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밤... 책과 인터넷 짜집기니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말라능. 이것도 버거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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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라인 일본은 고대 야마토 정권 시기에 실질적으로 대륙 침략이 불가능한 것을 인지해서인지
침략해야할 국가인 중국과 한반도를 상대로 문화를 전수받으며 개화를 진행해 왔다. 외부문물을
받아들이고 이 문물들을 소화한 다음 통일정권으로 강력한 중앙정부와 전쟁이 종식되어 필요성
이 적어진 군대와 군수품을 해상로를 통하여 대륙을 침략하는데 사용한 예는 한반도에서 빈번히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는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사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그 이후 득세한 토요토
미 히데요시라고 말할 수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침공을 위하여 국가가 통일되고 평화가
계속됨에 따라 쓸모가 없어진 대부분의 군대를 대륙침공의 선봉에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대륙침
공에 필수적인 수송선, 군수물자, 항구 등의 인프라를 확충하였다.
실질적으로 일본의 경우, 해군력을 증강시킨 것이 아니라 해병원정대의 전력을 증강시킨 것이라
고 볼수 있으며 방왜육전론을 펼치게 될 조선 정부로써는 낭패일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을 상륙하
기 전에 저지해야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므로, 경상 좌수사, 우수사의 전력을 증강시키고 초계
활동과 인력정보를 이용해서 일본의 동태를 감지하고 이전 통일국가였던 고려와 같이 상륙하기
전에 강력한 사거리와 화력을 가진 함포를 이용하여 철저히 몰살시켜야 했으나 시나리오는 이와
같이 전개되지 못하여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미, 선대국가인 신라, 고려에
서 그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신라의 이찬이었던 우노는 223년 7월 영덕의 사도에서 대규
모 함대, 화공법으로 적 함대을 전멸시켰으며, 백제와 마찬가지로 해군의 필요성에 눈을 띄게 된
다. 만약 해군력, 해상무역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당항성을 만들지 않고 오히려 해안가
보다 북쪽에 위치한 대고구려 전진기지로 한성백제의 풍납토성과 같이 좀 더 북쪽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이후 신라는 장보고의 등장으로 삼국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게 된다.
고려말에는 최무선이 화약의 제조기술을 원나라 이원에게 배우와 화포 등을 제작하자 고려정부
는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무기를 연구하고 개발하여, 함선에 함포를 장착하였다. 1383년 5월
관음포 해전에서 정지는 3배의 적 함대를 대파하였다. 조선은 1392년에 건국하였고,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하였으므로 정확히 209년 뒤에 조선은 2백년전과 동일한 전술로 침입한
일본에게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방법은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한 함대를 통해서였다.
화력이 우수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함대로 연안에서 철저하게 상륙과 지원을 봉쇄해버렸기 때문
에 기존의 적 부대는 정체되고 군수지원이 열악하여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조선 육군과 조선 해군
의 합동작전으로 방왜육전론과 방왜해전론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에 전쟁수행 자체를 포기하면서
종전된다.
일본으로써는 신라의 화공에 의한 공격, 고려의 함포에 의한 공격, 조선의 대형함과 함포에 의한
공격이 패전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순신 제독과 임진왜란을 연구하면서 병사의 숙련도
와 해양기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전투함의 성능을 매우 중요시 하였고 리베르타 법
칙 뿐만 아니라 여러 변수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선공을 중요시 하였고, 이를
증명한 사례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태평양전쟁이며 위 전쟁 모두 일본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기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3년전인 1891년 북양함대는 일본 나가사키, 쿠레, 고베, 요코하마 등을 방문
한다. 북양함대가 보유한 정원과 진원의 장갑은 당시 일본해군의 전투함으로 뚫을 수 없었고 이는
나카무라 구라노스케 등이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하면 주력함대는 외해로 출동하지 않고, 내해를
사수하는 사세보 퇴수주의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청국해군의 북양함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또한, 정원, 진원을 포함한
청국의 전투함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화력과 기동력을 가진 전투함을 보유하는데 전력투자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를 통하여 정원과 진원의 장갑을 뚫을 수 있는 마츠시마급(마츠시마, 이츠쿠
시마, 하시다테) 3척을 프랑스로부터 도입하고 3번함인 하시다테급은 국산건조하게 된다. 또한,
영국에 주문하여 당시 최고 속도와 기동성을 가진 고속함인 요시노급을 도입하고, 나니와급 3척
도 인도되어 실질적으로 194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일본해군은 중국해군의 진원
과 정원을 제외한 청국해군의 전투함을 압도하는 전투력을 확보하고있었다.
마츠시마급 3척은 정원과 진원의 장갑을 뚫을 수 있는 함포를 프랑스에 주문하여 1문씩 장착하였
으며 기함인 마츠시마는 패전 시 정원과 진원으로부터 안전하게 아군함정이 후퇴할 수 있도록 후
방에 장착하여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여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청일전쟁 발발하기 직전, 군령부
장을 강경론자인 가바야마 쓰케노리가 맡게 되면서, 청일전쟁을 수행할 함대가 사세보에서 출항
하여 풍도로 향하게 된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 육군은 풍도 근처의 아산으로 남하하였다.
