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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드골평전

굽시니슽(218.48) 2007.06.17 03: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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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드골평전은 상당한 드골빠 시각으로 쓰여졌습니다.





드골 평전 - <펌>야생화 피는 조경 카페



드골 평전
필리프 라트 지음/윤미연 옮김
도서출판 바움/2002년 11월/726쪽

▣ 저 자 필리프 라트
고등 사범학교 출신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중 한 사람인 필리프 라트는 『알제리 전쟁, 오해의 시간』과 『군 통신의 역사』를 펴낸 바 있다.

▣ 역 자 윤미연
부산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프랑스 CAEN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역서로는 『아프리카의 역사』『영화 조명』『피카소』『디키 여행시리즈 그리스』『넬슨 만델라』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역사 속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실제적인 삶과 더불어 하나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드골(De Gaulle, 1890~1970)의 인생은 완벽함 그 자체이며, 정치인으로서의 신화에 해당한다. 이 책의 저자 필립 라트는 ‘평전’이라는 장르의 개념에 맞게 드골의 미덕들과 아울러 드골의 결함들을 숨김없이 드러내려 한다. 초급장교 시절,『프랑스와 프랑스 군대』의 출판을 놓고 페탱 장군과 벌인 치졸한 갈등, 독선적인 면모, 지치고 노쇠한 드골이 자신의 신화에 스스로 갇혀 실수를 범하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에게는 결함보다 미덕들이 훨씬 더 많다. 프랑스 정치계가 표방하고자 하는 것이 드골의 정책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프랑스 민중들이 그리워하는 드골은 결단력과 당당함, 강인함, 정직성, 검소함, 청렴결백, 탁월한 지성과 같은 무수한 미덕들을 한 몸에 실천한 드골일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인간의 삶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도 역시 드골은 상징이며 기적이다. 1,2차 대전을 모두 경험하면서 한 세기를 주도한 드골의 삶을 다룬 이 책은 동서 갈등, 탈식민지화, 유럽의 모험, 그리고 드골의 업적․담화․저작물․제스처 등 그의 신화에 기여한 모든 것들의 분석을 덧붙였다.

▣ 차 례
1. 삶
1890~1909 세기말과 드골의 유년 시절
1910~1925 숨겨진 자질을 드러내다
1925~1940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다
1940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꽃
1941~1943 국가적 결단 외

2. 알아보기
참고문헌
드골 소사전
텍스트와 인용구문


3. 신화
창건자
앞서가는 사람
예측할 수 없는 인물
미사 집행 사제
상징, 그러나 무엇에 대한 상징인가?

4. 약어 목록
5. 찾아보기

세기말과 드골의 유년 시절(1890~1909)
1890년 11월 22일, 샤를 드골이 태어났다. 모계는 릴 지방의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아버지 앙리 드골은 파리에 위치한 이마퀼레-콩셉시옹 중등학교(카톨릭계 학교)의 교사였다. 드골은 이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샤를 드골은 상류사회의 문화와 거리가 먼 프랑스 북부의 중산층 가정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도시 릴 지방에 팽배해 있던 서민적인 성향, 실용적이고 단순명료한 사고방식과 노동을 중시하는 가치 풍조, 현실주의 등 프랑스 정치계에서 열렬히 선호하던 남부의 댄디즘(정신적 귀족주의)과 거리가 먼 이 도시의 특성들은 드골이 장차 자신의 명료한 사상을 구축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숨겨진 자질을 드러내다(1910~1925)
사관생도 시절(1910~1915) 드골이 훗날 프랑스 국가 원수가 되기까지의 토대는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부임해 군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구축된 것이었다. 1909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드골은 사관 서약과 함께 군인의 길로 들어선다. 이렇게 그는 프랑스의 운명을 구현하는 소명을 띠게 되었으며, 1911년부터 필리프 페탱 대령 휘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베르됭은 지금까지도 전몰장병들을 추모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는데 1915년 대위로 진급한 드골 역시 그곳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 이후 32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페탱 장군이 서명한(‘모든 점에서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상찬의 내용으로 직접 가필한) 육군 수훈보고서에 드골의 혁혁한 전과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전쟁을 생각하다(1916~1921)
포로 생활을 포함한 전쟁 체험을 통해 그의 사상이 완전히 형성된다. 불과 27세의 육군 대위가 주는 전략과 정책에 관한 교훈들에 많은 상급 장교들이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드골 대위가 자신의 사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화술과 논증력,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과 뛰어난 설득력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독일 내의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전쟁에 참여할 영광을 놓쳐버렸다며 낙담에 빠진 드골에게 수여된 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공화국 최고의 훈장)이 그의 진정한 가치를 마침내 인정해 주었다. 젊은 교관(30세)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부여된 교육자적인 자질을 발휘한다. 그는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그 능력을 발전시켜 고위급 장교들 앞에서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10년에 걸쳐 무르익은 경험을 토대로 그가 지닌 사상 자체의 대담성과 그 사상을 납득시킬 수 있는 설득력이 결합됨으로써 그는 확고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확립(1920~1925)
1921년은 샤를 드골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해로 시작되었다. 군 내부에서 역사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고, 군인이 아닌 개인으로서 결혼생활의 행복에 취해 있던 한 해였다. 4월 생시르 사관학교 역사학 교수로 임명된 서른한 살의 육군 대위는, 12월 아들 필리프가 태어나는 행복 속에서 ‘프랑스군 총사령관’ 드골 장군으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완성한다. 이 역사학 교수는 1922년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 학생 신분으로 공부한다(장 라쿠튀르는 이 시기의 드골에 관해 ‘반反 독재주의 이론가’라고 묘사한다). 군사업적에 대한 탁월한 분석학자인 드골은 당시 육군대학 내에서 강압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던 군사 이론에 맞서, 그 이론의 기본원리에 대한 비평에 관심을 갖는다. 자신이 중대한 전략적 실수라고 판단한 것으로부터 문제의 핵심을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그의 첫 번째 저서가『적의 내분』이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다(1925~1940)
인정(1925~1930)
드골을 군대 내의 사상가이자 문인 장교로 높이 평가한 페탱은, 1912년부터 청년 드골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신임함으로써 큰 이득을 얻는다. 1925년 드골 대위는 고등군사위원회 회의실에서 페탱 원수의 총애를 받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1927년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드골에게 강의를 의뢰해 온다. 페탱은 자신의 대필가인 드골이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기가 출간하려 했던 ‘프랑스 군인’에 관한 연구서의 변전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너그러운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페탱 원수(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드골에게 기대고 있었다)는 그 작품의 서문을 ‘공동으로 작성’한 사실에 대해 밝히면서, 연구서 저작에 대해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때부터 영향력은 완전히 전도되어 드골은 자신의 시대를 맞는다. 그런데 1928년 딸 안느가 장애아로 태어나는 비극은 민간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성숙(1932~1937)
드골은 자신이 맡은 직무들에 의해 강해졌고 크게 성장했다. 페탱 원수의 집무실에서 벗어나 야전부대의 지휘관으로 발령 받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휘관 드골, 그는 군부 실세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교수로서의 그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주어진 권한을 진실에 의해서만 이행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특성이 드골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 축이었다. 1931년 11월, 드골은 국방위원회SGDN 제3지부 사무국원으로 임명되었다. 국방위원회는 1933년을 위해 ‘국방 계획’을 갖추어야 했는데, 그 임무가 이 신참에게 이임된 것이다. 그리하여 1934년 5월『미래의 군대』가 출간된다. 이 책은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을 갖춘 소수 정예의 첨단 기계화 부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현 시점이 비상시국이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호소하고 있다. 사실상 1933년부터 독일은 대공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히틀러는 숨겨둔 자기 패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1937년 봄, 미래의 군대 제1기갑사단이 창설된다.

