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카날 섬 해상에서 미일 양군의 강력한 해상세력이 정면충돌코스로 진입하고 있던 11월 11일, Evans Carlson중령이 지휘하는 제1해병사단의 제1침투대대가 헨더슨 비행장에서 50km쯤 떨어진 Aola에 상륙했습니다.
이 부대는 그 곳에서부터 헨더슨 비행장을 향하여 서쪽으로 전진하면서 그 중간에 있던 일본군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중간에는 마타니코우 강의 전투 당시 가와구찌 소장의 후임으로 일본군 주력의 우익을 지휘했던 쇼지 대좌가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1월 12일, 일본군 2개 중대와 교전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서쪽으로 진격한 침투대대는 12월 3일, 드디어 헨더슨 비행장이 보이는 고지에 도달하여 과달카날 섬의 동쪽을 소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동안 침투대대는 50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자신들은 전사 16명, 부상 18명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침투대대에게 쫓겨난 일본군들은 서남쪽으로 정글을 뚫고 퇴각하여 Austen산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12월 초에 아올라와 헨더슨 비행장의 중간에 있던 콜리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해병대의 다른 부대는 마타니코우 강을 건너 서서히 서진하여 그 곳에 있던 일본군의 주력을 서서히 압박하며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그동안에도 매일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하기는 했으나 예전처럼 수십대가 날아오는 일은 없어지고 한두대씩 날아와 고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고 달아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한편 과달카날 해전에서 패한 이후로 미군에게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뺏겨버린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 고립된 2만에 가까운 육상병력에게 보급을 하기 위하여 드럼통을 사용하는 궁여지책을 짜냈습니다.
즉 드럼통의 절반정도가 차도록(꽉 채우면 드럼통이 뜨질 못하니까) 쌀이나 의약품 등의 보급품을 싣고 밀폐한 다음 여러 개를 네트에 싸서 구축함에 싣고 구축함의 고속성능을 이용하여 야간에 과달카날 섬에 도착해서는 드럼통들을 미리 약속된 해면에 내려놓고 보트를 이용하여 네트에 연결된 줄을 해안에서 대기중이던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날이 새기 전에 돌아가면 해안의 일본군들이 열심히 잡아당겨서 수거하는 방식이었죠.
구축함이 급히 돌아가야 할 때면 해안의 일본군들이 직접 보트를 이용하거나 헤엄쳐서 네트에 연결된 줄을 끌어오기도 했습니다.
구축함 1척당 약 200개 정도의 드럼통을 수송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드럼통을 가득 실은 구축함은 중량 관계상 무장을 정규 무장시의 절반정도로 가볍게 해야만 했습니다.
미군은 일본군의 이런 보급방식을 조롱하여 '도꾜 익스프레스'와 별도로 '쥐수송'(rat transport)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일본군이 이런 쥐수송을 처음으로 시도하던 날인 11월 30일, 이를 저지하려던 압도적인 전력의 미군 해상부대와 정면으로 격돌한 해전이 바로 타사파롱가 해전이었습니다.
1942년 11월 29일 저녁, 상기한 쥐수송의 임무를 띠고 구축함 8척으로 편성된 다나까 라이조 소장 지휘하의 일본군제2구축함전단이 쇼틀랜드를 떠났습니다.
이들 중 다나까 소장의 기함인 구축함 나가나미와 다까나미는 정규무장을 하였지만 나머지 6척의 구축함들, 즉 가와까제, 스즈까제, 가게로, 오야시오, 구로시오, 마까나미는 각각 200개씩 합계 1,200개의 드럼통을 싣고있었고 따라서 무장은 정규무장의 절반 정도로 가볍게 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제2구축함전단의 출발 전날인 28일, 이미 미암호해독반에 걸려들었고 곧이어 연합군의 해안감시원들도 쇼틀랜드에 일본군 구축함이 집결중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한편 암호해독반과 연안감시원으로부터 동시에 보고를 받은 남태평양군 사령관 핼시 대장은 즉시 순양함 중심의 강력한 수상함대인 Carleton H. Wright소장 지휘하의 제67기동부대에게 명령하여 일본군을 저지하도록 했습니다.(핼시 제독은 그 동안의 전공과 그가 맡은 책임의 막중함이 인정되어 1942년 11월 26일자로 대장으로 진급해 있었죠.)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4척으로 편성된 제67기동부대는 원래 킨캐이드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항모기동부대를 지휘하던 킨캐이드 제독은 과달카날 해전이 끝난 후에 엔터프라이즈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입었던 손상을 완벽하게 수리하러 다시 누메아의 공창에 들어가 버리자 대신 순양함 중심의 제67기동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거죠. (엔터프라이즈는 12월 4일에야 수리를 마치고 전열에 복귀하게 됩니다.)