제해권을 일본이 장악하게 되면, 육전에서 청나라가 불리하게 되기 때문에 북양함대는 이를 저지
하기 위해 일본 연합함대에 맞서게 되었다. 북양대신인 이홍장은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전 함대
를 총 집결한 상태에서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 아닌 편대 형식으로 기동하게 하였고 일본의 제해권
장악을 저지하려면 정원과 진원을 파견하고 기동성과 명중률이 떨어지는 정원과 진원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함들이 포진해야 했으나 풍도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선에 놓인 전투함은 제원
호와 광을호였다. 마침이 전투함들은 해상전투가 목적이 아닌 병력을 수송하는 수송선을 호위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일본은 적 함대가 정원, 진원등의 대형함이 포진하면 무시하라는 것과 적 함
대가 약할 경우 교전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바로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풍도에서 교전 당시, 일본은 나니와급 고속함인 나니와(3709톤, 18노트), 아키츠시마(3709톤, 18
노트)과 요시노(4216톤, 23노트) 3척이 전투에 임하게 되었고, 이에 대항한 북양함대는 제원호(2
300톤 15노트)와 주력함대인 북양함대 소속 전투함도 아닌 광을(광동함대 소속)호는 북양함대에
파견되어, 훈련 이수가 목적이었으며 풍도 해전 당시 광을호 외에 광갑호도 있었으나 광갑호는 1
296톤, 15노트였으며 무엇보다 장갑이 목재였기 때문에, 전투력과 방어력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
다.
또한, 일본 연합함대는 정원과 진원을 제외한 북양함대의 전 함정의 장갑을 뚫을 수 있는 속사포
를 개발하고 장착하였고, 풍도해전에 임한 연합함대 전투함정들은 속사포를 통하여 유린하였다.
강력한 화력에 풍도 해전에 임하던 청국해군의 기함의 함장이었던, 방백겸은 의욕을 상실하면서
항복을 의미하는 백기를 마스트에 걸어버렸다. 이리하여 광동함대에서 파견된 광을호은 교전 명
령을 받지 못하여, 지휘 체계에 혼란이 가중되어 육지로 도망치다가 뻘에 갇혀 좌초되어 버렸고,
자력 이초가 불가능하여 추적해온 연함함대의 전투함인 아키츠시마의 집중포화에 대폭발을 일으
켰다.
요시노와 나니와는 제원을 추적하고 있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속함인 요시노는 최고속
도 23노트를 낼 수 있었지만 제원호는 최고속도가 15노트였으므로 추적범위와 유효 사거리에 위
치하였고 상호간에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속으로 도주하는 제원호와 달리 추적하는
입장의 요시노는 고속 기동상태에서 포탄이 명중하기가 쉽지 않았고 제원호의 반격을 염려하여,
제원호는 무사히 여순까지 도망가게된다.
하지만 이렇게 해전이 치열한 가운데에 수송함인 고승호는 나포되고 고승호를 호위하던 조강호
는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졋다. 고승호는 분명 영국 국적의 선박이었으나, 본래 청나라의 수송함
이었으므로 요시노는 영국인만 구조하고 고승호에 탑승했던 2000명의 청국해군을 수장시켜 버
렸다. 물론, 프랑스 군함에 의하여 2147명은 이튿날 구조된다. 비경호, 애인호는 풍도해전이 발
발하기 전날 제원호, 광을호의 호위 아래 병력을 상륙시켰으나, 이튿날의 해전이었던 이 풍도해
전에 의하여 더이상 수송함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상태였으며, 고승호의 호위해야 함에 불구
하고 도주했던 조강호 역시 광을호를 파괴하고 귀환한 아키츠시마에 나포되었다. 물론, 고승호
가 수송하던 14문의 대포와 1100명의 병력은 지원되지 못했고 8문의 대포와 전날에 상륙했었던
병력과 무기만으로 육상전에 임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아산만의 풍도해전과 마찬가지로 아산
에서의 육상전 역시 일본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부산에 8천 800명, 원산 2천 2백명, 인천 1만명 등을 청국해군의 저항을
받지않고 무사히 상륙하고 평양에 집결하게 되었고 전쟁 선포는 8월 1일이었지만 풍도해전을 패
전했을때 부터 청국군은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군수 보급 역시 문제였지만, 해전도 아닌 육전에
서도 해전의 여파로 인하여 이미 기세에서 청국군은 밀리고 있던 것이었다.
북양수사였던 정여창은 일본의 수송함대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산둥반도에서 압록강 하구까지
이르는 구역을 방어구역으로 정하고, 일본의 예전 전략이었던 소극적 방어에 치중하여, 적극적이
고 능동적인 기습작전과 차단작전을 원활하게 진행하지 못했다.
이미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상륙한 일본군 병력은 집결하고 평양에서의 전투에서도 우위를 보이
며 각개격파를 시작하였다.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 이하로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
천에 추가적으로 상륙한 일본군 병력은 평양 전투에 투입되엇다.
9월 17일에 청일전쟁의 승패의 향방을 결정하는 황해해전이 발발하였고 일본은 군함 12척과 어뢰
정 20척을 전투에 임하게 하였다. 황해해전에 투입된 일본의 해군함은 마츠시마, 이츠쿠시마, 하시
다테 등 마츠시마급(4278톤) 전함 3척과 나니와(3709톤)급 3척 등을 포함한 일본 연합함대 전투함
으로 구성되었다.
황해해전이 발발하기 전인 8월 8일 황해 수색작전 시 북양함대가 없다는 것을 파악되었을 때 이미
청군의 육군과 해군은 육, 해 합동작전이 아닌, 각각 서로 다른 임무의 야전을 독립적으로 수행하
였기에 육, 해군이 합동작전을 통해 화력이 상승하고 이미 초전의 승리을 포함하여 여러 이점들을
통한 치밀한 일본군에 의하여 육전에서도 4면 포위로 전멸하고, 압록강 하구에 투묘하고 있던, 북
양함대는 횡진으로 투묘하고 정박하여 기동성이 불리한 상태였고, 일본 연합함대는 단종진 진형
으로 항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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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또 올리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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