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격 점감작전과, 일본의 태평양 방어전에 대해 재밋는 글이 있더군요. -ㅅ-; 관련 얘기라 예전글 재활용 해서 스리슬쩍(...) 올려봅니다.
「아」호작전(매리애나 해전의 일본측 작전명)은 당시 참모장 쿠사카 참모장의 회상에 의하면「면밀을 다한 계획」이며 또 당시 전황도 오자와 기동부대는 적보다 먼저 적의 위치를 발견하고 있었기에 공격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기에 정말로 베스트.컨디션, 이제 더이상의 우려는 없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녹초가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남아있는 가쿠다 부대(육상 항공부대)의 전력이 더해지면 매리애나에서 미 기동부대를 결전끝에 격파하는 것은 확실하다는....그야말로 완승 분위기라고 할 정도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일본해군은 완패했으며 매리애나의 칠면조 사냥이라는 이름이 전사에 남아있을만큼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전 해상 항공병력과 개전 전부터 일본해군이「불침모함」이라 자랑한 남양군도에 전개한 모든 육상 항공 병력을 상실해 이후 조직적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일본해군은 왜 진 것일까? 게다가 이 작전은 일본해군이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처음 삼은 메이지 말기 이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온 무기나 전술, 그리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 온 요격 점감 작전을 거의 계획대로 실시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작전이었으며 또한 미 해군에 앞서 일본해군의 선제 공격에 의해 개시된 작전이었기에 더 그렇습니다.
1. 작전구상과 준비
(1) 「아」호작전의 원형 (요격 점감작전)
「아」호작전 최대의 특징은 일본해군이 메이지시대 이래 계획하고 훈련해온 요격 점감 작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시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뭐 사실상 일본해군은 이 작전을 위해 해군의 편제나 함대의 편성, 함정이나 항공기의 건조나 장비, 그리고 훈련까지 이 작전 구상에 따라서 성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요격 점감 작전의 구상은 워싱턴 조약이나 런던 조약에서 해군 병력의 열세비가 고정된 일본해군이 유틀란트 해전 등의 전훈을 기초로 1918년에 최초로 작성한 것으로, 1923년에는「제국군 용병강령」에「적 함대의 동양방면 내항시, 준비된 병력이 순서대로 요격전에 나서 적 세력을 감쇄시키고 최종적으론 주력함대가 적의 잔존병력을 격파」라고 규정, 동양소재의 미국 함대를 개전 초두에 격파, 필리핀/괌을 순차적으로 공략해 세력권에 넣어 마샬 - 캐롤라인 이서를 확보한 뒤 이후는 태평양을 횡단한 미 함대를 잠수함, 항공기 및 수뢰전대의 야전에 의해 순서대로 격파.....미 함대 주력을 점감시켜 대략 동등의 병력비가 맟춰지면 연합함대 주력(전함)이 미 해군에 함대 결전을 시도해 완전히 격파한다는 작전입니다. 이 작전은 대략 다음의 3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 잠수함 부대를 미 함대의 근거지(하와이)에 파견해 그 동정을 감시, 미 태평양 함대의 주력이 출격했을 경우는 이것을 반복 추적/접촉하며 그 동정을 면밀히 관찰함과 동시에 습격을 반복, 적병력의 감쇄에 노력한다.
2. 기지 항공부대를 남양군도에 전개, 적함대가 그 위력권에 들어오면 항공모함 항공대와 협력해 항공공격을 집중, 미군의 전력을 더욱 점감시킨다.
3. 적함대가 결전해역(개전 전 일본군해 상정, 마샬-캐롤라인 제도 부근)에 도착하면 고속전함(공고급)을 선두로 야전부대(중순)가 강행접근해 적의 전위 부대를 포격전으로 격파, 이어 수뢰전대가 적 주력 함대에 대해 뇌격전을 주로 한 야전을 결행해 적 주력함대에게 대타격을 입혀 야전에 계속된 여명 이후 연합함대의 주력 전함전대를 핵심으로 하는 전병력을 결집해 결전을 시도해 미 태평양 함대를 격멸한다.
........는 시나리오였습니다. -ㅅ-;
(2) 육상기지 항공부대의 준비
얼마전 관련 계시물 두가지와(<U>점감 요격작전</U>, <U>태평양의 방어가 늦어진 까닳은 뭔가</U>) 덧글에 보면 조금 잘못 이해된 부분이 있는데 간단히 이를 위해 추가하자면 일본해군도 그렇게 준비를 안한게 아니었습니다 -ㅅ-;
일단 일본해군도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을 둘러싼 항공 소모전에서 숙련 파일럿의 대부분을 잃은 1943년 10월 이후부터는 해군의 전략을 공세작전에서 수세방어로 전환하고 이후 쿠릴 열도와 오가사와라제도, 매리애나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 서부 뉴기니아, 자바/수마트라섬 - 등을 묶는 범위를 절대 국방권으로 상정하고 이 권역의 방어작전 구상은 육상 기지에 전개한 항공기를 미군의 습격 정면으로 예상되는 지역에서 일단 내측으로 배치전환시키고 정찰기만을 남긴 상태에서 미군의 내습징후를 포착, 미 함대 내항시 재차 진출해 타 기지로부터 항공기를 한꺼번에 집중시켜 반격해 이들 기지 항공 부대가 피아 기동부대의 결전 전, 먼저 미 기동부대 모함 병력의 최소 3분의1을 격파한다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시기(43년 중반부터 말 이후) 일본군의 작전구상은 일본군도 (항공전으로)패러다임이 넘어간걸 대비해서 충분한 수세방어 계획을 세운 것이기에 당연 그 핵심은 일단 항공기, 그리고 기동부대와 제해를 위한 수상함대였지요. 또하나 ()님이 잘못알고계신것은 솔로몬의 소모전은 당초 계획대로의 점감요격의 최전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드웨이작전 실패 후 군령부가 밀던 전략안인 미호차단작전을 위한 세부 작전구상으로써의 MO작전을 위한 발판으로써의 요지 제압의 목적이 먼저였습니다만 이곳에서 발생한 엑시던트(...)는 바로 세계최초의 항모결전인 산호해 해전....-ㅅ-;
뭐 설명하면 길어집니다만 원래 요격 점감작전으로 대표되는 미함대와 결전을 벌여 격파한다는 안은 전통적으로 연합함대측이 선호했고 미드웨이 작전도 장소는 다릅니다만 이것의 한형태로 나타난 작전이었지요. 야마모토는 최대한 일본해군이 유리한 시점에서 조기에 결전을 감행, 미 함대의 잔존병력을 조기에 격파하기 위해 당초 계획한 점감작전보단 먼저 능동적으로 움직여 미드웨이 근해를 결전장으로 삼았지만 이게 실패했고 때문에 42년 말 이후는 반대로 군령부의 안이 힘을 얻기 시작해 군령부안 - 미호차단작전 - 을 위해 MO작전이 실시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군령부안인 MO작전에 대해 첨언하자면.....-ㅅ-;
사실 일본해군은 41년 말의 대미개전 자체가 메이지시대 이래부터 계획한 점감작전에 맞는 조건이 아니기에 기본적으로 반대였단 사실은 모두들 알고계실겁니다 -ㅅ-; 야마모토 장관의 "....1년이나 1년 반은 날뛸 수 있지만 그 이후는 무리다" 라는 말도 이걸 내포하고 있는것이거든요. 왜냐? 사실 해군의 요격 점감작전은 기본적으로 2대국 이상의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순수한" 대미 작전계획으로 이 계획의 전제는 결전상대는 오직 미 태평양함대 또는 미 해군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41년의 대본영에서 결정된 대미개전과 남방작전은 필연적으로 극동에서의 모든 열강을 적으로 돌린다는 조건을(미국의 금수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석유가 있는 란인을 제압, 또 그를 위해선 영령말레이와 싱가폴도 제압)내포하기에 해군은 이 시기에 개전하면 상정할 수 있는 모든 적과 싸우는게 정말로 현실이 된다며 대놓고(...) 대본영에서 말하진 못했지만 매우 비관적이었던겁니다.
