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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훈 에세이] 지구촌의 새로운 도시들

운영자 2006.01.16 17:20:48
조회 2223 추천 0 댓글 2

2. 서울을 향한 좌절과 희망

지구촌의 새로운 도시들

  본격적인 계획 수립을 앞두고 나는 신행정 수도 건설 계획에 도움을 줄 만한 세계 각국의 도시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이것은 내가 기획단을 통해 박대통령에게 요청을 해서 수락을 받아낸 일로서, 대상 도시는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호주의 캔버라,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인도의 챤디가, 이 네 군데였다.

  출국하기 전에 박 대통령은 이런 지시를 내렸다.“그 도시들에 가서 잘된 것도 보겠지만 특히 잘못된 것을 보고 오시오." 나는 곧바로 짐을 꾸려서 네 대륙 방문의 먼 여정을 시작했다.

  맨 먼저 가 본 도시는 브라질리아였다. 브라질리아는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로 해안에 밀집된 인구 분포의 문제점과 미개발 지역 개발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내륙 중심의 대상지로 꼽은 곳으로서, 루치오 코스타와 오스카 니마이어라는 유명한 두 사람이 설계한 도시였다. 루치오 코스타가 도시의 기본 골격을 계획했고, 오스카 니마이어는 주요 정부 건물들을 건축 설계하였다. 브라질리아는 완전히 새로 지어진 도시였다. 도시 외곽으로는 건설에 투입된 인력과 주변 농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광대한 슬럼 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브라질리아는 계획된 도시라고는 했지만 실상 도심의 고속도로가 시민의 접근성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너무 현대적 상징성에 치우친 것도 문제였고, 유럽 도시의 영향을 받아 라틴계 사람들의 가로변 문화를 간과한 것 또한 도시 활성화를 더디게 한 요소였다. 요새는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보행 공간은 기본적으로 ‘그저 자동차 도로 옆에 있는 인도(人道)’ 정도로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팽창된 공공 외부 공간의 중요성을 보지 못한 실패 설계 사례를 브라질리아에서 볼 수 있었다.

  이어 그리스의 아테네로 가서 이슬라마바드를 계획한 독시아데스의 사무실을 찾아가 여러 의견을 교환했다. 파르테논 언덕에 올라가서 고대 건축사를 음미하기도 했으며, 파리에서는 르 꼬르뷔지에 사무실에 들러 기념관 직원들과 챤디가의 설계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 남미와 유럽을 거친 후 이번에는 인도로 향했다. 챤디가로 가기 전에 먼저 뉴델리로 갔는데, 나와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사이인 이범석 대사가 비행기 트랩까지 마중을 나와 물었다. 그런데 곽 교수, 당신이 언제부터 중화학을 공부했어?”

  나중에 알았는데, 청와대에서 그곳 대사관으로 사전 연락을 취할 때 내 방문 목적을 밝히지 않고 그냥 오원철 수석이 단장으로 있는 ‘중화학 기획단’의 위원이라고만 알려 준 모양이었다. 도시 계획을 하는 교수가 난데없이 ‘중화학 기획단’ 소속이라니, 이 대사로서는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챤디가는 르 꼬르뷔지에라는 건축가가 계획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가 보니까 마치 조각처럼 설계한 그 건축가 특유의 콘크리트 정부 청사만이 눈에 들어올 뿐, 펀잡주(州)의 수도로서의 면모는 찾기 힘들었다. 전체적인 도시 모습에서 시민들에 대한 배려를 찾기 힘들었고, 도시 공공 편익 시설과 주거지와의 관계를인도 사람들 특유의 습성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쉬웠다.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는 옛 수도였던 인도양의 항구 도시, 카라치를 통해 들어갔다. 북쪽 끝 카쉬미르 근처에 위치한 이슬라마바드는 기존의 라왈핀디(Rawalpindi)라는 도시를 모(母)도시로 이용하여 비교적 수월하게 신도시를 건설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 만했다. 그곳 도시 계획 관계자와 함께 도시 전체를 살폈는데, 신도시 건설을 맡았던 도시 계획가 독시아데스 역시 파키스탄의 문화를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특히 큰 블록을 이루게 한 도시 도로망 때문에 전혀 특성이 없는 도시라는 느낌을 주었다.

  다음으로는 뉴델리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호주 시드니로 향했다. 캔버라를 방문하기 위해 먼저 시드니에 도착한 것인데, 날씨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이 부랴부랴 떠나는 바람에 그냥 반바지 차림으로 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겨울도 보통 겨울이 아니라 바람 쌩쌩 부는 한겨울이 아닌가. 물론 수하물로 보낸 가방 속에는 긴 바지와 긴팔 옷이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방이 도착하지를 않았다. 덜덜 떨며 겨우 호텔을 잡고 곧장 옷 가게로 갔다. 한참을 헤매다니다가 겨우 양복 한 벌 사서 입었는데, 바지 기장이 너무 길어서 바닥에 질질 끌렸다. 바지를 줄여 주는 수선집을 찾는 것보다 나는 훨씬 수월한 방법을 택했다. 구두 가게로 가서 최대한 굽이 높은 부츠를 사서 신고 나자 그런 대로 남의 바지 훔쳐 입은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짐은 결국 오지 않았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야 어렵사리 되찾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호주에서 단벌 신사로 지내야 했다.

