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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에 대하여

나다 2005.09.12 0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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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사건과 백령묘전투 내몽고로 향하는 일본의 야욕 화북에 대한 야욕을 달성한 일본은 이번엔 내몽고지방에 대한 모략을 개시했다. 일찍이 징기스칸의 지휘 아래 광대한 몽고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인들은 원나라가 망한 뒤로 그 세력을 잃고 있었다. 이들은 이후 청조의 은근한 견제로 제대로 된 생활터전도 갖지 못한 채 원나라 시절같은 유목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청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몽고는 이른바 화외 지역이라 하여 중국 본토의 정치대상이 되지 않았고 봉건황후가 다스리는 반독립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세력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1931년에는 소련 영향하의 외몽고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고 얼마동안 중국과 종주국 관계를 유지하다가 얼마 후엔 아예 관계를 끊고 말았다. 한편 내몽고지방은 1920년대에는 서북계 군벌의 거두인 풍옥상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으나 그가 몰락하고 나자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그 내부에서는 급진 민족주의와 구 왕족파가 엇갈리는가 하면 외부에서는 부작의와 송철원등이 손을 뻗치고 있었다. 내몽고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세력인 국민당정부는 내몽고, 특히 덕왕의 자치정부에 대해 회유책을 써 오다가 1934년 4월, 덕왕을 중심으로 한 외몽고정무위원회의 성립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덕왕의 만주방문 그러나 만주침략 이후 덕왕은 관동군의 책략에 의해 1935년 11월 만주의 신경을 방문하고 황제 부의와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와 회견하여 일본과 제휴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로 관동군 참모 다나까중좌의 모략에 의한 것이었다. 다나까는 이미 1935년 3월부터 덕왕과 접촉을 개시하여 이 무렵 국민정부가 덕왕에게 보내는 재정경비의 중단을 기회로 삼아 앞으로 관동군이 그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하여 덕왕을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관동군이 내몽고에 손을 내민 것은 처음에는 군사적 이용가치 때문이었다. 즉, 만주의 서쪽 경계의 안정과 대소첩보모략기지로 육성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덕왕을 장악할 수 있게 된 35년 6월경부터는 내몽고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키고 다시 청해성, 신강성 외몽고까지 손을 뻗쳐 이 지역을 망라한 괴뢰정부를 수립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왕영군의 침입 관동군의 계획으로는 36년 말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내몽고 괴뢰정권을 만들어놓고 내친 김에 수원방면으로 무력침공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침공군에는 덕왕의 수하인 이수신의 병력과 새로 모집한 내몽고군을 투입할 예정이었다. 이윽고 새로 규합한 13,000명의 내몽고군은 그야말로 오합지졸로서 단독작전은 도저히 불가능한 군대로 노무자들의 집합에 가까웠다. 그래서 덕왕의 일인 군사고문등도 그 무모함을 주장했으나 관동군의 이다가끼, 부또오, 다나까는 3자 회담을 열어 7월 중순을 기해 우선 수원성에 침입하자고 합의했다. 이 작전의 선봉으로서 선택된 것이 왕영의 군대였다. 이 왕영군은 다나까가 몽고군과는 별도로 그의 직계군으로 훈련시켜 온 모략군이었다. 몽고출신인 왕영을 표면상의 지휘관으로 세우고 왕도일, 석우삼계열의 잡군을 포함하여 약 6,000명의 병력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중 왕도일군인 이미 8월 상순부터 수원 동쪽지구에 침입하여 소규모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도전행위를 보자 수원측에서는 부작의군이 출동하여 삽시간에 왕도일군을 격파했고 겨우 목숨을 건진 왕도일은 패주하는 도중 그의 부하에 의해 사살당하고 말았다. 이 충돌사건을 계기로 수원군과 내몽고군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미리 전란을 감지한 외국인과 일부 주민은 북평과 천진방면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백령묘 전투 이리하여 수원 동녘의 초원에서 내몽고군과 수원군의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수원군은 사령부를 평지천에 두고 부작의를 총수로 한 왕청국, 이복응군이 수원성 동쪽 경계에 배치되었다. 한편 장개석도 전례없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내몽고군의 침입태세를 보고받자 10월 하순에 항주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20여만의 중앙군을 북상시켜 수원군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장개석이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내몽고군의 배후에 관동군의 지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관망하고 있던 화북의 여러 군벌 및 중국공산당의 세력범위에 진출하여 그들을 제압하자는 것이었다. 한편 괴뢰 내몽고군의 선봉 왕영군은 관동군 비행대 15대의 지원 아래 우선 홍격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왕영군에게는 왕성한 전의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관동군이 지급해 주는 보수와 보급물자에 눈이 멀어 이 작전에 참가했던 것이다. 18일, 부작의가 지휘하는 수원군은 며칠동안 수세를 취하며 상대의 전투력을 평가한 다음 일제히 대공세로 나섰다. 