그동안 킨캐이드 제독은 핼시 제독의 명령을 받아 '도꾜 익스프레스'를 저지할 수 있는 야간전술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11월 27일에 완성한 그의 전술은 신형의 SG레이더 탑재함이 포함된 구축함 전대를 순양함들의 전면에 내세워 일본군의 구축함을 먼거리에서 발견한 다음, 치명적인 일본군 어뢰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순양함들이 일본구축함들과 12,000m이상의 거리를 두고 포격을 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선두의 구축함들도 역시 일본군 구축함들에게 어뢰공격을 가하게 되어 있었죠.
하지만 킨캐이드 제독은 그의 새로운 구상을 실전에서 적용해보지 못한 채 다음날인 11월 28일 갑자기 진주만으로 불려가서 북태평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던 Attu 섬과 Kiska 섬에 대한 탈환작전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67기동부대는 킨캐이드 제독의 부사령관이었던 라이트 제독이 사령관을 맡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트 제독은 킨캐이드 제독의 구상을 알고는 있었지만 부사령관으로서 자기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상을 실전에서 직접 실현해야할 사령관으로서는 준비할 시간이 너무 없었습니다.
즉 그는 제67기동부대의 사령관직을 맡은 바로 당일인 11월 28일 , 핼시 제독의 명령에 따라 누메아를 떠나서 과달카날 섬으로 출동해야 했던 거죠.
당시 제67기동부대는 수송선단 호위를 맡고 있던 구축함 Lamson과 Lardner가 가세하여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의 세력으로 이루어져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다나까 제독의 제2구축함전단에 비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일본 구축함들 중 6척은 보급용 드럼통을 운반하느라고 가벼운 무장만 한 상태였죠.
제67기동부대가 누메아를 떠나 북상하여 과달카날 섬의 동쪽으로부터 섬의 북안을 따라 아이언 바텀 사운드로 진입했을 때는 30일 오후, 이 때 미함대의 상공에 홀연히 나타난 일본군의 수상정찰기가 미함대를 발견하곤 다나까 제독에게 경보를 보냈습니다.
30일 밤, 10월부터 툴라기 섬에 기지를 두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미군의 어뢰정들과 서쪽에서 접근 중이라고 알려진 미국의 강력한 수상함대를 경계하면서 다나까 제독의 제2구축함전단은 사보 섬의 서남쪽을 돌아 아이언 바텀 사운드로 진입했습니다.
아이언 바텀 사운드에 진입하자 제2구축함전단은 사전계획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구축함 다까나미가 서쪽으로 나아가 미국함대의 접근을 감시하는 동안 다나까 제독의 기함인 구축함 나가나미는 제24구축함 전대 소속인 구축함 스즈까제와 가와까제를 호위하여 타사파롱가 해안의 동쪽에 있는 도마 해안(Doma Reef)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제15구축함전대 소속의 구축함 구로시오, 오야시오, 가게로와 제31구축함전대 소속의 구축함 마까나미 등 4척은 사또 대령의 지휘하에 타사파롱가 해안으로 향했습니다.
한편 과달카날 섬의 동쪽을 돌아 아이언 바텀 사운드에 진입한 미국의 제67기동부대는 선두에 신형 SG레이더를 장비한 구축함 Fletcher를 필두로 Perkins, Mauri, Drayton의 순서대로 서고 그 뒤 4,000m후방에 라이트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Minneapolis, New Orleans, Pensacola, 경순양함 Honolulu, 중순양함 Northampton, 그리고 누메아에서 출항하기 직전에 제67기동부대에 합류한 구축함 Lamson과 Lardner의 순으로 단종진을 형성하여 과달카날 섬의 북쪽해안을 따라 서진중이었습니다.
1942년 11월 30일 밤 11시 6분, 라이트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미네아폴리스의 레이더가 23,000m의 거리에서 두 척의 일본구축함을 포착했습니다.
