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카미카제 관련된 질문

후앙후앙(211.211) 2007.08.31 14:15:20
조회 1242 추천 0 댓글 10




일본의 패퇴 

 

 1943~44 기간 동안 압도적인 공업력과 풍부한 자원의 지원을 받으며 미군은 일본 본토를 향하여 착실하게 전진했다. 일본의 항공기는 성능과 수적인 면에서 압도적인 미군의 F6F 헬캣과 F4U 콜세어 함재기에게 압도당했으며 솔로몬과 뉴기니에서 패전을 당한 끝에,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군은 무려 400기 이상의 함재기와 조종사를 손실하여 이른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불리는 완패를 당하고 더 이상 미군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1944년 6월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괴멸당한 이후, 44.07.15. 일본의 중요한 기지인 사이판이 연합군에게 합락되자 미 공군은 B-29 장거리 폭격기를 이용해서 일본 본토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연합군이 다음으로 일본 본토와 남방 자원지대 사이의 중요한 길목인 필리핀을 점령할 것으로 예측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7월 21일, 군령부가 "대해지 제 431호"를 통해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했고 8월에 일본의 동명 뉴스사는 다케오 다카다라는 교관이 대만에서 자살공격 방법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고, 카이텐, 사쿠라바다, 진요 등의 호칭이 붙게 되는 자폭용의 이른바, "특공병기"의 제작 계획이 44년 9월에 시작되었다.

 즉, 1944년 10월의 항공특공 실시 이전에, 항공기, 인간폭탄기, 인간어뢰 등의 여러 특공대를 준비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또, 최초의 카미카제 공격은 1944.09.13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네그로 섬에 주둔중이던 일본육군 제 31전투기 대의 파일럿들이 그 다음날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다케시 코세이 대위가 실행자로 선택되었으며 2기의 전투기에 2개의 100kg 폭탄을 장비하고 항공모함에 돌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기지를 이륙했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날 공격을 당한 연합군 항공기나 군함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44.10.14, USS Reno가 일본 항공기에 의한 충돌공격을 당했으나 이것이 의도적으로 준비된 형태의 자살 공격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오니시 지로

 제 11 항공함대의 제 26항공대 사령관이었던 아리마 마사후미 대령은 카미카제 전술의 발안자로 종종 거론되는 인물로, 레이테 만 근처에서 1944.10.15, 100여기의 요코스카 D4Y, 스이세이 급강하 폭격기를 이끌고 에섹스 급 항공모함 USS Franklin에 자폭공격을 가했다. 일본군 사령부는 아리마의 경우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소장 계급을 추서했으며 최초의 카미카제 공격으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였으나 이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자폭공격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일본군의 홍보와 실제의 사건 사이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1944.10.17, 연합함대가 수루안 섬을 공격하면서 레이테 해전이 시작되었고, 마닐라에 위치한 일본해군 제1함대가 연합군을 맞이했다. 이 시기에 1함대는 34기의 제로기와 3기의 나카지마 B6N 뇌격기, 1기의 미쓰비시 G4M, 2기의 요코스카 P1Y 정찰기(육상공격기를 개조)가 있을 뿐으로 연합군에게 전력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몰렸다.

 이에 제 1함대 사령관 오오니시 지로 해군 중장은 마닐라 근교의 클라크 비행장(일본측 명칭 마발라캇 비행장)에서 10월 19일, 휘하 제 201항공대 장교들에게 더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해진 항공전력을 활용하기 위하여 레이테 해전에서 적 항모부대의 비행갑판을 일시적으로 사용불능시켜 항공전 능력을 일시적이나마 상실시켜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제 필리핀에서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로기에 250kg 폭탄을 장비해서 미군 항모에 돌격하는 것만이 남았다." )


 오오니시 본인도, 생환을 기대할 수 없는 전법을 "통솔의 외도"라고 인정했지만 쿠리타 함대의 레이테 돌입을 지원하기 위해 유효한 수단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명했다고 하며, 그는 본래 1942년 3월 이후 해군 항공본부 총무부장으로서 항공기 생산에 관여할 뿐, 부대지휘의 일선을 떠나 있었으나 44년 10월에 급거 필리핀 제1항공함대의 지휘를 명령받아 현장에 착임한 직후에 특공대의 편성을 명한 것이다.