때마침 중앙군의 북상 소식도 들려오고 있었고 수원군에게는 왕영군과는 달리 왕성한 전의가 있었다. 24일 새벽 수원군은 마침내 내몽고군의 거점인 백령묘로 공격해 들어갔다. 1개 사단 병력의 수원군이 백령묘에 밀려들어가자 내몽고군은 그 기세에 눌려 반격도 제대로 못하고 패주했다. 수원군은 거의 무혈점령하다시피 백령묘를 점령했다. 수원군이 백령묘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중국은 축제 분위기에 휩쓸렸다. 남경의 각 신문은 일제히 백령묘 전투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다. "모 방면(관동군)이 기도한 대원제국 건설의 음모는 청천백일하에 폭로되었다. 백령묘 전투에서 우리 중국군은 각종 무기, 탄약과 가솔린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시체 300, 포로 300의 전과를 올림으로써 무모한 침략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백령묘를 빼앗김으로써 누구보다 기세가 꺾인 것은 관동군의 다나까였다. 그가 모집하여 육성한 내몽고군이 이렇게 쉽게 패퇴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11월 29일, 그는 덕왕으로 하여금 내몽고 긴급 군사회의를 소집케 하고 이 회의에서 새로이 김갑산부대를 동원하여 백령묘 탈환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 김갑산부대 역시 왕영군의 일부에 속하는 잡군이었는데 이번에는 일본인 장교 구와하라소좌가 직접 지휘에 나섰다. 1 2월 3일, 약 4,000명의 김갑산부대는 백령묘 남쪽의 수원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날 그곳 평원에는 흰눈이 쏟아져 내렸는데 하루 밤낮의 공방전 끝에 내몽고군은 다시 한번 대피해를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때마침 극심한 추위 때문에 패주하는 김갑산부대는 인마가 모두 동상에 걸린 채 눈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등 추태를 보였고 이들이 길을 잃은 것을 안 다나까중좌가 관동군 비행대로서 공중유도로 길을 안내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원군 기병대는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이들은 분쇄하고 12월 10일 김갑산부대의 거점이었던 시라므린묘를 점령했는데 이때 김갑산부대의 일부는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군사고문 고하마대좌를 사살해버렸다. 일본의 태도 두 차례에 걸친 침공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관동군은 11월 27일 그들의 면목을 조금이라도 살리고자 어설픈 성명을 발표했다. "내몽고군의 궐기는 자위를 위한 부득이한 수단이었다. 내몽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본 관동군은 만일 만주국 인접 지방에 위기를 초래할만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엔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변명과 위협이 뒤섞인 성명이었다. 이 적당한 조치란 일본군과 만주군을 출동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주국 이외의 지역에 병력을 출동시키기 위해서는 중앙 통수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관동군은 이해 12월 10일 이마무라 참모부장을 도쿄에 파견하여 육군 수뇌부의 양해를 구하려 했다. 이 무렵 육군 수뇌부에서는 관동군의 계속되는 월권행위를 억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해군과 외무성의 강경한 반대로 12월 4일에 있은 외무, 육군, 해군의 3상 회의에서는 관동군의 출병을 허용치 않기로 결정하고 이것을 곧 육군상으로 하여금 현지군에 명령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마무라가 출병 요구를 위해 도쿄에 도착한 것은 그 며칠 후였다. 이마무라는 먼저 육군 차관 우메즈에게 관동군의 의사를 설명하고 출병안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우메즈는 고함부터 질렀다. "관동군은 사사건건 중앙의 명령을 무시한 월권행동을 하고 있다. 심지어는 수원공격의 중지를 설득하기 위해 파견된 이시하라대좌를 모욕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고함을 지른 우메즈는 단호히 출병요구를 거절했다. 우메즈가 이렇게 진노한 이시하라대좌를 모욕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에 앞서 이시하라는 참모본부의 전쟁지도과장으로서 관동군의 수원침공계획을 중지하도록 설득하러 갔었다. 그런데 이시하라의 설득을 듣고 난 관동군 참모들의 반응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특히 이 자리에 있던 부또오는 문제의 한 마디를 던졌다. "이시하라대좌는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실은 우리들의 지금 계획은 왕년에 대좌가 보여준 그대로를 실행하려는 것 뿐입니다." 만주침략의 주모자였던 이시하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는 이시하라의 면전에서 관동군 참모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야유의 웃음이었다. 누구보다 믿었던 우메즈의 거절을 받자 이마무라는 어쩔 수 없이 만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중앙의 방침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관동군 안에서는 방침을 무시하고 출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본국 정부와 궁중, 원로들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이들은 모두 공개적으로 육군, 특히 관동군의 월권행위를 규탄하고 나섰다. 서안사건 일본의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갈 무렵 서안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2월 12일 장개석이 서안에서 장학량에 의해 감금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세계의 시선이 서안으로 집중되었다. 이 서안사건은 모택동이 1935년 8월 1일에 발표한 `8.1선언`에서 기인한다. 