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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재군비와 구군 세력 내부의 관계에 대한 질문

HENRY 2005.12.12 16:15:43
조회 1162 추천 0 댓글 4


짤방은 아리스에 세이죠 중장 (전 참모본부 제2부장) 전에 전 후 일본 재군비의 배경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 데 여기서 몇 가지 의문나는 점에 대해 질문 하나 드립니다. 직접적으로 2차 세계 대전에 관련된 사항은 아니지만 대전 당시 일본 구군 인물에 관련된 건이기에 이 글 일부를 올리니 여러분들의 통찰과 지적 부탁드립니다 계급 직책은 패전 당시 기준입니다 (일부 인명은 읽는법을 몰라서 한자만 적었습니다. 관심있는 분의 지적 부탁드립니다) ------------------------------------------------------------------------- 전 후 미국은 비군사화라는 목적 하에 일본의 군대를 완전히 해체시켰고 전범재판과 공직추방지정을 통해 군국주의 색채를 제거내려는 정책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미군은 군사상 필요에서 부분적으로 일부 기능을 유지시키긴 하였고 , 군 조직이 해체된 상황에서도 이러한 기능과 여기에 관계된 구 군 간부 군인들은 미군에 협력하는 Agent 구실을 했고 이들은 군의 묵인 하에 각종 기관들을 구성하여 미군에 협력함과 동시에 장래의 재군비를 대비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군 협력은 미군이 일본에 진주할 당시부터 이어지며 패전 직후의 점령군 연락기관으로 그 연원을 올라갈 수 있습니다 . 항복 선언 이후 일본은 항복의 조건 수용과 미군 진주 관련 사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가와베 토라지로( 河辺虎四郎) 참모차장을 전권위원으로 한 항복 사절단을 마닐라에 파견하였고 미군 도착에 즈음하여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대본영 아츠키 위원회가 창설되어 위원장에 참모본부 2부장(정보)었던 아리스에 세이조(有末 精三) 중장이 부위원장에 가마타 (鎌田 銓一)중장(제2 야전 철도 사령관)이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군이 요코하마에 진주함에 따라 여기에 관련된 사항을 처리하기 위하여 대본영 요코하마 위원회가 창설되어 육군위원에 아리스에가 해군위원에 나카무라 가츠헤이 소장(中村勝平 해군성 항공본부 총무부장 )이 각각 임명되었습니다 . 이 들 기관은 패전 후 설치된 종전연락 요코하마사무국과 더불어 지역 내 점령군과의 연락기관이 되어 점령군의 지시를 일본 정,군부에 전달 중개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후 군 조직이 해체된 이후에는 이를 모체로 아리스에 기관(有末機關) , 나카무라 기관(中村機關) , 가마타 기관(鎌田機關)과 같은 미군 협력기관들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기관들은 미군과의 연락 사무 이외에도 구 군의 편제 병력 장비에 관한 사항 , 미군이 필요로 하는 지역 지리 지리 관계 사안 그리고 대 중 대소 정보 등을 집약하여 미구에 제공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으로 아리스에 기관을 보면 아리스에 중장을 책임자로 하여 야마모토 대좌 (山本新 전 참모본부 6과장 구미과장) 마츠다 마사오 대좌 (松田正雄 전 참모본부 1과 참모) 浦茂 중좌 치시마 대좌 (千島治雄 전 나가노 학교 실험대장) 등 10 여명의 육군 측 인사들과 나카무라 소장을 비롯한 10여명의 해군 장교들 그외 사무 지원 업무 담당 10여명으로 구성되어 당시 동향에 비추어 미군의 대소 대 극동지역 정보소요를 부응하여 여기에 관련된 구 군 정보 자료들을 정리 지약하여 미군에 제공하였고 나카무라 소장은 또 한 주로 해군 장교들로 구성된 나카무라 기관을 만들어서 해군 방면에서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기관들은 미군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정,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쳣으며 이를 배경으로 각종 의혹 사건들의 흑막으로 떠올랐으며 특히 구 군 세력 관계나 처우에 있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이들 기관은 구 군 고급장교들이 모여서 장래를 대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기도 