하지만 대본영 어전회의에서 최종적으로 대미개전, 남방작전이 결정되었고 이것을 위해 해군은 요격 점감작전이 아닌 전혀 새로운, 그리고 상정외의 광면적 제압작전을 계획하게 되었고 때문에 기동부대의 하와이 작전과 더불어 말레이, 란인방면이란 크게 3해역 작전을 세로 계획하게 되었던겁니다.
물론 여기까진 해군 자신들도 기대하지 않았던 대성공, 서전의 하와이 작전은 미 태평양함대를 빈사상태로 만들어놨으며 말레이에서도 영 동양함대를 수상함 손실없이 격파, 란인에서도 ABDA함대를 격파해 생각 외로 너무나 유리한 상황이 속속 전개되었던겁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일본해군은 그들이 한번도 계획하지 않았던 인도양 작전마저 대성공시킨 가운데 그래도 당면한 최대의 주적, 하와이에서 살아남은 미 항공모함마저 마저 격파하기 위해 전장의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의 새로운 전략을 결정하게 되는데 여기서 군령부와 연합함대(GF)측의 시각은 이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육군의 지원을 받은)군령부안은 미호차단작전으로 남방을 굳힌다는 안이었고 GF측은 그래도 미 잔존함대 격파가 우선이란 안이었는데 이 시점까지는 연이어 작전을 대성공시킨 야마모토 장관을 필두로 한 GF안이 GO사인을 받아 미드웨이 작전이 실시되게 되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미드웨이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다시 대두된게 군령부안이었고 이것은 미호공조라인을 누르기 위해 뉴기니아섬 남동단의 포트 모레스비를 떨어뜨린다는 작전이었습니다.
포트 모레스비는 산호해에 인접한 반도의 첨단에 위치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연결하는 연락선상의 요충지로 여기를 떨어뜨리면 확실히 미호 공조라인은 차단되어 오스트레일리아는 고립, 미국도 필리핀 탈환전과 남태평양 방면으로 반공작전의 발판을 상실하게 되며 더욱이 뉴기니아라는 전략상의 요충도 일본군이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기에 이것은 군령부뿐만 아니라 육군도 지지하는 안이었지요.
뿐만아니라 이 작전의 시행과정에서 예상된 여러 조건중엔 미호연락라인을 유지하려면 미 해군도 함대를 다시 파견할 가능성이 제기되므로 미 기동부대를 또다시 유인해 일망타진시킬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되므로 이것은 최소한 당시 시점에선 군령부뿐만 아리나 해군이 상정할 수 있는 최상의 작전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는 미드웨이의 타격을 추스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더이상 전선이 팽창하는걸 원하지 않았거든요. 구체적으론 포트 모레스비 공략을 위해선 라에나 브나를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고 경우에 따라선 솔로몬까지 공략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다면 GF가 감당해낼 작전해면이 늘어나 용병상에 심각한 문제점을 낳게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만, -ㅅ-; 대부분 이런 경우 결국은 전략적인 면을 들어 제시한쪽이 이기기 마련이죠. 뭐 이건 좀 더 종합적으로 대국을 관망하며 군령을 내리는 입장인 군령부와 실제로 싸움을 치루는 부대인 GF와의 인식차라고도 할 수도 있고, 또는 책상에서 작전을 기안하는 쪽과 실제 피흘리며 싸워온 쪽의 인식의 괴리라고도......orz
하여간 이런 구상에서 나온게 MO작전이고 그것에서 파생된 것이 라바울-솔로몬까지의 전선 확대였습니다만 뭐 지도만 봐도 잘 알 수 있으실겝니다. 사실 일본해군의 요격 점감작전상 결전해역인 마셜 캐롤라인제도는 솔로몬보다 훨씬 윗쪽, 즉 점감작전의 발판을 위한 곳은 아니죠. 쓸데없이 길게 되었는데....정리하자면 이건 절대 요격 점감작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단겁니다!!! (뽀핫) -ㅅ-;
여기서 또하나 언급자면. ()님이 말씀하신 " 야마모토와 우가키가 이 솔로몬 일대에 집착하면서, 오히려 주력인 항공기들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 " 이것의 성격도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실 함재기의 육상투입에 관해선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집착" 이라고 오해되기 쉽습니다만 그 배경을 좀 더 잘 이해할 필요성이 있거든요.
