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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아버지와 도둑 아들 2

운영자 2010.04.06 10:40:37
조회 226 추천 0 댓글 0

  ‘땡’ 하며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엘리베이터 문 상단의 층수를 알려주는 계기판이 18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깊은 바닷속 같은 침묵이 흐르는 기다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여러 개의 판사실 문이 열리기를 거부하듯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터벅터벅 복도를 급히 걸어가다가 한 구석에 있는 문 앞에 섰다. 굳게 닫혀진 베이지 색의 철문 중앙에는 손바닥만한 아크릴 판이 붙어 있었다. ‘1800호 형사 ○○부’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기도했다. 주님이 힘을 주시면 안되는게 없다고.. 판사실 앞을 지키는 비서 아가씨가 책을 보다가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김하림 판사님 계십니까?”

  “죄송합니다. 면담 신청하셨습니까?”


  그 아가씬 나에게 절차를 밟았는지 물었다. 판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사전에 서류로 면담 신청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판사가 본 후에 면담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바라다 볼 오해의 눈을 의식해서 판사실 출입을 정당한 업무 이외에는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냥 문을 밀고 들어갔다.


  자그마한 키에 통통한 체구를 가진 판사가 책상위에 수많은 기록을 쌓아 놓고 열심히 내일 있을 판결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불쑥 들어온 낯모르는 나를 보고 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대개 판사들의 경우 귀찮은 손님이 오면 예의로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줄 뿐 자리를 권하지 않는다. 시간을 빼앗기기 싫다는 거절의 의사가 내심 들어 있는 것이다.


  “바쁘신 줄 알지만 염치 불구하고 한 3분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나는 그가 설사 내쫓는다 해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미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보겠다는 각오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못해 판사석 옆에 있는 의자를 권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그 판사를 설득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까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굴렸다.


  “이미 재판이 끝난 김순호 때문에 왔습니다. 내일이 선고라고 하는데 이제사 그 아버지가 합의서를 만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기록을 보지 못해서 구체적인 범죄 내용을 전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도 부모가 다급하게 사정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대신 실례를 무릅쓰고 사정하러 왔습니다. 변호사는 이런 때 그런 일도 맡아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그 판사는 내가 보지 못하게 하면서 책상 위에 있는 기록 중 하나를 살펴본다. 그 사이에 빨갛게 인쇄되어 있는 판결문 요약지가 보인다. 벌써 부장판사와 주심판사가 회의를 거쳐 내일 선고할 형량을 결정하고 기재한 것이다. 그 판사는 판결문 용지를 살펴보고 기억을 돌이켰다. 그러면서 가능성이 없다는 투로 혼자서 머리를 약간 흔들었다.


  “글쎄요.. 이 사건은 외판 사원이던 피고인이 여러 차례 남의 사무실에 들어가 고의적으로 지갑을 훔친 사건인데요.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신용카드로 물건을 마구 산겁니다. 게다가 피고인은 남의 주민등록증까지 훔쳐서 그 사진을 오려 낸 후에 자기 것을 붙이고 검문에 걸릴 때면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심리한 결과로는 이외에도 어릴 적부터 절도 전과가 더 있는 것 같은데요. 증거도 명확하고 본인도 자백하고 있습니다. 유죄가 확실한 사건이에요. 이런 내용에서 변호사님이 더 변론할 게 있나 싶네요. 그리고 합의서를 가져온다 해도 그것이 이미 정해진 형량에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말을 못하겠네요.”


  한마디로 그 판사의 말이 품은 뜻은 이미 소용이 없다는 뜻이 배어 있었다. 죄질도 나쁘고 변호할 것도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형량이 정해진 마당에 변호사가 사건을 맡아 뛴다 해도 별로 할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만해도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나이 60먹은 범인의 아버지 사정이 너무 딱합니다. 합의금을 구하느라고 아들이 재판 받는 법정에도 못나오고 한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어버지나 아들이 변호사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라도 후련히 할 기회를 다시 말들 수 없을까요?”

  그 판사는 말없이 잠깐 생각하더니 “그러시면 부장님한테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만 별 소용이 있을지요..”


  “감사합니다. 부장님께 한번 허락을 얻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장님 계십니까?”

  “부장님께서는 지금 지존파 사건 때문에 아주 바쁘시고 또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다시 찾아와 부장님을 뵙겠습니다. 그동안 대신 말씀을 꼭 해주십시오.”

  주심판사의 협조는 일단 구해 놓은 셈이었다. 고마웠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수시로 부장판사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지리에 있는 시간에 다시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오후 세시쯤 부장판사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급하게 부장판사실로 향했다.


  돋보기를 쓰고 부장판사는 책상 위에 놓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수북한 서류를 다급히 보고 있었다. 불청객이 찾아온 데 대해 반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시간이 쫓기게 일을 하는데 불필요한 사람이 찾아와 시간을 뺏는 건 당연히 싫은 일이다. 나는 개의치 않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웃는 낯에 욕을 할 테면 해보라는 마음이었다. 욕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 건 아니니까.


  “주장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만 김순호 때문에 왔습니다. 다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일이 선고인데 서류로 절차를 밟기가 너무 다급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글쎄, 아까 주심판사가 찾아와서 뭐라고 하긴 하던데 그 사건 때문에 오셨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변론 재개신청서를 제출하시죠. 새로운 재판 기일은 제가 다시 잡겠습니다. 그 나머지 얘기는 제가 지금 지존파 사건 때문에 몹시 바쁜 상태로 좀..”


  바쁘니 나가 달라는 완곡한 표정이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일단 모든 심리를 원점으로 돌려 다시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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