기계화부대 대령(1937~1940)
마침내 드골은 최고권력자들과 접촉하여 기계화된 장갑부대를 중심으로 국가방어계획을 재편성하라고 설득한다. 그는 메츠에서 창설된 507부대 제1기갑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2년 만에(1937년 9월~1939년 9월) 이 부대를 최정예 부대로 만들었다. 1939년, 독일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의 선전포고는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1914년의 페탱 대령이 그랬던 것처럼, 이 전쟁은 드골 대령의 앞날을 약속한다. 1934년에 그가 제안했던 내용들이 그대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꽃(1940)
‘나, 드골장군’(호소문, 1940. 6.18)
1940년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140대의 전차로 독일군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제4기갑사단은 조국을 위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군사령부는 드골을 임시 장군으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6월 6일, 폴 레노는 프랑스의 상징으로서 그를 내각으로 불러들인다. 프랑스의 정권을 쥐고 있는 의지 박약한 집단 내에서, 누군가 계속해서 의지를 구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비 효과는 더욱 분명하게 강화되어 그 시기 동안 내내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꽃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결국 레노의 사임에 이어 르브룅 대통령은 페탱 원수를 부른다. 그리하여 필리프 페탱의 비시 정부가 들어선다. 그러나 6월 17일 “나는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답답한 심정으로 이 전쟁이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라고 페탱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친다.

독일과의 휴전협상이 전혀 시작되지 않았을 때 발표된 궁극적인 무능력과 패배의식에 근거한 이러한 발언은, 6월 18일의 드골의 호소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는 군대를 새롭게 창설해야 한다는 것을 전쟁 와중에 확실하게 선언한다. ‘나, 드골 장군’이라는 말로 유명한 6월 18일의 호소문을 통해 드골은 위대한 지도자들 쪽으로 돌아선다. 1940년 8월 7일, 대영제국과의 협약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의 위대함과 독립성의 완전한 복원’을 추구해 나가도록 만드는 협약이었다. 그것은 외교적인 걸작이었다.