 

 

 최초의 카미카제 공격대는 4개 소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소부대에는 모투리 노리나가의 적인 단가(시조 비슷한 일본의 고전문학)에서 이름을 따와 각기 시키시마, 야마토, 아사히, 야마자쿠라라고 명명했다.(敷島の 大和心を 人問わば  朝日に匂ふ  山桜花)


 

 한편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병력을 격감시키고 장병의 사기에 충격을 주는 작전을 현지 사령관인 오오니시가 독단으로 채용하는 권한은 없으므로 군령부에서 이미 결정한 특공작전을 현장에서 실행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또, 카미카제 특공대 의 부대 명칭도 군령부서 편성 전부터 결정해 두었으며 1944년 10월 13일 자의 "기밀 제 261917"에서 특공작전의 때마다 시키시마대, 야마토대 등의 이름도 아울러 발표할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군령부의 지시로 전과 발표와 동시에 대대적으로 공표할 방침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시에 있어서도, 미쓰비시 A6M 함상전투기(제로기)에 250kg의 폭탄을 고정 장비했으나 동체에 묶은 상태로 폭발시키기 위하여 신관장치를 개조해서 낙하중의 풍압으로 해제하게 되는 개조를 해야 했으므로 현장에서 병기를 마음대로 개조, 배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전례로 보아 군령부가 처음부터 자살공격 작전을 승낙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이테 만 ; 가미카제의 시작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가미카제 공격을 당한 최초의 연합군 함정은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중순양함 HMAS Australia로 이 함정을 공격한 것은 오오니시의 특별공격대 소속과는 별개의 것으로 미쓰비시 Ki-51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일본육군항공대의 제6항공대 소속 기체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누구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아무튼, 1944.10.21, 레이테 섬 근처에서 HMAS 오스트레일리아와 HMAS 슈럽셔의 포수들은 3기의 일본기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고 있었는데 그 중 1기가 배에서 멀어지는 듯 보이다가 선회해서 그대로 오스트레일리아 호의 함교 구조물로 돌진, 충돌했다. 당시 기체는 200kg의 폭탄을 부착하고 있었으나 폭발하지 않아서 배에는 화재만 발생했을 뿐이었으나 이로 인하여 함장인 에밀 드셰너 대령(사망)과 존 콜린스 제독(부상)을 포함하여 30여명의 승무원들이 죽거나 다쳤다.

 

 

 10.25, 오스트레일리아 호는 또 다시 공격을 받고 뉴 헤브리지로 수리를 위해 귀환해야 했으며 같은날 카미카제 특공대가 최초로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작전에서 세키 유키오 대위가 지휘하는 5대의 제로기가 일본의 에이스 니시자와 히로요시를 포함한 호위기의 엄호를 받으며 호위 항모로 돌진하였으며 그 중 1기가 USS Kitkun Bay(CVE-71)의 함교에 충돌하려 했으나 실속으로 선회하면서 바다에 빠졌고 다른 2대는 USS Fanshaw Bay(CVE-70)로 돌진했으나 대공포화로 공중분해되었다. 남은 2기는 USS White Plains(CVE-66)에 충돌하려고 했지만 심한 포연에 의하여 충돌하지 못하고 근처에 USS St. Lo(CVE-63)의 비행갑판과 충돌했다. 이것이 폭탄 저장소에 유폭되어 결국 USS St. lo는 카미카제로 침몰된 최초의 연합군 항공모함이 되었다.(이상 카사블랑카 급 호위항모.)