뭐 사실 일본해군이 항공모함기를 육상기지에 전개시킨 것은 야마모토때문이라기보단 후임인 코가 대장때의 조치가 더 많았습니다. 일단 모함기의 육상 배치는 소규모나 일시적인 것을 포함하면 총 6회였는데 그 대규모 투입의 시작은 1943년 4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이」호 작전 발령과 더불어 시작되어 이어 동년 10월의 코가 미네이치 사령장관이 발령한「로」호 작전때가 2회째로 당연히 그 이후 나머진 모두 코가 대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즉 야마모토는 딱 한번 모함기를 투입한거란 얘기죠. -_- ; 이걸로 야마모토와 우가키가 솔로몬에 집착했다긴 좀 그렇습니다.
또한 야마모토 장관의 투입과 후임인 코가 장관의 함재기 육상투입의 과실에 대해서도 동렬로 놓고 논하긴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야마모토 장관이 모함기를 육상에 투입한 시점은 육군의 과달카날 철퇴 이후니깐 솔로몬에 해군이 집착할 껀덕지가 없는 가운데 육군의 전쟁지도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변해버린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거든요. 결국 이때문에 당시 남방전선에선 해군의 남동방면 함대 작전 지도도 더불어 정체된 상황이었는데 이대로 산만한 모양새로 방치해둔다면 현 전선의 보관/유지 자체까지도 어렵게 될 것이라고 야마모토 장관은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군령부 총장도 육군의 과달카날 철퇴 후 나름데로 해상에선 해군이 적극적으로 작전을 실시하면서 대본영에 그 내용들을 상주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거의 눈에 띄는 전과가 없었기 때문에 천황으로부터「그 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 」라는 프렛셔가 있었다고 합니다. 뭐 꼭 이것이 직접적인 동기인가 아닌가는 불명하지만 어쨋건 심리적으로는 상당히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라고 당시 군령부원이「이」호작전(야마모토가 함재기를 육상에 배치한 작전) 결정의 배경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야마모토 장관에게는 뉴기니 라에로의 증원 육군부대를 실은 고속 수송선 8척 전부가 격침된 단피르 해협의 비극에 대한 해군의 꺼림찍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미 이 시기까지도 솔로몬 방면 연합군의 항공병력은 작전 가능기가 과달카날섬에 약 70기, 에스피릿트 상트에 약 170기, 뉴기니에 약 250기였으니까 당시라면 일본해군도 투입 가능한 모함기를 투입하면 최소한 숫적으론 대등한 항공전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란 판단이 들었기에 함재기 투입이 이런 의미라면 이것도 이 자체로 타당합니다.
그러나 코가 장관의 투입은 43년 10월 중순에 마셜 방면으로 미국 기동부대 접근의 첩보를 받고 출격했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트럭에 귀환한 직후인 10월 26일에 발령되고 있어 일본측 서적인「전사총서, 남동방면 작전」에도「이시기 GF 사령부의 항모비행대 투입결정은 다소 급하게 내려진 감이 깊다. 결전무대인 마셜 방면 출격이 무위에 끝난 결과, 그것에 대한 심리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다시피, 코가 장관의 이 결정이야말로 충동적으로 내려졌을 가능성이 강합니다.
물론 이 직전인 1943년 9월 30일의 대본영 최고회의에선 이른바 절대 국방권을 정한 향후 전쟁지도 요강에 의거 갱신된 육해군의 협정에도 남동방면 함대 사령장관이 지휘하는 항공병력에 대해선 상황에 따라 항모 항공기를 전용, 증강하여 배치한다고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동방면 육해군 부대나 대본영 육군부는 이 한 마디를 근거로 항공모함 비행대의 육상 투입을 실제로 요청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요구에 대해서 해군 중앙 특히 GF에서는 항모 탑승원 육성의 어려움이나 남태평양에서부터 시작되던 미 기동부대의 공세에 대비해 훈련에 시간이 걸리는 모함 탑승원을 소모하는 것은 극도로 우려해 이러한 요망을 계속 거부해왔던 만큼 문제는 야마모토나 우가키의 집착이 아닌 역시 코가 장관의 투입결정에 있다고 봐야겠지요.
헉헉.......기네요, 긴 내용은 환영받지 못한다는것 잘 알고 있습니다. ㅎㅎ 게다가 어딘가 많이 삼천포로 빠져버린 내용....orz 뭐 다시 아호작전으로 돌아올작시면 -ㅅ-;
솔로몬의 해상 소모전, 그리고 라바울의 항공소모전을 거친 이후 절대국방권을 상정한 방어작전구상에 근거해 일본해군은 남양군도에 대대적인 비행장 건설을 개시, 매리애나 해전이 발생한 시점을 전후로도 꽤 많은 비행장이 완성 또는 막바지 공사에 이르고 있었지요.
* 도표는 그리기 귀찮어 숫자로만 표시합니다. -ㅅ-;
매리애나 제도에 8개, 동/서부 캐롤라인 제도에 7개, 이외 5개 = 합계 20개 전초 항공기지.
이 작전계획에 따라 중부 태평양방면 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쥬이치 중장의 지휘하에 제 1, 제 14 항공함대가 신규 편성되었고 그 실무지휘는 제 1 항공함대 장관인 가쿠다 중장이 맡았습니다. 가쿠다 장관은 휘하 부대의 최대 목적은 집중 가능한 전 기지 항공병력을 결전해면에 집결시켜 아군 기동부대와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고 개전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미 기동부대에 반격을 가해 반공의 기도를 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제 1 항공함대는 결전해면에 기지 항공부대 집중(제 1 집중)시 기동부대와의 협력, 결전시 기지 항공부대의 소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 반격 작전을 실시하기 위한 병력의 정비에 노력했습니다.
「아」호작전 계획에 의하면 이때 일본해군 기지 항공부대의 배치는 총 정수 1,552기(정찰기 144기, 전투기 696기, 공격기 570기 외 예비기로 142기)를 배치할 예정으로 이들 육상 항공부대는 3개 공격집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이에 더해「아」호 작전의 공식 발령에 의해 북방에서는 임시 편성의 야와타 부대(요코스카 항공대 등의 베테랑 교관과 최후의 숙련부대인 제 27 항공전대를 합쳐 편성한 112기)가 오가사와라 제도 등에 배치되어 있었지요.