자유 프랑스(1940. 8. 7)
드골은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실질적으로 이 임무를 책임지게 된다. ‘자유 프랑스’라는 명칭은 하나의 선언이었다, 즉, ‘프랑스가 자유가 되기 위한’. 당시 자유 프랑스는 임대한 한 아파트 내에 한 명의 장군과 그의 부관, 그리고 몇몇 동지들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프랑스를 다시 한데 모을 모든 기회를 마련하려고 드골이 비시 정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유의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해외 영토들이 비시정부에서 탈퇴한다면 결국 자유 프랑스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의 지원에 의해 준비된 자유 프랑스의 이 식민지 독립은 프랑스령의 적도 아프리카(AEF) 전역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가게 된다. 그 이후 30년 동안 드골을 지지하게 된 민중들은 바로 아프리카 민중들의 형제자매들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가 그 자체의 구원에 대해 최초로 민중의 동조를 얻게 된 것은 카메룬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11월 17일, 드골은 국가 원수 자격으로 확고하게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국가적 결단(1941~1943)
국가위원회(1941. 9.24)
1940년 한 해 동안, 드골은 프랑스를 이끌 수 있는 활동의 토대를 만들고 다지는 데만 전념한다. 1941년은 프랑스가 가장 과소평가된 해였다. 점령당하고, 무장해제 된 프랑스 본토는 독일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비시, 북아프리카, 그리고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은 정복자에게 동조한 지중해의 완충지대를 이루었고, 다시 전쟁에 참여하게 된 프랑스가 중심에서 제외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드골은 프랑스의 신탁통치 하에 놓인 영토들에 관해 프랑스의 특권을 주장하면서 공화국과 자유 프랑스 사이의 연속성을 실질적으로 인정받게 하는데 이것은 훗날 드골의 합법성을 정당화시켜 준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바바로사 작전(독일이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독소불가침조약이 무효화된다)을 개시한다. 이로써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고, 독일에게는 비극적이며, 번복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41년 9월 24일의 법령에 의해 그는 정부 형태로서 국가위원회를 설립한다. 이 조직은 ‘집단지도체제의 형태 아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드골은 현실주의적 인물인 장 물랭(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 도지사에게 정당들과 연합회뿐만 아니라 모든 저항운동단체들을 레지스탕스 국가위원회의 이름으로 소집하라는 임무를 맡긴다. 런던과 레지스탕스를 결합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대내외적인 운명의 열쇠가 되었다. 국제무대 교섭과정에서 연합군과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들로 상황은 끝없는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화합에서 구원으로(1943~1945)
프랑스 해방의 길
1943년의 10개월간은 승리의 행진을 구가하는 정치적․제도적 행위들을 통해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인 드골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조직화시킨 시기다. 공식적인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CFLN)가 설립되는데 이 위원회는 1943년 6월 1일, 지로와 드골을 공동의장(지로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다)으로 추대해 알제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외교 업무를 수행해온 과정을 통해, 드골은 프랑스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나의 정부로 기능하는 국가자유위원회(CFLN)의 선두에서 드골은 불가능한 것을 성공시켰다. 즉, 1940년 6월의 짓눌리고 쇠약해진 국가를 세계대전의 중심 축으로 변모시켜 열강들의 협상 테이블에서 프랑스가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완전한 자격을 갖추고 참석한 것이었다.

1944년 4월 21일 알제에서, 프랑스 해방 이후의 권력 구조에 대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 주권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하기로 한다(이 투표에서 프랑스 여성들이 최초로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6월 2일,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는 프랑스 공화국의 임시정부로 탈바꿈한다. 그리하여 8월 9일, 법령에 의해 본국의 공화정의 합법성이 회복된다. 드골은 제도, 투쟁, 군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상호작용을 이루면서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던 결말에 다다르도록 만든다. 프랑스는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투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레지스탕스는 그 비밀조직들, 마키들(항독 운동을 한 프랑스 게릴라), 그 희생자들에 의해 프랑스 국민들을 그 전쟁에 복귀시킴으로써 역사의 기록에 새겨지게 되고, 그 민중 속에 피의 대가를 지불한다.

프랑스는 자기 대열에 당당하게 올라섰다. 연합군은 이제 적의 수중에 들어간 영토로 진군하는 게 아니라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땅,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영토를 향해 나아간다. 바로, 다음 목표는 파리였다. 드골은 역사적인 행동을 위해 파리에 입성한다. 8월 26일 토요일, 그를 암살하려는 적들이 매복하고 있는 곳에서, 샹젤리제 거리의 군중들 사이로 행진하는 것이었다. 이어 노트르담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연속적인 총성이 울리고,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려 몸을 피했다. 그러나 드골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것은 굴복할 줄 모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구원의 대가
레지스탕스는 국가를 위한 일등공신인 동시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정부 자체로부터 태어난 이 레지스탕스가 정부의 행정기구들 속으로 흡수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프랑스 공산당에 의해 의식화된 지도자 계급을 갖게 된다면 아주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었다. 10월 23일, 그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바로 그날, 그들을 정규군에 통합시키기로 결심한다. 국가가 아직 허약하기 때문에 이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레지스탕스 국가위원회에 의해 숙고된 경제적․사회적 프로그램이 그 뼈대가 된다. 국영화 사업, 사회보장제도 시행, 거대한 산업 개발정책의 실시, 각종 기업위원회의 창설 등 이러한 사회 변혁은 프랑스를 20세기 후반기의 강대국으로 만들게 된다. 주권을 되찾은 프랑스는 해방과 승리에 참여한 것에 의해, 세계의 충돌과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에 있어 행사한 프랑스의 권리에 의해 세계적 역할을 확보하게 된다.