바로 아군구축함들의 서쪽에서 미함대의 접근을 감시하고 있던 다까나미와 동료구축함들의 호송임무를 마치고 다까나미가 있는 곳으로 합류하러 가던 다나까 제독의 기함 나가나미가 레이더에 걸린 것이죠.
6분 후인 11시 13분, 이번에는 다까나미의 견시가 10,000m까지 접근한 미함대의 선두함정(플레처)을 발견하고 즉시 다나까 제독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때 도마 해안에서는 구축함 스즈까제와 가와까제가 네트에 싸인 드럼통을 해면에 투하하고 네트 끝에 달린 끈을 해안에 갖다주기 위하여 보트를 막 내리고 있던 중이었고, 사또 대령이 지휘하는 4척의 다른 구축함들은 목적지인 타사파롱가 해안을 향하여 30노트의 속도로 항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까나미의 보고를 받은 다나까 제독은 휘하의 구축함들에게 즉시 모든 행동을 중지하고 자신이 있는 지점으로 집결할 것을 명했습니다.
다시 3분 후인 11시 16분, 이번에는 미함대의 선두에 선 구축함 플레처가 자신의 좌현 7,000m거리에서 다까나미를 포착했습니다.
플레처의 함장 Cole중령은 즉시 라이트 제독에게 어뢰발사허가를 요청했습니다.
라이트 제독이 아직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그 요청을 거부하자 콜 중령은 거리는 충분히 가깝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5분 후인 11시 21분, 콜 중령이 다시 어뢰발사허가를 요청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라이트 제독이 망설이면서 시간을 끌자 콜 중령은 자신의 독단으로 다까나미에게 어뢰를 발사해버리고는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그 어뢰는 다 빗나가고 말았죠.)
그러자 라이트 제독은 자신이 너무 망설이다가 일본구축함들에게 어뢰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미함대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여유를 주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휘하함대에 포격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11시 21분, 기함 미네아폴리스가 구축함 다까나미에게 포격을 개시한 것을 신호탄으로 미함대의 모든 함정이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과는 달리 야간전투에서도 무섬광화약이 아닌 일반화약을 사용하여 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일본구축함에서는 북동쪽에서 일렬로 나란히 서서 포격을 가하는 미군의 순양함군들이 아주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다나까 제독은 급히 모여든 자신의 휘하구축함들에게 차례로 미함대에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일본구축함들은 비오듯이 쏟아붓는 미함대의 포화를 뚫고 한 척씩 차례로 북동쪽으로 나아가 미함대에 접근하여 미순양함들의 발사섬광을 목표로 어뢰를 발사하고는 남서쪽으로 후퇴했습니다.
이때 라이트 제독은 휘하함대에게 어뢰를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구축함으로서는 표적을 조준하기가 더 용이했죠.
이 때 일본군은 총 8회에 걸쳐 47발의 어뢰를 발사, 그 중 6발을 4척의 미국중순양함들에게 명중시켰습니다.
썩 뛰어난 명중률이라 하기는 어려웠지만 전투의 승부를 가르는데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라이트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미네아폴리스는 9번째 일제사격을 마친 직후, 선수에 두 발의 어뢰를 맞았습니다.
순식간에 선수가 날아가 버리고 화염에 휩싸인 미네아폴리스는 11번째 일제사격을 마치고는 전투불능상태에 빠졌습니다.
미네아폴리스의 바로 뒤에서 항진하고 있던 중순양함 뉴 올리언즈는 미네아폴리스가 어뢰를 맞은지 바로 30초 후 전방 화약고에 한 발의 어뢰를 맞아 선수와 1번 포탑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뉴 올리언즈의 뒤에 있던 중순양함 펜사콜라는 두 척의 순양함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보자 좌측으로 선회하여 일본군구축함들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동은 불타는 아군 순양함들을 배경으로 자신의 실루엣을 일본군에게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펜사콜라가 다시 우측으로 선회하여 서북침로를 잡은 직후, 1발의 어뢰가 좌현 중앙 연료탱크에 명중하여 불타는 중유가 선체를 뒤덮었습니다.
펜사콜라를 따라가던 경순양함 호놀룰루는 현명하게도 우측으로 변침하여 불타는 아군 중순양함들의 배후에 숨음으로써 미국 순양함중 유일하게 일본군의 어뢰를 모면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불타고 있는 아군 순양함 때문에 시야가 막혀 11시 36분에 일본군에 대한 포격을 중단해야 했죠.
