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美日和親條約-黑船降臨.
일본의 개항은 조선과 유사한 불평등 조약이었고, 강화도 조약은 미일수호조약의 과정과 내용을 그대로 응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개항 이후의 혼란기 속에서 국제질서에 적응해 나가 마침내 유신 이후에는 조선을 상대로 개항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의 근대화 과정의 시초가 되는 일본의 개항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선술한대로, 사실 일본은 이미 16세기에 서양과 교류를 개시, 일본의 은과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인도의 향료로 대변되는 동아시아 황금항로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鐵砲와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기타 서구 문물도 일본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아즈치(安土) 모모야마(桃山) 시대 이후 서양의 침략과 기독교의 파괴력을 우려한 나머지 칸에이(寬永) 15년(1638) 쇄국정책을 취하고 국내 기독교를 탄압하였다.(주92) 하지만 서양과의 창구를 위해 선교에는 관심 없는 신교국가 네덜란드와는 통상을 계속하였고, 이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였다. 이를 난학(蘭學)이라고 한다. 비록 쇄국을 취하고는 있었으나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꾸준히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고는 있었다. 하지만 초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유훈이라 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했고, 이국선타불령을 내려 일본에 접근하는 외국선박은 즉시 격퇴하도록 하였다.
18세기 들어, 일본 북부의 홋카이도(北海島), 사할린, 쿠릴 열도에서 일본은 시베리아로 진출하는 러시아와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메이와(明和) 8년(1771) 7월, 헝가리인 베뇨브슈키가 유배지였던 캄챠카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배를 빼앗아 타고 일본에 표류했다. 그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商館長 앞으로 편지를 보내 러시아가 다음해 홋카이도 마쓰마에(松前) 인근을 습격할 준비를 한다고 전했다. 실제 러시아는 18세기 초부터 쿠릴 열도를 타고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18세기 중심에는 시베리아 이르쿠스크에 일본에 학교를 세우고 마쓰마에번과 밀무역을 하는 등 남하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침공 자체는 사실이 아니었고, 막부는 이를 묵살했다. 다만 세상에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식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센다이(仙臺)번의 의사 쿠도 헤이스케(工藤平助)는 에조(蝦夷)(주93) 문제를 러시아의 남하와 관련해 북방문제로 인식하고 텐메이(天明) 3년 赤蝦夷(주94)風雪考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상하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에서는 마쓰마에에서 밀무역을 하고 남하하는 러시아의 상황을 서술하고, 대책으로 러시아와의 교역과 에조 개척을 주장했다. 당시 노중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는 이 의견에 주목하고 텐메이 5년 勘定奉行 마쓰모토 히데모치(松本秀持)에게 홋카이도 인근 조사를 명령했다. 그 일행이었던 모가미 도쿠나이(最上德內)는 쿠릴 열도를 조사하고 오이시 잇페이(大石逸平)은 사할린 일대를 탐험하였다. 이 탐험 결과 홋카이도의 면적은 11664000정보이며 그 중 10%인 1166000정보를 개간할 수 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막부에서는 이를 검토하여 70000명을 이주시켜 개발한다는 계획안을 세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였고, 이후 오키쓰구의 실각으로 좌절되었다. 그리고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은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위협을 환기하고 서양에 대응하는 일본의 국방대책의 필요성을 주장한 海國兵談을 집필하였다.
칸세이 4년(1792) 9월, 9년 전 풍랑으로 표류하던 기이(紀伊)번의 쌀 수송선 신쇼마루(神昌丸)의 선원들이 탑승한 러시아 배가 홋카이도 네무로(根室)에 도착했다. 인솔자인 라스크만 중위는 일본 선원들을 송환하고 일본과의 통상을 제의했다. 노중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은 표류민은 인수했지만 국서와 헌상물은 거부하고, 다만 나가사키 입항허가 信牌를 수여하여 네덜란드와 같은 방식의 한정무역의 가능성만을 시사했다. 다음해 3월 사다노부는 해안 경비 강화령을 내리고 직접 방비 상황을 시찰하였다. 12년 뒤인 분카(文化) 원년(1804), 러시아의 견일 대사 레자노프가 예전 라스크만에게 주었던 신패와 통상 요구 국서를 들고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하지만 막부는 이를 거부하고 일행을 나가사키 우메가사키(梅ヶ崎)에 반년 간 연금했다. 이는 막부의 쇄국정책과 대일무역독점을 노리던 네덜란드의 견제 때문이었다. 격노한 러시아는 분카 3, 4년(1808)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여러 시설을 습격했다. 이는 러시아와의 최초의 군사적 충돌로, 이 충돌이 야기한 충격과 위기의식은 컸다. 이미 사전에 막부는 동부 홋카이도를 직할지로 삼았었고, 러시아의 습격 이후에는 전쟁에 대비해 홋카이도 전체를 직할지로 삼았다. 이후 잠시 홋카이도를 마쓰마에 번에 반환하기도 했으나, 안세이(安政) 원년(1854)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위협으로 다시 전역을 막부 직할지로 삼았다.