  

 26일까지 55대의 카미카제 공격기가 잇달아 자폭공격을 시도하여 대형 호위항모 USS Sangamon(CVE-26), USS Suwannee(CVE-27), USS Santee(CVE-29) (이상 3척은 유조선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한 것)와 소형 호위항모 USS White Plains(CVE-66), USS Kalinin Bay(CVE-68), USS Kitkun Bay(CVE-68)(이상 3척 카사블랑카 급 호위항모)가 파손되었다. 이로써 총 7대의 항모 외에 40여척이 손상을 입었다.(5척 침몰, 23척 대파, 12척 파손)

 

 

카미카제의 본격화

 

 얼마전에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는 치욕을 당한 일본으로써는 눈이 부실 정도의 대 전과(실제로는 항모 1척 침몰, 6척 파손이지만 전과 보고는 보고한 호위부대의 착오도 있어서 7척 침몰로 과장 되었음)로 카미카제는 일본군에서 대대적으로 실시되었으며 몇개월 사이에 2,000대 이상의 자폭공격이 실시되었다. 필리핀에서 출격한 최후의 카미카제 공격이 1945.01.06 실시된 이후에도 훨씬 장거리 비행이 요구되는 일본 본토의 비행장에서도 이어져 01.08에는 오오니시 소장이 편성한 두번째 자폭공격대가 미쓰비시 A6M 52형과 요코스카 D4Y를 중심으로 다카오 비행장에서 출격했다.

 1945.01.29에는 육군도 참가하여 7대의 가와사키 Ki-48기로 구성된 시치시 미타 대가 발렘방에서 출격하여 영국의 태평양 함대를 공격했으며, 02.16에는 제601 항공대의 긴페이 테라오카 소장과 스기야마 리이시 대령도 7조의 특공대를 조직해서 미군 함대를 공격하게 했다.

 03.11, USS Randolph(CV-15, Essex Class)가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티 환초에서 무려 4,000km 밖에서 날라온 카미카제의 공격을 받아 파손되었고(단 2호 작전), 03.20 미국의 잠수함 USS Devilfish도 일본 근해에서 카미카제 공격을 당할 정도로 공격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오우카를 비롯한 자폭전용 병기가 투입되기도 하고, 공중에서도 카미카제 공격을 실시하는 등 전쟁 후기 일본은 카미카제 공격을 대대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군규모로 실시하게 된다.

 

 

연합군의 방어전술

 

 연합군도 카미카제의 공격을 더 이상 일시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없게된 1945년 초, 이미 서치 위브로 유명해진 존 서치 사령관이 카미카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Big blue blanket"전술(함대 외곽에 레이다를 탑재한 소형선박을 위치시켜서 접근하는 일본기의 고도와 위치 속도를 알려주면 본함대에의 항공대가 이들을 포위해서 요격한다.

)을 개발해 내었다.

 

 이 전술은 효과가 있었으나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미함대에 호위 항공대가 전방위 방어를 해 줘야 했고 미 해군은 이 시점에서 항공기조종사의 양성을 감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인원을 보충할 수는 없었다.

 

 당시 할지 제독의 참모로 있던 서치 대령은 다시 CAP(combat air patrol)팀을 보다 대규모로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동시에 일본군의 비행장에 대한 집중공세를 퍼부을 것을 제안했고 이런 제안들이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어 카미카제의 효과는 후기로 갈수록 급격하게 감소했다. 일본군도 자살공격에 더 많은 항공기를 투입하고 밀도를 올렸으나 이미 숙련된 조종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진데다가 항공기의 질도 급락한데 반해서 연합군은 미국의 고속항모전단이 단독으로 1,000기의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는데다 자살공격의 방법에 익숙해지자 함선에 충돌하기 전에 요격하는 방법에 숙달되었고 해군에서도 접근하는 자폭기를 막기 위해 수면에 포격을 가해서 큰 물기둥을 일으켜서 자폭기를 격추시키는 전술을 개발했다.