제 1 공격집단 : 사이판, 티니안, 괌, 트럭 방면
제 2 공격집단 : 팔라우, 야프, 다바오 방면
제 3 공격집단 : 뉴기니아, 셀레베스 방면
(3) 해상 항공부대의 전개
한편 일본해군은 진정한 해상결전의 주력으로 기지 항공부대와는 별도로 정규항모 3척, 중형항모 2척, 소형 항모 4척을 중심으로 기동부대 항공병력 439기를 끌어모았습니다. 하지만 이 항공병력조차도 미 해군이 반공시 전개한 956기(항모 12척)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 1 항공전대 (항모 다이호, 항모 쇼가쿠, 항모 즈이가쿠) - 214기
제 2 항공전대 (항모 준요, 항모 히요, 항모 류호우) 135기
제 3 항공전대 (항모 치토세, 항모 치요다, 항모 즈이호) 90기
합계 439기, 그 외 기동부대 부속 함정의 함재 수상 정찰기 36기
* 기동부대 항공병력의 미/일 비교
일본해군
( 제 1 기동부대)
함상전투기(함전) 222기, 함상폭격기(함폭)-113기, 함상공격기(함공)-95기
항모 탑제기 총수 430기 이외 수상기 43기 포함해 총계 473기.
미 해군
( 제 58 기동부대)
함전 475기, 함폭 232기, 함공 184기로 항모 탑재기 총수 891기, 이외 수상기 66기를 더하면 총계 956기.
일단 이미 이 시점에서 벌어진 양국의 생산력 차이는 개전 전부터 일본해군도 예상한 점이었기에 결전해면에서의 이 피아 병력 열세비는GF 사령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때문에 일본해군에게는 남양군도에 건설, 전개한 각 항공기지와 기지 항공부대의 지원이 43년부터 계획된 것이었지요. 때문에 계획대로 1,500기의 육상 전개병력을 더하면 총 항공병력 수에서는 미군의 2배, 물론 실제 작전 발동시에는 공습 등으로 훨씬 많은 숫자의 병력이 격파되었지만 사실「아」호작전이 발동된 시점에서도 일본해군도 최소 500기는 남아 있었기에 양군은 항공 병력의 숫자에 대해선 거의 대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측에는 작전 해역내에 괌과 로타, 야프 섬 등의 크고 작은 섬들을 이용한 비행장이 있었기에 그 비행권 내에서 작전할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이때까지도 정찰기는 560해리(미 해군기는 325~350 해리), 공격기는 300 해리(미 해군은 200 해리)라는 항속거리의 우위가 있었기에 일본해군의 항공전력은 미국 항공부대를 약 100해리 아웃레인지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2. 작전의 추이와 문제점
(1) 기지 항공부대의 괴멸
앞서 언급한것과 같이 일본해군은 우선 기지 항공부대로 항공 점감요격을 달성하고, 그다음에 기동부대의 출격과 가동 가능한 전 잠수함을 집중해 결전에 도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해군이 전개한 항공부대는 1944년 2월 17일의 트럭 항공전에서 약 270기(미 기동부대의 일본 해군 남방 근거지인 트럭 기습전으로 진주만의 복수를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지요. 미군이 이날 격추한 일본기는 지상격파 200기, 공중전에서도 약 70기)를 상실하고 23일에는 괌, 사이판에서 123기(지상 81기, 전투 42기)를 손실, 3월 30일에는 팔라우도 급습당해 전날에 증원된 제 1항함의 44기와 30일 밤 공수된지 얼마 안된 항공기의 거의 전기인 203기를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일본해군은 남양 군도에 총 1,644기를 투입했지만 미군의 사이판 상륙이 개시된 6월 11일에는 당초 배치기의 30%인 약 500기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던겁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 남아있는 항공전력도 5월 27일부터 시작된 맥아더군의 비아크 상륙작전을 미군의 본격적 반공 작전으로 오판해 요격작전을 발동, 잔존한 제 2, 제 3 공격집단을 뉴기니 방면으로 이동시켜 버렸기 때문에 매리애나 해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단 172기밖에 결전 해면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매리아나 해전에 앞서 11일부터는 미 제 58기동부대가 사이판에 190기, 괌에 139기, 티니안에 140기를 집중시킨 공습이 있었고 다음날인 12일에는 0240시의 괌을 시작으로 0420시에는 사이판, 0730시엔 티니안, 로타, 파간 등의 전 비행장이 총계 1,400기의 미 해군기에 의해 공격당해 일본해군이 기대한 기지 항공부대는 요격기의 발진, 육공대의 공중 퇴피와 피해 복구에 바뻐 공격대를 편성할 여유조차 없이 정찰기를 발진시키는 것이 한계인 상황에 빠져버렸습니다.
결국 최후의 병력을 끌어모아 기지 항공부대를 편성했지만 이 부대조차 미군에게 어떠한 타격을 주는 일 없이 전투 전에 괴멸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지요.
이후 일본군의 저항으로 미군의 사이판 상륙이 시작된 직후 대만, 필리핀, 본토 등에서 급히 전개한 부대에 의한 반격이 개시되었지만 이들 항공부대의 공격은 산발적인 수준으로 15일에 트럭과 야프로부터 텐잔 11기(미귀환 6기), 야프로부터 혜성 3기, 은하 10기, 영전 11기가. 16일에는 괌의 텐잔 4기와 은하 1기가, 17일에는 야프의 혜성 17기(미귀환 11기), 은하 3기(미귀환 1기), 영전 31기(미귀환 16기), 트럭으로부터 월광 1기, 텐잔 5기가 미 기동부대를 공격한 정도로 미군에게 준 타격조차 소형 상륙주정 1척 격침, 양륙함 1척, 호위 항공모함 1척에 피해를 준 정도였습니다.
결국 비아크 방면으로 전개된 항공기도 미군의 사이판 상륙에 따라 원대 복귀를 명령받았지만 이들 항공기조차 비아크 방면의 작전이나 왕복에 사용된 비행장의 미비 등에 의해 다수를 손상, 또한 탑승원의 대부분이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15일까지 본대에 복귀한 것은 은하 16기, 혜성 7기, 영전 24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공습을 피한 트럭의 제 2 공격집단의 일부가 19일에 괌으로 복귀했지만 이 부대조차 상공에 매복하고 있던 미 전투기대의 요격으로 반수를 상실, 본토에서 전개된 야와타 부대도 기상악화로 이오지마로의 출진이 지연되어 24일에야 이오지마 주변의 미 기동부대를 공격했지만 이렇다할 전과는 없었습니다.