하였으며 아리스에 중장은 아리스에 기관과 별도로 구 군 고급장교들이 주축이 된 다른 모임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들이 일본우선 빌딩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빌딩 그룹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이들 그룹은 아리스에 중장을 비롯하여 전 참모차장 가와베 중장, 요시나카 와타루 중장 (芳仲和太郞 전 서부군 참모장 패전 당시 86사단장) , 사와모토 소장 ( 시종무관) 야마자키(山崎) 소장 , 橫內 대좌 , 히로오카 대좌(平岡 전 랭군 기관장 ) 그외 두 세명의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며 정보제공 전술자문 역할을 수행했으며 미군 측에서 파견된 연락관을 통해 미군 G2 와 밀접한 관게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육 해군성이 폐지된 이후 해외 파견 구인 귀환 제대 활동에 관계된 복원 업무를 위해 폐지된 육 해군성의 총무 인사 자료 부서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복원기구 (제 1복원성은 육군성 제 2복원성은 해군성을 모체로 하였으며 46년부터 복원청으로 축소되어 산하에 제 1복원국 제2복원국을 두었음) 역시 군의 정보 자료 전술 지도 지지를 집약 정리하여 미군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1복원국장에는 전 참모본부 제1부장(작전부)이었던 미야자키 (宮崎周一)소장이 제2복원국장에는 제10항공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마에다 미노루(前田 稔) 중장이 임명되었는 데 미야자키는 중국서 특무기관을 지휘하였으며 마에다는 해군 군령부 제3부장(정보부) .대본영 해군부 보도부장을 지냈고 소련 중국 주재 무관을 역임한 대소 정보 전문가였습니다 이 복원기구들은 미군에 협력하는 한 편 육해군 중견장교들이 모여 구군의 각종 전술 작전 인사 자료들을 집약 보존함로써 군의 맥을 보존하고 아울러 구 군인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제1복원국에는 구 참모본부 작전부를 기반으로 사실조사부를 설치하여여 전사를 비로한 각종 작전 전술 관련 자료 를 정리 보존하고 장교 명부와 같은 인사 자료를 정리 보존하여 군의 맥을 유지하려는 작업을 했습니다 . 그 외 구 군 장교들은 각종 협회 연락회 등의 각종 조직을 만들어 서로 연락을 유지하고 구성원들의 이탈을 방지하여 군 내의 질서체계를 보존하려고 하였고 여기에 연락 특무기관이나 복원 부서들은 이를 지원하고 여기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구 군인세력들의 대미협력 공작에 과한 내용은 주로 다음 책들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黑の 機關 (森中 永), 謨略列島(吉原公一郞) , 秘密のファイル (春名 幹男) ) 이 들 기관 관계자들을 비롯한 구 군 세력이 제공한 정보는 주로 일본이 소련을 적국으로 상정한 이래 그동안 오랫동안 축적된 소련 군사 동향, 내부 정세, 작전 상정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지리,지지 사항,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국경 지역에서의 군사적 충돌에 대한 구체적 경험 , 소련을 대상으로 한 특무기관 정보, 대소 교란 활동 사항 정보망 과 같은 대소 정보와 현지에서 전쟁과 각종 공작을 통해 축적된 중국 정보, 내부 공작망등이었고 미군은 이 들 이외에도 전시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던 각종 특무기관, 우익 인사 대륙낭인 등을 AGENT로 고용하여 이들의 경험과 인맥을 이용한 각종 공작 침투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다룰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배경하에서 구군 관계자와 그 세력들이 나름대로 맥은 유지하고 이를 보존하려고 하고 장래 재군비를 구상하기도 했지만 , 이를 미국이 인지했다거나 혹은 당시 공식적 정책과 배치되게 이를 지원하고 고무헀었는 지에 대한 여부에 대해서는 불분명합니다. 일부 인맥상 연결은 있었을 런지는 몰라도 적어도 점령 초기 정책은 비군사화라는 기조를 관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조직 차원으로써의 군 자체는 해체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 요소를 잔존시켜 미군이 이용한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보다 가깝지 않을 가 생각합니다 . 