 

 

최종단계

 

 카미카제 전술은 1945년 4~6월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절정에 도달했으며 1945.04.06, 기쿠스의 작전으로 수백대에 이르는 항공기가 자폭공격을 시도했다. 이 공격으로 30여척의 미군 함정이 침몰되거나 작전에서 이탈했으며 3척의 미군 상선을 포함한 몇척의 연합군 선박에도 피해를 주었다. 최종적으로 총 1,465대의 항공기가 소모되었고 연합군 선박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항모나 전함, 순양함과 같은 주요 목표물은 한척도 침몰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공격은 외곽 초계 임무중인 구축함이나 기타 소형 선박에 집중되었다.

 

  미군의 항모들은 이 시기 목재 비행갑판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태평양 함대(British Pacific Fleet, 이하 BPF)의 철제갑판 보다 카미카제 공격에 방어력이 떨어졌다. 05.04 새롭게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 BPF에 일본군이 높은 각도에서 HMS Formidable을 향해 대공포화를 뚫고 공격을 성공시켜 비행갑판에 3m길이에 0.6m 넓이, 0.6m 깊이로 찌그러트리는 데 성공했으며 이 충격으로 철재 빔이 기관실과 격납고에 떨어져서 화재가 발생하여 8명이 사망하고 47명이 부상을 당했고 1기의 콜세어 함재기와 10기의 어벤저 공격기가 파손되었지만 5시간 뒤에는 모두 수리되었다.

 

 공식적인 지시에 따른 최후의 카미카제 공격 명령은 우가키 마토메 소장에 의하여 1945.08.15일에 제 701항공대가 요코스카 D4Y 스이세이 폭격기로 오키나와의 연합군 함대에게 가한 것으로 이 후에도 독단적인 자폭공격은 간간히 이루어졌다.

 

 한편, 소련군에 대한 카미카제 공격도 이루어져서 일본 관동군의 비행기 6대가 만주의 46 탱크 여단과 6호위 기갑군에게 자폭공격을 감행하여 1대의 트럭이 완파되고 셔먼전차 1대가 손상됐다. 또 08.18 또는 그 다음날에 소련해군의 소형선박 KT-152가 쿠릴 열도 근해에서 카미카제 공격으로 침몰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공대원의 훈련

 

 "생과 사에 대한 모든 잡념을 지우면 이승에서의 삶에 대하여 완전히 초연해 질 수 있다. 이를 통해 집중력을 높이고 두려움없이 결단을 내려 전투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다."  - 카미카제 승무원 훈련서에서.

 

 카스가 다케오의 설명에 의하면 특공대 병사의 훈련이란 "대단히 격렬한 훈련과 폭력적인 처벌의 일상화"로, 해군의 츠치우라 비행장에서 훈련을 받은 이로카와 다이키치에 의하면 "따귀를 하도 맞아서 더 이상 감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한번은 너무 맞아서 앞을 볼수 없게 되어 넘어진 적이 있을 정도인데, 일어났더니 다시 몽둥이로 맞아서 기억이 나질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가혹한 "훈련"은 병사에게 근성을 심어준다는 발상으로 정당화되었지만 이런 일상적인 구타와 폭력으로 조종사들의 애국심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훈련 조종사들은 사고하는 방법과 준비, 공격에 대한 절차들을 지도 받았으며 "고도의 정신적 훈련상태를 유지"하고 "건강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방법"등을 지도받았으며 이를 통해 조종사들은 정신적으로 죽기 위한 준비를 갖췄다.

 

 특공대의 훈련교범에는 조종사가 만약 목표물을 발견할 수 없을때는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 가를 설명하고 있고, "조종사는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적고 있지만, 기지로 계속 귀환한 병사들에게는 유형 무형의 제제가 기다리고 있었고 9번 귀환한 경우에는 총살당했다.