미군 순양함 중 맨 뒤에 있던 노샘프턴은 재수가 없었습니다.
앞서가던 호놀룰루를 따라 오른쪽으로 변침했던 노샘프턴은 아군의 배후에서 숨어있던 호놀룰루와는 달리 불타는 동료 순양함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포격이 어려워지자 서북침로를 계속 유지하면서 항진하여 선두에서 불타고 있는 미네아폴리스의 앞쪽으로 나섰습니다.
바로 그 때 노샘프턴의 견시가 함의 왼쪽으로부터 다가오고 있는 두 발의 어뢰를 발견했습니다.
노샘프턴은 이 어뢰들을 피하려고 침로를 왼쪽으로 최대한 꺾었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11시 48분, 일본구축함 가와까제가 발사한 어뢰 중 두 발이 노샘프턴의 좌현에 명중했습니다.
두 발의 어뢰 중 뒤쪽에 명중한 어뢰는 노샘프턴의 가장 오른쪽 스크류를 제외한 3개의 스크류를 날려버림으로써 노샘프턴은 순식간에 침로를 잃고 왼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좌현 중앙에 명중한 어뢰는 연료탱크를 파괴하여 노샘프턴 주변의 해상은 부서진 연료탱크에서 새어나온 중유의 불길로 대낮같이 타올랐고 이 불길속에서 5인치 포의 포탄들이 유폭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체는 순식간에 좌측으로 21도나 기울었습니다.
노샘프턴의 함장인 Kidd대령은 승무원들에게 퇴함 명령을 내려 구축함 플레처와 드레이턴으로 옮겨타도록 했으나 그래도 함을 포기하지 않고 손상관리반과 함께 함에 남아 화재진압과 응급처치를 진두지휘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인 31일 새벽 2시, 소화호스의 수압이 0으로 떨어져버려 화재를 진압할 방법이 없어져 버렸고, 함체의 기울기는 무려 36도에 달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키드 대령은 결국 함을 포기, 남아있던 전 병력에게 퇴함명령을 내렸고 드디어 새벽 3시 4분, 노샘프턴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노샘프턴에 어뢰가 명중하기 4분전인 30일 오후 11시 44분, 다나까 제독은 휘하의 구축함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구축함 다까나미를 제외한 7척의 구축함들은 우현쪽으로 불타는 적의 순양함들과 생존자 구조에 여념이 없는 구축함들을 뒤로 바라보며 신속히 북상, 퇴각했습니다.
일본함대의 가장 우측에서 미국함대의 접근을 감시하던 다까나미는 미함대 전체의 화력인 36문의 8인치 포와 15문의 6인치 포, 그리고 수많은 5인치 포들의 집중포격의 표적이 되어 치명적 피해를 입고 31일 새벽 1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까나미의 희생으로 일본함대의 다른 구축함들은 모두 무사할 수 있었죠.
일본군의 어뢰를 피하여 살아남았던 미군의 구축함들은 11시 37분, 드레이턴이 일본구축함들에게 어뢰의 일제사격을 가한 것을 마지막으로 일본군에 대한 추격을 단념하고 아군의 생존자에 대한 구조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로써 타사파롱가 해전은 끝났습니다.
이 해전은 미군측이 나중에 기록한대로 미해군에게는 그야말로 '찌르는 듯이 아픈 패배' 였습니다.
미해군의 제67기동부대는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이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우세한 세력에다가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접촉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8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지고 게다가 그 중 6척은 정규무장마저 갖추지 못한 상태의 일본군 제2구축함전단에게 중순양함 1척이 격침당하고 나머지 3척이 9개월에서 1년간의 수리를 요하는 대손상을 입었습니다.
반면 일본해군의 피해라고는 구축함 다까나미 한 척이 격침당한 것과 1,200개의 드럼통 중 800개를 보급하지 못했다는 것뿐이었죠.