단 비군사화와 군의 해체 작업이 마무리된 후 자유화에서 기지노선으로의 공식적 정책 전환이 있기 전 윌로비 하의 G 2같은 점령군 내의 일부 세력이 이보다 먼저 재군비 구상에 착수하고 이러한 연락 복원 기관을 통해 형성된 인맥들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은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점령초기에는 미군 측이 이들 미군 협력 기관들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재군비 계획을 조기에 추진햇다기 보다는 종래 일본군이 모아왓던 정보 자료 기록 문서들을 취합하여 활용하고 군의 해체로 신분이 불안정해진 구 군 관계자 참모장교들을 모아 그들에게 장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일종의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947년 맥아더 전사 편찬을 공식적 목적으로 내걸고 GHQ에 창설된 역사과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역사과는 G2산하에 설립되어 윌로비의 지도 하에 전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 정리와 자문 증언 등을 명목으로 많은 구 군 관계자 참모들이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역사과의 창설은 구 군 장교들을 공식조직의 일원으로 흡수하므로서 보다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활동공간의 여지를 넓혀준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당시 역사과에 구 군 장장교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일본내 상황이나 다른 연합국의 비난 가능성을 우려하여 비밀로 붙여졌지만 이 들에게 공식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로 보입니다). 역사과의 공식적인 책임자는 도쿄대 교수인 荒木光太郞가 맡았지만 얼굴마담에 가까운 존재였고 실제적으로는 구 군 출신들이 이를 주도하였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역사과 내의 구 군 관계자들은 상당수가 연락 .정보협력 기관이나 복원 부서 출신으로 그동안 미군과 관계를 맺어온 이들이었습니다.이 들 기관 관련자 들 중 마닐라에 파견된 항복 사절단원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가와베 중장 같은 경우는 항복 사절단으로 가서 윌로비 소장과 대면한게 인연이 되어 미군진주 후 상당히 친밀한 사이가 되었는 데 독일 주재 무관을 역임한 경력이 있어 독일 이민 출신인 윌로비와 독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 참고- 마닐라 파견 항복 사절단 구성원 단장 (전권위원) 가와베 도라지로 (河辺虎四郎) 중장 참모차장 오카지키 가츠오 (岡崎勝男) 외무성 조사국장    아마노 마사이치 (天野正一) 소장 참모본부 (제1부) 제2과장 (작전) 요코하마 이치로 (横山一郎) 소장 해군 군령부  溝田主一 해군촉탁  海軍嘱託 야마모토 (山本新 ) 대좌 참모본부 (제2부) 제6과장 (구미정보 담당)   오마에 (大前敏一) 대좌 해군 군령부 (제1부) 제1과장 (작전) 요시다 에이죠 (吉田英三) 대좌 해군성 군무국 제3과장(함선 보존 정비 담당)  스기타 (杉田主馬) 해군성 서기관 유자와(湯川盛夫) 외무성 직원   寺井義守 중좌 해군 군령부 1과 부원   마츠다 마사오(松田正雄) 중좌 참모본부 제1과 참모 南清志 중좌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 자재반장 고쿠라 (高倉盛雄) 중좌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 부원 오타케 사다오(大竹貞雄 )소위 참모본부 제2부 소속. 통역   다케우치(竹内春海) 소위 참모본부 제2부 소속. 통역 출처 -横山一郎少将回顧録 발췌 역사과의 주요 인물들을 보면 가와베 중장이 실질적인 책임자였고 아리스에 중장은 고문 상담역 으로 참여하였으며, 도조 히데키의 비서관을 지냈으며 전쟁 중 참모본부 1과장 (작전과장)을 역임하면서 전쟁지휘의 중추에서 실무를 담당했고 중국전선에서 귀국한 후 제1복원국 사실조사부장.