바이외로부터 또 다른….(1944~1946)
호소에서 실제적인 노정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우방인 프랑스를, 얄타회담을 비롯한 전쟁을 종결짓는 모든 회담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외교적인 완력에서의 승리자인 드골에 의해 마침내 프랑스로 하여금 앞으로 태어날 연합국들 가운데 5대 강국 중 하나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드골은 자문의회 토론에서 프랑스 외교정책의 내용들을 정한 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가능한 한 많은 국가정부와 교섭하면서 주요 동맹국들의 국가원수와 접촉을 시도했다. 이러한 제스처들에 의해, 프랑스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 되찾게 된다. 1944~1946년만큼 드골식의 정치 혁신이 힘차게 추진된 적은 그 어느 때도 없었다. 드골은 평화적인 작업들 속에서 국민 화합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통합과 강화’라는 수단을 취한다. 그리고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은 헌법제정의회에 유리하게 분명한 결정을 내렸다. 헌법제정의회(이 기구는 6월 18일 이후로 모든 과거에 대한 결산 확인과 ‘국민에 의한 국가원수의 임명’을 동시에 행한다)에 의해 1945년 11월 13일 만장일치로 임명된 드골은 PCF(프랑스 공산당)에게는 내각의 단 한 자리도 내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1944년 11월부터 프랑스 인민공화파(MRP)의 창설과 더불어, 정치무대는 풍부해지기까지 한다. 이것을 보면서 드골은 폴 레노가 이끌던 시기를 다시 체험한다. 자신이 도모한 행동의 화합에 이어 곧 불협화음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다.

1946년 1월 20일, “나는 나의 직책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면서 오랜 기간(5년 7개월 3일) 끝에 당당하고 분명하게 하나의 행위를 완성한다. 사임의 순간은 새로운 시작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12년 후 정계로 되돌아올 그 날까지. 전쟁 동안 교전국들은 소리 없는 혁명을 이룩했다. 그런데 20세기에서 가장 지략이 뛰어났던 그 5년 동안 현대화 과정에서 분열된 이 나라는 전후의 세 가지 비극(재건, 탈식민지화, 냉전)을 겪게 되는 서양의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1945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는 세계 곳곳에서 시작된 탈식민지화에 동의해야 함에 따라 패배의 경험과 함께 재건을 시작하게 된다. 사임 이튿날, 드골은 1940년 6월의 상황과 비슷한 하나의 상황을 겪는다. 1월 20일, 그는 투표에 의해 표현되는 제헌의회의 합법성 앞에서, 제헌의회에서 만장일치로 비준된 자신의 합법성을 양도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의회의 잘못된 영향력을 고발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것은 국민을 대표하는 투사의 역할이었다.

그는 자신이 바이외(1940년 6월 독일군에 점령된 후, 1944년 6월 7일 연합군에 의해 탈환된 첫 번째 도시였으며, 약속대로 프랑스로 돌아온 샤를 드골 장군을 맨 먼저 맞이한 도시이기도 하다)로 들어간 기념일인 6월 16일, 바로 그날 승리자이자 조정자로서 바이외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곳에서 1946년 6월 16일 드골이 발언한 담화는 입헌적이고 정치적인 앤솔로지로 남아 있는데, 그 자신의 목표들을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한 결과를 낳았다. 너무 무능하거나 불성실한 수임자들에 대한 유권자들인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 형식으로 발표된 드골 장군의 사상들은 그들과 그 자신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르네 카피탕은 초당파적인 형태로 의회에서의 드골파 연합을 창설했다. 이른바 하나의 정치적 운동이 드골 장군을 지도자로 추대하기 위해 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이외에서 드골 장군은 자신의 입장과 견해에 대해 엄숙한 발표를 하기로 선택했다. 아직도 행동하기를 열망하는 그에게는 결국 잘못된 상황이었다. 10월 13일의 국민투표 결과는 비참했다. 11월 10일 이어지는 입법의회에서 크게 두드러진 유일한 정치세력은 프랑스공산당(PCF)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제1당이 된다. 1946년의 실패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견제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프랑스 국민을 재집결시킨다?(1947~1953)
끔찍한 해(1947)
1947년의 식량 배급 사정은 독일 점령 시절보다 더 악화된 상태였다. 프랑스는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만 그 생존을 보장할 수 있었다. 제4공화국은 사회주의자들, 기독교 민주주의, MRP프랑스 인민공화당, 그리고 급진파들과의 부자연스러운 연합을 맺기에 이른다.(제5공화국을 세울 때, 드골은 단도직입적으로 제3공화국에 입각하여 9월 4일을 자신의 기획안을 출간하는 날로 선택하면서 명백히 제3공화국을 계승한다.) 1946년 10월 총선거에서 패배의 잔을 들어야 했던 그는 1947년 4월, 이 체제에 반대하여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국가적 투쟁을 시작하지만, 압승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이 체제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프랑스 국민연합에 대한 명부 연합,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
1951년 6월 18일은 결정적인 하나의 전환점이 된 날이다. 프랑스 국민연합(RPF)은 득표율 21.7%, 의석 19%와 더불어 의회에서 다른 당을 앞질렀다. 그러나 제4공화국은 드골식과 전혀 반대되는 양식을 내부에 퍼뜨리고 있었다. 프랑스와 그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드골 장군에게는 아직 어떤 전투를 이끌기 위한 단 하나의 이유가 남아 있었다. 1952년 6월, 유럽방위공동체(CED)의 기획에 반대하여 그가 참여한 전투가 그것이다. 여기서 프랑스 군대는 미국의 지휘 아래 편성된 유럽 군대로 되어 있었다. 이 문제가 국가적 권위에 관한 것인 이상, 그의 행동들은 정당화될 것이다. 이는 1940년 6월 17일(비시정부 페탱의 호소문 발표)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당시 프랑스의 최고권력자 페탱은 국방을 저버리면서 공개적으로 ‘그 전투를 중지할 것을’ 호소한 반면, 드골(1940. 6. 18 호소문)은 군대의 새로운 창설을 선언했던 것이다.