 교범은 매우 상세하게 어떻게 조종사가 공격을 하는지를 설명하며, 표적으로 "함교와 연돌 사이"를 노릴 것을 지시하고 있으며 특별히 연돌을 향하여 돌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조종사는 함교나 포탑을 표적으로 삼지 말 것을 지시하고 그 대신 비행갑판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시설을 찾도록 하고 있으며 수평 공격시에는 조종사는 "선박의 중간 부분, 수면 약간 위쪽"을 공격하거나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격납고 입구 또는 함선 바닥쪽을 노리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목표에 명중될 확률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조종사가 눈을 감지 말라고 지시하고 있으며 돌입할 시에는 "실패없이 침몰시킬 수 있도록", "필살!"이라 외치라고 지시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왜 20대 초에 죽어야 하는지 이해라고 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지요. 죽음을 향해서 시계가 째깍거리는 걸 듣다보면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었죠" - 이로카와 다이키치 ; 카미카제 다이어리, 학도병의 회상

 


특공대원의 문화적 배경과 심리

 

 일본인들에게는 신토의 신앙관이 강하고 신토란, 일본신과 정령, 그 외에 기원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으로 신토가 일본의 국교로 지정된 이래 일왕에 대한 숭배가 일본국민에게 강요되었으며 1890년대 이래 일본의 "천황제"에대한 숭배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채용되었고 학생들은 일상적인 선서문 낭독을 통해 "조국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것"과 "몸을 바쳐 황족을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메이지 유신이래 일본 근대화를 통해 정립된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통치구조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가장 큰 명예로 취급되었다. 엑셀과 카제가 지적한 바로, "수많은 일본의 병사들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였다. 일왕은 1년에 2번씩 신사를 참배하는데, 일본 전체를 통틀어 야스쿠니 신사만이 인간신 일왕이 직접 참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가적인 문화적 배경을 통해 초기에는 지휘관들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카미카제에 지원자가 몰렸고, 국가 전체에서 카미카제를 찬양하는 열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미국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에 자신의 비행기를 충돌시켜서 일본함선을 구한 키유 이시카와의 경우, 죽은 후에 상사에서 중위로 일왕이 직접 특진시켰고 야스쿠니 신사에 안장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죽음을 통해 명예를 얻는다는 것이 많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특공대를 지원할 용기와 죽을 열망을 주었다.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기 위해 최종 출격을 하기 전에는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일장기나 욱일승천기와 함께 남부 권총 또는 일본도, 일왕의 하사주 등이 지급되었다. 출격시에는 무운장구를 비는 세니바리(천번 바느질한 허리띄를 두르면 살아서 돌아온다는 속설에 의한)나 머리띄를 두르고 사무라이들이 할복전에 하던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죽기 전에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카미카제 출격에 나서는 젊은 조종사들은 922m의 카이몬 산, 일명 "사쓰마 후지"(후지산을 닮았지만 사쓰마 지역-오늘날의 가고시마에 있음)를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조국에 작별을 고하고, 아마미 오시마 동쪽의 키카이지마 를 지날때, 조종사들은 출격할때 가져온 꽃을 뿌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전설의 반영인 듯, 키카이지마 비행장의 언덕에는 5월마다 시차국(꽃의 이름, cornflower)가 핀다.



 

 

특공에 반대하는 이들.

 특공 명령을 거절하고 묵인받은 제343 해군 항공대의 경우도 있기는 하나 전쟁 말기에 이와 같은 사례는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숙련자에 의한 야간 통상 공격의 유효성을 주장하여 특공을 지시하는 상층부를 논파해 종전까지 오키나와에 야간습격을 계속한 부용 부대의 대장 비소베 소령도 부하에게 특공을 시키지 않았던 인간으로 후세의 평가는 높으나, 정작 본인은 "대안이 없다면 특공이 불가피하다"라고 하여 특공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왕의 패전방송 이후에도 철저항전을 주장하여 반란 상태가 된 아츠키 항공대 제302 항공대의 사령관도 특공에는 반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 후에 일본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 같은 경우는 특공을 비난하며,

 "카미카제는 일본 고대부터의 기습작전에 따른 것인데 기습은 한번은 성공하더라도 10개월동안 몇번씩 시도하면 어떤 바보가 당하겠는가. 일왕이 그걸 깨닫고 멈추도록 지시했어야 한다."