자료정리부장에 임명된 핫토리 다쿠시로(服部卓四郎) 대좌가 주임계획자 역을 맡았고 , 나카무라 소장 , 오마에 대좌 (大前敏一해군 군령부 1과(작전)과장) 이 주스탭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 외에 육군측에서는 대본영 작전 참모를 지낸 스기타(衫田一次 ) 대좌( 패전 당시는 17방면군 참모. 후 자위대 창설 이후 육상막료장 역임) 原四郞 중좌 후지와라 기관의 책임자로 남방 등지에서 특무공작을 전개했던 후지와라 (藤原岩市) 중좌(패전시 57군 참모) 다나카 (田中兼五郞) 중좌 해군 쪽에서는 大井驚 대좌 千早正隆 중좌를 비롯한 구 육해군 장교들을 포함하여 역사과에는 약 20여명 정도의 구 군 군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식적 임무는 전사 편찬이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각종 전투 전술 기록 자료들을 모아 이를 비교.분석하고 그외 각종 정세 동향이나 관련 정보 보고 인사 관련 사항들도 취합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는 자연히 전술 작전 편졔 연구로 이어졌고 이는 미군에 전술적 교훈 조언을 제공해줌과 더불어 군 재건 구상의 토대를 제공하는 바탕으로 이어지기도 헀습니다. 다만 역사과 작업에 종사했던 이들의 말에 따르면 역사과 활동에 있어서 전사 편찬 자료 정리 연구에 대한 지시만 받았고 그 외의 다른 임무는 수행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다수라서 역사과 자체가 본격적으로 재군비 연구를 추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같습니다. ( 단 일부 증언에 따르면 핫토리를 중심으로 하여 역사과 내 몇몇 인물의 경우 특명을 부여받아 별도의 임무에 종사했다는 말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별도의 조직과 루트가 관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역사과 역시 그 자체가 재군비의 추진기관이엇다기 보다는 오히려 각 분야에서 산개되어 있던 구 군의 정보 자료들을 정리.집약하고 향후를 대비하기 위한 발판을 제공한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 역사과 와는 별도로 G2 산하에 지리과도 창설되어 참모본부의 중국통이었던 야마자키 시게사부로(山崎重三郞 )중좌가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 지리과에서는 야마자키를 중심으로 하여 수십명의 구 군 장교들이 모여서 주로 중국 만주 소련 그외 극동 지역서의 구 군 병요 지지나 전략지도 각종 작전 환경 상황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여 미군에 제공하여 미군이 장래 이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전개할 경우를 대비하는데 협력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미군에 협력하는 대가로 일부 구군인들은 신분을 보장받고 그 바탕에서 구군의 맥을 보존하였고 이는 미국의 대일 정책이 반공기지 노선 쪽으로 선회하고 그외 당시 정세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이 인원들을 주축으로 특무기관들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재군비 연구를 비롯하여 각종 특수 활동을 전개하는 기반이 됩니다 . 이러한 조직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와베(河辺) 기관과 핫토리 기관을 들 수 있습니다. 가와베 기관은 역사과의 작업이 일단락 된 무렵 48년 가와베 중장이 주축이 되어 G2직할 기구로 설립한 조직으로 군 고위 장성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이전의 미군 협력기관들보다 보다 큰 규모로 조직을 갖추고 정보 수집 군사 자문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가와베 중장 외에도 시모무라 사다무 대장( 下村 定 전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 . 마지막 육군대신) 아리스에 중장 , 요시나카  중장, 타츠미 에이지 중장 (辰巳英一전 주영무관 패전 당시 제3사단장) 들이 있었습니다 .