타사파롱가 해전의 교훈으로서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니미츠 제독은 'Training, training, more training'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사실 당시 미함대 승무원들의 훈련수준은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이 해전에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지휘관의 상황판단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전사가들은 플레처의 콜 중령이 어뢰발사허가를 요청했을 때 라이트 제독이 즉시 그것을 허락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즉 선제공격이 늦어짐으로써 일본함대가 충분히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가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문제는 중순양함들의 8인치 포였는데 이 포들은 연사속도가 느려서 야간에 잽싸게 움직이는 일본구축함들을 맞추는 데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큰 기대를 모았던 SG레이더도 아직까지 정확한 레이더 사격을 유도하기에는 허상이 너무 많이 생겨서 실용성이 떨어졌습니다.(예를 들어 포탄이 물에 낙하할 때 생기는 물보라 등도 전부 다 화면에 잡혔다고 합니다.)
반면 일본군의 승리 요인은 우수한 승무원과 고성능의 어뢰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다까나미의 견시는 SG레이더를 장비한 플레처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플레처를 발견함으로써 다나까 제독에게 휘하의 구축함들을 모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견시들은 비록 야간이라도 안개가 끼거나 날이 굉장히 흐리지 않은 경우에는 레이더를 장비한 같은 급의 미함정보다 먼저 상대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군의 구축함들은 압도적인 미함대의 포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과감하게 미함대에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가하는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승리의 마지막 요인은 역시 일본군이 보유한 24인치 어뢰의 놀라운 성능이었죠.
순수한 산소를 연료로 사용하여 탄두에 500kg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폭약을 싣고도 48노트라는 엄청난 속도로 20km, 36노트의 속도로는 무려 40km를 달릴 수 있는 일본군의 93식 24인치 어뢰는 당시 전세계의 어떤 어뢰와 비교해서도 압도적인 고성능을 자랑하고 있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이 어뢰를 능가하는 어뢰는 추축국과 연합국 측을 막론하고 끝내 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우수한 승무원들과 고성능의 어뢰를 장비한 일본군 수상함정들과의 야간전투는 미군의 레이더조준사격기술이 현저히 향상되어 어뢰의 명중률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당한 장거리에서 정확한 선제포격을 가할 수 있게되는 전쟁후반기에 들어서기까지 미해군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타사파롱가 해전의 의의에 대하여 미국측의 기록은 '이미 다 이겨놓은 승부에서 미해군이 방심하다가 일본해군에게 뜻밖에 허를 찔려 망신 한 번 당한 전투' 라는 식으로 고의로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당시 미해군은 이 해전의 결과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따라서 이후의 미해군의 전략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타사파롱가 해전 이후로는 미군이 구축함을 이용한 일본군의 소위 '쥐수송'을 강력한 수상함대를 이용하여 저지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는 것이었죠.
사실 타사파롱가 해전 당시에 이미 남태평양 함대는 순양함 중심의 제67기동부대 이외에도 고속전함 워싱턴, Indiana, 노스캐롤라이나 중심의 협력부대, 구형전함인 Maryland, Colorado중심의 예비부대 등 5척의 전함을 포함하여 아직까지도 막강한 수상함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형편없이 열세인 일본군의 구축함들을 만만하게 보고 덥석 달려들었다가 크게 혼쭐이 난 미해군은 이후로는 쥐수송을 툴라기에 기지를 둔 어뢰정들과 커크터스 항공대의 항공기만을 이용하여 견제했을 뿐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강력한 수상함대를 이용하여 일본군의 구축함 수송을 저지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943년 2월초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철수할 때 미군은 3차례에 걸쳐 여러 척의 일본군 구축함들이 밤사이에 과달카날 섬을 오가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감히 수상함대를 내보내 그 앞을 가로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일본군이 또다른 대공세를 펼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여 과달카날 섬의 지상군들은 참호를 파느라 정신 없었죠.
그 덕분에 1만명이 넘는 일본군이 무사히 과달카날 섬으로부터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즉 다나까 제독은 1942년 11월 30일 밤에 벌어진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미함대를 상대로 싸워 승리함으로써 야간전투에서는 아직도 일본해군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미해군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켰고 그 결과로 2개월 후에 무려 1만명이 넘는 일본군들의 귀중한 생명을 구했다고 할 수 있겠죠.
3줄 요약
1. 미해군 : 중순양함 함대 : 라이트 제독한테 일개 구축함 함장 하나가 조난 개기고 쏴버렸으나 다 빗나감
2. 일해군 : 구축함 수송대 : 미친척 근접해서 어뢰 난사
3. 순양함 1척 개관광, 3척은 쌍코피 터지게 얻어맞고 GG
결론
개기지 말자
개념은 안드로메다 개관광 보낸 양키 해군 윗대가리들도 있었3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