비교적 기지 항공기에 의한 요격작전이 활발하게 행해진 22일의 상황을 봐도 다음과 같은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만 더 늘어날뿐 별다른 전과는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티니안의 육공대, 450해리의 거리에서 미 기동부대에 대한 공격
제 1 차 공격대 : 1식육공 16기(5기는 발동기 고장으로 중도 귀환) - 7기 미귀환, 1기 불시착
제 2 차 공격대 : 1식육공 5 - 4기 미귀환
제 3 차 공격대 : 1식육공 8기 - 2기 미귀환, 1기 불시착
* 해군 제 61 항공전대의 공격
제 121 비행대 : 함재 정찰기 5기 전기 귀환
제 321 비행대 : 야간전투기 5기 - 2기 미귀환, 2기 불시착
제 756 비행대 : 육공 11기 - 9기 미귀환
제 532 비행대 : 함폭 6기(2기 고장으로 중도 귀환) - 2기 미귀환
제 263 비행대 : 함전 18기 - 17기 미귀환
정리해서 굳이 작전의 진행과정과 패인을 분석하자면, -ㅅ-; 사실 일본해군도 난늘궁금해님이 생각한것처럼 태평양 군도의 방어를 경시하거나 늦게 시작한게 아니었습니다. 위에서도 누차 언급했듯 일본해군은 남양제도의 각 크고 작은 섬들에 항공기지를 상당수 설치했고 전력도 최대한 집중시켰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좁은 산호초섬이였기 때문에 한 비행장에 주기 할 수 있는 항공기는 엄연한 제한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GF참모진에서도 이점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결국 작전의 실시 단계에서 각 크고작은 섬들의 항공기를 기동 운용, 집중시켜 대처할 계획으로 정리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최소 100 해리에서 300 해리까지 떨어진 크고 작은 섬들에 분산된 항공병력을 집중하는데는 조기 경보체제와 세밀한 지휘/통신 조직이 필요했지만 일본해군에게 그러한 조직적 방공 태세가 미흡했습니다. 뭐 이건 당초 야마모토가 우려한 늘어진 작전해면을 생각해보면 분명 일본해군의 한계를 넘는 상황이 분병했습니다만........-ㅅ-; 하여간 이때문에 요격기를 웃도는 우세한 항공병력을 집중시킬수 있는 미 기동부대의 Hit & Run 전술에 급습받아 각개격파되어 버린겁니다.
또 기지 상호간의 지원도 레이더로 탐지되어 전개처 비행장 상공에 기다리는 미 모함기의 요격으로 대부분을 상실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해군이 오랜 세월 기대하고 있던 불침 항공모함 남양군도를 이용한 항공 요격 점감작전은 이러한 기술적 결함과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 집중능력때문에 기동과 집중이라는 전략의 기본을 실현하지 못하고 전과을 올리지 못한 채 소멸되게 됩니다.
(2) 해상 항공부대의 괴멸
워싱턴 조약에서 주력함(전함)을, 런던 조약에서 보조함정(항공모함과 순양함)까지 열세한 비율로 고정된 일본해군은 단함으로 다수의 함정과 싸울 수 있는 개함능력의 우월과 훈련에 의한 숙련도의 향상을 기대할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열세를 보충하기 위해 아군 함정이 손실을 입기 전 상대에게 손실를 주기 위해 상대의 사정 외로부터 공격하는 아웃레인지 전법을 극도로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웃레인지 사상이 일본해군에게 항상 타 열강해군보다 사정거리에서 우수한 대구경포나 산소어뢰, 또 항속 거리가 긴 영전등을 개발시킨 배경이 되었지요.
이런 기조는 항공모함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일본해군은 항모 항공기에 대해서도 미 함재기 이상의 항속거리를 요구했습니다. 함재기의 항속거리는 곧 선제 공격거리의 증대를 의미하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매리애나 해전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기동부대는 6월 19일 0634시에 제1 목표로 미 항모 기동부대를 선제 발견하고 100 해리 아웃레인지한 거리에서, 즉 미 함재기의 항속거리를 넘어선 지점에서 공격대를 발함시켰습니다. 초두의 쿠사카 참모장의 회상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다시한번 소개해볼작시면 -ㅅ-;
「오자와 부대는 적보다 앞서 적의 위치를 발견했고 우리는 적 함재기의 항속거리 밖에 있었다. 발함명령이 내려졌을 때 공격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으며 승조원들까지 전부 갑판으로 나와 공격대의 발함을 모자를 흔들면서 전송했다. 정말로 베스트 컨디션이었고 어떤 걱정도 할만한게 없었다. (중략) 그야말로 축배라도 들어야 할 정도로까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미 기동부대는 오자와 함대의 위치를 몰랐고 일본기의 공격은 미 함재기의 항속거리 밖에서 시작되었지요. 즉, 일방적인 일본군의 선제 공격이며 전형적인 아웃레인지 공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호작전(매리애나 해전)에 즈음해, 오자와 중장은 「....(중략) 만약 이번 결전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우리 제국 해군의 수상함정은 비록 잔존해도 그 의미가 없다.」라며 전군에「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걸려있다.」- 라는 결의아래 마지막 결전의 훈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자와 제독은 앞서 말한것처럼 미군을 능가하는 항속거리를 자랑하는 신예 함상기「혜성」,「텐잔(천산)」등의 공격기를 이용해 100해리의 거리를 유지한채 미 함대를 공격하는「아웃레인지」전법을 취했습니다.
0725 제 1 차 공격대 ( 제 3 항공전대) 64기
0745 제 2 차 공격대 ( 제 1 항공전대) 128기
0900 제 3 차 공격대 ( 제 2 항공전대) 49기
1020 제 4 차 공격대 ( 제 1 항공전대) 18기
1030 제 5 차 공격대 ( 제 2 항공전대) 65기
일단 이때까지도 R.스푸루언스 중장이 지휘하던 미 제 58 기동부대는 일본 기동부대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일(6월 19일) 이른 아침에도 이미 괌을 공격하기 위한 함재기들을 내보낸 상태였습니다. 이 58 기동부대의 괌 공격은 트럭에서 급거 날아온 지원기 19기(일본군)를 포함, 이 이른 아침의 전투에서 일본 전투기 및 폭격기 35기를 격추시켰고 활주로를 파괴시켜 괌 기지를 거의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괌 공격의 보고를 스프루언스 중장이 받고있던 한창때인 오전 10시 29분, 레이더실에서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함대 150 해리 전방에 일본군 제 1차 공격대 64기가 레이더로 탐지되었다는 보고였지요. 보고를 접수한 스프루언스 중장은 즉시 요격기를 발함시켰습니다.