이 기관의 구성원 중 특히 타츠미 중장은 참모본부 구미과장을 지낸 군내의 지미파로써 오랫동안 요시다 수상이 주영 대사 당시 주영 무관을 역임하면서 그와 친분을 쌓았고 중국 전선에서 귀국 후 요시다 수상의 군사 자문역을 하면서 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맡았고 요시다 수상의 군사 브레인으로써 향후 자위대 창설과 그 방향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 한 이 들 이외에도 사나다 소장(真田穣一郎 전 참모본부 작전부장 ,육군성 군무국장 패전 당시 제2총군 참모부장) 야마모토 시게이치로 소장( 山本重一郞 전 16군 참모장) 사사키 소장(佐々木勘之丞 전 나가노 학교 생도대장) 石戶勇一 대좌 (전 태원특무기관장)  사이고 쇼고 대좌 (西鄕從吾 전 대본영 16과장-독일 이탈리아 정보)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 . 이전의 협력기관들이 소수의 구군 장교들에 의한 자료 정리 수집 자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조직도 빈약했던 데 비해 가와베 기관은 전국에 걸쳐 하부조직을 두고 일본 전역에 대해 대공산당 정보 수집 구 군인 세력 동향 파악, 시베리아 억류 귀환병 조사를 실사혔고 그외 미군이 수집한 정보를 평가 분석해서 보고하였습니다. 그 외 가아베 기관은 미군에 대한 현장 작전 조언이나 전술 자문 같은 활동에도 깊숙히 관련되었으며-특히 이 기관이 강화조약이 맺어질 떄까지 존속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활동은 보다 실전적이고 구체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재군비 계획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 당시 이 기관의 하부조직을 보면 일본 전역을 홋카이도.토호쿠(北海道.東北), 칸토(關東), 킨키(近畿) ,시코쿠.쥬코쿠(四國.中國) ,규슈(九州) 5개 지구로 나누어서 각 기 지부를 두어 해당 지역 내의 정보를 수집하고 공산당 동향을 파악 하게 했습니다. 홋카이도의 경우에는 萩三郞 중장 ( 전 5방면군 참모장 . 삿포르복원국장)이 담당헀고 아오모리를 중심으로 한 토호쿠는 아리스에 중장이 맡았으며 야마구치를 중심으로 주코쿠 .시코쿠 지방은 고야 에쓰오  대좌 (甲谷悅雄 전 대본영 15과 전쟁지도과장 ) 가 담당하였으며 각 해당지역에 있어 구 군 특무관계자들을 모아 정보 수집을 진행했으며 그 규모 약 100여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외에도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구 군인이나 정보 특무 관계자들을 외곽 협력 스탭으로 운용했습니다 . 역사과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조직으로는 핫토리 기관이 있습니다 속칭 H 기관이라고- 엣찌♥가 아니에요!!- 불린 이 조직은 핫토리 대좌를 책임자로 하고 니시우라 스스무(西浦進) 아카마츠 사다오(赤松貞雄) 屈場一雄 井本熊男 대좌 를 비롯하여 역사과 출신의 原四郞 중좌 후지와라 (藤原岩市) 중좌(패전시 57군 참모) 다나카 (田中兼五郞) 중좌등이 참여하였고 그 구성원은 전국 각지에 걸쳐 6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사실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전사연구 기관으로 출발한 핫토리 기관은 태평양 전사를 편찬함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구 군 장교들를 연락 호출하여 집결시켜 G2 윌로비 장군의 지시와 후원 하에 재군비의 인적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조직될 군의 조직구성 체계 병력 규모 장비 등의 사항에 대한 구체적 시안을 작성해나갔습니다 (이러한 작업에 있어 핫토리 대좌가 복원국 시절 정리 취합하였던 복무기록을 비롯한 각종 인사 총무 관계 정보 자료들이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 이런 가운데 미군은 당시 양 기관이 별도로 재군비 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무렵 양자가 서로를 검토 심사케 하는 일종의 크로스 체크 시스템을 운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타츠미 중장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 예비대 초기 창설 계획 당시 핫토리 기관 측에서 작성한 경찰예비대 등용 구 군 장교 명단을 미군이 가와베 기관 측에 넘기면 타츠미 중장이 중심이 되어 여기에 대해 부적격자를 심사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반공의 방파제로써 일본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이에 따라 일본에 대한 미군주둔을 지속시키기로 하고 아울러 안보강화 조치의 일환으로 본의 재군비를 고려하게 되자 이러한 구 군 세력들의 구상이 실체화될 기회가 마련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당시 주일 미군 병력을 대거 한 국 전역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여기에 따르는 안보공백을 메꾸기위해 국내 치안을 담당할 세력으로 경찰 예비대가 창설되므로써 전후 재군비의 시발을 내딛게 됩니다. 