 "아직까지도 눈을 감으면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눈에 선한데, 수많은 제자들이 카미카제 특공대로 끌려갔다. 어째서 일본 사령부는 그런 어리석은 작전을 10개월이나 지속했는가. 모든 이들이 카미카제에 지원했다지만, 죽으라고 보낸 겐다 미노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아있다. 모두 거짓말 장이들이다."

라고 말하고 잇다.

 

 2006 요미우리 신문 편집장 와타나베 츠네오는 카미카제에 대한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태도를 비난하며,

 "그들이 기쁨과 용기로 충만해서 "텐노헤이카이반자이"를 외치며 죽어갔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억지로 글려갔고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걸을 수도 없어서 군인들이 실어가서 조종석에 처넣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
질문은 여기서 부터인데,

독일군이 각성제를 써먹은건 잘 알려진 거고,
일본군도 사용했나? 요미우리 신문에 나온 각성제 광고 말고 말이지 예전에 누가 일왕 하사주에 뽕을 탔다느니 뭐니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에 관련된 자료가 있는 햏 있으면 관대하게 링크라도 좀 부탁.


짤방은 히로뽕 광고랑 블루 블랭킷 개념도.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모태 솔로도 구제해 줄 것 같은 연애 고수 스타는? 운영자 25/07/21 - -
121022 센징국이 신생 독립국이라는 증거 이소자키 이츠키(211.192) 16.05.18 105 0
121021 원래 반일 센징들이 헛소리를 잘 늘어놓긴 하지만 코가미 유리코(211.192) 16.05.18 132 0
121020 일본이 못난이 조센을 합병한뒤 운지하기 시작한거 같음 타테와키 쇼타로(211.192) 16.05.18 128 0
121019 국뽕 새끼들만 모르는 대일본의 파워 쿠죠 사쿠라코(211.192) 16.05.18 82 0
121018 조센징 반일세뇌가 얼마나심하면 아직도 정신세계는 2차세계대전속이냐? 이이즈카 치사(211.192) 16.05.18 56 0
121017 안중근 몰랐던 죄로...오늘 공개 처형...jpg 미개하고 열등한 좆센징 마츠모토 아키라(211.192) 16.05.18 46 0
121016 세상에 어느 나라가 다른나라를 증오하지 않으면 국민취급을 안하냐? 시이나 안즈(211.192) 16.05.18 34 0
121015 삽질 테러범 안중근의 진실.fact 이시와타리 나오(211.192) 16.05.18 66 0
121014 안중근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코와타 아카네(211.192) 16.05.18 41 1
121013 한국이 원해서 일본과 합방한거 맞네 쿠라모토 치나츠(211.192) 16.05.18 54 0
121012 백인우월주의 사이트에서 발견한 글과 조센징. (feat. 노벨상) 쿠라모토 케이(211.192) 16.05.18 76 0
121011 정말 국방군이 무장친위대한테 꼼짝도 못했냐? [3] 맥스4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5.17 237 0
121010 태평양전쟁 관련 서적 추천좀 해주라 [2] ㅇㅇ(220.72) 16.05.17 123 0
121009 존키건 책읽다보면 [3] 4124124(220.87) 16.05.16 230 0
121003 20세기 초반 독일영토 클라스 jpg [5] 갸루갸루갸루(220.76) 16.05.14 243 0
121002 패전 후 조선인이 되겠다 자처하는 일본인들 ㅇㅇ(61.77) 16.05.14 144 0
121001 일본 연구팀 "일본인은 토착민과 한국인의 혼혈" ㅇㅇ(128.199) 16.05.14 130 0
121000 일본 넷우익 평소 모습 [2] ㅇㅇ(128.199) 16.05.14 139 3
120999 빈부격차와 빈곤층이 증가하는 일본의 현실 ㅇㅇ(128.199) 16.05.14 177 0