그리고.......스프루언스 중장은 정말 행운의 사나이였습니다.(얀 웬리 -ㅅ-?) 당시 미 기동부대는 그때까지도 일본함대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괌 공격에는 공격기 위주로 함재기들을 내보냈고 전투기는 소수만 딸려보낸 상태였습니다. 즉 전 전투기를 거의 온전히 보유하고 있던 상황에서 스푸루언스 함대는 레이더로 일본군의 공격대를 탐지한 것이었지요!!!!
이런 호조건과 행운에 힘입어 스푸루언스 중장이 내보낸 제1차 요격대는 58 기동부대 전방 60 해리 지점에서 일본기 25기를 격추, 그리고 제 2차 요격대가 16기를 더 격추시켰습니다. 미군의 요격대를 돌파한 수기의 일본기가 전함 사우스 다코다에 명중탄 1발, 순양함 미네아폴리스에 지근탄 1발을 명중시킨 것이 전과의 전부로 일본군 제 1차 공격대중에서 모함에 귀환한 것은 38%인 25기뿐이었습니다.
또한 오자와 기동부대 본대에서 출격한 제 2차 공격대 128기도 미 제 58 기동부대 전방 60 해리 앞에서 요격되어 70기를 잃고 함대 상공에 이른 항공기도 VT신관의 탄막 사격에 의해 대부분 격추, 역시 불과 수기의 함공이 기동부대를 공격해 항모 벙커힐과 워스프에 지근탄 1발을 맟춘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인 공격의 주력인 이 제 2차 공격대의 피해는 쓰디썼습니다. 이들중 오자와 본대의 모함에 귀환한것은 128기중 31기에 지나지 않았거든요.......-ㅅ-; 손실률 75%라는 이 수치는 간신히 재건한 항모 탑승원의 전멸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제 3차 공격대 49기는 미 제 58 기동부대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손해도 7기로 그나마 가장 나았습니다만 필승을 기해 입안한 항모결전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당황한 오자와 제독은 치명적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남은 제 4 차, 제 5 차공격대 합계 83기를 분산시켜(...) 돌입시킨다는 것이었지요.
이 판단 자체, 뭐 전술적으로는 옳았습니다. 이대로 열세인 공격대를 계속 내보내면 가는 족족 격추당할 것은 분명했으까요. 하지만 이때 분산된 4차공격대의 18기는 이미 미 기동부대 전방 먼곳에서 저지되어 반수로 감소된 공격기가 기동부대 상공에 간신히 이르렀지만 역시 경미한 피해를 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5 차공격대 49기는 아예 예상위치 오차로 미 기동부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공격의 기회를 잃은 채 괌으로 향했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스프루언스 중장은 이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무리하게 새벽부터 괌을 먼저 두들긴 이유는 첫째로 오자와 기동부대와 일본군 기지항공대와의 협공을 막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항모 항공전시 일본군의 항공기가 다시 이곳을 근거지로 사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판단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문에 스프루언스 중장은 괌의 일본군 항공기를 처리하고 활주로까지 대파시켜 시설을 모조리 파괴한 후에도 그 상공에는 전투기대의 일부를 계속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괌 상공을 초계중이던 미 해군의 F6F 헬캣에게 제 5차 공격대 49기중 30기가 격추, 격추를 간신히 피한 19기는 파괴된 활주로에 강행 착륙을 시도했기 때문에 전기가 대파되고 말았습니다.
오자와 기동부대가 필승을 잠당한 아웃레인지 전법이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은 결정적으로 탑승원의 숙련도를 고려하는 일 없이 무리하게 아웃레인지 전법을 고집해 전 항공기를 미 기동부대 전방 400 해리라는 먼 거리로부터 발진시켰던것에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자와 함대의 함재기중 미 기동부대 상공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0여대 안팎으로 추정될정도로 참담했습니다. 게다가 오자와 제독이 마지막 기회로 내보낸 양면 공격(제 4, 5차 공격대)도 이러한 각 부대가 동시에 미 함대 상공에 도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개격파되어 버린겁니다.
3. 패인의 분석
「도상의 이론으로서는 일리가 있다. 그리고 용병술의 근본으로도 항모 항공전의 본질을 꿰뚫어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기의 말, 여기서는 항공기와 그 탑승원을 의미)이 잘 움직여 줬을때의 이야기이다.......(중략).....이쪽의 창을 계속 찌른다, 적의 창은 아직 닿지 않는다. 우선 적 항공모함에게 집중적인 일격을 가한다. 모함의 취약성을 붙잡고 늘어져 그 발착함 기능을 빼앗는 것이 주 목적이다. 이렇게하여 적의 함재기를 날 수 없게 해두고 나서 전군이 육박해 마음껏 때려 눕혀 주자는 것이 오자와 장관이 말한 아웃레인지 전법이다. (중략) 단지 문제는 그것을 수행하는데 적격인 정예 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미군은 이날 우리 함대에 대한 공습을 보류하고 시종일관 요격 전법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그리고, 레이더를 전폭 활용하는 것과 동시에 전 탑재 전투기를 집중 사용해 절대 유리의 태세로 기다려 아웃레인지 전법을 위해 원거리로부터 간신히 도착한 우리 공격대를 차근차근 잘래내 버린것이 아닐까.........」( 이하「 쿠사카 참모장의 회상」에서 )
「오자와 장관은 해군대학교 교장까지 지내 실전에서도 그 영명을 떨칠 것이 유력시된 해군 전술의 대가이며 장관을 보좌하는 참모장 이하도 모두 검증된 엘리트들이었다. 하지만....... 단지, 내마음에 한가지 걸리고 있던 것은 오자와 부대는 장관, 참모장, 수석참모, 작전참모, 또한 두명의 항공참모중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뇌부가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사람들 뿐이었던 것이다..........게다가, 항공참모 외에 항공출신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여기서 유일한 항공출신에 실전 경험자는 아마 겐다를 말하는 듯 -ㅅ-;, 결국 겐다뻬고는 실전경험있는 참모가 아예 없었단 얘기죠. 겐다는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많아 많이 욕먹습니다만 그건 그만큼 이양반이 혼자 많은 일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실 명 파일럿 출신에 참모까지 할 정도의 고도의 능력을 가진 군인은 흔한게 아닙니다. 이 작전에서도 제 4/5차공격대의 분산공세는 그 자신이 파일럿이기도 한 겐다 참모의 직언으로 쿠사카 참모장이 반대의견을 내었습니다만 오자와 제독이 최후의 공격결단을 내린 것이지요...-ㅅ-;)
참모장이었던 쿠사카 참모장이나 항공참모인 겐다는 보시다시피 작전에 대해 「계획 그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작전을 실제로 실시하는 부대의 숙련도는 개전 초기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을정도로 낮은 것이었다.」라고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참모답게 작전 실패후 매리아나 해전의 패인을 탑승원의 숙련도 부족, 기지 시설의 미비, 아웃레인지라는 원거리 공격의 용병상 결함을 들었고 한층 더 패인의 원점은 기밀의 누설과(해군 을호사건으로 불리는 것인데 후쿠토메 시게루 연합함대 참모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부섬에서 포로가 된 사건) 레이더/요격기등을 관제하는 웨폰시스템의 개념결여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일본해군은 배수량 3만 4200톤, 수선장 253m, 속력 33.3 노트, 탑재기수 81기로 세계에서도 일류 성능을 자랑하던 일본해군이 건조한 최강의 항공모함이자 기함인 다이호를 포함한 항모 3척, 항공기 약 430기를 상실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 해군의 손실은 함정 침몰 제로.