경찰 예비대는 명목상 국내치안에 있어 경찰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조직으로 이야기되었지만 그 편제나 조직 운영 장비면에서 볼 때 하나의 군대였으며 구 군인 세력들은 여기에서 주도권을 잡고 자신들의 재군비 구상을 반영하려고 하였습니다. 경찰예비대 조직과 편제에 있어 G2는 핫토리 대좌에 예비대 간부 인선과 편성을 주도케 헀고 이예 따라 구 군 장교중 예비대 참가자 명부가 작성되었으며 G 2를 중심으로 핫토리 대좌를 경찰예비대의 책임자로 한다는 구상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GHQ내에서 민주 개혁 성향을 대변하고 있는 GS (민정국)은 구 군인 채용에 대해 반발하였으며 요시다 수상도 구 군 세력이 경찰예비대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심한 거부감을 보였고 특히 도조의 비서관이었던 핫토리 대좌에 강한 반발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쟁 중 종전공작으로 일시 수감되기도 했던 요시다 수상의 도조에 대한 감정상 문제도 개입되었지만 요시다가 당시 일본의 상황에서 재군비에 상당히 회의적었다는 점도 작용했습니다 . G2의 후원 하에 핫토리 대좌를 중심으로 하는 예비대 편성 계획이 진행되던 중 다른 한 편에선 당시 요시다 수상과 오카자키 관방장관은 타츠미 중장을 비롯하여 구군 장군이었던 시모무라 대장(전 육군대신), 미야자키  중장( 제1복원국장 ) 이이무라 중장(飯村譲 패전 당시 동경방위군 사령관) 야마모토 소장( 전 16군 참모장) , 우에츠키 요시오 중장 ( 上月良夫. 제17군관구 사령관 조선군 사령관 ) 에게 예비대 창설에 대한 의견을 구하였고 이 들은 도조의 비서관과 참모본부 작전과장을 역임하며 전쟁 수행에서 실무책임자로 패전에 책임이 있는 핫토리 대좌가 경찰 예비대 창설에 중심적 인물이 된다는 데 대해 강한 반발을 나타넀습니다. 이들의 의견은 반군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구 군인 출신들이 주축이 된 예비대 창설은 국민들의 우려와 반발을 불러올 거라는 견해와 함께 민정국에 전달되어 GHQ 내부에서 G2와 GS간의 의견논의를 거친 후 예비대 창설에서 구 군인 세력을 배제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핫토리 대좌의 구상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들 장관급 인사들이 핫토리 대좌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인 것은 핫초리 대좌에 패전 책임이 있다는 인식과 함께 재군비에 대한 노선 차이도 작용하지 않았을 까 여겨집니다 구 군 본류에 속한 강경파로 미국의 후원 하에 구 군에 버금가는 전력을 갖추자는 즉시적 재군비 노선을 주장한 핫토리 대좌와는 달리 타츠미 중장은 구군에서도 방계로 주영 무관을 역임한 지영파로써 온건성향으로 점진적 재군비론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선은 요시다 수상과도 통하는 점도 있어 정치적으로도 호응을 얻을 수 있을 던 것으로 보여집니다(핫토리 기관과 가와베 기관 사이에 있어 재군비에 대한 태도 노선 계획안 등이 어떤 관점에서 작성되었고 그 들의 노선은 어떤 것이며 양자 사이의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 지 대해서는 자료부족으로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핫토리 대좌의 중심 역할에 반대했던 장관 그룹들 중 가와베 기관과 연계된 인물이 많고 핫토리 기관이 주로 소장파 좌관급들로 구성된 데 반하여 가와베 기관은 장관급들이 주축을 이웠다는게 양 자 사이에 일종의 견제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 --------------------------------------------------------------------------------- 위의 글에서는 이렇게 썼는 데 타츠미를 중심으로 하는 가와베 -타츠미 계열의 장관 급과 핫토리를 중심으로 하는 좌관 세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뉘앙스를 다르게 풍겨 확실히 판단을 내리기 어렵더군요. 