이때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군은 국부군의 추격으로 서남지방에서 섬서성으로 이동중이었다. 이 8.1선언은 여태까지 중국인끼리 싸워온 내전을 항일전으로 전환하자는 것으로 국민당과의 합작으로 시사한 것이었다. 이 무렵 동북과 화북지방에서 활동무대를 잃은 장학량은 장개석의 지령으로 모택동군 포위작전의 제 1선에 서 있었다. 그로서는 중공군과의 전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거점인 동북과 화북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과의 대전에 신경를 더 쓰이는 판이었다. 때마침 8.1선언을 들은 그는 1936년 2월 낙천에서 중공군과 협상하여 양군은 그때부터 현상유지상태로 들어갔다. 동시에 장개석에게 내전중지와 항일정책의 강경화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개석은 내심 장학량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항일전에서 그리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도 못하고 자신의 본거지마저 빼앗긴 데다가 중공군과의 전투에 내세웠지만 여기서도 기대에 못 미쳤고 더구나 그의 휘하인 동북군과 중공군이 합작했다는 정보도 입수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장학량의 동북군과 모택동의 중공군은 계속되는 대치에서 서로 적의를 못 느끼는 적이 되어 있었다. 특히나 동북군은 자신들의 고향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적의만 있을 뿐이었고 중공군에 대해선 전의를 잃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장개석은 직접 서안으로 날아왔다. 독전이라는 명목으로 왔지만 실제로는 장학량을 해임하고 자신과 뜻이 통하는 사람을 동북군사령관에 앉히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학량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만큼 장개석의 이런 뜻을 눈치채고 먼저 행동에 나섰다. 장개석과 함께 도착한 중앙군의 중공군에 대한 총공격 날짜로 예정된 12월 12일에 서북군 총사령 양호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미리 꾸며진 계획에 따라 서안에 체류하고 있던 장개석을 감금하고 그 일대의 중앙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것이 서안사건이다. 이 사건이 국민당 정부에 알려지자 그 대책을 둘러싸고 두 갈래로 의견이 나뉘었다. 송자문과 송미령, 손과등의 구미파, 친소파는 타협론을 주장하고 이에 대해 하응흠등은 외유중이던 왕조명을 급거 귀국하도록 하여 반란군과 중공군에 대한 철저토벌을 주장했다. 이러는 동안 장개석과 장학량은 일련의 협상이 이루어져 장개석은 중국 국민의 열광적 환호 속에 남경으로 돌아옴으로써 사태는 해결되었다. 서안사건 직후 남경으로 돌아온 장개석은 국공연합전선의 정책을 발표했다. "외적과 싸우기 위해 이제까지의 국내 문제는 불문에 붙인다. 모든 민족적 세력을 항일로 결속시킨다." 서안사건의 결과 서안사건은 때마침 복잡하게 엉켜 있던 중국과 일본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12월 15일, 먼저 덕왕이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여기서 찾았다. 그는 이날 이수신, 왕영등 부하들을 불러 회담한 끝에 전투중지와 수원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어 18일에는 국민당 정부에 대해 일련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장학량의 배반행위는 몽고 관민 모두가 통분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하루 속히 장개석주석이 구출될 것을 바라고 있다. 우리의 군사행동을 몽고 민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이번의 흉변에 즈음하여 중앙 당국으로 하여금 역도 토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수원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지하는 바이다." 이 성명과 동시에 자진해서 군사행동을 중지했다. 궁지에 몰린 덕왕으로서는 안성맞춤의 기회였던 것이다. 중국측도 서안사건의 수습에 다급했던 터라 곧 수원군 지원을 위해 북상시켰던 군대를 남하시켜 서안으로 급히 이동시켰고 부작의도 현상 유지의 태세로 당분간 군사행동을 중지하기로 했다. 또한 관동군도 중앙의 의견을 따라 내몽고군을 원래의 위치로 이동시킨 후 왕영부대등 잡군을 해산시켰는데 이 무렵의 정세가 얼마나 복잡했는가는 내몽고사태의 최일선에서 있었던 다나까중좌가 노이로제에 걸려 대신 부또오가 몽고로 파견된 것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수원사건의 의미 이 수원사건은 표면상으로는 단순히 몽고에서 벌어진 국지분쟁에 지나지 않지만 이 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큰 것이었다. 첫째로 여태까지 화북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은 대개 일본군과 화북지방정권간의 문제로 그쳤었지만 이 시건에서는 장개석 휘하의 중앙군이 대거 북상하여 수원군을 지원할 태세를 취했었다는 점이다. 중앙군이 관동군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차하르성에 진출할 의도가 있었는가와 막상 충돌 위기시에 전투를 벌일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서안사건이라는 돌발상황이 그것을 회피시켜 준 것이다. 특히 중요거점인 백령묘를 상실한 내몽고군으로서는 체면상 그것의 탈환을 고집해야만 했었고 화북에의 진출을 꿈꾸는 관동군은 이에 가세하였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만일 서안사건이 없었다면 중일전쟁은 이미 이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둘째로 수원군의 백령묘 점령은 지금까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 국민에게 자신감과 신념을 불어넣어주는 효과를 나타냈다. 수원사건의 뉴스영화는 중국 전토에 상영되었는데 민중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환호성을 터트리며 그것을 보았고 장개석과 부작의의 사진이 화면에 나오면 모두 옷깃을 여미고 우레와 같은 박수로서 존경심을 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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