CED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그는 ‘유럽에 독일 제국의 정치적․군사적 헤게모니를 직접적으로 이끄는’ CED의 협정을 통렬히 비난했다. 드골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의회의 한복판이었다. 체제를 다그치는 인민전선의 대표인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였다. 르네 코티는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군대를 배치시켰던 그 처참한 상황에서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전쟁을 패배로 결론지어야 하는 제네바 회담에서 1954년 6월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인도차이나의 휴전협정, 그리고 CED의 그 문제에 대해 암묵적인 동의로 8월 30일 논쟁의 끝을 맺은 망데스 프랑스는 드골의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10년간의 이 체제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1954년은 ‘슬픔이여 안녕’(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으로 여기서 ‘안녕’은 슬픔의 시작을 의미한다)의 해였다. 드골은 총리(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를 지칭)로 하여금 1월에 시작된 알제리 전쟁에 관해 그의 추락을 부추긴다. 1955년 2월 6일, ‘PMF\'(피에르 망데스를 지칭하는 이니셜)는 전복되었다.

거꾸로 흐르는 역사(1955. 2. 6~1955. 12. 2)
망데스 프랑스가 쓰러졌을 때, 그의 동료들(상원의원들)은 비위에 거슬리는 매우 독자적인 스타일로 정책을 이끌어나갔다는 사실을 비난했다. 제4공화국은 드골이 예언한 대로, 공화 체제의 정책적 오류들 때문에 곧 파멸한다. 1956년 3월은 AOF(프랑스령 서부 아프리카)와 AEF(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를 미리 결정한 달이며, 알제리에 관한 가장 극적인 난센스의 달이기도 하다. 알제리 총독부에 근무했던 폴 테이트젠은 <프랑스인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이라는 영화를 통해, 알제리에서의 군대의 무력 진압 방법의 개발에 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를 폭로한다.

그런데 1956년 10월 30일, 이 내각은 프랑스를 수에즈 운하의 위험한 모험 속으로 몰고 갔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저지한다는 이유를 빌미로 대영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자국의 국방을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 것이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수에즈 전쟁을 일으킨 영국 연합국들에 대해 철수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 두 강대국들은 핵 보유국이 아니라면 무조건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큰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프랑스는 해외 영토에 간섭할 수 있는 본국으로서의 체통을 잃어버렸고, 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자인했다.(알제리 사건은 오직 프랑스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하는 사건이었으며, 공화국의 전제조건들을 되살아나게 한 사건이었다) 체제는 전쟁에서 펠라가(1954~1962년의 알제리 독립운동의 빨치산)들이 아니라, 그 자체의 무능함에 의해 패배당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책이 부재한 정권이었다.


9월 4일을 중심으로(1956~1962)
“알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1958. 5)
제3공화국 선언 기념일인 1958년 9월 4일,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국민들에게 제5공화국의 헌법을 발표하는 드골은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체제는 1958년에 결국 정권을 포기한다. 수에즈의 퇴각과 함께 미국에 대해 비참하게 머리를 숙여야 했던 상황, 프랑스의 정책에 대한 아랍의 결정적 불신, 패배한 채 알제리의 병영으로 돌아와 또 다시 같은 모욕을 참아야했던 군대의 결정적인 사기 저하, 마지막으로 내각의 무능함이 원인을 제공했다. 급기야 정치적 급변이 일어난다. 5월 14일 알제리 폭동에 의해 드골의 복귀는 시작된다. 1958년 5월은 드골에게 창건의 제1막으로 나타났다. 6월 1일, 다수당의 의결은 순전히 드골을 공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형성된 이 내각은 알제리에 대한 특별한 권한, 완전한 권력, 헌법 제정권을 포함한 세 가지 개헌안을 표결에 붙인다. 드골은 즉시 집무를 시작한다. 알제리가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다.