일부 자료는 견제 대립적 관계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 다른 쪽에서는- 이런 견해는 史錄 日本再軍備에서 표햔되업집니다_ 협력적 관계에 가까웠다는 견해도 있고. 또 협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건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이라고 하는 쪽도 있더군요. 여기에다 각 세력들의 재군비 구상의 형태라든지 노선의 문제를 결부시키면 더욱 복잡해지는 데 위에서는 타츠미를 축으로 한 장관급 (가와베 기관 연계자)들이 점진적 노선을, 핫토리를 주축으로 한 세력이 급속한 재군비를 주장헀다는 쪾에 주안점을 두고 쓰낀 헀지만 양 세력간의 재군비 구상의 방식과 규모 방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는 지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저렇게 구분될 수 있을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역시 애매하더군요. 더구나 카와베 기관의 구성원이었던 사나다 소장 같은 경우는 상당한 강경파로 알려져 있으니 저런 구분에 맞을 것 같지는 않으니...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 세력을 각기 구 군 본류와 방류의 대립으로 본다고 하면  이는 타츠미 중장과 핫토리 대좌 같은 경우는 가능하지만 , 장관급 그룹의 일원인 가와베나 시다무라 같은 경우는 참모본부 작전과장이나 제1부장을 역임한 군의 주류이므로 이또한 어렵더군요. 전후 각 구군 세력들내부 상황 그리고 이들이 추구한 재군비 노선과 방향에 어떤 것이 있었고 이들 세력들간의 각 관계는 어떠헀는 지 , 여기 계신 분들의 고견과 통찰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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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주위 눈치 안 보고(어쩌면 눈치 없이) MZ식 '직설 화법' 날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9 - -
78476 위구르,티베트,내몽골같은 자치구가 다 독립한상태면 중국 어떻게될까? [6] ㅇㅇ(124.28) 10.12.22 94 0
78474 이....이것은 움직이는 요새로다!! [8] Michael wittman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104 0
78473 2차세계대전을 빨리 끝내도록 도와준 사람중에 [4] 해태(222.113) 10.12.22 79 0
78472 토이스타에 STG44 다시 나왔던데 [5] 해태(222.113) 10.12.22 313 0
78471 근데 일본군들 차고다니던 일본도 말인데요 [10] Rur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147 0
78468 히틀러가 독일 패망시키고 완전 삽질만 한거루 알지만.... [12] 아달정종(112.166) 10.12.22 143 0
78467 이탈리아때문에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했다고 드립치는사람들이많은데 [55] Maestr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230 0
78466 음 질문이에욤 [2] 늅늅늅뉴비(116.43) 10.12.22 27 0
78465 대제국 왜 다른 나라는 국명하고 국기 바꿔놧는데. [5] (125.186) 10.12.22 132 0
78464 대제국에 관한 사실 [1] ㅁㄴㄷㄹ(14.45) 10.12.22 64 0
78463 대제국 트레일러 [9] Erich von Manstei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104 0
78461 국내 전혀 역사의식이나 비판없는 십더쿠들.. [5] ㅁㄴㅁ(125.186) 10.12.22 59 0
78460 오랫만에 무솔리니 자료 찾아 봤는데.. [2] ㅁㄴㄷㄹ(14.45) 10.12.22 249 0
78458 근데 독일군 사병 군복 코트는 밀리터리룩으도 입어도 댈듯 [2] (125.186) 10.12.22 149 0
78457 2차대전 독일군복을 접할때 주의할 점 [4] 하인부르크(121.191) 10.12.22 192 0
78456 슈빔바겐 케텐크라트 큐벨바겐 실제 기동 [2] 개복치(71.79) 10.12.22 171 0
78455 PPSH_41 숨겨진 기능 발견되다!!! [8] Michael wittman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100 0