이렇게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텐포 14년(1844) 네덜란드는 일본에 친서를 보내 세계정세를 설명하고 정식으로 개국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당시 막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미국은 이미 이전에 모리슨호 사건이 일어났었고,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중국 廣東 간의 항로 열기 위해 일본에 중간 기항지를 두기 위해 동인도함대 사령관 비들을 파견했으나 막부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1848년 골드러시로 표현되는 캘리포니아 금광이 개발되고 서부개척이 시작되자, 태평양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일본의 개국을 열망하게 되었다. 이에 1852년 11월 24일, 미영전쟁과 멕시코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는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노포크를 출항했다. 이후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도는 여정 끝에, 카에이 6년(1853) 6월 3일 우라가 만에 미국 동인도함대 군함 4척(주95)이 나타났다.
페리는 에도 가까이 진입하고, 막부의 감시선이 접근하면 바로 퇴거시켰다. 막부는 페리 제독의 행동에 나라에는 그 나라의 국법이 있고 그 법을 어기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항의하였다.(주96) 이는 이전의 러시아 등과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인 포함외교였다. 페리 제독 자신도 일본을 반미개의 나라로 간주하고, 군사적 교섭이었다고 술회하였다.(주97) 사실 막부는 카에이 5년 2월 네덜란드 상관이 보낸 別段風說書으로 미국 동인도함대의 내항을 알고 있었다.(주98) 일단 막부의 노중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은 혼란을 우려해 이 정보를 일부의 영주들과 우라가 奉行에게만 전했다. 페리 제독은 막부에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의 접수와 일본의 개국을 요구하고 3일 간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막부는 일단 국서 접수를 결정하고 일단 함대의 퇴거를 요구했다. 국서가 접수되자, 페리는 답변을 내년 봄까지 연기하는 것을 허가하고 6월 12일 류큐로 철수했다. 이 미국 함대의 개국 요구에 마사히로는 국서 접수를 조정에 알리고 영주들에서 서민들까지 두루 의견을 들어 보았지만 타당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막부의 무능만을 드러냈다. 한편 7월에는 러시아의 푸챠친이 나가사키에 나타났다. 푸챠친은 늘 문제가 되는 북방 영토분쟁에 대한 확정과 통상을 요구하는 국서를 가지고 나타났다. 이에 교섭에 나선 카와지 도시아키라(川路聖謨)는 미국처럼 시간을 버는 계책을 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최혜국대우를 인정하는 문서를 전달하였다.
러시아의 행보가 예상보다 빠른 것을 안 페리 제독은 안세이 원년(1854) 1월 16일 약속대로 7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에도만에 나타났다. 페리 제독은 에도와 가까운 곳에서의 회담을 제의했고, 이에 2월 10일 요코하마에서 회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선술한대로 아직 이렇다 할 의견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는 지지부진해 한 달을 끌게 되었다. 하지만 마사히로는 서로의 국력을 비교하고 나서 아편전쟁을 교훈삼아 전쟁을 피하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하여,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주99) 조약 내용은 미국 함선에 대한 보급과 통상을 위해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표류 선원의 구조와 송환, 영사 주재, 시모다에 미국인 거류지의 설정과 최혜국 대우였다. 기타 세칙은 미국인의 이동 가능 범위는 시모다에서는 7리, 하코다테는 5리로 제한하고, 미국인의 민가 출입 금지, 사냥 금지, 미국인의 휴게소로 了仙寺, 玉泉寺를 설치하고 미국인 묘지는 玉泉寺에 두는 것이었다.