단 몇시간만의 전투로 243기, 오자와 기동부대는 최후의 항모 탑승원을 포함한 총 430기의 항공기 손실을 입었으며「아」호작전을 포함한 일련의 해전(통칭해서 매리애나 해전)에서 일본해군은 총계 1283기, 탑승원 1528명이라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정예 탑승원을 모두 소모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또, 일본해군은 이 작전에 36척의 잠수함도 출격시켰지만 미군의 비아크 상륙전에 따라 전개선을 애드미럴티 제도 방면으로 오판단했기때문에 전투 해역에는 단 1척의 잠수함도 집중시키지 못한채 20척을 상실하고 말았지요. 이렇게하여 「아」호작전은 일본해군의 대패배에 의해 종료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해군이 30년간 기대해온 요격 점감 작전의 비참한 결과였습니다. 이렇듯 일본해군이 갈고 닦아온 요격 점감 전법이, 그리고 병력 열세로부터 해군의 체질처럼 되어버린 아웃레인지 전법이 일본해군이 조직적으로 기동할 수 있었던 마지막 대해전인 매리아나 해전의 패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여담 -
1927년 해군대학교 강의에서 당시 해군군령부 작전부장 스에츠구 노부마사 소장은 요격 점감 작전의 전제는 미 함대가 예상대로 내항하는 것이 전제지만 그것이 미 해군이 일본에 유리한 조건하에 내항하는지 아닌지가 큰 문제이며 또, 요격 점감 작전 자체의 문제로서 색적(정찰)을 위해서는 분산이 필수 조건이지만 적을 발견하면 다시 집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미군은 최초부터 집결된 병력으로 내습하므로 분산된 일본해군의 전력으로 이에 대응한다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즉 이 가정이 최악의 경우로 현실화될 경우, 최대 문제는 오히려 점감되는 쪽이 최초부터 분산된 일본해군이 될 가능성을 제기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점감하려고 하는 이쪽이 오히려 점감될 우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처음부터 도고 제독의 선례처럼 연합함대를 집결해 미 함대를 맞이하면 되지만 이것 또한 과거 러일전쟁때와는 달리 태평양이란 광대한 대양을 작전해역으로 하는 장차전에서는 어려운...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광대한 태평양에서는 색적(정찰)을 충분히 하지 못하면 미 함대의 발견 자체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리고, 가령 최초부터 연합함대를 집결시켜 결전에 들어간다고 해도 열세한 세력을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산은 여전히 낮다는것이 일본해군이 가진 딜레마이자 한계였습니다. 이 강의에서도 스에쯔구 제독은 이것에 대한 최선의 답을 어떻게 찾아낼지가 오늘날의 큰 고민이다 - 라고 말했지만 결국 일본해군은 이것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전쟁은 스에쯔구 소장의 위구심대로 흘러가고 말았지요.
뭐 사담입니다만 미 해군도 사실 공세로 방향을 바꾼 것은 대형 항공모함을 다수 양산시킨 1944년 이후의 일입니다.
마한의 해양 전략사상은 요새화된 해양 근거지와 광대한 해역을 지배하는 영국해군의 사례를 근거로 해군 함정과 동일한 자원을 투입해 건조된 해안포와 시설은 방어측에 유리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한의 해양 전략사상을 신봉한 일본해군은 그 사고방식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마한의 주장이 육상 기지 항공병력과 모함 항공병력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원칙은 넓게 보면 대서양과 지중해, 인도양에 수많은 근거지와 요새화된 해군 기지를 갗춘 영국(해군)의 경우에는 2차대전기까지도 지켜졌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기지와 기지와의 사이가 훨씬 먼 태평양과 남양군도에서는 그렇게 적용될수 없었지요.
사실 이것은 마한이 영국해군이란 매우 특수한 예를 들어, - 그들은 요새화된 근거지, 제해하는 해역, 그리고 함대 자체의 숫자가 압도적이었습니다. - 일반화한데 지나지 않아 처음 마한의 해양 전략사상이 나왔을때부터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또한 마한 자신도 그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조미니의 원칙,「집중과 기동」에는 어긋나는 것이라고 언급한적이 있었거든요.
정리하자면 불침 항공모함 남양군도는 기동과 집중에 의해 압도적인 미국의 모함 탑재 항공병력앞에 무력화되었고 또한 전술적으로 아웃레인지 한것이 분명한 일본해군도 미국의 레이더와 결합된 EW(Early Warning/조기경보 시스템)와 항공관제등에 오히려 기술적으로 아웃레인지되어 선제 기습공격을 모토로 한 일본해군이 레이더와 근접신관(VT)이라는 기술적 기습에 패배했다며 마무리. -ㅅ-;
소스- 역사군상 태평양전쟁시리즈 8권 매리애나 해전.
추가 ) 난늘궁금해님의 의문점에 대한 대답. -ㅅ-; (원문- <U>태평양의 일본 방어가 늦어진 까닳은 뭔가</U>)
태평양군도의 전투들을 살펴보면 일본군의 준비는 대체로 매우 부족한 상태가 많습니다.