120998 졸렬한 참패로 끝나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 된 할힌골 전투 ㅇㅇ(128.199) 16.05.14 203 2
120997 일본인 여행가 '일본은 동양의 이상한 소국에 지나지 않는다' ㅇㅇ(128.199) 16.05.14 92 0
120996 똥먹는 법을 기록한 에도시대 의학서적 ㅇㅇ(128.199) 16.05.14 252 0
120995 노상방뇨와 똥 천국이였던 19세기 일본 ㅇㅇ(128.199) 16.05.14 616 0
120992 [국가소개] 대동아연방 타나카 모쿠렌(210.107) 16.05.10 182 27
120991 청일전쟁 승전일은 독립경축일 코와타 마코토(210.107) 16.05.10 94 0
120990 김구는 테러의 괴수 우사카메(210.107) 16.05.10 84 0
120989 한일합병은 합법적 조약 -2- 이바쿠사 소라(210.107) 16.05.10 108 0
120988 한일합병은 합법적 조약 -1- 이로하니 헤호토(210.107) 16.05.10 286 0
120987 세계를 둘러 봐도 대일본처럼 불가사의한 나라는 없다. [1] 바바 미야코(210.107) 16.05.10 175 0
120986 좆센징들이 울부짖는 개소리-독일이 식민지에 사죄와 보상을 해? 후루비라 타스쿠(210.107) 16.05.10 169 3
120985 독립꾼은 마을하나도 점령 못한다. 니시아라이다이시 니시(210.107) 16.05.10 83 0
120984 브란트 총리가 무릎 꿇은거 가지고 독일 본받으라는 조선인들이 웃김 사토 쿠루미(210.107) 16.05.10 140 0
120983 김구(X) → 킬구(O) 스즈키 아야코(210.107) 16.05.10 104 0
120982 2차대전 연합군 포로는 조선인을 미친 개라고 부름 타나카 키나코(210.107) 16.05.10 132 0
120981 욱일기 사용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유 카와이 마나(210.107) 16.05.10 131 0
120980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 카와이 마이(210.107) 16.05.10 196 0
120979 좆센징들이 망상하는 안중근은 일러전쟁에서 대일본을 찬미했어 사쿠라 아미(210.107) 16.05.10 109 0
120978 조선 최초의 공식 국기가 머청속국기인 이유 사쿠라 노아(210.107) 16.05.10 237 0
120977 한국의 근현대사란 조선민족에겐 축복 아니냐 후카가와 후유미(210.107) 16.05.10 99 0
120976 조선인의 욱일기 선동 아이자와 유우(210.107) 16.05.10 171 0
120975 일제 강점기라는 말이 요새도 왜 쓰이고 있는지 궁금 [1] 타니 미나미(210.107) 16.05.10 121 0
120974 킬구는 진짜 빼박 테러리스트 아님? 사카가미 토모요(210.107) 16.05.10 90 0
120973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의 나라 대한민국 후지바야시 쿄(210.107) 16.05.10 102 0
120972 떡밥이 떠올랐다. 앨런비쨩☆(119.192) 16.05.10 123 0
120971 오데르-나이세 선의 문제에서. 앨런비쨩☆(119.192) 16.05.10 102 0
120969 히틀러의 초기 영토야욕의 문제. 앨런비쨩☆(222.109) 16.05.09 230 1
120968 독일이 요구한 것은 폴란드 회랑 전체일까 앨런비쨩☆(222.109) 16.05.09 116 1
120967 폴란드 영토를 보며 내가 독빠라는 것을 느꼈다-_-; 앨런비쨩☆(222.109) 16.05.09 128 1
120966 폴란드 영토들 'ㅅ'; 앨런비쨩☆(222.109) 16.05.09 463 0
120965 다케시마허구 울릉도 제주도는 대일본이 가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1] 히바리가오카 루리(210.107) 16.05.09 191 34
뉴스 '청담국제고등학교 2' 이은샘-장성윤의 대립 모멘트, 숨 막히는 긴장감 유발 디시트렌드 07.25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