⑵ 인민군 공군기 서울 출현과 선전포고
이날 10 시경에는 인민군 정찰기가 김포와 여의도 공군기지를 정찰하였고 12 시경에는 인민군 야크전투기4대가 서울 상공에 출현하여 용산역, 서울공작창, 통신소, 육운국 청사에 기총소사를 가하고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서울시민의 불안은 깊어만갔다.

그러나 이때 국방부에서는 옹진의 제17 연대가 해주를 점령했다고 발표하고 일간신문들이 호외로서 이를앞다투어 보도함으로써 국민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웅진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23

 

이와같은 오보(誤報)는 “남한이 북한에 대해 선제 공격을 하였다. ”는 구실로 악용되는 뜻하지 않는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무렵 북한은 그들의 남침 기습달성이 확실해지자11 시경 평양방송 라디오를 통해 “북한 인민군은 국군이 북침을 해왔기 때문에 자위 조치로서 반격을 가하여 정의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라는 표현으로 남한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⑶ 정부 및 국군 수뇌부의 조치
6.24 일 오후 육군본부 장교구락부 연회에 참석하고02 시경 잠자리에 들었던 채병덕 총참모장은 06 시경북한의 남침사실을 보고받고 06 시부로 전군에 비상령을 발령하였다. 이어 07 시경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였으며, 08 시에는 대전, 광주 등 후방에 위치한 예비 사단들을 서울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성이 함락된 30 분 뒤인 10 경에창덕궁의 연못에서 낚시질을 하던 중 경무대 경찰서장으로부터 북한의 남침사실을 보고 받고 곧바로 경무대로 돌아와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하였다.

오후 2 시 중앙청에서는 대통령 주재로 임시 각료회의가 열렸는데 채병덕 총장은 보고를 통해 “38 도선전역에서 인민군이 불법남침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이적절하게 작전을 전개 중에 있다. 후방사단을 진출시켜 적을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전시를 맞아 반민족적 반인도적 범죄자를 중벌한다.”는 긴급명령 1 호를발동하였으나, 당시 헌법 64 조에 의거한 계엄령도 선포하지 않았고, 전시체제로 전환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는 정부 및 국군수뇌부에서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정부 상황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6 월 26 일 오전10 시에 국방부에서는 작전지도 지침에 대한 심각한논의가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군사 경력자들의 자문을 받아 난국을 타개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범석 전 국방부장관 등 군의원로들을 소집하여 작전지도 방안을 논의하였다.

회의벽두에서 신성모 장관과 채 총장은 “군은 의정부에서 인민군을 반격하고 있으며,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 자리에서군 원로들은 의정부를 포기하고 한강 이남에서 결전할것을 주장하였으나 신 장관과 채 총장의 서울 고수론을 꺾지 못하였다.


군사경력자 회의에 이어 신 장관과 채 총장은 이날11 시부터 중앙청에서 개최되는 비상국무회의에 출석하여 “3∼5 일 이내에 평양까지 점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 3일 안으로 평양까지 점령하겠다. ”라는 낙관적인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2. 서 울 함 락

가. 정부 대전 천도
한편, 의정부 반격작전이 실패하고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후인 6 월 27 일 01 시에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도 채 총장은 “서울을 고수한다. 반격으로전환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고 주장하였으나 신성모 장관은 정부의 수원 이동을 발의하여수원으로 천도(遷都) 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150 만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겠다는 대책은 강구하지 못하였다.

이어서 03 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대전)에 올랐다. 27 일 06 시에 정부가 수원 천도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시민들은 비로소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음을 알게되었다.

 

나. 인민군부대 서울진입
한편, 의정부에서 철수한 제7 사단과 증원부대인 제2 사단 등은 우이동- 창동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적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이마저도 6 월 27 일 10시에 무너짐으로서 인민군의 서울진입은 시간문제가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채 총장은 이제까지 주장해오던 서울 사수 결심을 번복하고 신성모 장관에게서울 철수를 건의하였다.

이어서 채 총장은 각군 본부를 시흥 및 수원으로 이동한다고 천명하였으나, 전선부대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

한편, 미아리- 회기동을 연하는 서울의 최후방어선에는 광주에서 이동한 제5 사단이 전선에서 철수하는병력을 수습하여 3,000 여명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으나 27 일 19 시경 적의 기마 정찰대와 함께10 여대의 전차가 수유리 방면으로부터 미아리를 공격하였다.

배치된 국군 부대들은 사력을 다하여 적의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차를 막아내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28 일 01 시경 인민군 전차 2 대의 미아리고개 진입을 허용하게 됨으로써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무너지고 말았다.

      태능 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48
     미아리 지구 전투 상황 :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555

 




다. 한강교 폭파
28 일 01 시 45 분경 채 총장은 작전국장 강문봉대령으로부터 인민군 전차가 시내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보고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한 후, 전방부대 지휘를 김백일 참모부장에게맡긴채 자신은 용산의 육군본부를 떠나 시흥으로 향하였다.