1854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동인도함대의 스털링 제독이 적국 러시아함대를 수색하기 위해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당시 태평양 일대에서 영국, 프랑스의 연합군 함대는 캄차카 반도의 러시아군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고 있었다. 이때 스털링은 유럽의 전시국제법에 준한 우호적 중립을 요구했다. 하지만 막부는 이는 전쟁에 관여하는 행위로 간주되기에 거부하고, 대신 일반적인 화친조약의 체결을 요구했다. 당시 크림 전쟁은 세바스토폴 전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북태평양일대가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쟁수역이 되자, 이 화친조약 제의는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전황이 급변해 세바스토폴이 함락되고 전쟁의 승패가 갈려지자, 영국은 강경한 자세로 나와 일본 영해 통행권과 영국 선박에 대한 물자공급, 나가사키와 하코다테의 개항을 요구했다. 이런 영국의 입장변화는 전쟁에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포함외교의 위력 아래 막부는 나가사키 奉行에게 조약체결을 승인, 8월 23일 영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12월 러시아와 러일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큰 골자는 미일화친조약에 기초해 체결하였고, 늘 문제가 되는 북방 영토에 대해 쿠릴 열도는 중간 수역에 국경을 설정하고 사할린은 양국 공동구역으로 정하였다. 러시아는 개항지로 시모다, 하코다테, 나가사키를 지정하였다.
미국은 주일 대사로 해리스를 시모다에 파견했다. 우선 미일화친조약의 개정인 시모다 조약을 안세이 4년 5월 체결하고 이후 줄기차게 에도 登城을 요구했다. 막부는 거절했으나 이후 미국 군함이 시모다에 입항하자, 무력시위를 우려해 등성을 허가, 10월 21일 장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을 배알하고 친서를 전달했다. 이때 그는 영일화친조약 체결 시 드러난 영국의 위협을 강조하고 미국의 우호외교를 강조했지만 사실 막부도 여러 채널을 통해 미국의 우호외교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해리스는 중국의 애로호 사건에서 드러난 영국과 프랑스의 호전성과 일본 침공, 일본 내 아편유입의 가능성을 지적하고 이를 막기 위해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했다. 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이 정세를 이해하여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칙허가 없는 채 6월 1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개항장 중 시모다를 폐쇄하고 대신 효고, 니가타, 나가사키, 가나가와, 하코다테의 단계적인 개항,(주100) 자유무역, 영사재판권, 협정관세제도, 미국화폐 유통권, 에도, 오사카의 開市이고 기타 아편수입 금지, 거류지 설정, 일반 외국인의 국내여행 금지 등이 있었다. 즉, 아무런 보호조항 없이 바로 자유무역을 실시하고 최혜국제도와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관세 자주권이 없는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나마 미국인의 활동범위를 거류지로 제한하였기에 미국의 직접적인 국내시장 침투는 막을 수 있었고, 요코하마에 몰려든 일본 상인들로 활동으로 인해 겨우 민족적 자립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조약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와도 체결했는데, 이를 안세이 5개국 조약이라고 한다.
이런 굴욕적인 조약 이후 일본 내는 이 조약을 체결한 막부에 대한 비판으로 들끓었다. 우선 조정은 88명의 공경이 조약 체결에 반대했고, 코메이 천황은 선조들에 면목이 없다며 유감의 뜻을 보였다. 막부 내 영향력을 발휘하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앞장서서 격렬하게 항의했고, 기타 지방의 번들도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막부의 허약함과 무능함을 비난했다. 더욱이 여기에 장군의 후사문제까지 얽혀들어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칙허 없이 무단으로 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정을 무시하는 태도로 인해 그 비난은 거세어져 갔고, 코메이 천황은 무단 조약 체결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의 뜻까지 밝히기도 하고 은밀히 미토번주 나리사이에게 막부의 실정을 힐책하라는 내칙도 내렸다. 결국 궁지에 몰린 이이 나오스케는 막부의 권위를 보여주고자 반대파인 히토쓰바시파와 각 지방의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인사들을 처벌하는 안세이의 大獄을 일으켰다. 약 1년간 안세이의 대옥에서 이이 나오스케는 비판적인 인사들을 숙청했으나, 이이 나오스케 역시 만엔(萬延) 원년(1860) 3월 3일 아침, 출근하던 중 에도성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미토번과 사쓰마번 출신의 지사 18명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막말이라 불리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를 겪게 된다.