1958년 6월 4일 알제리 방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날이었다. 문제 제기의 종결이 이루어진 날이기 때문이다. 2주일만에 공화국을 구하고 사흘만에 알제리를 수중에 되찾은 드골은 9월 28일의 제헌 투표를 이용해 아프리카인들이 독립할 수 있는 국민자유연합을 만들고자 한다.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공동체에 있어 중요한 문제였다. 제3공화국의 건국 기념일인 9월 4일. 1940년의 재앙으로부터 공화국을 구해냈던 드골은 무효화된 비시 정권과 제4공화국을 넘어서서 공화정의 연속성을 다시 이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알제리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알제리가 해방되는 것이 목적인 이상 드골이 태도를 바꿔 1958년 7월에 거침없이 군대식으로 진압할 것을 명령한 만큼 살육전으로 전개된다. 마침내 23일, 반란군의 지도자들이 망명지에서 세운 GPRA(알제리 공화국의 임시정부)를 법적으로 인정하면서, 드골은 ‘용감한 사람들의 평화’를 그들에게 제안한다.
공화국의 대통령
1958년 1월 8일, 정권을 이양하는 자리에서 르네 코티가 “프랑스인들 중 최고였던 그가 이제부터 프랑스의 최고권력자가 된다.”라고 간략하게 언급했듯, 드골은 자신의 정치적 작품을 완성했다. 국가로서의 존엄성을 확인시키며 대서양의 경쟁, 유럽의 각축전, 핵 개발과 보유를 위한 노력에 앞장서며,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고, 경제와 제정의 복구를 실현하고, 국방정책을 견제정책으로 전환시키며 7개월 동안 드골은 실질적인 국가 원수, 총리, 그리고 입법위원회의 의원으로서 모든 영역을 하나의 화합물로 결합시켰다. 1959년 1월 8일,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연설은, 알제리는 ‘그 자체의 개성을 스스로 개발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공동체(프랑스와 분리되어 있는 공동체를 뜻한다) 자격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드골의 전략은 연합에서 분리로 이행해가는 과정 속에서 프랑스의 이익에 준한 원칙은 필요하다면 사하라까지 포함한 알제리를 해체하고, 그 대가로 국제적 신용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UN은 프랑스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시하겠다고 여러 차례 위협했다. 드골은 마침내 전 세계가 1년 전부터 알제리에 관해 기다려오던 것을 앞장서서 주도했다.

1960년 1월 18일 뮌헨에서 마쉬 장군의 인터뷰가 발표된다. 이는 드골에 의해 발표된 정책이 알제리 군대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드골이 마쉬를 알제리에서 처벌받게 한 것에 대해 프랑스령 알제리 전선의 군대들과 군사정보국 요원들이 근무해 왔던 알제의 소요는, 즉 폭동을 진압해야 할 군대에 의해 조장된 폭동은 너무도 극렬했다. 그리하여 1960년 1월 31일, 혁명의 바리케이드는 해체되었고 문제는 종결되었다.

1960년 2월 13일, 르간(사하라 사막의 한 지점)에서 프랑스 최초의 원자폭탄을 실험함으로써 프랑스가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한 것을 축성하던 바로 그 순간, 프랑스는 다시 골머리를 싸매지 않으면 안되었다. 과격파 프랑스령 알제리 전선(FAF)이 반대자들을 규합시킨다. 1960년은 1958년의 상황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러나 훨씬 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국민투표에 의해 ‘알제리 공화국’이 탄생되는 것을, 국가 영토의 분립에 관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예고한다(그곳의 유럽인들은 330년간의 식민지 정책을 종결짓고자 하는 그 대통령에 반대하는 분리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1961년 1월 8일 국민투표에서 75%가 ‘Yes’라고 대답하면서 그의 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22일에 발생한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 대령의 군사 쿠데타는 드골에게, 알제리에서 성공적인 과도기적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믿었던 군대의 완벽한 배신과 패배를 의미했다. 그것은 1940년 국가의 수뇌부들이 자신들의 허영심을 지키기 위해 이 나라를 유기하여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과 동일했으며,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알제리 문제? “그것은 해결되었다“
드골로 하여금 정계로 복귀하도록 자극하고 새로운 제도들의 확립을 그 자신이 복귀하는 목적으로 삼게 만들었던 알제리는 심각하게 동요된 한 군대에 의해 점령된 채 지옥과 같은 상황으로 빠져든다. 두 진영(OAS육군비밀결사대와 FLN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테러범들로 인해 능욕을 당한 군대는 본국으로의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본국과 알제리의 모든 영토에서 수많은 인명을 빼앗는 테러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FLN과 프랑스 군대가 1962년 3월 18일 조인한 휴전협정 결과로, OAS는 즉각적으로 쌍방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알제리 독립전쟁은 잔인한 내란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보복을 부른다. 결국 알제리는 피와 광란 속에 매몰된다. 알제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체제의 목을 조른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정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4월 8일, 알제리에서의 민족자결에 관한 국민투표에서는 90%가 ‘찬성’에 표를 던졌다. 그리고 7월 1일 알제리 독립에 관한 알제리의 국민투표에서는, 99.72%라는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었다.

알제 전쟁이 종결되고 나서 드골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공화국의 기초를 확립시켰다. 하나는 정도를 벗어난 애국심에 의해 나라를 배신한 극우파의 아류들(비시 정부와 OAS)을 정치적 통일체(국가)로부터 완전히 잘라내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균형 잡힌 제도들을 갖추는 일이었다. 같은 해 11월 22일, 르네 코티 대통령의 죽음은 6년간의 ‘전투하는 프랑스’, 12년간의 사막 횡단, 그리고 비정상적인 4년간의 정권을 거쳐와야 했던 그 지난한 시기의 종말을 의미한다. 나라와 세계를 대표해 죽음을 걸고 체스 게임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였다.