채 총장으로부터 한강교 폭파를 지시 받은 최창식공병감은 한강으로 이동하여, 대기하고 있던 폭파조에게 명령하여 2 8 일 02 시 30 분경에 한강인도교와3 개소의 철교를 폭파하고, 04 시경에는 광진교도 폭파하였다.

폭파당시 한강인도교 위에는 차량과 수많은 피난민이 엉겨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약 800 여명이한강교 폭파와 함께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파에도 불구하고 2 개의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고일부분이 폭파되는데 그침으로써 며칠 뒤 인민군 전차의 도강을 허용하게 되었다.


 

라. 인민군부대 서울중심부 돌입
인민군이 서울의 중심부에 돌입한 것은 28 일 11 시30 분경 이었다. 서울을 장악한 인민군은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각 경찰서에 들어가 정치범은 물론이고 일반 죄수까지 모조리 석방시켰다.이들은 죄수들을 인민의 영웅으로 추켜 올리면서 인민군을 환영하는 선봉에 내세웠고 소위 반민족주의자들의 색출에 앞장세웠다.

김일성은 28 일 서울점령의 축하연설을 방송하고 서울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며, 위원장에 사법상 이승엽을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3. 한 강 방 어 선
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당면 문제
인민군의 공격계획 즉 선제 타격계획에는 그들이 국군의 주력을 격멸하고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지역에서 남로당원이 봉기하여 이승만 정부가 붕괴될것이다. ”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이 서울을 완전히 장악한 6 월말까지도 민중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치못했던 미국의 참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증대되고있었다.

따라서, 인민군은 미국의 지상군이 참전하기 전에한반도를 조기에 석권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한강 방어선의 조기돌파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6 월 30 일부터는 한강 방어선 돌파에 전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다.



 

나. 한강 방어선 형성
한강은 서울 부근에서 강폭이 700∼1,500m, 수심이평균 3m 에 달하여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는 방어에가장 양호한 지역이었다.
당시 한강에는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인도교)와 경부 복선화 철교, 경인 상행선 철교와 하행선 철교, 그리고 광진교(인도교)등 총 5 개의 교량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한강교 폭파당시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강교가 폭파되면서 자동적으로 퇴로가 차단되었다.
따라서 국군은 야포, 박격포, 차량 등 주요장비를 폐기하고 소총만을 휴대한 채로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부대 단위로 도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군은 부대건제(建制)가 무너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 숫자도 개전 당시 10 만 여명이 2만 5 천명 수준으로 급감하였다.

 

다. 한강 방어선 전투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교가 폭파되자 육군본부에서는 한강선 방어를 위해 임시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편성하였다. 그
러나 새로 편성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에는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룻배를 이용하여 삼삼 오오로 도하해오는 철수병력을 재편성하여 한강선에 재배치함으로써 6 월 29 일에는 간신히 한강 방어선이 형성되었다.


이어서 6월 29 일 밤부터 국군의 한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 이때,인민군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부분 파괴된 한강철교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강철교가 복구되면 전차가 도하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국군도 미군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인민군의 교량복구를 필사적으로 저지하였기 때문에 인민군의 기도는 좌절되었다.

철교의 복구가 어려워진 인민군은 나룻배와 수영 등으로 노량진, 여의도, 영등포에 상륙을 기도하여 도하지점을 확보한 뒤 은밀히 경부선 철교를 복구하였다.

결국 7월 1 일 04 시에 복구된 철교를 이용하여 4 대의 전차를 도하시키고 뒤이어 열차를 이용하여 13 대의 전차와 병력이 도하한 후 영등포까지 진출함으로써한강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4. 뒷 이야기


7월 3 일 국군은 한강 방어선을 철수하였다. 그리고지연전을 펼치면서 낙동강까지 철수하게 된다. 결국한강 방어선은 붕괴되었지만 국군과 인민군이 한강에서 대치한 6 월 29 일 부터 7 월 3 일까지의 5 일간은전쟁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붕괴되었던 국군 부대들이 5 일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을 하여지연전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미군이 증원될 수 있는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결국 유엔군의 참전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한편,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필사적인노력을 경주하고 있던 6 월 29 일 오전 당시 미 극동군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의 전선시찰이 있었다.

전선시찰의 목적은 전쟁상황을 파악하여 미국의 지상군 참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등포 일대의 한강 방어선에 도착한 맥아더는 진지작업을 하고있던 병사에게 " 이 진지를 얼마나 오래 지킬 수 있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병사는 차렷 자세로 " 중대장님이 명령할때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맥아더 장군은 감격하여 흙투성이의 병사를 향해 간곡한 어조로 "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지켜 달라." 고 당부했다.
맥아더는 이때의 전선시찰 결과에 의해 “국군의 전투력이 보잘것없지만 전투의지만은 투철하였다. ”고 평가하였으며,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의 지상군 참전이 불가피하다. ”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구상도 이때 이루어졌다고한다.

이와 같이 전쟁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된 한강 방어선의 형성이 가능하였던 것은 인민군이 서울에서 3 일간을 지체한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춘천을방어하였던 국군 제 6사단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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