제대로 진지를 완성시켜 전투를 한 것은 이오지마나 길버트제도 정도 뿐이었고, 대부분 중요한 섬에서 건축자재를 쌓아놓고 노무자들만 잔뜩 끌고와서는 준비부족으로 미완성의 진지에서 전투를 하다 반자이 돌격으로 죽어가거든요...
중부 태평양 군도들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본토에서 2류급 병력만 투입된 경우가 많습니다.
사태가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안 대체 중국에 있던 수백만에 이르던 일본육군은 왜 거기서 쓸때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었을까요?
미군이 재빠르게 진격해왔다는 이야기를 둘러댈 수도 있지만, 솔로몬 군도에서 버틴 시간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모자랐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중국전선에 있던 일본육군 주력의 20%만 제대로 빼 왔어도 마리아나 제도와 필리핀을 그렇게 쉽게 내주지 않았으리라 생각되거든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중부 태평양 군도의 중요성과 방어계획에 대해선 본문에 서술했으니 여기선 패스, -ㅅ-; 자 그런데 태평양 전쟁의 본질을 좀 착각하시는군요. 태평양 전쟁은 기본적으로 해군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서술했다시피 이 전쟁은 실제 일본해군도 최선을 다해 투입했듯 해군의 병력과 부대로 해상에서 막아내는게 당연한겁니다. 육군과 해군의 알력 문제도 있지만 그걸 둘째치고서라도 진지전을 생각한다는게 태평양 전쟁에선 하나의 넌센스인겁니다. 왜냐? 여긴 평원이 아니거든요. 해상전이 끝난 이후에나 상륙전과 진지 소탕전이 육상 병력(미군의 경우는 해병대)에 의해 이뤄지는겁니다. 실제로도 이오지마나 길버트나 해상전, 항공전이 미국측의 승기로 돌아선 시점에서 해병대의 작전이 이뤄졌습니다.
또 중국전선의 육군파견을 말하는데.....그 중국전선에서 일본육군이 대응하던 적이 누군지를 생각해보시길 그 상대는 중일전쟁 전에도 최소 250만 이상의 육군병력을 보유한 국부군과 팔로군이었습니다. 또한 소일중립조약이 있다곤 하지만 만주엔 항상 대소 견제로 얼마간의 병력은 반드시 잔존해야만 한다는 점, 그리고 중국전선의 일본육군 진출선을 생각해보면 그 늘어진 전선에서 병력을 빼내는건 말이 안되는겁니다. -ㅅ-;
즉 일본은 1937년이래 중국과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또 만주에도 대량의 군단을 대소전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육군 대부분의 현역사단은 이미 외지에 출정한 상태로 장교들에게 갑종교육(대위급의 현역 사관에게 고급 전술이나 군단 전략을 교육하는 것)조차 그리 충실히 이뤄진다고는 장담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또하나 착각하신게....일본도 태평양 전쟁이 격렬해지자 각지의 병력부족을 심각하게 나타났고(특히 남방) 여기저기서 임시 편성의 부대를 신설합니다. 생각하신것처럼 안 보낸게 아니란겁니다 -ㅅ-; 이중엔 유력한 실전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육군 공주령 학교도 포함되어 실전부대로의 개편을 행하게 되는데 이 학교는 노몬한전 이후 소련 전차군단의 실상을 목도한 육군의 기갑 교육기관으로 시작해 이후엔 각 병과를 결합한「교도단」을 중심으로 실전적인 병과간 연합전술에 대한 학교로 재편성된 베테랑 부대였습니다.
부대의 구성은(공주령학교 시절) 자재와 보급관리를 맡는「재료창」, 본부조직이 되는「본부」,「교육부」,「연구부」외에 8,451명의 정원을 가지는「교도단」이 기본으로 이 교도단에는「사령부」,「교도 보병단 사령부」,「교도 보병 제 1 연대」,「교도 보병 제 2 연대」,「교도 전차 연대」,「교도 포병 연대」,「교도 공병 연대」,「교도 통신대」,「교도 제독대」가 소속되어 있어 재료창으로 감편된 병참부대를 제외한다해도 각 병과가 훌륭히 결합된, 일본육군으로서는 보기 드문 최정예 부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후 독립혼성 제 68 여단으로 개칭- 아주 예전에 이 부대에 대해 질문드린적 있었는데 민혁님 말씀으론 독일군의 대전 초기 수준이라고 하신게 기억납니다.-ㅅ-;)
하여간, 이런 부대를 포함한 각 부대들이 남방으로 투입되기 위해 속속 편성되었고 68여단을 포함한 각 부대들은 중국전선에서 차출되어 1944년 초중반부터 만주에서 곧바로 조선의 부산항까지 철도로 수송되어 투입되었죠. - 참고로 당시 부산항은 사이판 탈환작전에 투입되기로 지정된 부대나 필리핀, 난세이 제도 방면으로 투입되는 각 육군 부대들로 들끓고 있어 차례차례 수송선단이 입항하고 나가는 매우 번잡한 상황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사이에 태평양의 전국은 크게 요동쳐 매리애나 제도를 공략한 미군은 다음 목표를 필리핀으로 삼고 있었지요. 매리애나에서 요격 점감전법에 따른 필사의 결전에 져버린 일본군은 다음 전장인 필리핀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 전국의 일거 만회를 도모하려고 했습니다. 통칭「첩호작전」으로 불리는 그것이 바로 이때의 얘기로, 이 작전은 남아있는 모든 육해군 전력의 투입이 계획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의 다음 작전목표는 오가사와라 - 난세이제도 - 필리핀중 어디엔가 상륙해오는것은 확실했습니다. 특히 필리핀을 노리는 반공작전은 틀림없다고 판단되고 있었는데 그때문에 미군이 차기 작전을 실시할때 전력을 집중해 단번에 격파하자는것이 첩호작전의 주 목표였던 것이죠. 이 작전의 전제 조건은 결전장으로의 급속한 전력 기동집중을 들 수 있습니다. 그때문에 대본영 명령으로「기동 반격작전 준비령」이 하달되어 1944년 8월 20일까지 해당 군단(필리핀 결전부대)의 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결론 -
이젠 좀 궁금증이 풀리셨는지요 난늘궁금해님 -ㅅ-? 중국전선에 있던 일본육군 주력의 20%만 제대로 빼 왔어도 마리아나 제도와 필리핀을 그렇게 쉽게 내주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신다면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시면 되는겁니다. 찾아 보면, 이렇게 최정예부대까지 빼와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져버린 역사적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실겁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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