세계의 각축장에서(1964)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드골은 프랑스를 그 자체로부터 구해내어 세계의 지평 위에 제1의 선진국가로 올려놓았다. 1944년과 1946년 사이에 국가, 정부, 공화국을 복구하러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쟁에서 ‘전투하는 프랑스’의 세계적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스 게임에서 궁지에 몰린 왕(1965~1968)
1960년대에 드골은 프랑스를 국제적 스캔들의 외로운 정상으로 이끌어 간다. 그에 따라 드골은 새로운 형태들로 나타난 과거의 저항운동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동시에 새로운 세대들의 세력에 두 손을 들게 된다. 1959년 1월 8일 샹젤리제를 지나가는 신임 대통령의 모습을 보인 이후 1969년 6월 15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1962년 10월에 승리한 드골 장군은 7년(1873년에 제정된 임기 7년의 대통령제) 후 1969년에 패배를 당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63년 3월 1일부터 4월 5일까지 탄광노동자들의 대파업은 1958년 이래로 평범한 프랑스 사회계층이 국가원수를 궁지로 몰아넣은 최초의 사건이었다(1968년 5월, 마침내 폭발할 때까지 끊임없이 확산될 그 사회적 동요는 민중의 동조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권력의 받침대를 갈아 끼운다).

1965년의 임기 만료는 그를 비통하게 만든다. NATO 탈퇴와 프랑스를 원자폭탄을 보유한 강대국으로 만들려는 노력, 그것은 1940년 6월 17일의 상황에 대한 결정적이고 유일한 수정책이었다(당시 독일군 공격으로 레노처럼 사임하거나, 페탱처럼 굴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선거에서 54.6%라는 득표율로 드골이 재임되었다. 그는 경제적 엄정성의 기초를 하나의 모형에 두고 ‘참여’(드골의 통치의 주 개념 중 하나로 노동자가 주주가 되는 참여를 의미한다)를 통해 노동자 계층들에게 보상을 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진정한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로 이행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거시경제적인 계획은 드골 장군에게도 중요한 것이었다.

1968년 5월은 에필로그의 슬픈 역사다. 잇따른 시위들 중 1968년 3월, ‘3월 22일의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다니엘 콩방디는 낭테르를 폭동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4월 3일의 대학 내 선거법 개정을 기회로 이용했다. 학생들은 유혈충돌을 개시했다. 폭동은 수도의 한복판까지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5월 13일부터는 노조연합이 나서게 된다. 프랑스는 지방에서부터 동맹파업에 돌입한다. 젊은이들의 갈망과 노동자들의 요구사항들로 결합된 압력과 제휴 속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약 60년 전부터 팽팽하게 유지되어온 긴장감을 한꺼번에 터뜨려 표출한다. 지도자로서의 그보다 상징으로서의 그를 더 거부하는 민중의 움직임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1968년 5월혁명이 5월 30일에 종결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드골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는 깨달았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신은 이제 너무 노쇠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제 남아있는 시간은 의무에 의해 이끌려가는 것일 뿐이었다.


남아있는 시간(1968~1970)
프랑스의 유일한 혁명론자
프랑스는 다시 제자리를 찾게되어 투표함으로 간다. 6월 30일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5월혁명을 이용했던 그 모든 행위들을 냉담하게 징벌한다. 그리하여 FGDS(좌익민주사회연합당)와 공산당은 후퇴한다. 이제 프랑스는 지난 날을 청산하고 역사의 페이지를 넘겼다. 드골이 참여의 개념이 실천되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진보주의자들을 설득시키지도, 노동조합들을 가담시키지도 않음으로써 그를 향한 몰이해, 적의, 의혹들이 점차 커져간다. 1968년 5월혁명 1주년 기념일이 오기 전에 시기상조의 후계자 계승에 위협을 느낀 드골은 국민들 앞에 자신의 위상을 제기하면서, 국민투표로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한다(이 국민투표에서 퐁피두는 드골과 경쟁적인 합법성을 가지고 이끌어낸 입헌선거에 의해 5월 30일 드골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드골, 국민, 프랑스’는 서로 협력하며, 그 세 요소가 참여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것. 그런데 이제, 국민들은 그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나는 공화국 대통령의 직무 수행을 중단한다.”(1969. 4. 28)
드골은 ‘Yes\' 47%, \'No\' 53%로 패배했다. 4월 28일 밤 12시 10분, 다음과 같은 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나는 공화국 대통령의 직무 수행을 중단한다.” ’회고록‘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의 역사를 만드는 최후의 방법이었다.『희망 회고록』의 제1권이 1970년 10월 23일 출간된다.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1월 9일,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집필 중에 있던『회고록』제2권이 중단되고 만다. 그의 유언에는 국장(國葬)의 모든 형식을 엄격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경비들을 사비로 지출할 정도로 공유와 공정성을 엄격하게 지켜나가는 드골의 면모는 권력의 특권을 맛보는 데 집착했던 정치인들을 위한 위대한 교훈이 되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게 될 콜롱베의 장례식. 평범한 주검들이 함께 하고 있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흙으로 되돌아간 그는 영원히 ’샤를 드골, 1890~1970‘이 된다.


신화: 창건자
“이 헌법을 기획한 것은 바로 우리의 시대를 위해서다”(1958. 9. 4)
“예순 일곱의 나이에 내가 새삼스레 독재자의 이력을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1958년 5월 15일, 드골 장군의 이 재담은 재집권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 말은 그가 공공의 자유를 재건하고 전쟁을 통해 공화국을 존속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1958년 6월 4일부터 9월 4일까지 그 과업을 수행했다. 제도들의 결함과 무능력 때문에 1940년 6월에 매우 격렬하게 그 일에 뛰어든 그는 더 이상 그 같은 실패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1940년 6월 18일부터 1946년 6월 16일까지의 긴장된 6년은 국가가 자칫 질식할 뻔했던 진공상태가 재발할 우려가 있는 모든 조건과 상황들을 없애기 위해 매순간 노력해야 했던 시기였다. 1946년 6월 16일, 바이외에서의 담화문은 복구를 창건으로 변화시키고, 얻어진 구원을 지속적인 건강함으로 귀착시키려는 궁극적인 시도였다.