이상으로 조선과 일본의 개항 과정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조선은 유신 이후 계속된 일본의 관계 개선 요구 국서를 물리쳐 오다가, 마침내 운요호 사건이라는 포함외교로 인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 역시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을 벌이며 계속 개국을 거부해 오다가 마침내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인해 불평등 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되었고, 곧 외국 여러 나라와도 같은 내용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개항을 계기로 보다 적극적인 서양 문물 도입에 앞장섰지만, 일본은 반대로 막부의 무능과 허약함만을 폭로하게 되어 이후 막부와 지방 번들과의 대결인 이른바 막말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결국 막부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주92) 1587년경에는 규슈 등 서일본을 중심으로 교회 200여개와 신도 20만명을 기록했으며, 심지어 신자 70만에 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철저한 탄압으로 일본의 기독교는 거의 근절되었으며, 현재 교육계에서의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기독교도는 신교와 구교 합해서 1%가 채 되지 않는다. 과거 기독교도의 근거지였던 나가사키 현 일대에는 아직도 구교 신자가 많다.
(주93) 홋카이도의 옛 지명.
(주94) 赤蝦夷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러시아의 통칭.
(주95) 黑船이란 그 함선이 검은색의 증기 외륜선인 것을 당시 사람들이 부른 명칭이다.(실상 페리 함대의 저 4척이 동인도함대의 전부였으며, 4척 중 2척은 단순 범선이었다) 기함 서스케하나(Susquehanna)는 2450톤의 증기 외륜 프리깃이며, 이름은 펜실베이니아 주 서스케하나 강에서 따왔다. 무장은 2문의 150파운드 패럿포와 12문의 9파운드 포, 1문의 12파운드 포였다. 지금도 시모다(下田)에는 이 배를 재현해 만든 유람선인 혹선 서스케하나가 취항하고 있다.
(주96) 아사오 나오히로(朝尾直弘) 외 4명, 『새로 쓴 일본사』, 이계황 외 4명 옮김, 2004, p353
(주97) 위의 책 p353
(주98) 歴史ファンワールド編集部,『幕末維新解體新書』, KOEI, 1998, p18
(주99) 조약장소의 이름을 따 가나가와(神奈川)조약이라고도 한다. 가나가와는 요코하마의 옛 지명이다.
(주100) 하지만 저 중 사실 효고 대신 고베(神戶)가, 가나가와 대신 요코하마가 개항되었다. 각국이 이 고식적인 정책을 비난하자, 메이지 유신 후 요코하마를 가나가와 현에, 고베를 효고 현에 편입시켜 이를 억지로 정당화 시켰다.
5. 마침말 - 개항기를 돌아보며.
이상으로 개항기의 한일 두 나라의 사건과 이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았다. 사실 큰 차이는 없었다. 두 나라 모두 개항 전에 중앙의 권위를 높이고 중앙에 힘을 부여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또 외국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일전을 불사했고, 외국 역시 그 힘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개항할 때는 모두 포함외교에 개국을 했고, 둘 다 이례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럼 어쩌다가 두 나라가 하나는 개항 50년 만에 세계열강 중 하나가 되었고, 하나는 그 식민지가 되었을까?
아마도 외국과의 항쟁시기, 조선은 외국을 격퇴하는데 성공하고 진행해 오던 쇄국정책을 강화했지만, 일본의 경우 두 번이 모두 외국에게 처절하게 무너지고 난 이후 서양의 힘을 새롭게 인식한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철저히 패배했고, 이후 양이의 무모함을 깨닫고 개국을 하여 보다 적극적인 서구 문물 수용을 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강성해졌고 마침내 일개 제후인 그들이 중앙 막부를 힘으로 쓰러뜨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유신 정부는 개국 정책에 박차를 가해, 말 그대로 단순한 서구 문물의 도입뿐만이 아닌 서양의 마인드를 이해하고 그를 받아들인데 있다고 생각한다. 東道西機는 매력적인 구호였지만 그 마인드를 가지고 근대화를 진행하던 청나라는 일본과의 대결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말았고, 조선 역시 다루지는 않았지만 여러 시행착오 끝에 결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들은 패자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은 근대화에 성공해 강국이 되었다. 조선은 승자였지만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대원군이 확실하게 국내기반을 다져놓았을 때, 아직은 어수룩하던 일본의 관개 개선 요구를 받아들였으면 일본 역시 아직 큰 힘이 없던 시절이기에 급변하던 세계정세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패자는 상대의 힘을 알고는 스스로 반성하여 변화하려 하였고, 승자는 반성하지 않고 스스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아마도 이 차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서로 시작은 미약했고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끝에서 하나는 창성했고 하나는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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