  그 소동 끝에 나는 캔버라를 개발한 주체인 NCDC(National Capital Development Corporation)에 가서 관계자들에게 그 동안의 많은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캔버라는 벌리 그리핀이라는 미국 조경가와 건축가인 그의 부인이 합작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도심에는 그리핀의 이름을 딴 호수가 있었는데, 세 주요 시설 공간을 원형으로 만들고 서로 마주 보게 한 것이 도시의 중요 이미지였다. 주거지는 모두 자연 지형을 따르도록 한 것이 특징이었으며, 집을 지을 때 주변에 있는 자연 수목을 꼭 심도록 하는 건축 허가 조항이나 나무를 증정하는 제도를둔 것도 관심을 끄는 아이디어였다. 덕분에 도시와 외곽 자연 지역이 수목을 통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한 달에 걸쳐 남미와 유럽, 중동, 그리고 대양주, 이 네 대륙을 돌아다녔다. 그곳의 신도시들을 꼼꼼히 둘러보며 ‘잘못된 것’을 보는 동시에 ‘잘된 것’도 두루 살펴보았다. 1977년 10월에 정부 주도의 행정 수도 건설 세미나에서 여러 구상을 밝힌 적이 있었는데, 한 달 동안의 도시 순방은 그때의 구상을 여러 실제 사례들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일주일 이상 계속된 이 세미나에는 나를 포함해 35명의 전문가가 참석하였다. 세미나가 마무리되어 가던 즈음 나는 참석자를 대표하여 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으며, 새 행정 수도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언급하였다. 전통과 기능이 조화되는 도시',‘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도시’를 기본명제로 인식하고 있던 나는 ‘인간을 제1의 위치에 두는 도시’와 ‘한국의 국토 면적, 지형, 역사적 유물, 한국민의 민족성 등을 토대로 하되, 거기에 기능주의를 조화시키는 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른바 ‘백지 계획’이 수립된 것은1977년부터 1979년까지였다. 이 기간 동안 40여 가지의 보고서가 나왔는데 나는 그 가운데 “도시 중심지 도시 설계”와 도시 전체의 얼개를 설계하여종합 보고서로 만든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 계획”, 그리고 “외국신수도시와 행정 수도 계획의 비교”라는 제하의 세 권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실제로 행정 수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철저히 보안에 부쳐져 있었다. 그것은 물론 서울 시민을 비롯하여 국민들이 불필요하게동요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1978년 연두 교서를 발표할 때 대통령이 행정 수도 이전 계획을 언급하자 많은 국민들이 불안해했던것 같다. 구체적인 입지 후보지로는 충남 연기군 장기면을 가정하였고, 이로써 나의 행정 수도 기본 계획인 소위 ‘H 타입’의 개념이 그려졌던 것이다.

  1979년 박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그 동안의 행정 수도 계획은 일단 무산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80년, 당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에게서 연락이 왔고 이어 김종구건설 담당 비서관과 여러 차례 실무 협의를 한 후 김 수석과 독대를 하게 되었다.“곽 교수가 전문가니까 다 알아서 할 줄 믿습니다.”“그래도 김 선배님의 지침은 없으신지요?”“글쎄, 땅 투기만 나지 않게 하는것이 나의 조건이랄까 ……." 이에 따라 나는‘620 사업’이라는, ‘중화학 기획단’과 같이 모호한 이름으로 행정 수도 계획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같은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은밀한 것이었다.내 임무의 본질적인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 광범위한 임시 행정 수도 계획의 전 과정이 내게 더욱 무거운 과제로남겨지게 된 것이다.

  장기읍에 신수도를 짓겠다는 ‘백지 계획’과 달리 나는 대전시를 중심으로 유사시 수도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으로 차근차근 진행시켰다. 전두환 대통령도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국가 안보와 수도권 인구 분산의 대책으로 행정 수도 이전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이를 위해 행정 수도 계획안을 그대로 계승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김재익 수석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지난 3년 이상을 매달려 온 작업인데다 새로운 행정 수도가 올바른 계획과 설계 아래 건설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보안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데다 업무의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나는 ‘백지 계획’에 이어 전 대통령의 ‘후보 계획 620 사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대전의 모습과 계룡대, 그리고 제2의 국립 묘지 등의 현황은 이 ‘620 사업’의 결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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