드골은 1914~1918년의 격동, 이어 양 차 대전 사이의 경제적․정신적 침체와 인구 감퇴, 1940년부터 1944년까지의 국가의 붕괴와 소멸이 프랑스의 힘을 철저하게 약화시켰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역시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에 민감해져 있었다. 수에즈와 알제리가 겪은 실패의 경험을 이 나라에 견주어보면서 만일 이 나라가 다시 쇠약해질 경우 이 나라를 구제하기 위해, 세 번째로 치명적인 약화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드골은 권력의 가장자리에 접근하려고 시도한다. 1958년 5월은 바로 그러한 보살핌의 결과다. 그가 집권한 후 내각에서 제일 처음으로 행한 일은 제도들의 개념의 범주를 다시 만드는 것이었다. 드골이 마련하고자 했던 제도들의 목적은 바로 균형점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세기의 새롭고 근본적인 두 요소, 세계와 국민 사이에, 이 ‘나라’의 경제․사회․역사적 인터페이스를 세운 그 국가원수는 바로 그 프랑스의 수호자이자 보증인이다.


신화 : 앞서가는 사람
“계속 전진하라”(제2기갑사단의 행진구호)
드골 장군은 오직 프랑스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가장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 언제나 선견지명으로 현실을 앞서간다. 6월 18일의 창건 행위는 6월 17일 휴전을 예견하는 페탱의 선언이 프랑스로 하여금 ‘전투를 멈춰야 하는’ 치욕을 당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시각에 어느 정도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드골은 독일인들의 압도적인 승리가 곧이어 궁극적인 패배를 이끌고 오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계산하여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1944년 원자폭탄의 총괄적인 자료들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을 때부터, 드골은 국제관계에서 현대적 혁신의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그의 비전은 먼저,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 국가는 핵의 견제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채택할 때부터 그 국가는 반드시 계속적인 현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국력의 진정한 모태를 이루는 것이다.

뒤늦은 아방가르드
재건과 영속성이 중심 축이 되는 기구이자 추진력과 레이아웃의 공간인 정부는 드골에게, 농업국가 상태로 머물러 있는 한 나라에 비시 정부의 외적인 특징을 적용시킨 현대화의 원동력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은밀하게 이 전위적인 정부는 동시대의 현대성의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하면서, 국내의 상대적인 낙후성을 낳는다. 1968년 5월 혁명은 기동헌병대들, 전통적인 노동조합의 파트너들만을 젊은이들에 대한 대응책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현대성의 현실적 경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드러내는 정부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폭발이라 할 수 있다. 앞서가는 자인 드골은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돈다. 6월 18일의 이 사람(그의 인물됨을 제대로 알아본 처칠, 그리고 그를 경계하는 루스벨트는 키플링적인 영웅이자 자신의 깃발, 명예, 조국에 전념하는 중세시대의 방랑기사를 알아본다)은, 우선 자신이 비시를 좌지우지하는 반동분자들의 반의적 인물임을 알린다. 드골은 이때부터 정면으로 도전하여 이제까지와 완전히 다른 역할들을 맡는다. 그는 즉각적으로 우익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를 어떻게 좌익으로 분류하지 않을 것인가?

자유 프랑스 때부터, 그리고 1958년부터 전제군주로 간주되어 온 그는 민주적인 선거를 뿌리내리면서 선거 주체의 범위를 확대시켜온 장본인이었다(1944년에는 여성들에게, 1958년에는 프랑스 연합의 국민들과 회교도들에게, 1962년에는 투표권을 전 국민에게로 확대시켰다).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실현들 가운데 하나는 1945년, ‘사회보험제도’를 창설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사회보장제도’라고 불렀다. 그는 내각에 공산주의자들을 참여시킨 최초의 인물이었고, 1944년부터 아프리카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기업 내에 노조 세력을 정립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1944년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당시에는 ‘엘리트’들보다는 국민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있었다.”


신화: 상징, 그러나 무엇에 대한 상징인가?
장군과 대통령
1970년 11월 9일, 프랑스 국가 역사의 상징적 인물인 드골 장군이 마침내 영면하여 땅에 묻힌다. 1944년 여름의 구원자로서의 모습, 그의 호소문들과 메시지들로 발전된 사람들의 꿈, 희망, 소망들로 인해 신화적인 런던에서의 이미지,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1940년대에 그는 천년의 역사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1958년에 노인이 된 그는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노아처럼, 스스로를 새로운 문명을 향한 뱃사공으로 자처한다). 두 시기, 거짓 같은 인상을 주는 한 시기(RPF 시절)와 침묵의 기간(1955~1958)으로 나뉘어진, 양립하기 어려운 두 분신이 있다. 두 시대(산업화된 농업국가들의 충격의 시대, 국제화된 산업의 도약시대)가 이 인물의 두 시기에 대립한다. 드골은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교훈으로 정확히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6년씩 3번이나 프랑스를 통치했던 그 사람을 그는 기호이자 표지이며, 열려 있는 의미의 소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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