78454 판터 전차 기동 (WTD 41) [1] 개복치(71.79) 10.12.22 81 0
78453 대제국에 대해 정보를 더 얻었음 [4]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94 0
78452 (모형 재탕 토갤) 바스토뉴 익스프레스 [2] 개복치(71.79) 10.12.22 67 0
78451 2대겔 형들이생각이궁금해서 [20] 국보급빵돌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49 0
78450 던 오브 빅토리라는 거 너님들 앎? [10]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344 0
78444 유럽 최강국 순위 [13] 위대한 터키(115.21) 10.12.22 102 0
78443 위대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다 [8] 위대한 터키(115.21) 10.12.22 58 0
78441 컴퍼니오브히어로즈 이겜 대박이네.. [15] 힝힝(110.13) 10.12.22 179 0
78439 2차대전떄는 사람뿐만아니라 [2] 토텐코프(180.228) 10.12.22 62 0
78437 대제국 무솔리니 캐릭터 설명.jpg [8] 어억(125.137) 10.12.22 217 0
78436 대제국에 록펠러,로스차일드도 나오네... jpg [10] 어억(125.137) 10.12.22 201 0
78434 천조국의 전통 [1] Michael wittman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59 0
78433 대제국 보고 눈 베리신 분들을 위한 정화짤. [2] ㅋㅋ_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126 0
78432 대제국의 무솔리니.jpg [6] ㅁㄴㄹ(125.137) 10.12.22 286 0
78431 독일 공군이 망한게 [3] 요하임 파이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2 113 0
78430 [한국근현대사] 해방정국_민심_여론조사.jpg [3] Eplos(121.167) 10.12.22 63 0
78429 독일이 폴란드-프랑스까지만 먹고 쇼부보면안됨? [6] ㅇㅇ(124.28) 10.12.22 76 0
78428 그런데 왜 2대갤 글이 싹 밀리면 8월 24일만 나옴? / 2대야그有 [3] 에른스트린데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1 51 0
78427 우주공간을 접으면 리콜된다는데 [3] 일본해병대(222.239) 10.12.21 65 0
78425 랜드리스 대금결제 소련은 먹튀였네? [10] 그런거안키운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1 357 0
78424 세계사광 카페에 다니는 에리카는 반공카페에 다니고 있네요. [11] 하인부르크(121.191) 10.12.21 126 0
78423 이탈리아군은 [2] 루즈벨트(222.99) 10.12.21 73 0
78422 롬멜장군은 오히려 장군일때보다 위관급일때 전과가 더 화려하네..1차대전 [7] 여우(180.69) 10.12.21 527 0
78421 동이의 설(契)이 상(商)나라를 세웠으니 곧 상나라는 동이인 우리의 역사 [6] 우주갤러리(115.21) 10.12.21 66 0
78420 에니그마 해독법 [10] 빵꾸똥꾸(59.24) 10.12.21 660 0
78419 8월 포풍, 폭풍이 몰려온다!-5(2) [2] 이제큐터(58.142) 10.12.21 361 1
78418 일본군도 트럭 있었어효 [2] 개복치(71.79) 10.12.21 314 0
78417 독일무장친위대 군장가이드- 위장복 편 [1] 개복치(71.79) 10.12.21 431 0
78416 2차대전직전 영미일 해군과 소련,프랑스,독일해군의 차이는 매우큼? [1] ㅇㅁㄹㄷ(121.173) 10.12.21 91 0
78415 머나먼다리보니까는 .... [4] 항상우울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1 54 0
78412 이대갤에서 빅토리아도 하나효 [10] Rur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1 79 0
78411 근데 일본군은 보급 어떻게 했음? [16] ??(58.127) 10.12.21 154 0
78410 나치vs.일제는 이미 과거이고 [4] 꽃돼지송아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12.21 10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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